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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18화 (1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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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의 눈빛은 허술했다. 소년의 시선은 완전히 스텔라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베르트는 더욱 세게 물건을 쳐올렸다. 스텔라의 입에서 고통이 섞인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정사를 지켜보던 노아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죽 웃었다. 그것도 이제 제 주제를 깨달았나 보군.

    고아원 출신인 데다가 아무런 재능도 없어 성년이 지나고도 수도원에 머무르고 있는 멍청한 것. 알베르트는 노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스텔라의 아래에 제 물건을 박으며 승자만의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게도,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상상도 못 한 채.

    ***

    수도원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르트는 황궁에서 열리는 건국 기념제에 참석하느라 수도로 떠났다.

    그가 나를 수도에 데려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어찌나 힘들었는지. 다행히 나이가 지긋한 집사가 그를 말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차라리 수도에 따라가는 것이 나았을지도. 알베르트는 공작저를 떠나기 전, 손가락으로 방 하나를 가리키며 코르넬에게 명령했다.

    [코르넬.]

    [예, 가주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스텔라가 저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지켜. 절대, 절대 나오지 못하게.]

    [알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커다란 방에 덩그러니 갇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코르넬이 방문 앞에서 나를 감시했다. 그러나 내가 몇 번 창문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이후로는…….

    ?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코르넬은 방 안에서, 정확히는 침대 바로 옆에서 나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강력하게 거부했으나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 맛있었어요.”

    “맛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러다 나중에는 족쇄까지 채우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나는 잠시 그 장면을 상상하다가 혹시 실현될까 얼른 머릿속에서 지웠다.

    식사를 담은 쟁반은 하녀에 의해 방 밖으로 이동했다. 아, 나도. 나도 나가고 싶은데. 하지만 코르넬이 바로 옆에서 매섭게 눈을 뜨고 있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벌렁 누웠다. 고급스러운 침대가 내 무게를 견디며 출렁였다.

    “…….”

    아. 눈 마주쳤다. 나를 빤히 지켜보던 코르넬은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히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탈출 계획을 세우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서늘한 공기가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져 천천히 눈을 뜨니, 또다시 코르넬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감시가 자신의 일인 주제에, 자신이 죄라도 지은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코르넬은 냉철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 같았다.

    아, 그렇다면 동정심 유발 작전은 어떨까. 물론 공작의 개라고 불리는 코르넬에게 통할 리는 없지만 시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

    “저기…….”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코르넬을 올려다봤다.

    “코르넬 스테인입니다.”

    “아, 네. 코르넬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소설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그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알베르트와 여주뿐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코르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버벅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 그러니까, 코르넬.”

    “예, 말씀하십시오.”

    막상 그의 이름을 부르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고 말았다. 나는 잠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가고 싶어요.”

    코르넬의 얼굴이 조금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

    “안 됩니다.”

    저 말을 들으니 왠지 그와 알베르트가 겹쳐 보였다. 알베르트도 매일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나는 평생 겪었던 슬펐던 일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에 집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흑.”

    나는 겨우 눈물을 한 방울 흘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순진한 기사는 내 연기에 속아 넘어갔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사실……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 너무 외로웠어요……. 모처럼 고향 같은 곳에 돌아왔는데 공작저에만 갇혀 있어야 하고…….”

    “…….”

    “어린아이들이 뛰어놀던 공원, 따스한 분위기의 시장…….”

    나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전혀 기대를 안 했는데, 코르넬은 생각보다 동정심이 풍부한 것 같았다.

    ?

    마치 눈앞에 공원과 시장이 보이는 것처럼 손을 뻗자 코르넬이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돌렸다.

    “수도원의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싶었는데……. 역시 안 되겠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어깨를 들썩였다.

    나는 끈기를 갖고 코르넬이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렸음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에이, 실패인가 보다. 아무래도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는데.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드는데, 코르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

    헉, 진짜? 나는 코르넬의 눈을 피해 다급하게 코와 눈을 문질렀다. 됐다. 이 정도면 운 것처럼 눈이 빨갛게 물들었을 것이다.

    “정말요?”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코르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진짜로.”

    코르넬은 잠시 뻣뻣하게 서 있더니 이내 방에서 나가 버렸다. 뭐야. 설마 내가 웃어서 기분이 나빠진 건가? 아니면 이게 다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아챘다거나?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코르넬은 바로 다음 날 나를 저택에서 내보내 줬다.

    다만, 문제는 그가 나와 동행했다는 점이었다.

    코르넬은 숙련된 기사였다. 그것도 모니카 공작가의 전속 기사들을 이끄는, 기사단의 단장 같은 존재.

    그런데 그런 그를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공원 길을 따라 걸으며 코르넬을 어떻게 따돌릴까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이렇게 넓은 곳에서는 도망쳐 봤자 내가 손해다. 금방 따라잡힐 테니.

    그렇다면 시장으로 가자. 시장은 사람도 많고 길도 복잡하니 그를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

    “시장으로 가 볼까요? 맛있는 음식도 많이 팔 텐데.”

    ?

    코르넬은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이 근처에는 매일 열리는 야시장이 있었는데,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나는 사탕을 사거나 양꼬치를 먹는 등의 행동으로 코르넬을 방심시켰다. 코르넬도 나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잠시 이것 좀 들어 주실래요?”

    이제 슬슬 계획을 실행해야겠다. 나는 그의 품에 과자들을 잔뜩 안겨 준 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어, 공작님? 왜 벌써 돌아오셨어요?”

    순진한 코르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곳에 알베르트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코르넬이 다른 곳을 쳐다보는 틈을 타 얼른 인파 속으로 숨었다. 코르넬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이런 멍청한 코르넬. 나는 이 허술한 계획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기뻐 방향도 살피지 않고 아무렇게나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드니, 나는 어두운 골목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

    엥. 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주변을 살폈다.

    골목에서는 역겨운 악취가 났으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금방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것처럼 섬뜩한 곳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곳에 들어왔지. 조금 긴장됐지만 나는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뭐야, 저 쪼그만 건.”

    “웬 여자 같은데. 주인님께서 데려오신 여자인가?”

    “아니, 주인님 침실에서 저런 건 본 적도 없어.”

    저 말이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제발 착각이기를 빌었다.

    “한번 데려가 보면 알겠지.”

    그리고 묵직한 걸음이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코르넬을 속이고 도망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를 찾아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골목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시장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내가 뛰기 시작하자 나를 쫓아오던 사람들도 나를 따라 뛰었다.

    제발 누가 좀 도와줬으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왼쪽으로 돌아 어느 골목에 들어선 순간.

    “노아?”

    분명히 그것은 노아였다. 벽에 기대어 어느 한 남자와 대화하던 노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보다, 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내 머릿속은 노아를 데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노아의 손목을 잡고 따라오라는 듯 당겼다. 하지만 노아는 몇 걸음 나를 따라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왜 안 따라오는 거야. 여기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다시 한번 그를 잡아당기는데,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이상한 향 같은 것이 풍겼다. 진동하는 달콤한 향 때문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안정시키려고 애썼지만, 나는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알베르트 말대로 그냥 저택에만 있을 걸 그랬다. 괜히 나 때문에 노아까지 위험한 일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

    “노……아.”

    나는 쥐어짜듯 노아의 이름을 부르며 그대로 쓰러졌다.

    ***

    노아는 제 품 안에 쓰러진 여자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품에 몸이 쏙 들어올 정도로 체구가 작은 여자는 색색거리며 얌전하게 잠들어 있었다.

    ?

    “주, 주인님?”

    그녀를 쫓던 남자들은 노아를 발견하고 넙죽 무릎을 꿇었다.

    수십 년 전부터 암흑가에는 잔인한 지배자가 살았다. 암흑가의 지배자이자 주인인 남자의 이름은 반 미리엄. 그는 범죄자들의 주인이었다.

    ? 노아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스텔라를 세게 끌어안았다. 여자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반 미리엄. 그는 전대 암흑가의 주인이었다. 교활하고 추악한 노인.

    스텔라가 떠난 지 4년이 지났을 때, 노아는 성년의 날을 맞았다. 그는 성년이 되자마자 암흑가를 찾아갔다.

    한 달, 두 달, 그리고 석 달. 그는 무서운 속도로 암흑가를 손에 넣었다.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권력을 쟁취했다.

    처음에는 허리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암흑가에 입성했던 소년은 어느새 지배자의 측근이라는 자리까지 올랐다. 반 미리엄이라는 노인은 그를 찾아와 자신의 아래에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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