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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친구만 만나고 오실 겁니까?”
나는 애니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5년간 연락 한 통 없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하지만 그다음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혹시 도망칠 수도 있으니.”
물론 도망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동행이라니. 말도 안 됐다.
“더 많은 걸 배워 보고 싶다고 하면서 수도원을 떠났는데 공작님이랑 같이 수도원을 찾아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내가 흥분하며 말하자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답했다.
“돈 많고 잘생긴 공작과 눈이 맞아서 수도원을 떠났던 거구나, 라고 생각하겠죠.”
“그게 문제예요! 제발 제 평판을 좀 생각해 주시라고요.”
“충분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5년 전에 수도원 중앙에서 당신과 섹스하고 당신을 공작저로 데려왔겠죠.”
아, 글렀다. 말이 통하지가 않는다.
결국 나는 알베르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와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누군가 내게 그와의 관계를 묻는다면 어쩌다가 후견인으로 이어진 인연일 뿐이라고 둘러대기로 계획도 세웠다.
***
?
덜컹거리는 소음 없이 마차는 부드럽게 달렸다. 심하게 덜컹거려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이전의 마차와는 다르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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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도 이전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히 마차는 외형부터 이전 마차와 차이가 있었다.
유리창을 장식한 반짝이는 보석들, 그리고 섬세하게 수놓아진 금빛 무늬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아야 마차를 이런 비싼 것들로 꾸밀 수 있는 걸까.
내가 반짝이는 눈으로 마차를 구경하자 알베르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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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옆에만 있겠다고 약속하시면 전부 당신의 것이 될 텐데, 어떻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얼굴을 구겼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진짜 나를 물건이나 새장 속 새 정도로 보나 보다.
나는 알베르트가 또 저번처럼 마차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히 그를 살폈다. 다행히 마차가 수도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백색의 석조로 지어진 수도원이 보였다. 자그마치 5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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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는 먼저 마차에서 내린 후 내게 손을 뻗었다. 아마 잡고 내리라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손을 피해 옆쪽으로 내리려고 했더니, 갑자기 알베르트가 내 뺨을 쥐고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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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겠어요. 손 잡고 내릴게요!”
?
내가 그의 가슴팍을 밀며 다급하게 외치자 그제서야 알베르트가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잠시 노려보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
수도원 정문을 지나쳐 정원을 따라 걷는데, 왜인지 자꾸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옆쪽을 바라보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당신을 이 정원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라서요.”
?
그 말을 듣고 나는 알베르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우리는 정원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정원에서 알베르트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날 정원에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 표정과 대비되게 알베르트는 마치 그 기억이 추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이 들려왔다.
“스텔라?”
애니카였다. 5년 만에 보는 애니카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뺨을 채우고 있던 주근깨들은 어느새 희미해져 있었고, 얼굴형은 가름해졌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내게 빠르게 달려와 나를 품에 안았다.
“그동안 왜 편지 안 보냈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아, 그게…….”
“갑자기 떠나더니, 갑자기 돌아오고! 이제 어디 갈 생각, 하지도 마!”
무어라고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애니카가 빠르게 나를 몰아붙이는 바람에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나는 조그맣게 그녀에게 속삭였다.
“……나도 보고 싶었어.”
괜히 눈물이 차올랐다. 알베르트도 내 편의를 봐 준 것인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애니카의 훌쩍임이 멈출 때까지 계속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 동안 훌쩍이며 눈물로 내 어깨를 적시던 애니카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씨익 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5년 만에 돌아왔는데 공작님과 함께라니.”
생각해 보니 그녀는 5년 전에도 틈만 나면 알베르트와 나를 엮으려고 했었다. 저 표정만 봐도 애니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감동적인 만남이 5분도 지속되지 않다니. 역시 애니카 답다고 해야 할까.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단호하게 답하자 애니카는 오히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살살 건들기 시작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좀 말해 봐. 대체 뭐야? 공작님이랑 결혼이라도 하려고?”
거, 개소리도 정도껏이지. 무어라고 따지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갑자기 내 오른손이 누군가에게 세게 잡혔다.
?
알베르트였다. 그는 예쁘게 웃으며 내 오른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애니카에게 인사했다.
“헉.”
애니카는 그 상태로 굳어 멍하니 알베르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애니카는 알베르트의 얼굴을 봐 보고 싶다고 노래 부르듯 말하곤 했었다. 공작님의 잘생긴 얼굴을 보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라고 했었는데, 그 한이 드디어 풀렸나 보다.
한참 알베르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애니카가 드디어 입을 열고 폭포처럼 말을 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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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안녕하세요 공작님. 일단 전 애니카라고 해요. 공작님, 진짜 스텔라랑 결혼하실 거예요? 예전부터 보통 사이는 아닐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는데, 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결혼, 하실 거죠? 하실 거죠?”
저기, 애니카? 너 오늘 알베르트랑 처음 얼굴 마주한 거 아니었니? 애니카는 마치 알베르트가 십년지기 친구인 것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알베르트는 애니카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내 오른손과 연결된 그의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결혼, 말씀이신가요.”
그러더니 그대로 내 손을 그의 입술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하면 좋겠지만 꼭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스텔라는 제 것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애니카가 어머, 어머, 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애니카는 아마 알베르트의 말이 농담을 빙자한 사랑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혀 아니었다.
그가 한 말은 내 감금 라이프를 의미하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 내내 저택에만 갇혀 있다가 겨우 나온 거란 말이야.
물론 영원히 얌전하게 그의 옆에 머물러 줄 생각은 없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때가 되면 떠날 것이다. 그가 선물한 보석들을 챙겨서 말이다.
……다만 공작저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그 기회가 언제가 될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니카는 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몇 번이고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외치며 거부했으나 결국 알베르트의 손에 끌려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알베르트를 후견인이라고 둘러대려는 계획도 세웠는데 제대로 실행하지도 못했다. 젠장.
알베르트가 향하는 위치를 보니 마차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애니카도 만났는데 어딘가 찝찝했다. 무언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노아.”
불현듯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5년 전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났었다. 달빛을 받으며 조용히 자고 있던 어린 소년.
?
“노아를 아직 못 만났어요. 노아를 만나고 갈래요.”
“노아?”
알베르트가 그 이름을 발음하고 되뇌더니 이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항상 싱긋 웃고 있거나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였는데,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갔다 와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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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심히 묻자 알베르트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친구만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베르트가 날카롭게 말했으나 나는 그의 입에서 긍정의 답변이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마치 정말로 그의 소유물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눈치를 보고, 그의 허락을 기다린다.
내가 알베르트의 노예인 것도 아닌데 왜 그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지? 나는 얼른 그의 손을 뿌리치고 수도원을 향해 달렸다.
등 뒤에서 알베르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
노아를 찾기 위해 수도원을 돌아다니며 다른 익숙한 얼굴들도 꽤나 발견했다. 그들은 내게 반갑게 인사했으나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건 노아였다.
나는 대충 그들에게 인사한 뒤 다시 뛰었다.
보통 노아가 어디에 자주 있었지?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정답을 알 수는 없었다. 보통 내가 청소하고 있을 때 그가 먼저 나를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어쩌면 노아는 더 이상 수도원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까 수도원을 떠났을지도.
그렇게나 나를 잘 따랐었는데. 이제 만날 수 없는 걸까. 괜히 서운해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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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알베르트가 벌써 쫓아온 건가, 했으나 밀려오는 시원한 향취에서 그가 아님을 확신했다. 알베르트에게서는 조금 더 귀족적인 향이 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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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발에 맑은 벽안. 나를 끌어안은 것은 노아였다.
나보다 한참 작던 소년은 이제 고개를 들어야만 시선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깜짝이야. 얘 왜 이렇게 잘 자랐어.
어렸을 때부터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훤칠하게 자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마 그가 노아라는 것을 몰랐다면 진짜로 설��을지도 모르겠다.
눈이 마주치자 노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고. 이놈의 심장이 주제도 모르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오묘한 미소를 마주하자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아 나는 하려던 말을 잊고 고지식한 인사나 뱉고 말았다.
“어……. 그러니까,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디 있었어?”
그의 말투는 5년 전과 같이 다정했다. 걱정이 담긴 듯한 말투는 변함없었으나 성인 남성이 된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