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9화 (9/100)

-9-

?“내 말대로 안 해 주면 피곤해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해 줄 거야.”

과연 이런 유치한 놈이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몽마가 맞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답을 소리 내 말하지 않았지만 살로스는 이미 내 답을 알겠다는 듯 사악하게 히죽 웃고 있었다. 어디, 도대체 그 방법이 뭔지 한번 들어나 보자.

***

?“미쳤구나. 나를 이 마을에서 미친 사람으로 만들 셈이야?”

??“그 정도는 아닌데.”

??“그 정도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는 길길이 날뛰며 살로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이 미친 몽마 같으니라고. 그딴 것도 계획이라고 세웠냐.

?“한번 해 보고 말해. 완전 확실하다니까!”

??“그래, 확실하겠지. 내가 미친 사람이 될 확률이!”

?

나는 다시 한번 세게 은색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살로스가 만든 공간이라서 그런지 머리카락이 완전히 뽑히지는 않았다. 그냥 고통만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

?“일단 해 보자니까. 그 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응?”

??“어떻게 하든 나만 손해인 일이잖아.”

??“내가 알려 준 대로만 잘하면 하루 정도는 섹스 안 하고 넘어가 줄 수도 있는데.”

??“그게 보상이냐? 겨우 그딴 게 보상이냐고!”

또다시 난리를 치려는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내가 저걸 제대로 실행하든 말든 살로스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아닌가. 대충 보리스와 아무 대화나 하고 오고는 살로스가 말한 대로 하고 왔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 생각을 읽은 살로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뭐, 왜 뭐. 갑자기 왜 비웃는 건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

??“신 앞에서 당당하게 섹스를 한 성직자는 수녀님이 처음이라고 말이야.”

그게 왜. 살로스의 말속에 숨은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살로스가 한 마디로 간결하게 설명했다.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항상 내가 수녀님을 지켜보고 있다는 거야. 투명 마법을 쓴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하나.”

??“…….”

??“뭐, 하여튼. 내가 말한 대로 꼭 하고 와야 해. 지켜보고 있는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 나는 여기저기에 묻고 물어 보리스를 찾아갔다. 나무문을 두어 번 쿵쿵 두드리자 상기된 얼굴의 보리스가 집 안에서 튀어나왔다.

?“스텔라?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

왜인지 분위기가 비장해졌다. 보리스도 나를 따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그러지 마. 나는 긴장돼서 심각해진 것뿐이라고.

나는 살로스가 지어 준 대사를 그대로 입에 올렸다.

?“저 사실, 이상한 것들이 눈에 보여요.”

??“느, 느에?”

??“예를 들어 당신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백발의 할머니라든가. 신기하네요. 보통 이렇게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경우는 드문데.”

??“하, 할머니라니 그게 무슨…….”

??“당신 집에도 가득하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구경 좀 해도 될까요?”

?

딸꾹. 보리스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는 덜덜 몸을 떨다가 결국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여간 순수한 청년일세.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보리스는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나 지나지 않아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괜히 순수한 청년에게 몹쓸 짓을 한 기분이었다.

꿈에서 만난 살로스는 잘됐다며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아. 이미 살로스 때문에 평화롭게 살기는 그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도 살로스는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괴상한 방법으로 쫓아냈다. 도대체 왜 이래, 이 미친놈이!

***

?

오랜 시간이 지나 약 5년이 흘렀다. 다행히 나에 대한 흥미가 이제는 식어 버렸는지 알베르트는 나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애니카에게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수녀님. 내가 편지 보내지 말라고 했지.”

??“왜? 애니카 보고 싶단 말이야.”

??“그러다가 그놈이 수녀님 위치 알아내면 어쩌려고?”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여자하고 잘 지내고 있을걸.”

?

살로스가 전부 편지를 찢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정기를 쪽쪽 빨아먹은 결과 약 2년 전쯤 실체화에 성공했다. 알베르트에게서 도망쳤더니 이제는 살로스라니.

낮에도 밤에도 살로스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데 그는 쉬지도 않고 그 짓을 하려고 했으니까.

다행히 나는 일을 가야 한다는 이유로 낮에는 집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대신 밤에 두 배로 시달려야 하지만.

?

그래도 이 짓도 5년 동안 하다 보니 익숙해지……

?

기는 개뿔. 하루하루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살로스는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알베르트보다 더했다. 항상 그 짓의 끝은 기절이었다.

?

?“야.”

??“왜, 수녀님?”

?

이제 수녀도 아닌데 항상 그는 나를 수녀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내가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 세 가지가 뭐였지.”

??“내가 수녀님한테 질리거나, 수녀님이 나한테 반하거나, 수녀님이 죽거나.”

??

아무래도 내가 죽는 쪽이 가장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죽을까?”

?

아무 생각 없이 툭 뱉은 말인데 살로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거침없이 내 입안을 탐했다. 나는 풀린 눈으로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로스는 그것마저 핥아 낸 후 말했다.

?“마음대로 해. 그럼 지옥에서 영원히 나랑 섹스해야 할 테니까.”

??“…….”

?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결국 살로스에게서 벗어나려면 그가 나한테 질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잖아.

어떻게 하면 그가 나한테 질릴까 생각하던 도중, 살로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도 죽지 마, 수녀님.”

??“그럼 네가 내 인생에서 좀 꺼져 봐.”

??“그건 싫어.”

?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나는 살로스를 힘껏 밀친 후 어깨에 겉옷을 걸쳤다.

?“어디 가?”

??“일하러.”

??

나는 짧게 대답하고 문을 쾅 닫았다. 집 밖에 나오자마자 보이는 하늘에 떠 있는 눈 부신 태양이 괜히 얄미웠다. 나는 땅바닥에 있는 돌을 발로 툭툭 차며 일터로 향했다.

내가 선택한 일거리는 서점 알바였다. 월급이 적기는 하지만 뭐 어떠한가. 나 혼자 먹고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물론 내가 아무리 열심히 먹어봤자 내 체력은 정기가 되어 전부 살로스에게 돌아갔다. 이 무슨 깨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경우가 다 있나.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살로스가 나를 싫어하게 되려나. 나는 책들을 정리하며 곰곰이 고민했다.

성수라도 뿌려 볼까? 멀쩡히 수도원에 들어오는 몽마에게 통할 리가 없지만 그래도 신성한 물이니까 기분은 좀 나쁠지도.

생각할수록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좋아. 꾸준히 살로스에게 성수를 뿌리자. 마침 내가 머무르고 있는 마을의 중앙에는 작은 수도원이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몇 병 받아야겠다.

?

?“수고하셨어요.”

??

해가 산 뒤로 조금씩 숨기 시작하자 나는 겨우 일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었다. 아, 맞다. 성수 받아 가야지.

나는 조심히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가 지긋한 신부님이 나를 맞아 주었다.

?“성수 좀 받고 싶어서 왔는데요…….”

??“무슨 일이십니까? 설마 악마라도 만나신 겁니까?”

??“아, 그게…….”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대충 말을 흐리며 둘러댔다.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서요.”

?

그러자 신부님은 커다란 유리병에 성수를 가득 담아 내게 건넸다. 꽤 묵직한 정도의 양이었다. 신부님, 혹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신가요?

?“감사합니다.”

??“주신 렌다의 축복이 함께하길.”

?

신부님은 내게 행운의 말을 건넸다. 나는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 최대한 겉옷 주머니에 성수를 욱여넣었다. 크기가 큰 유리병이었지만 다행히 그 모습 정도는 옷으로 감출 수 있었다.

문을 열자 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살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도대체 네가 왜 내 침대에 누워 있으세요.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비켜.”

??“수녀님, 매정해.”

살로스가 툴툴거리며 내게 안겨 옴에 따라 내 심장도 미칠 듯이 뛰었다.

언제 성수를 뿌려야 하지. 만약 뿌리면 화를 내면서 평소보다 더 세게 안으면 어떡하지?

내가 망설이는 사이 살로스가 내 겉옷을 벗기고 나를 침대로 데려갔다. 나는 살로스의 아래에 누워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겉옷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젠장. 성수가 겉옷에 들어 있는데.

?“수녀님은 언제쯤 날 받아 줄래?”

받아 달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지. 설마 너한테 유혹당해서 평생 너랑 관계나 가지면서 살라는 소리니?

?“내가 널 받아 주기를 원해?”

??“응.”

?

살로스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미친 몽마 같으니라고. 받아 주기를 원하면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지는 말았어야지.

아, 아니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지금 이렇게 잘 구슬려서 겉옷을 가져오게 한 다음 성수를 뿌리면……!

?“그래, 살로스. 그럼 일단 테이블 위에 있는 겉옷 좀 가져와 봐.”

?

게다가 이름까지 부르니 살로스는 눈꼬리가 접어 예쁘게 웃었다. 이놈이 몽마만 아니었어도 이미 이 얼굴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를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다.

?“근데 그건 싫어. 저 옷 마음에 안 들어.”

?

꽤 강한 몽마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는데, 설마 주머니에 들어 있는 성수의 기운까지 느낀 거야? 나는 겨우 경악을 감추며 살로스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

물론 소용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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