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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8화 (8/100)

-8-

?“아, 노아구나. 무슨 일이니?”

“스텔라 누나…… 아니, 스텔라 수녀님이 떠나셨어요?”

?

노아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신부는 노아가 부쩍 스텔라를 잘 따랐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저런. 신부는 안쓰러운 눈빛을 했다.

?“그래. 하지만 스텔라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란다. 스텔라도 너를 그리워할 테니까.”

“하지만 돌아오지 않으면요?”

신부는 더 이상 답하지 못했다. 스텔라가 돌아올 것이라는 말은 노아를 위로하기 위한 거짓에 불과했기에.

?

?“…….”

?

노아가 서러운 듯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누가 봐도 친한 누나가 떠나 슬퍼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

노아는 신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그는 신부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걸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를 보는 사람이 없어졌을 때쯤, 노아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의 푸른 눈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차가워 보였다.

내가 원한다면 아름다운 꽃을 꺾어서 가지리라. 꽃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꽃을 단단한 꽃병에 가둬 버리리라.

아이는 끔찍한 계획을 머릿속에 되뇌었다. 열세 살. 그의 나이가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

***

알베르트는 답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항상 여유롭고 고고하게 고개를 세우고 있던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초조했다. 스텔라가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도, 어느 곳으로 향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코르넬.”

“예, 가주님.”

?

알베르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자 마차 옆에 서 있던 젊은 기사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코르넬 스테인. 그는 모니카 공작가의 전속 기사였다.

?“찾아와. 최대한 빨리.”

이름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코르넬은 알베르트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이름. 스텔라.

?

?“상처 하나 내지 말고, 온전한 상태로.”

“알겠습니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베르트는 천천히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곧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스텔라. 하늘의 별 같은 여자였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이상하게 손에 전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가 갖지 못했던 것은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원한다면 여러 방법을 동원해 손에 넣었고, 절대 놓지 않았다.

?

찾는다면 손에 쥐고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항상 상상만 하고 차마 실현하지는 못했던 더러운 갈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현할 것이다. 그 붉은 눈이 그만을 바라보게 할 것이고, 작은 입이 그만을 부르게 만들 것이다.

알베르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저도 모르게 손톱이 살을 파고든 후에야 그는 손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

?

그는 대충 상처를 짓누르며 턱을 괴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수도원의 모습이 보였다. 스텔라가 서 있던 붉은 장미의 정원. 그녀를 처음 만났던 정원.

?

그런데 그 자리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알베르트는 스텔라가 아닌 다른 이가 그곳에 서 있다는 것이 불쾌해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그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알베르트가 타고 있는 마차를 쳐다봤다. 흑발과 푸른 눈을 가진 어린아이. 이름이 노아였던가.

마차의 창문은 특수한 유리로 만들어졌기에 밖에서 내부가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아의 푸른 눈은 마차 안의 알베르트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괜히 불쾌했다. 어린아이의 것일 뿐인 저 눈동자가, 묘하게 불쾌했다.

알베르트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출발해.”

이내 마차는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노아는 계속해서 알베르트가 탄 마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걷고,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곳은 깊은 산속에 위치한 어느 작은 마을이었다. 수도원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나는 이곳에 정착했다.

?

상쾌한 공기에 친절한 마을 사람들까지. 게다가 있을 건 다 있는 꽤 괜찮은 마을이었다.

?

요즘 대부분 주민이 도시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있어 싼값에 집도 구할 수 있었다.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렇게 이루게 되다니.

?

딱히 챙겨온 짐도 없었기에 새로 사야 할 것들이 가득했다.

마을의 규모가 작아 시장도 잘 서지 않았다. 덕분에 생필품을 사려면 여러 상점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구매해야만 했다.

?

?“아가씨. 이걸 한 번에 혼자 들고 가려고?”

“네.”

“아유, 이게 보기와 다르게 되게 무거워.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나눠서 들고 가.”

“에이, 귀찮게 뭘 또 와요.”

?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불이 가득 든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자는 정말로 무거웠다. 들어 올리자마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

그런 내 모습을 본 상인 할머니가 비실 웃음을 흘리며 내일 또 오라는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할머니의 그 말이 내 자존심을 긁었다. 사람이 검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나는 내 자존심을 위해 끝까지 박스를 내려놓지 않았다.

물론 상점에서 나온 후 열 걸음 정도 걷자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들고 있던 게 이불이라 다행이었다. 접시였으면 전부 깨질 뻔했으니.

?

이걸 어떻게 들고 가지. 이런 식으로 가면 집에는 밤에나 도착할 것 같은데. 끌고 가야 하려나.

그때, 앳된 목소리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저기, 아가씨.”

주변을 둘러봤으나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한 남자가 나를 보며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저요?”

“네? 아, 네…….”

“무슨 일이세요?”

“그, 짐이 무거워 보여서 도와드리려고…….”

?

아. 산속 마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친절하구나. 초면인데 이렇게까지 도와주려고 하다니.

나는 흔쾌히 고맙다고 인사하고 이불의 절반 정도를 그 남자에게 넘겼다. 이불을 건네받은 그 또한 이불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꽤 힘겨운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고마워요. 어떻게 들고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별말씀을요.”

?

이불의 무게 중 절반을 그에게 넘기니 확실히 상자가 가벼워졌다. 이제야 좀 들 수 있을 만한 수준이 됐다.

?“이번에 새로 이사 오셨나요?”

“네.”

“도시에서 이런 시골로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그런지 신기하네요.”

“그런가요.”

?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대충 짧게 답했더니 남자가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음. 너무 성의 없었나.

?“그거, 이쪽으로 가져와 주시면 돼요. 제집은 저기, 산 아래거든요.”

“아, 알겠어요.”

?

도움을 받는 주제에 너무 당당한가. 나는 괜히 머쓱해져 얼굴을 긁적이려다가 곧 남는 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남자의 뒤를 따랐다.

남자는 집 앞에 상자를 내려놓은 후 꽤 힘들었는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 옆에 조심히 상자를 내려놓았다.

?“짐 들어다 줘서 고마워요. 그러니까, 그…… 아저씨.”

“아저씨 아니에요!”

“당연히 농담이죠. 이름을 모르니까.”

“아……. 전 보리스예요.”

“아. 예, 뭐. 보리스. 고마워요.”

?

따로 이름을 물어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보리스라는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그나저나 이름 한번 참 평범하네. 보리스라니. 길 가다 보리밭을 발견하면 떠오를 것 같은 이름이었다.

?

?“아가씨는 이름이 뭐예요?”

“스텔라. 스텔라예요.”

“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네요.”

?

슬슬 이 영양가 없는 대화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상자를 같이 옮겨 준 건 고마운데, 대체 왜 아직까지 안 가고 버티고 있냐 이거다.

?“……이름, 예뻐요.”

?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딘가로 뛰어가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노인처럼 허허 웃었다. 거참, 순수한 청년일세.

나는 집 밖에 잔뜩 놓인 상자들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이 넓은 편은 아닌지라 짐이 몇 개 들어오자 금방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하냐. 나는 기지개를 쭉 켠 후 하나하나 상자에서 물건들을 꺼내 정리했다.

***

?“난 참 피곤한 것 같아. 수녀님이 너무 인기가 많아서.”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까 보리스라는 꼬마 있잖아. 수녀님만 보면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지더라.”

?

꼬마. 꼬마라니. 좀 앳된 얼굴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꼬마라고 부를 정도의 나이는 아닌 것 같던데. 하지만 나는 곧 살로스가 몽마라는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수녀님은 걔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좀 불안해서 말이야.”

?

짜증 나게도 사실이었다. 알베르트나 살로스를 만나기 전이라면 보리스와 대화하며 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알베르트나 살로스와 같이 이미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수준의 얼굴들을 보며 눈이 저 하늘까지 솟은 후였다. 보리스를 보며 마음이 간질거리는 설렘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괜히 짜증이 나서 살로스를 발로 찼더니 살로스가 악,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짓궂게 웃었다. 되려 살로스를 가격한 내 발이 아팠다. 하여간 꿈이 너무 생생해서 문제야.

?“그래서 말인데, 내가 좋은 걸 하나 생각해 봤거든.”

?

들어 보겠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나불나불 말하기 시작했다.

?“그 꼬마를 떼 낼 좋은 방법 말이야.”

“굳이?”

“굳이? 굳이라니? 설마 수녀님 그 꼬마한테 반했어?”

??“그건 아니지만 굳이 떼 내야 할 필요가 있나. 너보다는 나은 놈일 텐데.”

?

그러자 살로스가 상처받았다는 듯이 눈물을 훔치는 흉내를 냈다. 심지어 흑흑, 하며 만화에나 나올 법한 어색한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곧 새침하게 눈을 뜨고 협박하듯 말했다.

?“맨날 꿈에서 섹스만 하고 싶어?”

?

이미 그러고 있잖아……. 내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살로스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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