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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소설 속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열다섯 살 때쯤이었다.
열다섯 살의 어느 날, 수도원의 도서관을 뒤적이다가 붉은색 표지를 가진 책을 찾았다.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책이었기에 의문을 품고 페이지를 넘긴 순간, 나는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이곳은 전생에 내가 읽었던 19금 소설의 세상이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수도원은 남주가 후원하고 있는 마을 변방의 작은 수도원이자 고아원이었고.
소설의 내용을 전부 떠올리고 나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전생의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런 남사스러운 소설을 읽은 거지?
?
소설의 전개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섹…… 아니, 성관계였다.
여주고 남주고 전부 변태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이 성관계밖에 없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
하지만 곧 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수도원은 원작에 거의 등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나는 이름 한 줄 적히지 않은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
나는 주인공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미쳐서 성관계만 맺더라도 내게 영향을 끼칠 일은 없다는 것이다.
?
휴, 다행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전생을 깨닫고 나서도 3년 동안 소설에 대한 내용을 잊고 살 수 있었다.
***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수도원에 머무르는 고아로서 밥만 축내던 나는 열일곱 살에 성인식을 치른 후 수녀가 되었다.
?
뭐, 그래 봤자 아직 어린 수녀인지라 하는 일은 기도와 청소밖에 없었다.
?“스텔라, 기도실 청소 끝냈어?”
??“아니. 아직 뒤쪽을 못 쓸었어.”
?
그러자 애니카는 빗자루를 들고 와 함께 기도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를 향해 고마움을 담아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자 그녀는 질색을 하면서도 내심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
애니카는 나와 같은 고아원 출신 수녀였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서 그런지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치 가족같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
?“아, 그거 들었어? 오늘 수도원에 후원자가 온다고 하던데.”
?“후원자?”
?
내가 묻자 애니카는 지겨운 설명을 시작했다.
?
?“응. 모니카 공작님 있잖아. 5년 전부터 우리 수도원에 후원해 주고 계신 분. 근데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뭐, 뭔데.”
??“그분 미모가 아주 그냥…….”
애니카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3년 전에 되찾았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
모니카 공작, 그리고 후원.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알베르트 모니카였다. 그것은 즉, 오늘 방문할 손님은 변태기 충만한 남자 주인공이라는 뜻이었다.
?
어우. 내가 싫은 티를 내며 얼굴을 구기자 애니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싱긋 미소 지으며 활발하게 질문을 던졌다.
?
?“너 이제 오늘치 일 다 끝났지?”
??“어……. 아마도?”
??“내가 주방에 몰래 숨겨 둔 쿠키 있거든?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가지고 갈 테니까.”
?
쿠키? 나는 반색하며 애니카를 바라봤다. 그녀는 손님용 쿠키를 몇 개 빼돌렸다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애니카가 주방으로 가는 사이 나는 정원으로 향했다. 달콤한 쿠키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쯤에서 기다리면 되려나. 나는 수도원 건물과 정원을 잇는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 날씨가 퍽 마음에 들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불편한 모자는 벗고 긴 금발을 쓸어내렸다.
?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카락이 거세게 흔들려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헉.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는 것을 막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
저벅저벅.
?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정원을 가로질러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람이 완전히 멎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걸음 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백발의 미청년이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실례지만 신부님에게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나는 그제야 그 남자가 알베르트라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후에 여주와 이런저런 짓들을 하는 변태…….
알베르트를 수도원장에게 안내해 주다가 애니카와 엇갈리면 어떡하나 잠시 걱정했으나 손님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카락을 모자에 욱여넣은 뒤 그를 수도원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나는 신부실 앞에 서서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
?“신부님, 모니카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어요.”
?
그러자 알베르트는 놀랐다는 듯 말을 걸었다.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아, 그…….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한마디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원장이 문을 열고 알베르트를 맞았다. 나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다시 정원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애니카가 말하기를 알베르트가 5년 동안 수도원에 후원을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5년 동안 후원을 하면서 신부실이 어디인지도 몰랐다고?
나는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뭐, 기억력이 안 좋을 수도 있지.
등 뒤로 집요한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으나 알베르트는 이미 신부실로 들어간 후였다.
아, 애니카가 기다리겠다. 나는 서둘러 정원으로 향했다.
?
***
?
?“공작님을 봤다고?”
?
알베르트를 봤다는 이야기를 하자 애니카는 입에 쿠키를 잔뜩 넣고 부럽다며 발을 굴렀다.
?
?“어땠어? 진짜 엄청 잘생기셨어?”
?
나는 쿠키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쿠키는 막상 먹어 보니 텁텁한 맛만 날 뿐, 그다지 달콤하지 않았다. 나는 물로 입을 헹궈 냈다.
?
?“아, 나도 봐 보고 싶다. 성격도 엄청 친절하시다던데.”
??“…….”
?
그래, 친절한 사람이기는 했다. 겉과 속이 다른 것만 빼면 말이지.
멍하니 애니카가 쿠키를 먹는 것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나이가 지긋한 수녀님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스텔라. 신부님께서 널 찾으시더구나.”
??“엥? 저를요?”
??“글쎄. 자세한 건 신부님께 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엉덩이에 붙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애니카에게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종종걸음으로 신부실로 향했다.
?“부르셨어요, 신부님?”
??“아, 스텔라. 왔구나.”
?
고아였던 나를 어렸을 때부터 키워 주신 분들이라 그런지 수녀님들과 신부님은 나와 대화할 때마다 편하게 말을 건넸다. 신부님이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말했다.
발목까지 오는 치마를 부여잡으며 테이블로 향하는데, 테이블 건너편에 알베르트가 보였다. 헉.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있지.
의심 가득한 눈빛을 하며 의자에 앉자 당사자 대신 신부님이 알베르트를 내게 소개했다.
?“이분은 우리 수도원에 후원을 해 주고 계신 모니카 공작님이란다. 인사드리렴.”
??“……안녕하세요, 스텔라입니다.”
일어서지 않고 앉아서 인사했다고 면박을 주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알베르트를 힐끗 쳐다보자 그의 반짝이는 황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눈꼬리를 휘며 나른하게 웃었다.
갑자기 어딘가 싸한 미소를 마주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다름이 아니고, 네가 공작님께 수도원을 안내해 드리면 어떨까 싶어 불렀단다.”
?
예에? 나는 금방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왜, 왜 하필 저예요? 안내는 저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잘할 텐데요?”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스텔라 수녀님께서 안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
가만히 있던 알베르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나한테 안내를 부탁한다고? 무슨 속셈이지. 도저히 새까만 그의 속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거부한다고 해서 공작의 명령 아닌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님은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알베르트와 나를 신부실에서 내보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알베르트를 앞서갔다. 그가 구두 소리를 내며 나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기도실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최대한 빨리 끝나기를 빌며 기도실 문을 열었다. 기도실 안에는 석재로 만들어진 성녀와 주신 렌다의 석상이 서 있었고, 그 앞으로 나무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
?“아침이 되면 이곳에서 모두 기도를…… 아윽!”
기도실에 대해 설명하다가 알베르트에게 붙잡힌 것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가 나를 벽에 몰아붙여서 몸이 세게 부딪혀서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알베르트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그는 내 양팔을 세게 붙잡고 내 혀를 그의 혀로 옭아맸다.
?
한참 동안 계속된 행위에 숨이 차서 고개를 돌렸더니 그가 다시 내 턱을 붙잡고 그를 바라보게 했다. 맑게 빛나던 그의 황금안은 이제 욕망에 가득 차 번들거리고 있었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내 양팔은 알베르트의 넥타이에 얽혀 뒤로 묶였다. 미, 미친. 이게 뭐야. 그는 나를 안아 들어 던지다시피 기도실의 중앙에 내려놓았다.
그가 창문의 커튼을 치고 문을 빗장으로 막는 것이 보였다. 이제 기도실을 밝히는 것은 촛불에서 흘러나오는 약한 빛뿐이었다.
?
빗장으로 문을 막은 알베르트가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으나 얼마 가지 못해 팔이 묶인 탓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고, 공작님.”
그는 답하지 않고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 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내 입술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에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