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5/5)
  • 외전.

    키레네는 바다 저 끝을 바라봤다.

    일리온의 손을 잡고 무작정 떠나온 곳은 어느 바닷가였다. 섬일지도 모른다. 배를 타긴 했으니까.

    그는 아주 조금 바빠졌다.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이곳에 다시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과도 같았으니까.

    “흐응…….”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창틀에 머리를 툭 기댔다. 뒤에서 누군가가 알 수 없는 말을 걸어왔다.

    뜻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마님이나. 부인이나. 뭐 그런 말일 거라고 대충 생각했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키레네를 늘 같은 말로 불렀으니까.

    시원한 주스가 가득 담긴 잔을 내미는 모습에 살짝 웃어주자, 하녀가 방긋 미소 짓곤 물러갔다.

    “언제 오는 거야.”

    투덜거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새로운 세상도, 날씨도 전부 포근하고 좋은데. 단 하나 불만이 있다면 일리온이 바쁘다는 것뿐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나?’

    그런데 또 그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지런한 사람 같으니. 키레네가 풀죽은 얼굴로 주스를 조금 마신 순간,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일리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문을 연 사람이 누군지 보지도 않고 온몸을 던졌다.

    “키레네. 누군지는 확인해야죠.”

    “일리온 말고 올 사람이 없잖아.”

    “심심했어요?”

    그가 낮게 웃으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키레네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또 뭔가 하는 거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뭘 하는데?”

    “기사?”

    일리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싫어.”

    “그냥 선생으로 들어간 것뿐이에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아서.”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이 꾹 닿았다.

    “밤낮없이 일하는 경우는 없을 테니 걱정 마요.”

    “후작일 때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이번엔 진짜예요. 한 번 더 믿어주면 안 될까요?”

    “맨날 믿어줬잖아.”

    입술을 삐죽이고 있으니, 단단한 손끝이 입술을 꾹 눌렀다. 일리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바닷가라도 걸을까요?”

    “말 돌리는 거지?”

    “눈치가 빨라졌네요. 키레네.”

    화난 표정을 애써 유지하려고 했지만, 웃음이 살짝 새어나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해변은 아주 예뻤다. 산에 둘러싸인 후작가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반짝임이 가득한 곳이었다. 바다 위로 수없이 부서지는 빛. 파도 소리. 새하얀 백사장.

    부드러운 모래를 밟자, 일리온이 허리를 숙여 구두를 벗겨 주었다. 맨발에 닿는 모래가 따듯했다. 키레네는 말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사락사락. 모래가 짓눌리고,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네.”

    “네. 조용하네요.”

    그녀는 발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하얀 모래를 쳐다봤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좋았다. 끝까지 그녀를 옭아매던 아레오스의 흔적조차 없었으니까. 영지를 떠난 뒤로 키레네는 디아메데스와 타이오스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랑했다. 그게 다른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품는 사랑 만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사랑하긴 사랑했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그 남자를 닮은 아들과 그 남자를 떠오르게 하는 딸이라니.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일리온이 손을 단단히 맞잡아왔다.

    말하지 말자고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자식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났을까. 지금쯤 아이가 태어났을지도 몰랐다.

    ‘그것조차 똑같아.’

    아레오스는 키레네가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조차 개의치 않았다. 디아메데스도 마찬가지였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츠린 순간. 일리온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추워요?”

    “안 추워.”

    다시 침묵이 흘렀다. 바다 소리가 들렸다.

    “일리온.”

    “네.”

    “……잘 살겠지?”

    에두른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에 일리온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잘 지낼 거예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 그가 걱정 말라는 듯 등을 끌어안았다.

    “쓸쓸해요?”

    두 아이에 관련된 것은 이미 손을 떠난 일이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을 그곳에 두고 온 것으로 됐다.

    키레네는 고개를 흔들었다. 팔을 뻗어 일리온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어느새 바다에 가까워졌는지 차가운 물이 두 사람의 발을 적셨다.

    “잘 지내면 됐어.”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더 이상 아레오스의 그림자에 짓눌려 살고 싶지 않았다. 일리온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음에도 키레네는 오래도록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아이를 낳은 것 자체가 그 남자의 저주였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자 쓴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지.’

    키레네는 애써 모든 생각을 지워냈다. 지금이 행복하면 됐다. 남은 삶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그저 낯선 이방인으로 취급받고 있었으니까.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키레네가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일리온의 얼굴에 망설임이 가득했다. 그녀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는 정말 곤란해 보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필요 없어.”

    “…….”

    “아이는 됐어.”

    딱 잘라 말했다. 키레네가 답삭 안겨들자 남자가 낮게 웃으면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들었다.

    허리에 다리를 감고, 일리온의 뺨을 붙잡았다.

    “왜.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솔직히요?”

    “응. 솔직히.”

    “아니요.”

    약간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나도 필요 없어.”

    “다행이네요.”

    그가 고개를 살짝 내밀어 입을 맞췄다. 입술이 부드럽게 꾹 눌리는 느낌이 좋았다.

    벌써 수천 번도 족히 키스해봤지만 일리온의 입맞춤은 언제나 다정하고, 달콤했다.

    “다른 것보다도 당신이 위험한 게 제일 싫으니까요.”

    “나는 일리온이 바쁜 게 싫어.”

    “으음. 그건 좀 곤란한 말이네요.”

    그가 쿡쿡 웃으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레네는 여전히 달랑 달랑 매달린 채 어깨에 뺨을 기댔다.

    “그럼 몇 년 뒤에는 진짜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약속할게요.”

    “몇 년 뒤에?”

    “글쎄요. 10년 뒤에?”

    “너무 길어.”

    “그래도 후작위를 넘기겠다는 약속은 지켰잖아요.”

    아이가 자라면 후작위를 넘겨주고 멀리 떠나자고 농담처럼 말했던 게 결국은 이루어지긴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건 그렇지만.”

    뺨을 기댄 채 웅얼거리자, 일리온이 그녀를 다시 추슬러 안았다.

    “10년은 너무 멀어.”

    “그럼 9년?”

    키레네가 인상을 찌푸리곤, 그를 살짝 꼬집었다.

    “아야.”

    일리온이 과장되게 아픈 척 하며 엄살을 피웠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파도 소리. 모래 소리. 일리온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처음부터 떠났어야 했던 걸지도.’

    단둘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완벽하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게 정답이었다.

    “일리온.”

    “네.”

    “라스카라는 성도 버리는 거지.”

    “……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리온은 거침없이 버리겠다고 대답했다. 키레네는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왜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왕께 말씀드려서 새로운 성을 달라고 해볼까요?”

    “그럼 또 귀족이 되는 거 아니야?”

    “음. 그렇겠죠?”

    그녀가 어깨에서 고개를 떼어내고 일리온을 쳐다봤다.

    “귀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거야?”

    “못할 건 없죠.”

    해맑게 웃는 얼굴에 더 이상 묻는 것을 관뒀다.

    “됐어.”

    다시 어깨에 뺨을 기대자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일리온과 키레네면 충분해.”

    “저도요.”

    “거짓말쟁이.”

    “진짜예요.”

    “일리온은 나 말고도 필요한 게 많잖아.”

    퉁명스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아닌데.”

    “맞는데.”

    “다 키레네를 위해서라고요.”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고집쟁이.”

    “맞아. 난 고집쟁이야.”

    “음. 그럼 이번에도 내가 져야 하는 건가요?”

    “응.”

    일리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당신을 고생시킬 수는 없잖아요.”

    그가 뺨에 입을 쪽 맞추더니.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일리온이 아무렇지 않게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일리온!”

    “괜찮아요.”

    “안 괜찮아!”

    “어차피 이 해변은 우리 집에 포함된 곳이라 아무도 안 와요.”

    “옷이 젖잖아!”

    “갈아입으면 되죠.”

    “나 수영할 줄 몰라!”

    “꽉 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키레네가 발버둥쳤지만,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팔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일리온!”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외치고 나서야 그가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가슴께에서 물이 찰랑였다.

    필사적으로 일리온을 끌어안은 키레네가 화난 표정을 짓자, 그가 장난을 치듯 입술을 핥았다.

    파도가 칠 때마다 몸이 흔들거렸다. 조금 불안한 마음에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놓지 마.”

    “절대 안 놓을게요.”

    “…….”

    “이제 나한테는 당신뿐이잖아요.”

    이 세상에. 단둘뿐.

    조금 높은 파도가 밀려와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덮쳤다. 턱 밑으로 짜디짠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엉망으로 젖어버린 꼴이라니. 그녀는 축축하게 젖은 일리온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나한테도 일리온뿐이야.”

    바다의 냄새가 느껴지는 이마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푸르고,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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