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레이
레이 아이기아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도착한 건 타이오스가 사라지고 10일이 지난 후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디아메데스.”
레이가 그녀의 손을 잡아들더니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는 붉은색에 가까운 짙은 적갈색 머리카락에, 녹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 어느 쪽을 비교해 봐도 타이오스와는 손톱만큼도 닮지 않았다. 그럴수록 디아메데스는 동생이 생각났다.
“제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겨운 말이었다. 그녀의 반응이 제법 긍정적인 것이라 생각했는지 레이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라스카 후작 각하께서 결혼을 서두르시는 이유를 잘 알겠습니다.”
입에 발린 말을 한 귀로 흘린 디아메데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평범했다. 조금 잘생긴 것 같긴 했지만, 그녀의 눈에 차는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기아 소후작이라고 했지.’
급하게 결혼을 추진하는 와중에도 후작가의 남자를 데려온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크게 모난 곳도 없어 보이고, 초면부터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지도 않았다. 그냥 그뿐이었다. 그 점이 그녀에게 무언가 감동을 주진 못했다.
디아메데스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증이라도 있는 건지 레이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녀에 대한 찬양과 흥미 있을 만한 얘기를 번갈아 하는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남자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기아 소후작.”
“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좋아요. 레이.”
“저도 디아메데스라고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그냥 싱긋 웃었다.
“그래요. 뭐, 상관없죠.”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자기가 본 그 어떤 사람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는 시종일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시선이 마주칠까 싶으면 고개를 숙이고, 디아메데스가 다른 곳을 바라보면 슬쩍 곁눈질했다.
“나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들었을 텐데요.”
“누구와 견줄 수 없이 아름다우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것뿐이 아닐 텐데요.”
“아. 라스카 후작 부인께서도 무척이나 아름다우시다죠. 저는 후작 부인을 아직 뵌 적이 없지만, 감히 장담하건대 당신이 더 아름다울 겁니다.”
“그것 말고도 있지 않나요?”
“어떤…….”
그 머릿속에 몇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는지 레이가 말끝을 흐렸다. 남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거짓말이네요.”
그녀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조금 더 내밀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아이기아 소후작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등을 곧게 폈다.
“말해 봐요.”
“무엇…… 무엇을 말입니까.”
“나에 대해서요.”
“무척이나 아름다우시다는 얘기밖에…….”
“창녀라는 얘긴 안 돌던가요?”
“헉.”
디아메데스가 직접 그 단어를 말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는지 레이가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음란한 여자라는 얘기는 안 돌던가요?”
“라, 라스카 소후작.”
“디아메데스라고 부르겠다면서요.”
“…….”
“셀 수 없이 많은 남자와 정사를 나눴다는 얘기는 안 돌던가요?”
“그만, 하십시오.”
“수도 없이 많은 남자들이 내게 거절당해서 자살했다는 얘기는 안 돌던가요?”
“디아메데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새파랗게 질리길 반복했다. 수치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테이블 밑으로 그의 발목을 툭 건드렸다. 곧게 펴고 있던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게 보였다. 달팽이가 껍질 안으로 숨듯 그가 발을 치웠다. 디아메데스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그게 전부 진실인지는 궁금하지 않던가요?”
레이가 입술을 달싹였다가 이를 꽉 악물었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또 거짓말이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남자의 시선을 곧게 마주했다. 그녀가 그 모든 것들을 숨길 이유도, 피할 이유도 없었다.
“전부 맞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나에 대한 소문 말이에요.”
디아메데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남자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확 달아올랐다. 그녀의 난잡한 소문에 대해 상상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이런 여자와 결혼하러 왔다는 것이 끔찍한 걸까.
“확인해 보고 싶어요?”
“그만하십시오.”
“여기서 아무 남자나 잡고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을 할 걸요.”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달라질 생각이 없어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레이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당신과 결혼해도 여전히 다른 남자들과 어울릴 거고, 당신은 그걸 막을 수 없을 거라는 뜻이죠.”
“라스카 후작 각하께선…….”
“아버지가 뭐라고 했든 신경 안 써요.”
결혼하면 달라질 거라고 말했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 무엇도 아버지의 뜻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으니까. 디아메데스가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자 레이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녹색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찬탄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이 우스웠다. 음란하고, 더럽고, 난잡한 창녀라는 말을 듣고도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디아메데스가 손을 뻗어 남자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레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불쾌함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소문나지 않은 걸 알려줄까요?”
입을 맞출 듯 가까이 다가갔던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다.
“무, 무엇입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왔다.
“라스카 후작가의 디아메데스는 제 동생이랑도 붙어먹는다죠.”
“……예?”
얼빠진 표정에 웃음을 터뜨렸다. 디아메데스가 그의 어깨를 툭 밀고,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리는 동안 레이의 녹색 눈이 잘게 흔들렸다. 지금 그녀가 한 말을 농담으로 치부해야 할지 아니면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진짜냐고 물어볼 용기도 없는 남자.’
아니. 그냥 두려운 것뿐일지도 모른다. 결혼할 여자가 친동생과 난잡한 짓을 하는 사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넘긴 디아메데스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싱긋 미소 지어주자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진짜냐고는 안 물어보나요?”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이미 답을 알아챈 듯했다.
“진짜예요.”
“……저는, 전.”
레이가 더듬거리면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녀는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바라본 남자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멀어졌다. 디아메데스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
그렇게 말하면 도망이라도 칠 줄 알았건만 레이는 의외로 바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가서 이런 일이 있었다며 털어놓지도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루가 지나 버렸다.
‘둘 중 하나라도 하길 바랐는데.’
디아메데스는 침대에 누워 눈을 깜박였다. 다른 남자와 어울려 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냥 관뒀다. 타이오스의 아이를 가졌는지 아닌지 모르니까. 혹시라도 다른 남자의 아이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타이오스는 어디로 간 걸까.’
죽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직접 가르치기도 했으니 어디 가서 쉽게 죽지도 않으리라. 막연히 ‘여행’을 떠났다고만 말하니 어디로 갔을지 짐작이 가지도 않았다.
“후우…….”
아이가 생겼으면 좋겠다. 디아메데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배 위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죽어서까지 타이오스의 목에 목줄을 걸어두고 싶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 해도 이 아이가 그의 족쇄가 될 테니까. 절대 누나를 잊지 못할 테니까.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디아메데스. 레이입니다.”
아이기아 소후작. 디아메데스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녀의 난잡함을 듣고 도망쳐 주었으면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그녀만의 바람인 듯했다.
‘청혼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여기 온 게 결혼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굳이 청혼을 또다시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자기도 한번 섹스하게 해 달라고 찾아오기라도 한 건가. 짜증이 치밀었다. 동생의 아이를 가졌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 다른 남자의 정액을 품고 싶진 않았다. 디아메데스가 대꾸 없이 가만히 있으니 그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디아메데스.”
“…….”
“잠시라도 대화할 수 있을까요.”
“하아.”
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문을 살짝 열자 무언가 크게 결심한 듯한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어제 말씀하신 것, 생각해 봤습니다.”
디아메데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서 어쩌겠다는 걸까. 달리 궁금하지도 않았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건 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답뿐이었으니까.
“전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 지금 이해라고 했어요?”
이해한다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른 남자와 수도 없이 뒹구는 것을 이해하고, 동생과 붙어먹는 걸 대체 어떻게 이해한다는 걸까. 디아메데스가 크게 웃어 버리자 레이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어떻게 이해한다는 거예요?”
그 말에 남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녹색 눈동자 위에는 굳은 결심이 가득했다. 그 어떤 말이 나와도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결심 말이다.
“그래요. 제가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겠죠.”
“…….”
“그렇지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
디아메데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 받아들이겠습니다.”
“과거가 아니에요.”
특히나 동생에 관한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에게는 그 무엇도 약속할 수 없었고, 약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레이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웃음이 나왔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녹색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어제는 그녀를 마주 보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던 남자가 디아메데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가 신음 같은 소리를 흘렸다.
“이제부터 모두 그만두겠다고 말해준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만둘 생각 없어요.”
“저와 결혼하려던 것 아닙니까, 디아메데스.”
“그건 아버지의 뜻이지 제 뜻이 아니에요.”
“하지만 후작 각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렇게 결정했지. 누구든 원하는 사람과 맺어주겠다는 말을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뒤집어 버렸지. 입꼬리가 뒤틀렸다.
“아버지가 뭐라고 했든 당신이 결혼하는 건 나예요.”
레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하고 싶지 않아.”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디아메데스는 팔짱을 끼고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하고, 이만 떠나 주었으면 했다.
‘물론 그동안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남자들이 그렇게 쉽게 그녀를 포기했다면 죽는 사람이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그녀가 본 남자들은 하나같이 매달렸으면 매달렸지 손쉽게 잊는 이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한참 후에야 대답이 흘러나왔다. 레이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동생과의 관계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걸까. 디아메데스는 얼굴이 벌게진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제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까?”
“…….”
“지금 전부 말해 주세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부 짜증이 났다.
“모르겠어요, 레이?”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을 어떤 식으로 해석한 건지 레이의 얼굴 위로 희미한 희망이 한줄기 스쳐 지나갔다. 디아메데스는 화가 났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한 말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예?”
“전부 사실이라고요. 내가 창녀라는 것도, 동생과 붙어먹었다는 것도.”
남자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한순간 구름 위까지 날아올랐다가 단번에 추락하면 이런 표정일까. 그녀는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녹색 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또 알아야 할 게 있냐고요?”
디아메데스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래요. 있어요.”
“무엇입니까.”
“동생의 아이를 가졌어요.”
그 말에 레이의 눈이 커졌다. 먼저 입을 열 수 없는 두렵도록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디아메데스는 배 위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눌렀다. 아직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랐다.
“그래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표정을 일그러뜨린 남자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거짓말 아니에요. 의사를 불러와도 좋아요.”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녹색 눈동자 속에 얽힌 수많은 것들은 다 읽어낼 수조차 없었다.
“……아직, 얼마 되지 않았나 봅니다.”
불길할 정도로 느리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낳을 거예요.”
“동생과의 아이를 말입니까?”
레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디아메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 아이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받아들이든 말든 상관없어요. 당신을 원한 적조차 없으니까.”
예전에도, 지금에도. 그 새까만 눈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본 그 순간부터 디아메데스는 단 하나만을 원했다. 다른 것 따윈 필요 없다. 다른 남자와 얽혀 있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타이오스의 표정이 어떤지는 그 누구도 모르리라.
어쩔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있는 끔찍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란.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배 속이 찌르르 울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차라리 타이오스와 떠났으면 좋았을까.’
아니, 그건 싫었다. 이 모든 게 디아메데스의 것인데 이것들을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떠날 생각 따윈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둘만 살자는 그런 로맨틱한 말은 싫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손가락질을 하든, 창녀라고 욕을 하고 그녀의 추잡함에 치를 떨든 디아메데스가 있을 곳은 이곳이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멀거니 쳐다봤다. 레이 아이기아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티끌만큼도.
‘다른 남자랑 똑같아.’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고,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고백하면서 디아메데스가 내미는 한 조각의 희망에 몸을 던졌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오직 그녀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날 원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결혼하게 될 겁니다.”
어두운색으로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가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정확히는 아직 밋밋하기만 한 배 위로 말이다. 저도 모르게 배 위를 팔로 감싼 디아메데스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두렵진 않지만, 위험한 남자였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다고 했죠?”
그 말에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보여주던 모습이 가식이었다는 듯 입꼬리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물론입니다, 디아메데스.”
그가 싱긋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 들었다. 손등에 입을 맞춘 남자가 아플 정도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제 뜻입니다.”
“…….”
손을 빼내려고 하자 그가 손에 힘을 더욱 꽉 주었다. 디아메데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바르작거리는 그녀를 겨우 놔준 레이가 경고하듯 말을 이어갔다.
“당신을 만진 이들의 손을 자르고, 입을 맞췄다면 입술을 도려낼 겁니다.”
조금 전까지 전부 받아들이겠다고 이해하겠다고 했던 남자가 맞는 건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씀해주시니 저 역시 솔직해지겠습니다, 디아메데스.”
문 밖에서 얘기를 나누던 것이 가식이었다는 듯 그는 방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경멸했습니다.”
디아메데스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그 자리에 꼿꼿이 섰다. 고개를 치켜들고, 어둡게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당신 같은 창녀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거, 우습잖아요?”
레이가 쿡쿡 웃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조차 멋쩍어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거침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그가 긴 머리채를 꽉 움켜쥐었다. 디아메데스는 더욱 턱을 치켜들었다.
“예쁜 여자 하나 두고 언제든지 안을 수 있으면 즐거울 것 같아서 수락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생각보다 잘 만난 것 같네요.”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리온의 눈은 정확했다. 이 남자의 어떤 점을 보고 딸의 남편감으로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쓰레기임은 확실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을 굳이 참을 생각도 없던 디아메데스가 크게 웃자 레이가 하하, 하고 같이 웃었다.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상상하던 것보다 더 아름다워서 짜증이 나.”
남자가 쿡쿡 웃으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디아메데스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숨결이 뒤섞였다. 끈적한 욕망으로 뒤엉킨 숨과 달리 두 사람의 표정은 서늘하기만 했다.
“그리고 난 더러운 건 싫어하거든.”
“나 역시 마찬가지야.”
디아메데스가 생긋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양보 없이 맞부딪혔다. 그녀가 먼저 빈정거렸다.
“창녀를 깨끗이 씻기면 순결해지는 줄 알아?”
“아니겠지.”
레이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렇지만 더 더러워지는 건 싫거든.”
“당신은 애초에 깨끗이 씻을 수도 없이 더러워.”
“창녀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은데.”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디아메데스가 먼저 혀를 내밀어 남자의 입술을 살짝 핥아 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은 남자가 혀를 얽어 왔다. 질척한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의 입술이 꽉 맞닿은 순간, 그녀는 그의 혀를 꽉 깨물었다.
“아!”
레이가 그녀를 거칠게 밀어냈다. 어찌나 세게 물었던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비릿한 피가 묻은 입술을 날름 핥아 올리자 남자가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웃었다.
“재미있지?”
디아메데스가 먼저 물었다.
“그래.”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피로 범벅이 된 혀로 입술을 훑은 그가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좀 더 날 즐겁게 해 줘요, 디아메데스.”
피로 질척한 혀가 귓가를 핥아 올렸다. 끈적한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섹스를 하려고 시도할 거라는 디아메데스의 생각과 달리 그는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그럼 결혼식을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처음 봤던 표정을 다시 지어낸 레이가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곤 문 밖으로 나섰다. 문이 쾅 닫혔다. 불쾌한 느낌에 귓가를 손으로 문지르자 벌건 피가 묻어 나왔다. 디아메데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
그날 이후로 레이는 다시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디아메데스는 짜증스럽게 날짜를 세다가 2주가 더 지나서야 의사를 찾았다. 거의 한 달이 지났으니 임신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알 수 있으리라.
“어디 가는 겁니까.”
“알 거 없잖아요.”
“곧 결혼하게 될 텐데 너무 매정한 것 아닙니까?”
그가 조금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든 것이 우습기만 했다. 본성을 모른다면 깜박 속아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레이 아이기아의 본모습을 봐 버렸다. 디아메데스는 그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릴 적부터 그녀를 쳐다보는 남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가족이기에, 동생이기에,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할 수 있는 타이오스 뿐.
그러나 라스카 후작저에 있는 건 낯선 남자뿐이었다. 남자의 끈덕진 시선을 받는 것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짜증이 치밀었다. 디아메데스는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하는 대신 문을 쾅 닫았다.
“디아메데스 님?”
중년의 여자 의사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이런저런 소리를 하는 대신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어디 안 좋으신가요?”
“임신한 것 같아.”
“……예?”
그 말에 의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디아메데스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아야 할 말이 나온 듯한 반응이었다.
“약이 떨어졌나요?”
“아니.”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손을 내밀었다.
“임신했는지만 봐줘.”
그 말에 그녀가 난처한 듯 웃었다.
“누구의 아이인지는 알고 계시는 건가요?”
“알아.”
“……누군지 물어도 될까요?”
“아니.”
확실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디아메데스가 눈짓하자 의사가 한숨을 가볍게 내쉬더니 맞은편에 천천히 앉았다. 임신을 확인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여기저기 그녀를 살핀 의사가 미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임신하셨네요.”
축하해야 할지 아니면 울상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뒷말을 쉽게 꺼내지 못한 의사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해?”
“……네.”
느린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것으로 됐다. 디아메데스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다급히 팔을 붙잡았다.
“후작 각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 말에 여자는 정말 난처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생각이신 거예요. 약을……지어드릴까요?”
“낳을 거야.”
“디아메데스 님.”
“그러려고 가진 아이야.”
“후작 각하께서 아시면 뭐라 하실지.”
“너만 조용히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이 맞긴 했다. 부풀어 오르는 배를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겠지. 하지만 아이를 지우지 못할 때까진 버틸 수 있었다.
“알아.”
디아메데스가 담담한 것과 달리, 의사가 더 안절부절못했다.
“저는…….”
“조용히 할 거잖아.”
떨리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싱긋 미소 지었다.
“날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잖아.”
다시 한번 강조하듯 말하자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디아메데스가 녹아내릴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아름답다’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남자에게만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각은 누구라도 똑같은 거였으니까. 나이가 많든 적든 성별이 무엇이든. 심지어는 인간이 아닌 것에게도 말이다.
의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눈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고마워.”
디아메데스가 환하게 웃으면서 중년 여자를 살짝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이제 몇 개월만 더 버티면 된다는 건가.’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긴 했다. 레이 아이기아. 그와 결혼하게 되면 좋지 않으리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동생의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결국 손에 넣겠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작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살짝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던 의사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의 아이인가요.”
“…….”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신 거예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그 말에 여자가 잠시 망설였다.
“……그래서는 안 되는 남자는 아니죠, 디아메데스 님.”
“그래서는 안 되는 남자가 누군데?”
오히려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의사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였다. 디아메데스는 그냥 싱긋 웃었다. 그 반응에 누군지 짐작이 간 듯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쉿.”
검지를 살짝 입술에 갖다 대고 작게 소리를 낸 그녀가 문을 열었다.
“……오래 안 걸렸네요.”
문 옆에 기대서 있던 레이가 웃으면서 등을 꼿꼿하게 폈다.
“엿듣는 건 신사가 할 행동이 아니라고 교육받지 못했나 보죠?”
그 말에 남자가 별다른 말 없이 방문을 닫았다. 그리곤 다정한 척 웃으며 디아메데스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고개를 숙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더러운 창녀에게 신사는 어울리지 않죠.”
“…….”
“당신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인 터라.”
레이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가 뭐라도 하든 관심이 가진 않았다.
‘어디까지 들었을까.’
어차피 들어 봐야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전에 엄포를 놓듯이 동생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한 것을 확인시켜준 것뿐. 그 뒤로 아버지에게서 뭐라 말이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조르르 달려가 고자질을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동생의 아이를 뱄다고 알리진 않을 생각인가 보죠?”
부드러운 그 말에 배를 감싸 안았다. 아무런 속셈도 없다는 듯 순진하게 웃는 얼굴이 불쾌했다.
“알려도 상관없어요.”
디아메데스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긴. 지금의 소문에 동생과의 일을 조금 더한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죠.”
“잘 알고 있네요.”
“그 말은, 지금 당신의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아는 건 나뿐이라는 소리네요.”
“…….”
그녀는 그를 노려봤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계단에서 밀기라도 할 것 같나요?”
“그것보단 고상한 방법을 쓰리라 믿어요.”
“그렇죠. 그건 우아하지 못하잖아요? 그리고 그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날 수도 있고.”
커다란 손이 턱을 잡아들었다. 디아메데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떻게 할까요. 디아메데스.”
“손 치워.”
“아직 바깥이에요.”
“그래서?”
“우리 둘 다 적당히 연기하기로 합의한 것 아니었나요?”
그녀는 짜증스럽게 손을 탁, 쳐 냈다.
“달라질 건 없어.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말이야.”
“생각이 달라질걸.”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말로야 무엇인들 못 할까. 레이가 정말로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심지어 협박도 하지 않았던가. 그녀를 만지는 남자는 손을 자르고, 입을 맞추면 입술을 도려내겠다고. 그것을 직접 목격하지 않고도 견딜 수 없어 하는데 어떻게 보고도 견딜 수 있을까.
“당신은 날 감당하지 못해.”
“글쎄.”
그가 여유롭게 웃었다. 디아메데스는 조금 더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다. 등 뒤에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BORI공금 갠소
아이가 생겼다.
‘타이오스에게 알리고 싶은데.’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 사실을 알면 동생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궁금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디아메데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임신한 것은 좋았으나 지금 당장 결혼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결혼식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그것에 비해 아이는 너무 느리게 자랐다. 약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수준이 되려면 적어도 4, 5개월은 더 지나야 할 텐데.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며칠뿐이었다.
타이오스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직접 말했음에도 레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덕분에 디아메데스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고상한’ 방법을 통해 아이를 없앨 수도 있었으니까.
생각에 잠겨 걷고 있던 그녀의 앞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디아메데스 님.”
누구였더라. 정사를 나눈 적이 있는 익숙한 얼굴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디아메데스는 적당히 미소 지었다.
“아…….”
얼버무리는 듯한 반응에도 남자가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어쨌든 기억을 한다는 점에 감동이라도 한 걸까.
“곧…… 결혼하실 거라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
무슨 말을 할까 싶어 팔짱을 꼈다.
‘하긴. 요즘 드물긴 했지.’
아버지가 막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틀이 멀다 하고 청혼하던 남자들이 사라졌다. 다들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포기한 걸까. 아니면 비관해서 목숨이라도 끊은 걸까. 어느 쪽이든 관심은 없었다. 애초에 디아메데스의 귀에 들어올 얘기도 아니었으니까.
“정말 사,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더듬거리면서 그녀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는 남자의 얼굴이 점점 더 벌겋게 변했다.
“결혼하신다는 건 알지만 디아메데스 님에 대한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격정적으로 외친 그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마치 은총을 내려주길 원하는 광신도 같은 모습이었다. 바닥을 기어가며 가까이 온 남자가 그녀의 발끝에 고개를 숙였다.
“날 사랑해?”
디아메데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신이 직접 지상에 강림하는 그 순간을 목격하면 그런 표정을 지을까 싶을 정도로 감격한 눈빛을 띤 그가 고개를 격렬히 끄덕였다.
“디아메데스 님…….”
입술을 달싹이며 움찔거리던 남자가 팔을 벌려 조심스럽게 그녀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아아……디아메데스 님.”
숨을 헐떡이다 죽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처럼 달라붙어서 헥헥대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디아메데스가 어깨를 톡 두드렸다.
“일어나.”
남자가 주춤거리면서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그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옷 위로도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체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디아메데스는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흡.”
잠시 뻣뻣하게 얼어 있던 남자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지금 상황이 현실인지 파악하듯 눈을 데구루루 굴린 그가 달달 떨리는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으응…….”
물컹한 혀가 성급히 입술을 파고들었다. 디아메데스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몇 겹의 천 너머로 단단히 부풀어 오른 남자의 성기가 느껴졌다. 뜨거운 혀가 뒤엉키고, 비벼졌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난잡하게 들려왔다.
“하아, 응.”
“하……하아.”
짐승처럼 헐떡인 남자가 정신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느다란 목을 부드럽게 핥아 올리고, 부드러운 가슴 위에 고개를 파묻는 행동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디아메데스가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이리 와.”
별달리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그는 목줄이 매인 개처럼 헐떡이며 따라 걸어왔다. 그늘진 수풀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손을 내려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형태를 더듬었다.
“읏, 헉…….”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사정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것을 밖으로 꺼내 직접 만지는 대신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핥아 봐.”
“디아메데스 님.”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는 그저 황홀한 듯했다. 남자가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허벅지를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헐떡이는 숨이 다리 사이에 닿았다.
“으응…….”
거리낌 없이 아래를 핥는 감각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남자가 움찔거리는 입구 속으로 혀를 깊이 밀어 넣었다. 배 속이 움찔거리며 꽉 조여 왔다. 헐떡이는 숨결이 습한 곳에 닿았다.
안쪽에서 흘러내리는 애액을 퍼내듯 움직인 혀가 달아오른 음부에 미끈거리는 액체를 펴 발랐다. 음핵에 살짝 스치는 뭉클한 감각에 허벅지 안쪽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하아…… 아…….”
디아메데스의 손가락이 남자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아플 정도로 움켜쥐는 손길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단단히 달아오른 작은 살덩어리를 혀로 짓누르고, 핥아 올린 그가 조금 더 깊숙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배 속이 꽉 조여들었다. 익숙한 쾌감이 점점 번져 나갔다. 내벽이 꽉 조여들고, 입술 사이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후윽, 응…….”
남자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고, 더 깊이 짓눌렀다. 숨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허벅지를 벌리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꽉 들어갔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팽팽하게 부푼 가슴이 옷에 꽉 짓눌려 갑갑해졌다. 디아메데스가 신음을 흘리면서 입술을 살짝 깨문 순간, 비명이 들렸다.
“아악!”
절정에 다다르기 직전 강제로 멈춰 세워져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눈을 뜨자, 싸늘하게 식어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레이.”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으으…….”
어떻게 한 건지 디아메데스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남자가 피를 쿨럭 쏟아냈다. 레이가 빠득하는 소리와 함께 이를 갈더니, 그대로 쓰러진 몸뚱이를 걷어찼다.
“헉…….”
듣기만 해도 숨이 꽉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흥분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성적인 유희를 즐긴다고 해도 그녀에게 그런 가학적인 취미는 없었으니까.
“말하지 않았던가요?”
레이 아이기아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어디부터 잘라야 할까요.”
그가 서슴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디아메데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긴 라스카 후작가예요.”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이죠?”
“당신은 내 영지민들에게 손댈 권리가 없다는 말이에요.”
“아니. 당신의 영지민이 아니라 일리온 라스카 후작 각하의 영지민이겠죠.”
“당신이 ‘라스카’라는 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 확실하죠.”
레이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었다. 한참이나 쿨럭거리면서 헐떡이던 남자가 조금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디, 디아메데스 님…….”
구원을 바라듯 간절한 얼굴이었다. 바닥을 기듯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으니 레이가 그의 손을 짓밟았다.
“악!”
“저는 제 약혼녀에게 손을 대는 자에게 마땅한 처벌을 할 뿐입니다.”
디아메데스는 그를 말리는 대신, 소리 높여 웃었다.
“날을 잘 갈아두는 게 좋겠네요.”
빈정거리는 말을 바로 알아들은 듯 레이가 지지 않고 미소 지었다.
“피를 얼마나 봐야 만족할 생각인 거죠?”
“나는 만족 따윈 모르는 인간이라.”
이미 수십 아니 수백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물론, 그녀가 원한 목숨은 하나도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디아메데스가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 안에 한둘 정도 더 추가한다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녀가 싱긋 웃자 레이의 입술이 뒤틀렸다. 남자의 목숨을 쥐고 협박하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기라도 한 걸까. 그건 큰 착각이었다. 디아메데스는 ‘타이오스’가 아닌 남자에겐 크게 관심 없었다.
그저 그녀를 즐겁게 해 주는 몇 가지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바닥을 기라고 하면 기꺼이 무릎을 꿇고, 개처럼 짖어보라 하면 기꺼이 개 소리를 내는 그런 재미있는 장난감이라고 해야 할까.
대용품은 차고 넘치게 많았고 그중 하나가 사라진다 해도 아쉬울 건 없었다. 개중에 조금 더 마음에 드는 게 있다고는 해도 그뿐. 그게 ‘특별’하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당신은 생각보다 더 구역질 나는 여자군요. 디아메데스.”
“이제 알았어요?”
디아메데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녹색 눈이 뒤틀린 감정을 품는 게 보였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검으로 바닥을 콱 내리찍었다.
“아악!”
조금 전까지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이 잘려 나갔다. 피 냄새가 훅 풍겨 왔다. 잔인한 장면이었지만 디아메데스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날 어디까지 끌어내릴 셈이지?”
레이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착각하지 마. 내가 끌어내린 게 아니라. 당신이 기어 내려온 것뿐이니까.”
“아아. 그래. 밑바닥의 창녀와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곳에 찾아가야 한다는 소리인가.”
이죽거린 남자가 다시 한번 검을 내리찍었다.
“아아악!”
비명이 멀게만 들렸다. 남자가 고통에 몸부림칠 때마다 피가 튀었다. 녹색 풀 위에 붉은 액체가 흩뿌려지고, 녹색 눈 위에 광기가 덮였다. 디아메데스는 눈을 크게 떴다. 목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정신이 멍해졌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손목이 잘렸다. 차근차근 손끝부터 하나씩 잘라내는 검은 멈출 줄을 몰랐다. 커다란 소리에 몰려든 사람들이 크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
레이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남자가 고통을 받는 게 전부 디아메데스 때문이라고 질책하듯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고통에 발버둥 치는 몸을 잘라냈다. 그의 얼굴 위에 피가 점점이 튀었다. 드레스 끝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끔찍한 고통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그만!”
분노를 애써 억누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아버지였다. 그의 뒤로 숨을 헐떡이는 기사 몇 명이 보였다.
“라스카 후작 각하.”
레이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디아메데스는 턱을 더 높이 치켜들었다. 타이오스를 떠오르게 하는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를 악문 일리온이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이 고통에 못 이겨 기절한 남자를 들쳐 업고 달려갔다.
“무슨 짓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레이가 아무렇지 않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디아메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뺨에 피가 튀는 감각이 선득했다.
“저자가 제 약혼녀와 난잡한 짓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후작 각하.”
그 말에 일리온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뺨에 묻은 핏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레이 아이기아 소후작은 즉결처분권이 없어요, 아버지.”
“하아.”
“세상 어떤 남자가 약혼녀를 탐하는 남자를 참아 넘길 수 있단 말입니까.”
검은 눈이 디아메데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책망하는 듯한 시선에 오히려 고개를 더 빳빳하게 들어 올렸다. 아버지가 정말로 그녀가 얌전히 지내리라 믿진 않았으리라.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의 계산과 다른 건 레이 아이기아 소후작이 생각보다도 더 밑바닥 인간이었다는 것뿐.
“……아이기아 소후작을 방으로 모셔라, 디아메데스.”
일리온이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기사들이 레이를 둘러쌌다. 순순히 검을 집어넣은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디아메데스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레이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마치 이 파워 게임에서 이긴 게 확실하다는 듯이.
그녀는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라스카 후작 성에서 거침없이 검을 휘두른 그가 성안으로 들어갔다. 일리온이 조금 피곤한 얼굴로 짧은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성을 향해 걸어갔다. 디아메데스는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피에 젖은 드레스 끝자락이 조금 신경 쓰였다.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감도는 듯했다. 후작의 집무실에 도착한 디아메데스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디아메데스.”
“제 탓을 하실 건 아니겠죠, 아버지.”
“언제까지 그렇게 살 생각이지?”
“타이오스를 데려오세요.”
“그 남자는 어쩔 셈이었는지 말해 봐라.”
“저는 평소와 똑같이 했을 뿐이에요. 검을 휘두른 건 아이기아 소후작이라고요.”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래.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검을 휘두른 이의 잘못이지.”
‘아, 피.’
가슴 부근에 튄 핏방울을 문질렀다. 잔인한 일을 당한 남자가 불쌍하긴 하지만,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난잡한 정사에 대한 죄라면 그에 합당한 법이 존재했으니까. 그것을 무시하고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 레이의 잘못이었다. 잔인한 일에 대한 책임이 디아메데스에게 있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죄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 아이기아 소후작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어요.”
“…….”
“또 이런 일을 저지를 남자예요.”
일리온이 눈을 잘끈 감았다. 그의 손끝이 이마를 꾹꾹 누르는 게 보였다.
“그런 남자와 저를 결혼시킬 생각은 아니겠죠, 아버지.”
“네가 그만두면 될 일이야.”
“그건 제가 결정할 거예요.”
“디아메데스!”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면 만족할게요.”
“네가 원하는 걸 말해봐라.”
“타이오스.”
“안 돼.”
“그럼 제가 달라지는 일 따윈 없을 거예요.”
동생의 아이가 배 속에 있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내리눌렀다. 지금 밝혀 봐야 억지로 약을 먹는 결과밖에 없을 테니까. 아버지가 속에 있는 것을 전부 쏟아 내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를 악물고 내뱉는 목소리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왜, 타이오스냐.”
“왜 타이오스면 안 되는 거죠?”
“네 동생이야.”
“제 동생이에요.”
그가 안 된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타이오스여만 하는 이유였다. 그 의미를 알았는지 일리온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너는 정말…….”
그러더니 말끝을 흐려 버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늘 그런 존재였으니까.
‘아니, 어머니도 마찬가지지.’
부모님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디아메데스는 깊이 가라앉은 검은 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두 사람이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굳이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축복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어디서도 축복받을 수 없다.”
“알고 있어요.”
담담한 대답에 일리온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냥 타이오스만 있으면 족해요.”
“네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동생이 원한다면 놀이 정도는 관둘 수 있어요.”
“…….”
“그렇게 바란다면 말이에요.”
“너는 정말 그를 닮았어.”
또 ‘그’의 얘기였다. 어차피 물어봐야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다른 남자.’
그렇게 짐작할 뿐.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다른 ‘남자’는 그것 말고 생각할 수 없었다. 애초에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심했으니까. 그리고 일리온은 몇 번이고 저에게 ‘그’를 닮았다고 했다.
디아메데스는 키레네를 꼭 닮았다. 머리 색도, 눈 색도, 생긴 것도. 전부 어머니를 꼭 닮아 있었다. 아버지가 누군지 생각할 틈조차 없을 만큼.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저와 타이오스가 안 되는 이유가 뭐죠?”
“되는 이유가 있긴 한 거냐?”
“아버지가 증오하는 남자의 자식이라서 그런 건가요?”
“뭐?”
“아버지의 자식이 아버지가 증오하는 남자의 자식과 이어지는 게 싫으신 거냐고요.”
“디아메데스.”
“그렇게 따지면 저는 타이오스와 이부남매가 되는 거네요.”
“너는 내 딸이야.”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거잖아요.”
일리온이 이를 꽉 물었다.
“디아메데스, 너는 나와 키레네의 딸이다.”
“제가 ‘그’ 남자를 닮았다면 타이오스와의 관계가 더욱 희미해지는 셈이네요.”
“아니라고 말했잖느냐!”
화가 치밀었다. 타이오스와 ‘완전히 같은’ 피를 타고난 줄 알았는데 반쪽짜리였으니까. 피 한 방울까지 전부 그녀의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점이 싫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타이오스를 데려오세요. 아버지.”
동생을 가져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이가 갈렸다. 머리카락 한 올, 그 머릿속에 감도는 생각 한 조각까지도 전부 그녀의 것임을 확인해야 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 속에 끔찍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
디아메데스는 창가에 기대서서 멀어지는 무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레이 아이기아가 떠나고 있었다. 일리온은 그가 이곳에 있어 봐야 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천천히 팔짱을 끼고 붉은색에 가까운 적갈색의 머리카락이 점점 멀어지는 걸 지켜보고 있으니 시선을 느낀 듯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멀리서도 어둡게 가라앉은 녹색의 눈동자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쩔 거야.’
입술이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레이 아이기아라는 남자는 사랑에 목숨을 던질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 말대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도 아닌 데다가 디아메데스의 모든 것을 바꿀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점점 멀어지던 시선이 결국 저 멀리 사라졌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창가에 기대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커튼을 내렸다.
일리온 라스카. 아버지가 계속해서 그녀를 결혼시키고자 한다면, 이 짓을 수백 번도 더 반복할 생각이 있었다.
‘영지민이 소중하다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하는 걸 아시겠지.’
디아메데스는 타이오스가 어디 있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
그 뒤로 디아메데스는 아버지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결혼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없었던’ 일인 양 취급되었다. 그녀 역시 불쌍한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동안 죽은 수많은 남자들처럼.
가만히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 임신한 지 석 달 정도가 지났다. 여전히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다. 아직도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게 갑갑했다.
‘피곤해.’
나른한 표정으로 휴게실 창 옆 의자에 앉아 있던 디아메데스는 언제나 동생이 서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중이었는지 한 남자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타이오스의 조각인 양 느껴졌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면서 손을 흔들자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게 하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듯 주위를 둘러본 그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흐응…….”
동생은 언제쯤 돌아올까. 디아메데스가 손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다가오라는 듯한 손짓에 남자가 주춤거리며 걸어왔다.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몇 번인가 몸을 섞었던 적 있는 기사라는 걸 알아챘다.
이름이 에드워드였던가. 에이드리안이었던가. 비슷한 종류였던 것 같다. 그녀는 홀린 듯한 얼굴로 창 아래까지 다가온 남자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디아메데스 님.”
떨리는 목소리에 벌써 흥분이 가득했다. 디아메데스는 턱을 괴고 쿡쿡 웃었다.
“올라와.”
그의 목젖이 아래위로 울렁이며 움직였다. 입술을 혀끝으로 천천히 훑은 기사가 조금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입구로 돌아가려던 순간, 갇혀 있던 그녀의 방까지 기어 올라왔던 타이오스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여기로 올라와.”
“예?”
디아메데스가 손가락으로 창을 톡톡 두드렸다. 당황한 듯한 얼굴에 싱긋 웃었다.
“싫어?”
남자가 높이를 가늠하듯 시선을 아래위로 움직였다.
“아, 아닙니다.”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 창틀은 타이오스가 올라왔던 것보다 훨씬 낮았다. 몇 번만 기어 올라오면 될 정도로.
그녀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커다란 손이 돌벽의 틈을 꽉 움켜쥐었다. 기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창틀로 몸을 끌어올렸다.
디아메데스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남자의 옷깃을 끌어당기고 입을 맞췄다. 헐떡이는 숨소리에 금세 흥분이 뒤섞였다.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은 그가 정신없이 혀를 얽고, 입 안을 휘저었다.
“하아. 읍…….”
“하…….”
끈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성급하게 디아메데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긴 그가 부드러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조금 세게 살덩어리를 움켜쥔 남자가 아직 말랑한 젖꼭지를 문질렀다.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가는 목덜미를 더듬은 남자가 쇄골을 지나 가슴 위에 입을 맞췄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그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움켜쥐었다.
“아, 타이오스.”
입술 사이로 동생의 이름을 속삭였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타이오스를 떠올렸다. 디아메데스의 몸이 잘게 떨리며 잔 신음을 토해냈다.
***
디아메데스는 거울 앞에 서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쩐지 배가 좀 나온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그 위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사 말로는 임신이 맞다고 했지만 달리 변화가 없어서 그런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조금 피곤한 것을 제외하면 놀랍도록 임신의 증상이 나타나질 않았다. 흔하다는 입덧 한 번도 없었으니까. 배 위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백금발이 어깨 위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아이가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듯 이리저리 몸을 틀어가며 거울에 배를 비춰 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디아메데스.”
일리온의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레이가 떠난 난 이후로 처음 나누는 대화였다. 그동안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눈 한번 마주친 적이 없었다.
“…….”
디아메데스는 가운을 걸쳤다. 타이오스에 대해서는 ‘데려오겠다’는 말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임신한 걸 들키진 않았을 텐데.’
정말 임신한 걸 알고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을 게 분명했다. 타이오스와의 관계 이후에 약을 먹였던 것처럼. 가운의 끈을 느슨하게 맨 그녀는 문을 노려봤다.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일리온이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그 말에 문이 열리고, 피곤한 얼굴의 아버지가 들어왔다. 그는 가운 하나만 걸친 몸을 훑더니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옷차림에 대해서는 달리 뭐라고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일리온은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앉아.”
“…….”
디아메데스가 맞은편에 풀썩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말하면 패배하는 싸움이라도 하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긴 손가락이 소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그랬던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그래서인지 먼저 입을 연 건 일리온이었다.
“결혼해라, 디아메데스.”
“같은 일을 또 반복하고 싶으신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을 남자를 골라.”
“제가 정숙해지는 것이 더 간단할 텐데요.”
“정숙?”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그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게 우스운 소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입매가 타이오스를 닮은 남자와 뒹굴지 않았던가. 디아메데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약속할게요.”
“무엇을 말이냐.”
“타이오스를 준다면 더 이상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다고요.”
“하.”
짧은 한숨을 내쉰 일리온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남자와 똑같군.”
“…….”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양 말하는 게 똑같아.”
그렇게 비틀린 표정을 짓는 아버지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어느 게 싫으신 거예요?”
“내가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니?”
“저희가 남매라서 싫으신 거예요. 아니면 ‘아버지’의 아이가 ‘다른’ 아이의 손에 떨어지는 게 싫으신 거예요?”
“넌 내 딸이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디아메데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진심이었다. 그러길 바랐다. 그래야 타이오스와 완벽히 ‘같은’ 피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확인할 방법 따윈 없겠죠.”
일리온과 조금이라도 ‘다른’ 부분이 있다면 확신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의 모든 것은 키레네에게서 받은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태어난 아이를 보고 안심했을까. 아니면 불안했을까. 친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품고, 사랑하는 아내를 꼭 닮은 딸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적어도 제 속에 있는 건 아버지의 말대로 ‘그’를 더 닮은 것 같네요.”
라스카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혼하면 타이오스를 데려오마.”
“영지민이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디아메데스!”
“저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일리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네 손이 깨끗하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랑한 것이 죄인가요?”
“사랑? 너는 사랑한 적 없어.”
그가 피식 웃었다.
“아니. 사랑 따윈 할 수도 없지.”
“…….”
“어차피 타이오스 역시 네 ‘재미있는’ 장난감일 뿐이잖니.”
“그 무엇보다 손에 넣고 싶은 것이기도 하죠.”
“그건 사랑이 아니야.”
“제가 동생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진짜예요.”
결국은 평행선이었다. 타이오스가 아니면 필요 없다고 하는 디아메데스와 동생만은 안 된다고 말하는 아버지. 합의점 따윈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배 위에 손을 얹었다. 튀어나오려는 말을 애써 참아냈다. 이제 한두 달만 더 버티면 말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내가 이길 게임이야.’
타이오스의 아이를 가진 시점에서, 일리온의 계획이 실패한 그 순간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동생의 아이를 가졌다는 얘기는 금방 퍼져 나가리라. 모두 디아메데스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니까. 그가 어디에 있든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파혼 소식도 알려졌을 거고.’
안심하고 있을까. 아니면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웃을까. 그녀는 일리온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타이오스와 닮은 눈매를 제외하면 다른 부분은 동생과 좀 달랐다.
“……끝까지 이럴 셈이니?”
“끝까지 이러실 거예요?”
디아메데스는 지지 않고 되물었다.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다른 결혼 상대를 알아보마.”
“그럼 정말 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사람을 알아보셔야 할 거예요.”
“…….”
“불쌍한 남자를 하나 더 만들 수는 없잖아요.”
디아메데스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리온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일어서서 방을 나섰다. 그녀는 배웅하는 대신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묻었다.
“하아.”
긴 한숨을 토해냈다. 한 달 정도만 더 참자.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고, 배 위를 문질렀다.
그날로부터 10일 정도가 지나자 또 한 남자가 찾아왔다. 좋게 말해 순하고, 나쁘게 말해 물렁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라스카 소후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그의 눈빛은 이미 사랑에 흠뻑 빠져 있는 상태였다. 감흥 따윈 없었다. 디아메데스는 입술을 떼는 것조차 잊은 남자에게 싱긋 미소 지었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한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얘기로 들은 것보다 훨씬…….”
수천 번도 더 들었던 지겨운 말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그 얘기를 한 귀로 흘린 디아메데스는 레이에게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사실이에요.”
“예?”
“저에 대한 얘기, 전부 다 사실이라고요.”
그 말에 남자의 표정이 약간 흐려지더니, 이내 미소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디아메데스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버지가 어디까지 말했을까. 동생과의 일까지? 아니면 거기까진 차마 말하지 못하셨나.
“결혼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달라질 거라 기대하진 않습니다.”
정말로 그녀의 ‘모든’ 것을 감당할 생각인 걸까. 배 속의 아이까지?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한 디아메데스가 쿡쿡 웃었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다른 남자와의 ‘놀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말은 그렇게 하죠.”
하지만 결혼한 상대는 또 다르지 않은가. 단순히 한번 몸을 섞는 것과 결혼이라는 계약으로 맺어진 건 또 다른 얘기였다.
“누구 한 명이 손에 넣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분이시니까요.”
다른 남자. 그것도 동생의 아이를 가진 여자라 해도? 디아메데스는 말없이 싱긋 미소 지었다.
“아버지께서 어디까지 말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알아야 하는 것들은 충분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동생과 관계를 가진다는 것도요?”
라스카 후작가의 치부와도 다름없는 얘기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역시나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는지 남자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어야 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저는 타이오스를 원해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나와 결혼하고 싶은가요?”
“……당신과 함께한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순간, 디아메데스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 버렸다.
“그 생각 변치 않길 바라요.”
그녀의 입술 위에 뒤틀린 웃음이 가득 떠올랐다.
***
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레이가 떠나기 전까지 결혼식 준비는 계속되고 있었으니 벌써 절반쯤 진행된 것을 이어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날짜는 생각보다도 더 빨리 잡혔다.
디아메데스는 여느 때와 같이 지냈다. 그러니까, 타이오스와 닮은 남자들을 수도 없이 다리 사이로 끌어들였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단 말이지.’
정말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생각인 걸까.
‘그럴 리가 있나.’
이미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는 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남자가 어디 한둘이었나. 이미 레이 아이기아라는 실패한 인간이 본보기로 있으니 어떻게든 지금 당장만 참아 넘기려는 일이라는 것에 배 속의 아이를 걸어도 좋았다.
결혼하고 나면 본성을 드러낼지도 모르지.
디아메데스는 거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새하얀 드레스의 치수를 다시 맞춰보던 하녀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허리 부분을 조금 더 늘려야겠네요, 디아메데스 님.”
“넉넉하게 해줘.”
앞으로 치수가 더 늘어날 테지. 하얀 드레스가 다시 벗겨졌다.
결혼까지 이제 2주. 아이를 이제 배 속의 아이는 5개월 정도 되어 가고 있었다. 임신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밋밋하던 배도 살짝 부풀어 오른 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가운을 다시 입은 디아메데스는 바로 드레스를 수선하고 있는 하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좀 더.”
“네?”
“더 느슨하게 해.”
“하지만…… 그러면 헐렁해서 안 예쁠 텐데요, 디아메데스 님.”
“괜찮아.”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조금 더 느슨하게 늘렸다. 2주 뒤 결혼식이라니. 아이가 생긴 지도 이제 5개월 정도니 거의 반년을 타이오스와 떨어져 지낸 셈이었다.
‘어디에 있는 걸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디아메데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식 날에 모든 것을 밝힐 생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든 것을 말이다.
***
타이오스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 모여 있는 수많은 여자들이 하나같이 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당히 다가와 친한 척해 대는 남자들까지.
“타이오스. 라스카 소후작께서는 사교계에 나올 생각이 없으신 거야?”
“결혼 소식이 들려오긴 하던데.”
“원래 귀부인들이 더 영향력 있는 법이니까.”
“라스카 소후작의 결혼 여부가 그리 중요하겠어.”
모두들 그의 누나에 대해서만 떠들어댔다.
‘수도까지 시끄럽게 만드는 여자일 줄이야.’
그냥 후작저 근처에서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수도에도 디아메데스에 대한 얘기가 퍼져 있었다. 심지어 누가 가져온 건지 모를 초상화의 복제품이 시장에 떠돌았고, 타이오스가 나타나자마자 모두들 그 초상화를 들이밀면서 정말 이만큼이나 아름답냐고 물었다.
물론, 그림 따위에 누나의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는 없었다. 그의 대답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대꾸하는 사람도 있었고, 벌써부터 사랑에 빠진 듯이 구는 남자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수도에 보내고 일 년만 있으라 말했다.
‘분명 다른 여자를 만날 거라 생각하신 거겠지.’
그 생각대로 수도에는 정말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아름답다’는 게 얼마나 큰 무기가 될 수 있는지 타이오스도 잘 알았다. 그리고 그 역시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다가왔다. 미혼인 여자뿐만 아니라 이미 결혼한 귀부인들까지도.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누군가를 눈에 담을 때마다 누나가 떠올랐다. 그 웃음. 부끄러운 듯 뺨을 발갛게 붉히는 순진한 아가씨의 웃음에 난잡하기 짝이 없는 디아메데스가 생각났다.
더러운 여자. 제 동생과의 잠자리도 꺼리지 않는 음란한 창녀.
“타이오스.”
한 여자가 떠밀리듯 그의 앞에 섰다. 이미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잘게 흔들리는 청회색의 눈동자에 새파란 누나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타이오스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니 여자가 입술을 달싹이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드레스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가 화들짝 놀라 애써 구겨진 부분을 편 그녀가 다시 용기를 낸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추, 춤 추실래요?”
주변에서 탄식인지 부러움의 감탄인지 모를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타이오스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간절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영광입니다.”
손을 내밀자 얼굴이 새빨간 아가씨가 달달 떨리는 손을 그의 손 위에 얹었다. 이렇게 경련하다가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고마, 워요.”
더듬거리는 여자와 함께 홀 중앙으로 나간 타이오스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필요 이상으로 바짝 달라붙은 그녀에게서는 조금 짙은 꽃향기가 났다. 좋은 향기였지만 냄새를 들이마실수록 디아메데스의 옅은 살냄새가 그리워졌다. 향수처럼 달착지근하거나 짙진 않지만 중독되는 듯한 그 냄새.
타이오스는 배운 대로 무심히 스텝을 밟았다. 얼굴이 새빨간 아가씨는 쉴 새 없이 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시선을 홱 돌렸다가 다시 흘깃 바라본다. 그게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라스카 소후작께서 곧 결혼하신다던데요.”
또 그 얘기였다.
“그런가요.”
“소후작님과 그리…… 친하진 않으신가 봐요.”
“…….”
친하다? 그런 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친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타이오스는 디아메데스와 사소한 얘기를 나누거나, 붙어 다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몸은 섞었다. 그것으로는 ‘친하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누나가 몸을 섞었던 남자들과 친하지 않은 것처럼.
‘일회성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타이오스는 결국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지 못할 관계였다. 말해서도 안 되는 관계였고.
여자는 대답 없는 남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낭패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된 주제를 고르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안 모양이었다. 타이오스는 가슴에 살짝 기대 오는 여자를 굳이 밀어내진 않았다.
그렇게 한 곡이 겨우 끝나고, 제자리에 여자를 데려다준 그는 다시 다가오는 사람들을 슬쩍 피했다.
‘결혼이라.’
이곳으로 내려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한다는 얘기가 한번 돌았다. 레이 아이기아 소후작이라 했던가. 그 순간, 타이오스는 아버지의 경고도 잊고 다시 후작저로 달려가려고 했다.
디아메데스의 결혼이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떠나오기 직전 함께 잠자리를 했는데 어떻게 되었을지. 결혼에 대한 누나의 반응이 어떨지.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결국 잘 해결됐잖아.’
그가 어떻게든 수도에서 버티고 있는 동안 디아메데스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결혼을 물렸다. 그 얘기를 들은 순간, 타이오스는 ‘누나다운 방법’이라 생각했다. 질투와 집착에 눈이 먼 남자를 이용하다니. 이제까지 제 목숨을 끊은 남자는 봤어도 남을 죽이려는 남자는 처음이 아닌가.
긴 한숨을 내쉰 그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도 잘 넘어가게 될 거라 믿었다. 디아메데스는 그리 녹록한 사람이 아니니까.
‘일 년만 있으면 돼.’
아버지는 그렇게 약속했다. 일 년만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동안만 누나의 곁에서 떨어져 있는다면, 그다음에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겠다고.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얘긴 아니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떨어뜨리진 않겠다는 뜻이라 해석했다.
물론 그때까지 아버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나를 결혼시키려고 이렇게 동분서주하고 계시지 않나. 타이오스는 발코니에 기대섰다.
“하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벌써 반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만났다. 아름답다고 칭송이 자자하던 귀부인. 청혼하려는 남자들이 줄을 서 있는 예쁜 아가씨. 몸짓 하나, 말 한마디가 매력적인 여자. 권력을 가진 황녀님 등.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누구도 타이오스의 마음이나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어떻게 되어 가는 걸까.’
디아메데스가 보고 싶었다. 여전히 다른 남자와 뒹굴고 있다는 것을 멀리서도 알게 된다는 것이 우습기만 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속이 뒤틀리는 스스로를 알아채고 흠칫 놀랐다.
누나가 그런 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이제 와서 그것으로 기분이 나쁘다는 게 우습기도 했다. 타이오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결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파혼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게 조금 불안했다.
‘지금 당장 가면…….’
결혼식 날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다. 1년간 떠나 있으라던 말을 어기는 셈이지만 이대로 디아메데스가 결혼해 버린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있을 여자는 아니지만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는 걸까.
타이오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그가 떠난 지 5개월.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정말 소문대로 디아메데스의 난잡하기 짝이 없는 사생활을 전부 받아들일 남자가 남편이 될지도 모르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를 감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타이오스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반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의 마음이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누나에 대한 마음만 더 확실해졌다. 이 세상 어떤 여자를 아니, 그 누구를 데려와도 그의 마음을 그녀만큼 흔들 수는 없으리라.
그는 발코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타이오스의 뒷모습이 어두운 정원 속으로 사라졌다.
***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결혼식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깨끗하게 씻은 디아메데스는 이제 조금 티가 나는 것 같은 배 위를 손으로 매만졌다. 하녀 중 그 누구도 그녀의 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넉넉하게 늘려 놓은 허리 부분이 살짝 끼었다. 생각보다 배가 많이 나온 모양이었다.
“차라리 화장을 안 하는 편이 더 아름다우실지도 모르겠네요.”
“으음, 하지만 결혼식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럼 입술만 살짝 칠할까요?”
종알종알 새처럼 떠들어대는 하녀들이 디아메데스의 얼굴 위에 화장품을 얇게 펴 발랐다. 평소 화장조차 거의 하지 않아서 그런지 조금 더 선이 짙어진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오늘 결혼식은 엉망이 될 테니까.
그 말을 속으로 삼킨 그녀는 군말 없이 하녀들의 손에 온몸을 맡겼다. 바깥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물론, 남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름답구나. 디아.”
문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일리온이 키레네와 함께 서 있었다. 디아메데스만큼 화사하진 않았지만 차분한 색의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정말 예뻐, 디아.”
키레네가 다가와서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있으니. 꼭 닮은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내렸다. 일리온이 뒤이어 천천히 다가왔다. 어머니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아버지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믿는다. 디아.”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하세요?”
디아메데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일리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냐.”
“다신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요.”
“네가 하려는 일이 실수라는 걸 잊지 마라.”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제 결혼식 날인데 타이오스는 참석하지 않는 건가요?”
“결혼에는 신부와 신랑만 있으면 된다.”
“하나뿐인 누나의 결혼식이잖아요.”
“타이오스를 흔들지 마라, 디아메데스.”
“그 아이는 제 것이에요.”
“…….”
“어디 있든 말이에요.”
아버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키레네. 나가서 손님을 맞는 편이 좋겠어요.”
“일리온은?”
“디아와 얘기할 게 있어서요.”
“무슨 얘기를 할 건데?”
“라스카 소후작으로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요. 나가 있어요, 키레네.”
그가 부드럽게 웃곤 약간 달아오른 뺨 위에 입을 맞췄다. 키레네가 생긋 웃어 주었다. 정말 여전히 소녀 같은 웃음이었다. 어머니가 나가고 나자 아버지는 하녀들을 내보냈다. 방 안이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점점 멀어졌다.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지?”
디아메데스는 거울 너머로 일리온의 얼굴을 바라봤다.
“결혼식이 기대되지 않으세요?”
“디아메데스.”
“제가 지금 말해 봐야 조용히 덮고 넘어갈 거 아닌가요?”
물론, 동생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어떻게 조용히 덮을지는 모르겠지만. 딸의 목숨이 위험하다 해도 아이를 죽이는 쪽을 택할까. 아니면 목숨을 걸진 않을까. 그게 조금 궁금했다.
그녀는 배 위를 손바닥으로 살짝 문질렀다.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아챈 게 분명했다.
“설마. 아니겠지, 디아메데스.”
“뭘 생각하고 계신데요?”
“…….”
디아메데스가 생긋 웃었다. 일리온이 입술을 꽉 깨무는 게 보였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대답했다.
“지우기엔 오래됐어요, 아버지. 누구 아이인지 아실 테니까 몇 개월이나 되었는지도 알고 계시겠죠.”
대답 대신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할까요.”
“결혼해라.”
“전부 밝힐 거예요.”
“그 아이도 받아들일 거다.”
“동생의 아이라는 걸 알고도요?”
“…….”
“다른 남자의 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죠.”
“다신 타이오스와 만날 수 없을 거다.”
“아니요. 이 소식을 알면 동생이 가만히 있을까요?”
“디아메데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들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
“식을 치르기 전에 조용히 파혼할지 아니면 식을 올리던 도중 파혼할지 아버지가 결정하세요.”
“네 말을 믿을 사람은 없어.”
일리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네가 그동안 잠자리를 함께 한 남자가 한둘이더냐.”
“그동안 한 번도 아이를 가졌던 적은 없죠.”
“다른 남자의 아이다.”
“이것 역시 그렇게 믿고 싶으신 것뿐이겠죠.”
디아메데스는 피식 웃었다.
“제가 아버지 딸이라고 믿고 싶은 것처럼요.”
“…….”
“배 속의 아이가 다른 남자의 아이라고 믿고 싶으신 것뿐이잖아요.”
거울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침묵을 깬 것은 하녀였다.
“후작 각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
“이대로 진행하실 생각이신가요?”
대답 대신 문이 거칠게 닫혔다. 눈치를 슬쩍 보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작 각하와 싸우셨어요?”
“응. 조금.”
“딸을 보내시는 게 아쉬워서 그러시는 걸 거예요.”
“맞아요. 디아메데스 님을 무척이나 아껴 주셨잖아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의 말대로 일리온은 디아메데스를 아주 아껴 주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꼭 닮은 아이였으니까.
‘이젠 모르겠어.’
정말 아버지가 예전처럼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닐 거라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이제 그에게 있어 디아메데스는 자식을 빼앗아 간 뻐꾸기 새끼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물론, 키레네가 낳았으니 절반 정도는 사랑스러우리라.
디아메데스는 하녀들이 떠드는 말에 대답하진 않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손이 그녀의 치장을 마무리해 주었다.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디아메데스는 거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화장한 얼굴이 낯설긴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입 속으로 해야 할 말을 중얼거렸다.
예쁘게 차려입은 하녀 두 명이 길게 늘어진 드레스 자락을 들어 주었다. 화사하게 꾸민 정원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하객으로 온 남자들도, 시중을 들어주고 있던 하인들도 모두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디아메데스는 평소와 같이 모든 시선을 가볍게 흘려넘기면서 신랑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남자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쳐 흘렀다.
“디아메데스.”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 왔다.
‘불쌍한 남자.’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조금 기대되기도 했다. 절망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그것도 아니면 동생의 아이조차 전부 품겠다고 말할까. 디아메데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신관이 천천히 틀에 박힌 주례사를 내뱉었다. 이 결혼에 이의가 있다면 지금 말하라 할 때 입을 열 생각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긴장되나요?”
“……네. 긴장되네요.”
“저도 무척 긴장됩니다.”
같은 이유로 심장이 뛰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럼, 이 결혼에 이의가 있으신 분은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그 말이 들리자마자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디아메데스가 고개를 돌린 순간, 몸이 거칠게 쓰러졌다.
“읏!”
“디아메데스!”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세게 끌어안겼다.
“아!”
익숙한 품이었다. 타이오스의 냄새가 났다. 살짝 고개를 들자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타이오스!”
“괜찮아?”
다급히 그 말을 내뱉은 동생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게 무슨…….”
겨우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레이 아이기아였다. 그의 녹색 눈동자는 광기로 가득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이에게 내어 줄 거라면 차라리 죽여 버리겠어.”
레이의 눈 속에는 디아메데스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동안 사랑이라 말하며 목숨을 버리는 남자는 많이 봤어도 그녀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손에 넣을 수도 있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걸까. 정말로 디아메데스가 자신의 것만 같아서 그래서 가졌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타이오스를 제외하곤 그 어떤 남자도 디아메데스를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난 당신의 것이었던 적 없어.”
이미 반쯤 아니 완전히 미쳐 버린 남자에게 말이 먹힐 리가. 그가 검을 휘둘렀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타이오스의 등이 그녀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길게 찢어진 옷 사이로 커다랗게 난 상처가 보였다. 피 냄새가 났다.
“레이 아이기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다시 한번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상황이 마무리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누나. 괜찮아?”
타이오스가 새파래진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등 뒤로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진 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디아메데스는 동생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여기에 레이가 나타난 것도, 동생이 때맞춰 온 것도 전부 예상 밖이지만,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디아메데스.”
레이가 이를 악물고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그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디아메데스는 바로 그의 눈앞에 멈춰 서서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남자를 경멸하듯 쳐다봤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소식이 있어.”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녹색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누나!”
팔을 세게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살짝 돌아보자 타이오스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며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디아메데스는 싱긋 웃었다. 일리온이 체념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를 가졌거든.”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하객으로 온 사람도, 일하는 사람도, 전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는 몸을 섞은 적이 없으니 아이기아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했으니까.
팔을 붙잡은 손가락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동생의 표정이 뒤틀렸다. 자기 아이일 수도 있다는 희망과 아닐 거라는 절망이 전부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타이오스의 아이야.”
디아메데스의 단호한 말에 침묵이 흘렀다.
“아악!”
레이 아이기아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뭐, 뭐라고요?”
조금 전까지 행복에 겨운 얼굴을 하고 있던 신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타이오스를 돌아봤다. 동생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디아메데스는 남편이 되려던 남자를 돌아봤다.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
“전부 다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
“동생의 아이까지?”
그녀의 입술이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역겹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 위로 떠올랐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사람들 역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타이오스.”
디아메데스는 동생의 옷깃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잠시 머뭇거린 그가 온몸을 세게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