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가출한 올리비아. (19/19)

외전. 가출한 올리비아.

“어? 벌써 떨어져 가네.”

올리비아는 폭 한숨을 쉬었다. 집사님의 명령으로 먹던 사탕이 거의 떨어져 갔다. 매일 챙겨 먹다 보니 유리병 가득 찼던 사탕이 바닥을 보이는 건 금방이었다. 이젠 집사님도 없는데 이걸 어떻게 구해야 할지. 잠시 막막함을 느꼈지만 곧 편하게 생각했다.

레이나 님에게 부탁하면 된다. 레이나 님은 마치 마법사 같았다. 올리비아가 이야기하면 거의 다 들어주는 편이었고, 중요한 건 언제나 친절했다. 어떤 요청을 해도 한 번도 인상을 찡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요즘 올리비아는 부탁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으며 점차 요구가 늘었고, 더 나아가 제 주장을 하는 법을 배웠다.

생각난 김에 부탁해야겠다. 올리비아는 곧바로 설렁줄을 당겼다. 이렇게 사람을 부르는 것도 나름 익숙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나가 찾아왔다.

“부르셨습니까?”

“시녀장님.”

“네, 아가씨. 필요한 것 있으세요?”

그저 불렀을 뿐인데, 필요한 게 있다는 걸 딱 맞추다니. 역시 레이나 님은 대단하다. 그녀는 올리비아가 보아 온 사람들 중에서 에이든 도련님 다음으로 아름답고, 또 우아했다. 백작저의 하녀장님처럼 화내는 법도 없었다. 보면 볼수록 레이나 님은 멋졌다. 올리비아는 오늘도 속으로 레이나 님을 찬양하며 그녀를 부른 이유를 떠올리고 유리병을 내밀었다.

“이것 좀 구해다 주세요.”

딸그락. 몇 개 남지 않은 사탕이 유리병 속에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올리비아의 음성처럼 맑았다.

그래서 레이나는 올리비아의 손에 있는 유리병을 보는 순간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익숙한 물건이었지만, 그걸 보여 주는 상대가 아가씨다 보니 자신이 아는 그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게 뭔가요?”

“전에 집사님이 도련님의 시중을 들 때마다 챙겨 먹으라고 했던 거예요.”

그리고 올리비아의 밝은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이 짐작한 물건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시녀 경력이 몇 년인데 무엇인지 모르겠는가. 특히 아랫사람을 관리해야 하는 레이나는 더욱 잘 알았다. 피임약.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시녀들에겐 하녀처럼 강제할 순 없어서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사용할 일이 생겼다. 자의로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전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니까. 덜컥 사고를 쳐 놓고 후회하는 시녀를 다독이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도 여러 번 해 보았다. 그러니까 저 물건이 피임약인 건 알겠는데, 아가씨가 그걸 왜 먹고 있는지 모르겠다.

레이나는 처음 이곳에 취직하려고 면접을 볼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 왔다. 주인님도 제대로 모셔야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데려올 여인 한 명을 더 정중하게 대접해야 한다고. 그녀가 아무리 이상한 행동을 해도 의아함을 표현하지 말아야 하고, 그저 최선을 다해 정중하게 모셔야 한다고. 공주님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라고. 무례한 태도를 조금이라도 보일 시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엄한 경고를 받았다.

레이나는 오랜 시녀 생활을 해 왔기에 이런 저런 귀족을 다 겪어 봤다.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는 건 자신 있었다. 그래서 믿어 달란 말을 자신감 있게 했고 덕분에 시녀장 자리까지 받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주인님은 멀리 떠났다. 레이나는 한동안 빈 저택을 지키며 편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님이 한 소녀와 돌아왔다. 맑고 순진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여인은 너무 어리고 천진해서 레이나의 눈엔 소녀처럼 보였다. 그런 소녀를 끼고 사는 주인님이 변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그 감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신 계약했던 대로 정중하게 아가씨를 돌봤다. 아가씨가 안쓰러워 더 신경 써 챙겼다.

그리고 아가씨를 잠시만 봤을 뿐인데 면접 때 왜 그런 질문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가씨의 언행이 귀족의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살짝 어수룩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천진한지 스스로 하녀였단 걸 밝히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약은 구석이 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그 뒤로 레이나는 아가씨에게 전담 시녀를 붙이지 않고 직접 돌보았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을 구할 때 최대한 사람을 골랐지만 시녀 중에 주제도 모르고 아가씨를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최대한 아랫사람을 단속했다.

그런 레이나의 노력이 통했는지 다행히 아직까지 아가씨에게 실수하는 이들이 나오지는 않았다. 주인님은 저택 내의 분위기에 만족했다. 그래서 평화로운 나날인 줄 알았는데, 이런 복병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레이나는 해맑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가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게 뭔지 알고 챙겨 드신 건가요?”

“그냥 집사님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어요. 계속 챙겨 먹으라고 하셨는데 떨어져서요.”

레이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가씨가 해맑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반쯤은 이런 답을 예상하긴 했었다. 주인님이 아가씨가 원하는 것은 전부 들어주라고 말했지만 어쩐지 이건 들어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네. 구해 보겠습니다. 그것 좀 주시겠습니까? 그래야 똑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레이나는 우선 친절하게 답했다.

“얼른 구해 주셔야 해요?”

올리비아는 의심 없이 남은 피임약을 건네주었다.

“서둘러 보겠습니다.”

그걸 받아 들고 레이나는 곧장 주인님을 찾아갔다.

“주인님 아가씨가 구해 달란 물건이 있습니다.”

“구해 주면 되지. 뭐가 문제야?”

갑자기 찾아와 레이나가 말을 건넨 걸 에이든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올리비아가 원하면 챙겨 주면 되지. 그걸 왜 묻고 있냔 말인가. 그런 신경질적인 반응에 레이나가 재빨리 말했다.

“아가씨가 구해 달라는 물건이 피임약입니다.”

“……뭐?”

에이든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피임약? 거기서 그게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그 의미의 피임약?”

“네. 꽤 오래전부터 드시고 계셨던 거 같았습니다. 여기.”

에이든은 레이나가 건네는 병을 받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유리병 속에 몇 개 남지 않은 피임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잔인하게도 맑은 소리였다.

그동안 그 노력을 했었는데 임신이 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걸 여태껏 올리비아가 먹고 있었다니. 지금에서야 알게 된 상황에 허탈하기까지 했다.

사실 에이든은 아이를 반쯤 포기했었다. 백작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열렬하게 노력했다. 온 정을 쏟아부어 올리비아가 임신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광란의 밤을 계속 보냈음에도 올리비아의 임신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아이가 생겨도 열댓 번은 생겨야 할 만큼 음란한 밤이 이어졌었다. 올리비아의 몸속을 정액으로 절여 버리듯 사정하고 또 사정했었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매번 한계까지 쏟아부었지만 끝내 올리비아의 임신 소식이 없었고 에이든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물론 심적인 변화가 가장 커서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예전엔 올리비아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그렇게라도 잡고 싶어서 절실했던 거고. 지금은 올리비아가 자신을 좋아하니 예전만큼 그런 초조함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순수하다. 그래서 에이든을 좋아하고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알린 뒤로 올리비아는 세상에서 에이든이 제일 중요한 사람처럼 굴었다. 에이든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올리비아의 태도에 에이든은 당연히 안도할 수 있었고, 아이가 없으면 없는 대로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완전히 마음을 놨다. 문제가 있어서 임신은 불가능하구나, 하고 넘겼다.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자신의 문제였다. 의지 새끼가 하찮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자신이 씨 없는 수박이었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올리비아는 그 자체로 완벽하니 그녀의 문제일 리는 절대 없었다. 올리비아의 단점이라고 해 봤자 살짝 멍청한 구석이 있단 거지만, 그것마저 귀여워서 사랑스러우니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여튼 이젠 올리비아의 사랑을 얻었으니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아이가 없으면 없는 대로 둘이서 계속 신혼 생활을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뭐? 피임약?’

“피임약을 먹고 있었다고!”

에이든이 버럭 소리를 치며 일어서자 레이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오래 모신 분은 아니지만 이럴 때의 주인님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건 잘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에 안도했다.

다만, 주인님의 반응이 예상보다 더 격렬해 전에 있던 저택의 집사님이 챙겨 주었다는 말을 전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짐작은 했지만 매우 격한 반응이었다.

레이나는 아까 아가씨가 부탁했을 때부터 불길함이 느껴졌었다. 자신이 아는 주인님은 절대 아가씨가 피임약을 먹도록 할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리 몸에 이상이 없고 맛있도록 연금술로 잘 만든 약이지만 주인님이 아가씨가 약을, 그것도 피임약을 꾸준히 먹도록 내버려 둘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에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자기도 모르게 올리비아가 피임약을 홀랑 집어 먹었단 사실에 분노했다.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에이든은 올리비아를 쫓아갔다.

최근 올리비아는 시간만 나면 침실에서 뒹굴거렸다. 그렇게 게으름을 부리는 모습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오늘은 분노의 에이든이었다. 침실 문을 열자 해맑은 얼굴을 하고 누워 있던 올리비아가 보였고, 그 천진한 꼴을 보니 에이든은 더 열이 올라 버럭 외쳤다.

“올리비아!”

“네?”

에이든의 격한 부름에 올리비아가 놀라 답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람을 드러내는 얼굴에 화를 삭여야 한단 걸 떠올렸지만 에이든은 오랜만에 찾아온 분노를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너 이거 뭐야? 이거 계속 챙겨 먹었어? 왜!”

에이든이 버럭 외치면서 내민 병을 보며 올리비아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들이닥쳐 왜 화를 내냐는 겁먹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급해진 에이든은 올리비아를 달래 줄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손에 든 병을 흔들며 답을 재촉했다.

“이거 왜 먹었냐고!”

달그락 달그락. 유리병 속에서 사탕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격렬하게 울렸다. 올리비아는 그게 레이나 님에게 줬던 사탕병임을 확인했다. 저걸 왜 저렇게 무섭게 흔드는지 모르겠지만 에이든 도련님이 화난 건 확실했다.

“……집사님이 챙겨 먹으라고 해서요.”

올리비아는 울먹였다. 잔뜩 겁을 먹은 얼굴은 진솔했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하긴 올리비아가 자의로 피임약을 찾아 챙겨 먹을 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잭슨이 먹으라고 하니 아무 의심 없이 먹었겠지.’

에이든은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잠자리를 편하게 하라고 향유까지 쥐여 줄 정도니 당연히 잭슨이 이런 짓을 할 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에이든은 씩씩거리며 분노를 곱씹었다.

그래도 올리비아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다. 먹으란다고 그걸 홀랑 받아서 그렇게 열심히 챙겨 먹었단 말인가. 거의 비어 버린 병을 보니 더 화가 났다. 이 많은 걸 먹었다고 생각하니 열이 났다. 그동안 이 사실을 몰랐던 상황이 답답하고 비참해서 에이든은 소리쳤다.

“이거 먹지 마! 앞으로 절대 먹지 마! 알겠어?”

올리비아는 오랜만에 날벼락을 맞는 느낌이었다. 최근 에이든 도련님은 굉장히 다정하셨다. 시도 때도 없이 웃어 줬고, 계속 예쁘다 말해 줬고, 또 좋은 것만 주고 기분 좋은 행동만 해 줬다. 그래서 에이든 도련님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와서 이렇게 화를 내시다니. 레이나 님에게 드렸던 사탕병이 왜 에이든 도련님한테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것 때문에 혼나고 있단 건 잘 알았다.

‘난 집사님 말씀을 들은 것뿐인데…….’

올리비아는 서러운 감정을 억누르고 답했다. 에이든 도련님이 화를 내니 어쩐지 더 울컥했다.

“……네.”

그런 올리비아의 서운한 감정을 읽은 에이든은 나름 속이 탔다.

‘지금 누가 더 서운한데! 나도 서운해!’

버럭 외치고 싶지만 올리비아의 눈가가 촉촉해져서 에이든은 이마를 감싸 쥐어야 했다. 여기서 올리비아가 울어 버리면 더 속상한 건 자신이니까. 나직하게 한숨을 몰아쉬며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확인하니 올리비아가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참고 있었다. 뚱한 뺨과 그렁그렁한 눈물이 툭 건드리면 참지 못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저 모습은 또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

에이든이 올리비아에게 계속 화를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기분은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올리비아.”

그 기분을 나타내듯 에이든의 목소리는 말랑거렸다. 하지만 이미 서러움과 두려움이 가득한 올리비아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네.”

그 서운함이 남은 목소리에 에이든은 손을 내밀었다.

“화내서 미안해. 이리 와.”

많이 서운했었는지 올리비아는 그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무룩해져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 에이든은 한숨을 흘렸다. 설렁줄을 당겨 밖에 대충 상황이 끝났음을 알리고 올리비아의 옆에 앉았다.

“올리비아, 이리 와. 응?”

다시 부르자 올리비아가 그제야 슬금슬금 움직여 에이든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에이든은 그 손을 냉큼 잡으며 올리비아를 당겼다. 못이기는 척 기대 오는 올리비아를 끌어안았다. 에이든은 얌전히 안기는 올리비아의 등을 쓸었다.

“화내서 미안해.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실수했어.”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고개도 들지 않고 올리비아가 사과를 했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반사적으로 사과하는 게 속상했다. 그리고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걸 보니 아직 올리비아의 기분이 풀린 것 같지 않았다. 에이든은 축 처진 올리비아의 어깨를 쓸었다.

그렇게 잠시 있자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레이나가 안쪽의 동태를 살폈고 마침 기다리고 있던 에이든은 얼른 들어오라고 고갯짓했다. 레이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들어와 들고 온 케이크 접시를 에이든에게 건네고 다시 조용히 사라졌다.

올리비아가 저택에 온 후로 두어 번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레이나도 익숙하게 대응했다. 에이든은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얼굴을 보여 줄 생각을 하지 않는 올리비아를 달랬다.

“우리 케이크 먹을까?”

케이크 소리에 움찔한 올리비아가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직 서운함이 가득 묻어난 얼굴이었다. 그래도 울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눈가를 확인하고 안도하며 포크로 케이크를 떠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자, 먹자.”

“아.”

올리비아가 작게 입을 벌려 에이든은 얼른 포크를 밀어 넣었다. 올리비아가 케이크를 받아먹고 우물거리는 걸 확인하고 다시 포크로 케이크를 떴다. 그리고 다시 올리비아의 입가에 포크를 가져갔다. 또 벌어지는 작은 입에 케이크를 넣어 주자 확실히 처음보다 올리비아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에이든은 안도하며 케이크 떠 주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올리비아에게 케이크 한 접시를 다 떠먹여 줄 때쯤, 그녀의 표정은 언제 서운했냐는 듯 행복함으로 가득 찼다.

“케이크는 언제 먹어도 맛있어요!”

다시 해맑게 동동거리는 올리비아를 보며 에이든은 미소 지었다. 올리비아의 단순함이 이럴 땐 참 도움이 되었다. 에이든은 귀여운 올리비아의 뺨에 쪽 입을 맞추며 이 상황이 정리된 것에 안도했다.

* * *

그렇게 올리비아의 기분은 풀어 줬지만, 사실 에이든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이해를 해야 하는데, 그러고 한편으로 이해는 하는데, 감정적으로 불쑥 화가 났다. 처음에 잭슨의 명령으로 피임약을 먹은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저택으로 와서도 계속 먹었단 사실이 화가 났다.

“올리비아가 피임약인 건 알고 먹긴 한 건가?”

“글쎄요. 그건 그분만 알겠죠.”

케일럽이 무성의하게 답했다. 에이든은 그조차 의문이었지만 차마 올리비아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 워낙 멋대로 화를 내 버려서 달래 주는 데 급급했고, 이제 와서 다시 이야기를 꺼내자니 기껏 풀어 놓은 올리비아의 기분이 도로 나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에 대해 전부 다 아는 줄 알았다. 워낙 숨기는 게 없는 사람이라 문제 따위는 없을 줄 알았다. 올리비아가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 못할 걸 생각도 못했다. 그동안 이런 사각지대가 있었다니.

‘올리비아의 하루를 전부 보고받을 수도 없고.’

에이든은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또 씩씩거렸다. 그런데 정말로 올리비아가 뭔지 알고 먹은 건 아니겠지? 그렇다는 상상만으로도 상처받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는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길 거란 생각을 하긴 하나?’

한 번도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까 봐 그것도 걱정이다.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는 우리 사이가 뭐라고 생각할까?

‘설마 아직도 도련님과 하녀인가?’

불안하지만 올리비아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게 맞을 것 같았다.

‘아니, 서로 좋아한다고 마음을 고백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아직 도련님과 하녀지?’

이젠 예전과 달리 같은 침실도 썼다. 매일 밤 안고 같은 침대에서 잠든다. 호칭도 도련님이 아니라 에이든으로 바뀌었다. 늘 거절하던 선물도 요즘엔 넙죽넙죽 잘 받았고. 에이든 입장에선 귀여운, 하지만 올리비아 입장에선 엄청난 사치도 부리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도 스스로가 하녀라고 생각하나?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올리비아를 생각하면 그게 맞을 것 같았다. 에이든은 다시금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오랜만에 욕설을 내뱉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한참을 시근대던 에이든이 버럭 외쳤다.

“착각하지 않게 만들면 되지!”

“그게 가능합니까?”

에이든의 지근거리에 머무는 케일럽이라 모든 상황을 다 알았다. 에이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씩씩대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케일럽도 에이든과 비슷한 생각의 흐름을 가졌다. 에이든의 저 외침은 보나마나 올리비아가 착각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건데.

올리비아는 직접 말해 줘도 모를 것 같았기 때문에 케일럽은 물었고 에이든은 웃었다. 엄청 어려운 일 같지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올리비아가 착각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되니까! 올리비아에게 다른 신분을 주면 되니까!

“당장 올리비아와의 결혼식을 준비해!”

그렇게 되면 올리비아의 공식적인 신분은 에이든의 부인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왜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결혼하고 나면 이제 걱정할 일 없을 것이다.

‘설마, 결혼까지 해 놓고 자신이 하녀라고 우기진 않겠지.’

에이든은 자신이 떠올린 기발한 생각에 신이 났고, 케일럽은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이 일을 만드는 상사 놈 때문에 신경질이 났다. 언젠가는 기필코, 저 하찮은 상사한테 좌절감을 심어 주리라 굳게 다짐하면서 요즘 결혼식은 어떻게 하는지를 떠올렸다. 입으로 툴툴대는 것과 다르게 케일럽은 근면 성실한 부하였다.

* * *

올리비아는 최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의 일이 기억에 너무 강하게 남았다. 아무리 케이크를 먹어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도련님 앞에선 괜찮은 척했지만 이상하게 이번 일은 많이 서러웠다. 그렇게 다그치듯 혼낸 건 처음이어서 그랬던 것 같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집사님 말씀 들은 것밖에 없는데. 집사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혼나는 건 난데…….’

그런 걸 몰라주는 도련님한테 서운했다.

“아가씨 외출하고 싶은 생각 없으십니까?”

문득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올리바아는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난간 너머로 자카르와 라토리가 기웃거리고 있었다. 1층 테라스에서 간식을 먹고 있던 터라 외부에 있는 그들이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말을 건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들은 백작저에서부터 따라온 귀찮은 존재였다. 매번 이렇게 올리비아에게 외출하자고, 자신들의 고향에 가 보자고, 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냐고 늘 물었다.

“관심 없어요.”

딱 잘라 말하고 올리비아는 일어섰다.

“아가씨!”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아가씨 저희 고향은 정말 좋습니다! 바람만 쐬고 옵시다!”

그들은 끈질기게 매달렸고 올리비아는 결국 단호하게 외쳤다.

“안 가요!”

처음엔 거절도 부담스러웠지만 이젠 익숙해졌다. 매번 똑같은 말을 들으니 올리비아도 거리낌 없이 거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에이든 도련님이 저들이 저택에 머무는 걸 허락하기는 했지만, 올리비아 혼자 있는 방엔 접근하진 말라고 해서 그들은 안에 있으면 귀찮게 굴지 않았다.

“아가씨!”

창문을 닫자 자카르의 절규가 창문에 막혀 줄어들었다. 올리비아는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무릎을 접어 팔로 끌어안았다. 기분이 우울할 때 이렇게 웅크리고 있으면 조금 나은데, 오늘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사님 말씀을 들은 게 그렇게 혼날 일인가 싶었다. 갈수록 가슴이 더 답답해지는 것 같다. 도련님을 좋아하는 만큼 서운함도 점차 커져서 큰일이었다. 숨 막히는 기분이라 결국 올리비아는 일어섰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좀 걸으면 나을까 싶어서 나온 터였다. 그렇게 천천히 저택 내부를 배회하던 중 하녀들이 열심히 물건을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계절 갈이 할 때처럼 엄청난 물품이 들어와 다들 정신없어 보였다. 아직 다음 계절을 준비하기엔 이른데 무슨 물건을 이렇게 많이 들여올까? 올리비아는 갸웃하며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히 돌아가기로 했다. 그때였다.

“아우, 무슨 물건이 이렇게 많이 들어와?”

“너 그 이야기 못 들었어?”

한 하녀가 작게 투덜거리자 다른 하녀가 슬그머니 속삭였다. 그 은밀한 신호에 다른 하녀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뭔데?”

“주인님 결혼하신대.”

“뭐? 진짜?”

“쉿! 쉿! 조용히 해. 비밀이라고 하니까 공식 발표 있을 때까지 모른 척해.”

정보를 건넨 하녀가 소리치는 하녀를 단속하며 두 사람은 함께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두 하녀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올리비아는 충격으로 굳어 버렸다. 주인님이 결혼하신다니? 저 사람들이 말하는 주인님이라면 에이든 도련님 아닌가.

‘에이든이 결혼한다고?’

올리비아는 어제도 에이든 도련님과 함께 잠들었지만 그런 말을 들은 적 없었다. 그 큰일을 왜 자신에겐 말해 주지 않은 걸까? 그리고 이상하게 가슴이 턱 막혔다. 아까보다 더 심하게 서러움이 몰려왔고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눈에 힘을 주느라 몸에 힘을 줘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자리에 더 있어선 안 될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몸을 돌렸다. 방금 들은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이런 기분으로는 침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만의 공간인 보물 창고로도 갈 수 없었다. 에이든 도련님의 결혼할 상대가 오면 전부 내주어야 하니까.

올리비아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예상하긴 했었다. 도련님은 귀족이니까 제대로 된 귀족 여성과 결혼하는 게 당연했다. 그때까지 시간이 조금 더 남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에이든이 며칠 전에도 그렇게 화를 낸 걸까?’

전에 백작저에 머물 때 캐서린 언니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에이든 도련님이 무턱대고 화를 낸 적 없냐고. 올리비아는 없다고 말했다. 당연히 없을 일이라고 생각했고 정말 그럴 줄 알았다.

그리고 뒤늦게 그때 그 물음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귀족이 하녀를 상대하다가 질리면 그럴 수 있다는걸. 더 상대하기 싫다고 대놓고 말하기 뭐하니까 그냥 눈치껏 떨어지란 의미로 화내기도 한다는걸. 그걸 알았을 때만 해도 올리비아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에이든 도련님이 자신에게 화내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계속 좋아한다고 말해 주셨으니까.

하지만 며칠 전 그 일은 이상했다. 그렇게까지 혼날 일이 아닌데 혼났다. 바로 달래 주시긴 했지만 처음 보는 격하게 화내는 모습이었다. 계속 마음에 남을 정도로 무섭게 화를 냈었다. 그리고 오늘 도련님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나니 다시금 캐서린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며칠 전의 화는 그런 의미였던 것일까?’

그러자 기운이 쭉 빠졌다. 올리비아는 이젠 에이든 도련님과 떨어진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갈수록 에이든 도련님이 더욱더 좋아져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그런 의미이면 어떡하지? 알아서 도련님을 피해야 하나? 그건 싫었다. 그냥 에이든 도련님 옆에 계속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도련님이 다른 사람과 행복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야지. 앞으로 케이크도 먹지 않고, 최대한 조용히 지내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도련님도 떨어지라고 화내지 않겠지?

그렇게 터덜터덜 걷다 보니 올리비아는 건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저택 내부는 어쩐지 다른 사람의 공간이 된 것 같아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나오셨군요. 아가씨, 외출 생각은 없으십니까?”

“너무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자카르와 라토리가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가깝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아까보다 더 이들의 말을 듣기 싫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만 좀 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강하게 외치고 말았다. 올리비아의 날카로움에 두 사람은 즉각 반응했다.

“그만합니다!”

“죄송합니다!”

자카르와 라토리가 서로 몸을 붙이며 올리비아의 눈치를 봤다. 이렇게 날카롭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두 덩치 큰 남자가 서로의 손을 잡고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꼭 하녀장님한테 혼나기 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이들이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어려워하는 건 확실했다. 다 큰 성인이 그렇게 눈치를 보는 모양새가 썩 좋지 않아 올리비아는 더 화내지도 못했다.

“저 오늘 기분이 안 좋아요.”

“……그래 보이십니다. 그저 바람을 쐬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실까 해서 나섰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카르가 허리를 숙여 가며 말했다. 저렇게 정중하게 말하니까 올리비아는 괜히 미안해졌다. 기분이 나쁘다고 다른 사람한테 화풀이한 꼴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이들은 잘못한 게 없는데 나쁜 짓을 했다.

올리비아는 미안해서 한숨을 내쉬다가 계속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신경 쓰여서 그들이 좋아하는 외출을 제안했다.

“그럼, 잠깐 나갔다 올까요?”

“그러시겠습니까?”

순식간에 자카르의 얼굴이 밝아졌다. 옆에서 라토리 역시 기쁜 얼굴을 했다. 그 솔직한 모습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깐 나갔다 와요. 제 방에서 돈주머니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그리고 레이나 님에게 외출한다고 말씀도 드려 주세요.”

기왕 나가기로 한 거 제대로 놀고 오기로 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외친 라토리가 후다닥 건물로 들어갔다. 나간다고 하니 들뜬 듯 자카르도 어깨를 들썩이며 얼굴에 싱글벙글 미소를 달았다. 사실 이들은 유독 외출을 좋아했고 그만큼 저택 내부에 머무는 걸 답답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들이 밖에 나가는 건 올리비아가 외출할 때뿐이었다. 올리비아와 함께하는 게 아니면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더 올리비아에게 외출하자고 조르는 부분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올리비아는 굳이 외출할 필요가 없어서 잘 나가지 않는 편이었다. 백작가에 살던 때처럼 허락받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올리비아는 딱히 나가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택 내에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여기 있습니다!”

밝은 얼굴로 뛰어나오는 라토리의 양손에 모두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주머니가 맞는데 다른 하나는 뭘까? 그런 의문을 떠올리기 무섭게 라토리의 뒤로 그의 동료들이 보였다.

“아가씨, 외출합니까?”

“아가씨 우리 어디 갑니까?”

나간다고 하니 우스카와 무카도 신나서 우르르 따라온 모양이다. 하긴 외출한다고 했을 때 빠지는 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네. 외출해요. 그런데 그건 뭐예요?”

올리비아가 처음 보는 주머니를 가리키며 묻자 라토리는 씩 웃었다.

“외출한다고 하니 시녀장님이 챙겨 주셨습니다. 맛있는 거 사 먹으랍니다!”

이렇게 레이나 님이 돈을 더 챙겨 준 게 처음은 아니라서 올리비아도 같이 웃었다. 그녀가 외출하면 켈타족 일행이 전부 따라붙었고 그래서인지 레이나 님은 꽤 넉넉하게 용돈을 챙겨 주셨다.

“그걸로 우리 맛있는 거 사 먹어요.”

올리비아의 말에 켈타족이 환호했다. 그들은 정문을 무리 없이 통과해 외부로 나섰다. 켈타족이 올리비아를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다시피 했고 그들 자체로 훌륭한 호위였기 때문에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마음껏 외출하도록 내버려 뒀다.

이곳에서 처음 외출했을 때, 올리비아는 깜짝 놀랐다. 한가했던 백작가의 영지와 차원이 다르게 복잡하고 대단했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과 마차도 많았고 상점의 종류도 엄청났다. 첫 외출 날 올리비아는 자카르 일당과 함께 탄성을 내뱉으며 구경하기 바빴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자카르가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그래도 몇 번 나와 봤다고 그는 이젠 처음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물론 올리비아도 예전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글쎄요. 어디로 갈까요?”

“디저트 먹으러 가는 게 어떻습니까?”

올리비아가 망설이니까 라토리가 나섰다. 슬쩍 눈치를 보는 모양새가 아까 짜증을 낸 올리비아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디저트 소리를 들은 올리비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생겼다.

“그래요. 달콤한 디저트 먹으러 가요.”

올리비아를 포함한 다섯 명은 익숙하게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외출하면 늘 들르는 곳이기에 그들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올리비아는 바닥을 파고들 것 같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걸 느꼈다. 이들이 어수선하게 자신을 챙겨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외출을 해서 그럴까? 아까의 충격이 좀 가셨다. 물론 아직도 마음은 무겁지만. 다시금 에이든 도련님을 떠올리니 한숨이 나왔다.

‘도련님이 결혼하시면 난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 도련님 곁에 머물 수 있는 걸까? 혹시 쫓겨나지는 않겠지?’

불안감이 자꾸 떠올랐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잊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불안감을 갖고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올리비아는 굳어 버렸다. 눈앞에 들어오는 광경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에, 에이든?”

올리비아의 중얼거림을 들은 자카르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 네. 맞습니다.”

그리고 에이든이 맞다 답했다. 보고도, 자카르의 확인을 듣고도 믿기지 않은 올리비아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지만 에이든이 확실했다. 그는 저 멀리 식당에서 나오고 있었다. 옆의 젊은 귀족 여성을 에스코트하면서 에이든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인이 뭐라고 하자 에이든 도련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올리비아는 안다. 도련님의 저 미소는 정말 기쁠 때만 나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미소는 여태껏 자신에게만 보여 줬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니. 그게 너무 충격적이라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을 부르지 못하고 응시하기만 했다. 그렇게 굳어 있는 사이 에이든 도련님과 귀족 여성은 같은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두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올리비아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너무 빨리 뛰어서 심장이 아팠다. 큰일이다. 도련님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모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올리비아는 그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막상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도련님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도련님이 행복해 보이니 같이 행복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너무 서글펐다. 순식간에 눈물이 뺨을 타고 투둑 떨어졌지만 닦을 기운도 없었다.

‘저 사람이 에이든 도련님과 결혼할 사람일까?’

처음 보는 여인은 너무 예쁘고 우아했다. 완벽한 귀족 여성처럼 보였다. 그만큼 그 여성은 에이든 도련님과 잘 어울렸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올리비아가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자 다들 당황했다.

“아, 아가씨!”

“울지 마십시오.”

자카르와 무카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올리비아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 슬프고 서러워서 소리 죽여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궁금한 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에이든 도련님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그때마다 에이든 도련님은 친절하게 답을 줬다. 도련님은 친절해서 속이는 법이 없었으니까 평소처럼 당장 달려가 에이든 도련님에게 묻고 싶었다. 그 여자는 누구냐고, 정말 결혼할 거냐고.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에이든 도련님이 정말 그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이젠 넌 필요 없으니 눈앞에서 사라져 달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버틸 수도 없었다.

그런 상상만으로 힘겨웠다. 몸은 분명히 말짱한데 잘못해서 체벌을 받았을 때보다 더 아팠다. 숨 쉬는 게 힘들 정도로 아팠다.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아파요.”

“어디가 아프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올리비아의 중얼거림을 들은 라토리와 우스카가 발을 동동거렸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참는 것만으로 너무 힘들었다.

“저택으로 돌아갑시다.”

“돌아가서 좀 쉬어요.”

올리비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 상태로는 에이든 도련님을 볼 수 없었다. 너무 아파서 도저히 도련님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혼 따위 엎어지라고 나쁜 마음을 빌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나쁜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이런 못된 마음으로는 도련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척 웃기 힘들었다. 올리비아가 거부하며 눈물만 흘리고 있자 자카르가 나섰다.

“저택에 가기 싫으면 다른 곳에 가시겠습니까?”

다른 곳? 다른 곳 어디? 사실 가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의 저택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당연히 에이든 도련님 옆이라고 생각했으니 다른 곳 따윈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막막했다.

“어디로요? 갈 곳이 없어요.”

올리비아의 목소린 처연했다. 도련님에게 버림받는 게 더 무서워졌다. 그 순간 자카르가 말했다.

“저희 고향이요.”

자카르의 나직한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늘 하는 말이었기에 어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 곳이 없다고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 이야기가 새롭게 들렸다.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올리비아의 동요와 망설임을 알듯 자카르는 단단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가도 될까요?”

“아가씨의 아버지는 아가씨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리비아는 한 번도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없어도 된다고 여겼다. 에이든 도련님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도련님의 곁에 있을 수 없는 지금, 올리비아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였다.

“그래요. 그곳에 가 봐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올리비아의 허락에 자카르와 일당들은 재빠르게 행동했다. 마치 항상 떠날 준비를 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분산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땐 라토리는 마차를 끌고 왔고 무카는 오랜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우스카는 먹을 걸 잔뜩 사 가지고 왔다. 멀리 떠날 준비를 해 가지고 온 것이다.

“아가씨, 오르시지요.”

올리비아는 진정이 되지 않은 상태로 얼떨결에 마차에 탔고 곧 마차 문이 닫혔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걱정되기 시작할 무렵 마부석에서 무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전하고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마차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 * *

최근 에이든은 그 어느 때보다 신났다. 결혼식 준비를 하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건 줄 몰랐다. 올리비아에게 어울릴 드레스를 찾는 것도, 꾸밀 보석을 사는 것도, 그녀에게 해 줄 모든 것을 떠올리는 것마다 행복했다.

화를 냈던 다음 날 올리비아에게 또 피임약을 먹었냐고 확인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안 먹는다고 답했다. 그다음 날도 물었더니 안 먹었다고 답해서 에이든의 머릿속에서 피임약 사건은 이미 사라졌다. 올리비아는 시킨 건 또 잘했기 때문에 안심했다.

대신 주르륵 늘어진 드레스 디자인 시안을 보며 에이든은 고민을 거듭했다. 뭘 입혀도 다 어울릴 것 같으니 고르는 게 힘들었다. 이것도 귀엽게 어울릴 것 같고, 저것도 우아하게 어울릴 것 같고, 요건 또 야릇하게 어울려 벗기는 즐거움이 있을 것 같았다. 예쁜 올리비아에게는 안 어울리는 옷을 찾는 게 더 힘들 지경이었다.

“다 어울려서 못 정하겠네.”

에이든의 행복한 고민이 케일럽은 귀찮기만 했다. 빨리빨리, 대충 정하면 될 것 같은데 뭘 저리 오래 고민하냔 말이다.

“다 어울리면 아무거나 정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다 어울리니까 신중하게 고민해야지!”

에이든의 외침에 케일럽은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꾸를 하면 할수록 자신도 하찮아지는 느낌이라 대화하기 싫어졌다. 그래서 케일럽이 입을 꾹 다물어 버렸지만 에이든은 역시나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 디자인을 보고 진지한 고민을 하던 에이든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면 올리비아가 참 요망하지 않아?”

에이든의 뜬금없는 말에 케일럽은 잠시 멈칫했다. 어떤 의미로는 동의하면서도 어떤 의미로는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누가 네게 물었어? 그냥 생각한 거지.”

에이든이 서늘하게 되받아쳤다.

‘씨발, 혼자 생각한 거면 입 밖으로 내뱉질 말라고. 의문문처럼 끝을 올리지 말라고!’

케일럽은 오늘도 울분에 찼다. 뭐라고 해 봤자 듣지 않을 테니 그냥 다시 침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든은 뭔가 아련한 표정으로 계속 혼잣말을 했다.

“아니. 일하기 싫은데 일하게 만들지 않나, 욕설마저 못하게 바꿨잖아. 응? 아주 제멋대로 날 흔들어. 이게 요망해서 그런 게 아니면 뭐야?”

‘올리비아가 요망한 게 아니라 네가 심하게 하찮아서 그런 거잖아!’

케일럽의 입장에서 에이든은 참 이상한 놈이었다. 스스로 하찮은 걸 알면서 때론 자신이 하찮은 걸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다시 드레스 고르기에 여념 없는 에이든을 보며 케일럽은 언젠간 그에게 큰 불행을 주기로 했다. 너무 짜증 나서 에이든에게 복수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그렇게 에이든에게 이를 갈던 케일럽에게 생각보다 이른 기회가 왔다. 그리고 그게 제 목을 조르게 될 거란 걸 케일럽은 정말 꿈에도 알지 못했다.

* * *

몇 시간 전 케일럽은 거리에서 올리비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충격받은 얼굴로 에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하찮은 상사 놈은 그 올리비아에게 줄 보석을 주문하고 헤벌쭉한 상태였다.

쟈넷 부인은 수도의 모든 보석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말하면 원하는 보석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상인계의 큰손. 때마침 에이든과 쟈넷 부인이 만나는 순간을 올리비아가 보고 있었다.

그는 올리비아의 놀란 표정으로 그녀가 어떤 오해를 하는지 대충 짐작했다. 알면서 모른 척했다. 기분이 상한 올리비아가 토라지면 덜덜 떠는 에이든을 보며 비웃어 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심술의 결과가 이렇게 엉망진창일 줄이야.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에이든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런 에이든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케일럽도 미칠 것 같았다. 그냥 투정만 부릴 줄 알았지. 설마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에이든의 살벌한 시선을 받으며 케일럽은 눈을 질끈 감고 방금 보고받은 내용을 다시 말했다.

“아가씨가 수도를 벗어난 듯합니다.”

“걔가 왜?”

상상외로 에이든의 목소린 차분했다. 케일럽은 슬그머니 눈을 뜨고 에이든을 살폈다. 감정을 삭이고 있는지 에이든의 어깨가 흔들렸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저런 에이든에게 폭탄을 던져야 하다니. 이렇게 일이 커질 줄 알았다면 차라리 큰 사고를 치고 일을 그만둘 걸 그랬다. 케일럽은 소심한 복수를 떠올렸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이거 방금 도착한 서신입니다.”

[아가씨는 우리가 모시고 간다. -자카르-]

“이건 뭐야?”

꼭 납치범이 쓴 것 같은 문구에 에이든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방금 사람을 통해 전달받은 서신입니다.”

케일럽의 대꾸에도 에이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서신을 보면 켈타족이 올리비아를 데리고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건 올리비아가 그들을 따라가겠다고 허락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올리비아의 말에 얼마나 설설 기는지, 그게 얼마나 진심인지는 그동안 충분히 보아 왔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올리비아가 같이 가겠다고 했다고? 왜?”

올리비아가 절대 허락했을 리 없다고 믿고 있는 그 음성에 케일럽은 속이 쓰렸다. 그리고 이제는 사실을 밝혀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실은 아까 아가씨를 봤습니다.”

“올리비아를? 언제?”

에이든이 난 왜 못 봤지?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케일럽은 더욱 초조해졌고 에이든의 눈길은 사나워졌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난리가 날 테니 서둘러 사실을 고했다.

“아까 쟈넷 부인을 만나고 식당에서 나올 때 말입니다. 아가씨가 멀리서 보고 있었습니다.”

“뭐? 그런데 왜 걔가 날 보고 아는 척을 안 했지?”

에이든은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는 거 같았다. 하긴, 처음부터 끝까지 올리비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 부분에 자부심까지 갖고 있으니 다른 쪽으로 생각이 튀는 것 자체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케일럽은 대놓고 알려 줬다.

“아무래도 두 분의 사이를 의심한 듯합니다.”

“둘? 누구? 설마, 나랑 쟈넷 부인?”

에이든의 얼굴에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네.”

에이든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이 와중에 기뻐하는 것처럼. 실제로 에이든은 기쁨을 먼저 느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자신에게 감정을 드러낼수록 좋았다. 그게 질투든, 분노든 어떤 것이든 에이든은 다 좋았다. 그런 감정 자체도 관심과 애정이 있어서 드러내는 거니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히죽거리려다가 조금 늦게 정신을 차렸다. 올리비아가 오해를 해서 서운함을 느꼈고 그래서 충동적으로 수도를 벗어났다면?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 아닐까?

가출!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자신을 떠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올리비아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한 뒤로, 그녀는 올곧게 에이든만을 바라봤다. 세상의 전부가 에이든인 것처럼 올리비아는 기대 왔다.

에이든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고 그녀는 의심 없이 따라왔다. 현재 올리비아의 세계엔 자신이 전부였다. 그래서 올리비아를 자유롭게 놔뒀는데.

‘고작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해로 지금 가출을 한 것이란 말인가?’

아니다. 올리비아는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 착한 아이가 가출 같은 걸 떠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건 다 간악한 자카르 일당이 이때가 기회다 싶어 순진한 올리비아를 꼬신 걸 거다.

그동안 안 돼요, 싫어요 잘만 말하던 애가 기운이 없어 거절하지 못하자 홀라당 속여 넘겨 그들의 영역으로 데려가려는 거다! 데려가? 데려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에이든은 버럭 외쳤다.

“당장 찾아!”

듣는 사람의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에이든의 벼락같은 외침에 케일럽은 재빨리 뛰쳐나갔다. 케일럽도 머리가 있었다. 저 서신을 본 순간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올리비아가 그들과 함께 떠난 이상 목적지는 켈타족의 영역이었다. 놀랍게도 그쪽에선 올리비아의 신분이 만만치 않았다. 켈타족 마을에 입성한 그녀를 다시 빼내 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잡아야 했다.

케일럽은 에이든의 흉흉한 기색에 이 일에 자신의 목숨이 걸렸음을 깨달았다. 죽도록 추격해야 했다.

* * *

올리비아는 정신이 없었다. 그땐 도저히 저택에 돌아가 에이든 도련님을 볼 자신이 없어서 자카르의 말을 따르긴 했는데. 이렇게 길게 마차를 탈 줄은 몰랐다. 거기다 얼마나 빨리 마차를 모는지 멀미까지 나서 어지러웠다.

“우리 좀 천천히 가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갈 길이 멀어서요.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평소 올리비아의 부탁을 잘 들어주던 이들이 이번엔 듣지 않았다. 계속 죄송하다고, 빨리 도착하겠다고. 도착하고 나면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조금만 참아 달라고 말하며 마차를 격하게 몰았다. 밤에도 번갈아 가며 마차를 몰았다.

첫날 에이든 도련님이랑 이렇게 갑자기 멀리 떨어질 줄 몰라서 올리비아는 걱정됐다.

“에이든한테 말도 안 하고 나왔는데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잘 연락해 뒀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자 자카르가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올리비아는 자신과 다르게 이들은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싶어서 자카르를 믿고 걱정은 지웠다. 당연히 그 연락이란 게 ‘아가씨는 우리가 모시고 간다.’라는 마치 납치범의 언사와 비슷하단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상보다 너무 멀리 가는 것 같아 올리비아는 다시 걱정됐다. 이렇게 멀리 가도 괜찮은 걸까? 이대로 도련님이랑 영영 헤어지는 걸까?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했다. 도련님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걸 볼 자신은 없는데, 그렇다고 영원히 안 보고 사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벌써 도련님이 보고 싶었다. 이미 몇 밤이나 마차에서 보내느라 도련님을 보지 못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여정에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게 가야 하는지 끙끙대던 중 무카의 외침이 들렸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알림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멈춰 선 마차에서 내린 올리비아는 놀랐다. 꽤 많은 인물들이 마차를 빙 둘러싸고 바라보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올리비아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들은 처음 보는 형식의 낯선 옷을 입고 있었고, 외모도 그동안 보아 온 사람들과 다르게 이질적으로 보였다. 올리비아처럼 여기 사람들은 다 색소가 옅었다. 머리카락 색도 밝았고 피부도 더 희었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다 큰 모양이었다. 심지어 여자들도 키가 큰 편인 것 같았다. 그래도 꽤 보아 온 자카르 일당과는 비슷해 크게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구경꾼들 중에서도 두 사람이 눈에 확 띄었다. 올리비아가 본 사람 중 제일 큰 체구를 가진 자카르보다 더 커다랗고 단단한 체구를 가진 중년 남성과 그와 대비되어 허리가 꼬부라져서 지팡이를 짚은 작고 마른 할머니였다. 남들보다 앞에 선 두 사람의 눈빛은 이상하게도 형형했다. 그게 너무 매서워 올리비아는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인사를 했음에도 두 사람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눈빛이 강렬해지는 것 같아 올리비아는 부담스러웠다. 특히, 커다란 덩치의 남성은 처음 본 사람인데 눈빛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지? 나 뭐 잘못했나?’

둔한 올리비아가 느낄 정도로 굉장히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마치 백작님이 내려다보는 것처럼 위압감이 느껴졌다. 여기 온 거 때문에 에이든 도련님도 오랫동안 못 보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혼나는 기분이다. 그래서 올리비아가 괜히 왔다고 후회하며 당장 돌아가자고 하려 할 때였다.

“아가씨, 이쪽이 저희 부족장님과 무녀님입니다.”

자카르가 나서서 두 사람을 소개해 줬다. 마차 여행을 하면서 대충 자카르에게 이곳에 대해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무녀님과 부족장님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았다. 이곳을 책임지는 사람들. 콜린스 백작님처럼 높은 사람들이었다.

왜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자신을 맞이해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신 이 무서운 눈빛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높으신 분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올리비아는 대충 이유를 수긍하며 다시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올리비아예요.”

“어서 오렴. 기다렸단다.”

“……반갑구나, 아니, 반갑습니다.”

무녀님이 먼저 인사를 해 주시고 부족장님이 느리게 올리비아를 반겼다. 부족장님은 말로는 반겨 주시는 게 분명한데 미간이 점점 좁아지고 눈빛이 더욱 매서워져 이상하게 불편했다.

“반겨 주셔서 감사해요.”

올리비아가 눈치를 보자 무녀님이 나섰다.

“오랜 여행에 지친 거 같으니 우선 쉬게 해 줘야겠네. 가서 쉬렴. 그러고 나서 이야기하자.”

무녀님이 쉬라고 해도 올리비아는 이곳은 처음이니 쉴 곳이 없었다. 그리고 쉬고 나서 이야기하자는 말도 어쩐지 신경 쓰였다. 올리비아가 슬그머니 자카르를 돌아봤다. 여기 데려온 이가 그이니 머물 곳도 알아봐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쉴 곳이 없지. 그래요, 부족장이 방을 내어 주세요.”

다시 이어지는 무녀님의 말씀에 올리비아는 움찔했다. 부족장님이면 자신을 노려보는 저 높은 분이었다. 갑자기 저 무서워 보이는 사람의 집에 가라니. 올리비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려는 그때 부족장이 먼저 나섰다.

“제 집에 말입니까?”

“네. 부족장은 미리 준비하셨을 것 아닙니까?”

무녀가 부족장에게 웃으며 의뭉스럽게 굴었고 잠시 침묵하던 그는 느리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올리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왜 자신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둘이서 결정한단 말인가. 올리비아는 부족장님과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낯설고 무서운 사람과 함께 있으라니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알아차린 것처럼 무녀가 올리비아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그녀가 도움을 주려는 줄 알았다.

“늙은이는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무녀는 부족장에게 그리 말하고 뒤를 돌아서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들어가지. 손님을 불편하게 하는 거 아니다. 들어가 봐.”

무녀님의 호통에 구경꾼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자 무녀는 자신도 볼일을 다 봤다는 것처럼 허리를 두드리며 걸어갔다. 순식간에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자 올리비아와 같이 움직인 자카르 일당과 부족장님만 남게 되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에서 부족장님이 먼저 말을 걸었다.

“자리를 옮기겠습니까?”

부족장님의 집으로 가자고 할까 봐 올리비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전 이들이랑 함께 있을게요.”

올리비아는 자카르와 라토리의 뒤로 물러서며 그들의 옷을 잡았다. 아무리 부족장님이라고 해도 올리비아에겐 그저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됐다.

올리비아가 제법 당돌한 표정으로 거절하자 부족장님은 입을 꾹 다물고 뺨을 한번 떨었다. 이를 악물고 화를 참는 것 같은 그 무서운 표정에 올리비아는 찔끔해서 자카르와 라토리의 옷을 더욱 꽉 잡았다. 그러자 어쩐지 부족장님이 자카르와 라토리를 매섭게 노려본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아가씨가 낯설어서 그러시는 겁니다.”

자카르와 라토리가 허둥거리며 변명하듯 외쳤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잡은 올리비아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그녀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서운 사람 앞에 내동댕이쳐지는 건 사양이었다.

에이든 도련님이 무섭고 위험할 땐 이들을 방패로 쓰며 뒤에 숨으라고 했다. 절대 비겁한 행동 아니니까, 그렇게 하라고 했다.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두 사람의 옷자락을 놔주지 않았다.

그러자 곤란한 듯 눈치를 보던 자카르가 올리비아에게 속삭였다.

“아가씨, 저분이 아가씨의 아버지 되십니다.”

“아버지?”

올리비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리고 그 소릴 들은 부족장님도 같이 움찔했다. 올리비아는 그제야 이곳에 오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던 자카르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저 사람이 아버지라니?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살펴봤지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랑은 닮은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부족장님은 다 컸다. 키도 크고 어깨도 크고 손도 컸다. 아름다운 에이든 도련님과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강인하고 사나울 것 같다. 그리고 자신과 닮은 곳이 없는 사람은 올리비아에겐 그저 낯선 존재였다.

“정말이에요? 정말 제 아버지세요?”

올리비아가 되묻자 부족장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잔뜩 굳어 있던 눈빛이 순식간에 서글픈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는 참았던 것을 터트리듯 내뱉었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 닮았습니다.”

그리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부족장님의 표정에 올리비아의 기분은 더욱더 이상해졌다. 괜히 안절부절못하겠다. 차라리 무서운 표정이 더 나았던 것 같다. 올리비아가 발을 동동거리자 보다 못한 자카르가 나섰다.

“우선 자리를 옮기시죠.”

“그래.”

“혼자는 싫어요.”

하지만 올리비아가 혼자는 안 갈 거라 버텼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올리비아에겐 오늘 처음 본 사람일 뿐이었다. 한 명이라도 익숙한 이가 함께했으면 했다. 그러자 늘 그렇듯 다른 일행에게 떠밀린 자카르가 대표로 선택되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아가씨, 편히 쉬고 계십시오!”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라토리와 무카, 우스카는 신나게 사라졌다. 재빠르게 사라지는 동료들을 보며 자카르는 배신감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동료들이 일을 매번 떠넘겼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아가씨와 함께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아가씨는 착하고 다정하니까 좋았다. 다만, 부족장님의 시선이 너무 사나워서 피부가 다 뚫릴 것 같았다. 부족장님은 마을에서 최고로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살벌한 시선을 받으니 자카르는 도망가고 싶었다.

“아가씨 저도 집에 가서 쉬면 안 됩니까?”

자카르가 울상을 지으며 올리비아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부족장님이 어렵기만 했다. 아버지라고 막 특별한 느낌이 들고 그러지 않았다. 그저 낯선 사람처럼만 느껴져서 둘만 있게 되는 상황이 싫었다.

“안 돼요. 같이 있어요.”

올리비아가 고집을 부리자 자카르는 더더욱 따가운 부족장님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아가씨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제 한 몸 희생해야 했다.

“그럼, 이동하시죠. 이렇게 서서 이야기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카르의 조심스러운 의견에 부족장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현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부족장의 집으로 움직였다.

“이곳을 쓰십시오.”

그곳에서 올리비아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포근한 방을 안내받았다.

“방이 예뻐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우선 피곤할 텐데 좀 쉬시죠.”

생각보다 방이 예쁘고 귀여워서 올리비아는 연신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그러자 부족장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그렇게 말하고 물러났다.

“저는 저쪽 방에 있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자카르는 올리비아의 방과 멀지 않은 곳에 방을 배정받고는 홀랑 가 버렸다. 얼떨결에 혼자 남게 된 올리비아는 백작저와 에이든 도련님의 저택과는 다른 독특한 내부에 잠시 구경을 하다가 침대에 앉았다.

에이든 도련님의 침대만큼은 아니지만 폭신폭신했다. 앉으니 눕고 싶었고 눕고 나니 눈이 가물가물했다. 딱딱한 마차에서 지내다가 몸에 포근하게 감기는 감촉은 안락함을 줬다. 그렇게 올리비아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올리비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잠들었는지 놀라 화들짝 일어났다. 그새 밤이 되었는지 창문 밖이 어두웠다. 점심이 조금 지나서 도착했었는데 밖이 완전 깜깜한 걸 보니 저녁 시간도 놓치고 잔 모양이었다.

그걸 자각하자 배가 고프고 갈증도 났다. 예전엔 배고파도 버틸 수 있었는데, 최근엔 굶지 않아서 그런지 허기를 참기 힘들었다. 특히, 금방 도착할 거라고 점심도 거른 터라 더 그랬다.

올리비아는 우물쭈물거리다가 방 밖으로 나갔다. 주방에 먹을 것이 있나 나갔던 올리비아는 저를 돌아보는 커다란 남자를 보고 놀라 폴짝 뛰었다.

“힉!”

어두운 곳에서 큰 남자를 보고 반사적으로 놀랐지만 잘 살펴보니 부족장님이었다. 그도 놀란 듯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일어났습니까?”

“……네.”

올리비아는 두근거리는 심장 근처를 누르며 머뭇거렸다. 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 침묵했다. 한참 불편한 공기에 올리비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부족장이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푹 잠든 듯해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저녁도 못 먹었는데 배고프지는 않으십니까?”

“……배고파요.”

자카르가 아버지라고 알려 줬지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뭔지 몰라서 그럴까? 올리비아는 부족장님이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

“여기 앉아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먹을 걸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 올리비아는 어쩔 줄 몰라 눈치를 보다가 우선 그가 말했던 대로 식탁에 앉았다. 부족장님의 저택은 작아서 그런지 주방이 따로 분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작은 집은 이렇게 생겼구나 생각하며 구경하던 중 올리비아는 부족장님이 직접 불을 피우고 거기에 솥을 올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시중드는 사람도 따라 없나 보다. 올리비아가 도와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는 능숙한 손길로 무언가를 끓였다.

잠시 후 올리비아는 수프 한 접시를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 간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간단한 거라 실망할 거라 여겼는지 부족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에요. 챙겨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최근 에이든 도련님 덕분에 꽤 호화롭고 자유로운 식사를 했지만, 예전의 올리비아의 식사 환경은 열악했다. 일을 하느라 식사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굶는 일도 허다했으니, 이 시간에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어서 드시죠.”

“잘 먹겠습니다.”

허기가 꽤 졌기에 올리비아는 재빨리 스푼을 들었다. 늘 먹던 수프와는 조금 달랐지만 꽤 맛있어서 놀랐다.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올리비아는 열심히 수프를 먹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부족장은 말없이 지켜봤다. 허기가 졌던 올리비아는 허겁지겁 한 접시를 다 비웠다. 그러고 나서야 부족장님이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잘 먹었습니다.”

“더 드시겠습니까?”

“아니요. 충분해요.”

올리비아는 배도 채웠겠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상대가 할 말이 있어 보여서 그냥 일어나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아직 피곤할 텐데 일어나도 됩니다.”

부족장님이 먼저 말해 줘서 살았다. 상대의 표정이 좀 걸렸지만 가도 된다는 소리에 신난 올리비아는 활짝 핀 얼굴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요. 푹 쉬세요.”

그리고 몸을 돌려 걸어가려던 중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과의 일이 떠올랐다. 도련님이 부족장님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을 때 가라고 해서 진짜로 갔다가 ‘가란다고 진짜 가냐?’라고 그에게 원망의 소리를 들었다. 그때 기억이 생각나 슬그머니 돌아보니 역시나 부족장님이 그때 에이든 도련님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결국 올리비아는 찜찜해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부족장님이 복잡한 표정을 했다. 잠시 입가를 움찔거리던 그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불편하고 피곤한데. 하지만 이 시간에 수프를 끓여 준 사람에게 매몰차게 굴기 미안했다.

“네.”

올리비아가 다시 앉자 부족장님이 물었다.

“마실 걸 좀 드릴까요?”

“아니요. 안 주셔도 돼요. 그리고…….”

차를 준비할 것처럼 다시 주방으로 움직이던 부족장님이 올리비아의 말에 멈칫하고 돌아봤다. 올리비아는 아까부터 계속 불편했던 점을 꺼냈다.

“저…….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목이 메는 사람처럼 부족장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정말 자신이 말을 편하게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죄책감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오히려 부족장님의 존대가 더 어색하고 불편했다.

“네. 부족장님이시고 또……. 제 아버지라면서요.”

올리비아가 그렇게 말하며 올려다보자 부족장님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그 격한 움직임에 올리비아는 혹시 잘못 말한 건가 싶어서 눈치만 봤다. 그녀를 등지고 잠시 그 상태로 서 있던 부족장은 주방으로 움직여 물 두 잔을 떠 왔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앞에 한 잔을 놓아 주고 나머지 한 잔은 챙기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쩐지 부족장님의 눈가가 조금 발간 것 같았다.

“미안하다.”

잠시 시간을 끌던 부족장님이 한 첫마디는 사과였다. 갑작스러운 부족장님의 사과를 올리비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요?”

처음엔 조금 무섭긴 했지만 이 시간에 수프를 끓여 주신 고마운 분이었다. 딱히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 그래서 되물었더니 부족장님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냥 모두 다, 미안하구나.”

목소리엔 울음기가 가득하고, 얼굴은 울 수 없어서 웃는 것 같은 어색한 표정이었다. 부족장님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까부터 계속 자꾸 마음이 이상했다.

“괜찮아요.”

그래서 괜찮다고 답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이런 말이 상대에겐 의외였나 보다.

“무엇이?”

오히려 부족장님이 되물어 왔다. 올리비아는 어쩐지 이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되었다.

“그냥 모두 다요. 무엇을 미안해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부족장님에게 서운한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괜찮았다.

그 말간 표정을 보고 부족장은 잠시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전부 덮고 나서야 그는 표정을 일그러뜨릴 수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흉측하지 않은 표정을 내보일 자신이 없어서 가려야만 했다. 잠시 그러고 있으며 감정을 수습한 후에야 부족장은 손을 내렸다.

“고맙구나.”

고마움을 느낀다고 하기엔 울 것 같은 얼굴이지만 올리비아는 거기까진 파고들지 않았다. 이제 하고 싶은 말씀은 다 끝난 건가 싶어서 눈치를 보는데 부족장님이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괜찮다면 나르힘의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니?”

“누구요?”

올리비아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멈칫한 부족장은 올리비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머니 말이다.”

“음, 어머니는 이사벨라인데요.”

올리비아의 어머니는 이사벨라라고 불렸다. 모두가 그렇게 불렀고 어머니 또한 올리비아에게 다른 이름이 있다고 가르쳐 주신 적이 없었다.

‘혹시 이분이 착각하신 거 아닐까?’

이름이 다르단 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분이 아버지가 아닌가? 올리비아가 의문을 떠올리는 사이 부족장의 얼굴은 사납게 일그러졌다. 화를 참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이름을 바꾼 모양이구나.”

부족장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괜히 올리비아는 눈치가 보였다. 착각하신 거 아니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괜히 대화한다고 했나 후회했다. 그러다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우선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아요. 워낙 어릴 때 돌아가셨거든요.”

그리고 그런 올리비아의 선택이 맞았는지 부족장님의 얼굴에 드러났던 분노의 기색이 가라앉았다. 대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많이 어릴 때 돌아가셨니?”

“네. 다섯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러자 부족장님의 얼굴에 다시 또 목이 막힌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겠구나.”

“네. 그래도 기억에 남은 어머니는 다정하고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나르힘이 다정하고 아름답긴 하지. 어린 나이에 홀로 되었다면 힘들었겠구나.”

“백작가에서 태어난 게 차라리 다행이었지요. 덕분에 잠자리 걱정은 안 했어요.”

이건 올리비아가 자라면서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너같이 멍청한 애가 백작가가 아닌 곳에서 태어났다면 고생했을 거라고. 어떻게 살아남았겠냐고 말이다.

올리비아도 반쯤은 그 말에 동의했다. 자신이 남들보다 아둔한 것도 잘 알았고, 아주 가끔 밖으로 심부름을 나갈 때면 길거리에서 굶는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런 걸 보면 백작가의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풍족하게 먹진 못해도 쫄쫄 굶어서 죽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자카르에게 들었다. 대충 어느 가문에서 허드렛일을 했다고?”

“네. 콜린스 백작가에서요.”

올리비아의 담담한 대답에 부족장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계속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기 힘들었다. 얼굴을 가리는 순간이 조금 늦어져 버리자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단단하고 견고해 보였던 남자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성처럼 표정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미안하다.”

그가 왜 미안해하는지, 미안할 거 없는데, 아까 괜찮다고 했는데 왜 또 사과하는지 올리비아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젠 부족장님이 아까처럼 화가 난 것 같지 않아서 물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제 아버지가 맞으세요?”

올리비아의 질문에 놀랐다는 듯 부족장은 잠시 굳었다. 하지만 이내 곧 단단한 목소리로 답을 해 주었다.

“그래. 그렇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지 모르겠지만 부족장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

‘정말 아버지인가?’

하지만 아버지라고 해도 올리비아는 다른 느낌이 없었다. 딱히 친근감이나 그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에이든 도련님을 떠올리는 게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아, 떠올리니까 에이든 도련님 보고 싶다. 올리비아는 시무룩해졌다.

그러다가 다시 궁금증이 생겼다. 자신은 떨어져 있으니까 이렇게 에이든 도련님이 보고 싶은데, 어머니랑 아버지는 아니었나? 두 사람은 왜 따로 살았을까?

“그러면 어머니랑은 왜 헤어지셨어요?”

올리비아는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질문을 하자, 부족장님은 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번엔 화를 낸다기보다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네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단다.”

“어머니가요?”

“그래,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나르힘이 사라진 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건 부족장, 바툰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바툰과 나르힘은 어릴 때부터 함께였다. 또래다 보니 자라면서 같이 어울릴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성으로 의식했다. 다른 또래도 있었지만, 마치 운명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둘은 남몰래, 그렇지만 소중하게 서로의 애정을 키워 갔다.

“우리 결혼하자.”

바툰의 인생에 배우자는 나르힘뿐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마음에 이어 몸마저 통했을 때, 그는 감격을 숨기지 못하고 나르힘에게 청혼했다. 그 성급한 청혼에 나르힘은 맑게 웃음을 터트린 후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부족은 자유연애 결혼을 했다. 배우자에 대한 선택은 대부분 당사자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인물이 몇 있었다. 바로 차기 부족장과 예비 무녀가 그랬다. 그들은 부족의 중요한 위치에 오를 사람들이라 무녀님의 결정에 따라 배우자를 얻었다. 부족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툰은 부족장의 아들로서 차기 부족장으로 꼽히고 있었다. 만약 무녀님이 반대한다면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괜찮겠어? 넌 무녀님이 정해 주신 짝과 결혼해야 하잖아.”

바툰은 나르힘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망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에게 나르힘은 전부였다. 나르힘을 이성으로 인식한 순간부터 그의 부인은 당연히 그녀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깟 부족장 자리보다 나르힘과 함께하는 게 더 중요했다.

“너랑 결혼하지 못한다면 부족장이 되지 않아도 돼.”

그래서 그 진심을 고백했다. 망설임 한 점 없는 진솔한 마음이었고, 바툰은 나르힘을 위해서라면 정말 그럴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내가 좋아?”

“당연하지! 정말 좋아해.”

“그래, 결혼하자.”

그날 나르힘은 울음을 터트리며 바툰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곧 어른들에게 알리자고 단단히 약속했다. 하지만 다음 날 행복한 미래에 젖어 있던 바툰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갑자기 나르힘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볼일을 보는 중일지도 모르지만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

“나르힘 봤어?”

“모르겠는데?”

“나르힘 본 사람?”

“난 못 봤어.”

“나르힘! 나르힘!”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다들 나르힘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 때부터 바툰의 불안감이 심해졌다. 밤이 되어서도 나르힘은 나타나지 않았다. 절대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찾아 나섰지만 근처에선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바툰은 아버지를 찾아갔다. 부족장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이 수색을 도울 거였다. 하필 아버지는 무녀님과 대화 중이셨다. 두 사람이 대화 중일 땐 방해해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마음이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나르힘이 사라졌어요. 찾도록 제발 도와주세요.”

“바툰, 무례하구나.”

아버지와 무녀님은 냉정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바툰은 자신의 성급한 행동에 두 사람의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아 공손한 자세로 사죄를 청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성급하게 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급해서 그래요. 나르힘이 사라졌다고요.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이 문제가 정말 급한 일임을 다시 알렸다. 이 정도 말하면 아버지든, 무녀님이든 도와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어디 볼일 보러 갔나 보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으냐.”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가 차분하다 못해 무심했다. 그걸 바툰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녀님을 돌아보았지만 그녀 또한 담담했다. 그 어떤 도움의 말 대신 그저 고요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두 사람의 담담한 시선은 마치 바툰이 별것 아닌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떤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건 바툰의 예민한 반응이 아니다. 나르힘은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질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어디 멀리 갈 일이 있었다면 바툰에게 반드시 말했을 거다.

“그럴 아이가 아니에요!”

“그건 모르는 거지. 바쁘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바툰이 사납게 반항했지만 아버진 담담하게 끊어 낼 뿐이었다.

“아버지!”

“자꾸 무례하게 굴 테냐? 바쁘다고 하지 않았느냐! 밖에 누가 있으면 들어와 이 녀석 좀 끌어내!”

바툰이 끝까지 매달리자 아버지는 호통을 쳤고 결국 다른 사람이 와서 그를 끌어냈다. 분통이 터졌지만 화를 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바툰은 곧장 몸을 돌려 나르힘을 찾아다녔다. 혹시 숲에서 길을 잃었나 싶어서 밤새도록 숲도 헤맸다.

하지만 다음 날도 나르힘을 찾을 수 없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틀이나 보이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를 찾아갔다. 실종이 확실하다고 나르힘을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빌었다.

“아버지, 제발요. 제발 도와주세요. 나르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돌아온 답은 거절이었다. 바툰은 충격을 받았다. 부족민을 지키는 데 앞장서는 아버지가 실종된 나르힘을 찾는 걸 돕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건 아버지답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녀님의 예언이 있었다. 그 아이는 잊어라.”

그게 바툰이 들은 전부였다. 더 설명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버지의 태도가 왜 이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무녀님의 결정이라면 아버진 절대 나서지 않을 거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중 그 누구도 나서지 않을 거다.

그걸 알려 주듯 아무도 나르힘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나르힘이 사라진 일을 쉬쉬하며 덮었다. 바툰은 이렇게 포기할 수 없어 지인들에게 부탁했다.

“나르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 같아. 찾는 걸 도와줘.”

“미안해. 무녀님의 말씀을 들었어. 난 도와줄 수 없어.”

바툰이 아무리 도와달라고 애원해도 돌아오는 것은 외면이었다. 친구들 또한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부족 내에서 부족장과 무녀님의 말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그들이 안 된다고 했을 때, 바툰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의 무시. 나르힘이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지 몰라 바툰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럼, 저 혼자서라도 찾으러 가겠습니다.”

그래서 혼자서라도 찾겠다고 나섰을 때 아버지가 명령했다.

“바툰이 떠나지 못하게 막아라.”

모든 이들이 바툰을 막아섰다. 그 말을 얌전히 따를 수 없었다. 바툰은 막아서는 이들을 헤치고 떠나려고 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바툰을 막아섰고, 그는 더 발악했다.

“저 혼자 떠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넌 마을을 떠날 수 없다!”

“아버지! 절 내버려 두십시오!”

바툰의 난동이 심해지자 결국 감금까지 당했다. 비참하게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힘없는 개인이 하는 일엔 한계가 있었다. 무력함을 사무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방에 갇혀 제발 보내 달라고 발악하며 애원만 하고 있을 때, 무녀님이 찾아왔다. 그녀는 문 너머로 짧게 말했다.

“그 아이는 살아 있다.”

그 아이가 나르힘을 지칭하는 걸 알았고 바툰은 몸에서 힘이 쭉 빠져 주저앉았다. 갑자기 사라져서 큰 봉변을 당한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던 터라 나르힘이 무사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숨이 막혔다.

“그 아이를 찾아선 안 된다. 그 아이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얌전히 지내거라.”

바툰이 계속 나르힘을 찾으면 그녀가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무녀님의 예언이었다. 그는 울부짖었다. 무력함에 좌절했다. 바툰의 감금은 꽤 오래되었고, 풀린 후에도 감시자가 늘 뒤따라 나르힘을 찾으러 갈 수 없었다.

그러면서 바툰도 무녀님의 예언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찾겠다고 나섰다가 자신이 나르힘을 불행하게 만들까 봐 두려웠다. 그는 당장은 나르힘을 찾는 걸 포기했다. 언젠간 재회가 가능할 거라고 믿으며 참았다. 무사히만 살아 달라고 매일매일 빌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생겼다.

나르힘이 왜, 어째서 사라졌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는 게 이상했다. 부족장님과 무녀님이 왜 이런 부당한 명령을 내렸는지, 그리고 왜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의문이 쌓이다 보니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녀님의 말씀이 전부 옳은 걸까? 무녀님의 예언이 맞다는 건 안다. 여태껏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도 안다. 무녀님은 분명히 부족을 위해서 결정했을 거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르힘이 피해를 받아야 했다. 이건 부족을 위해서 한 사람을 희생시키겠단 소리였다.

그게 맞는 걸까? 자신이 나르힘을 찾지 않는 것도 정말 맞는 걸까? 의문이 짙어지니 점차 오기가 생겼다.

부족장과 무녀님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를 필요가 있을까? 불합리하다 여겨지면 대항할 줄 알아야 했다. 바툰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미 모든 부족민들이 무녀님을 절대적으로 따랐다. 이대론 안 됐다. 바툰은 이를 악물고 대항할 힘을 길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까지 제발 나르힘이 살아 있길 바랐다.

그동안 바툰은 많은 노력을 했다. 윗세대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아랫세대는 무녀님 말에 절대적으로 휘둘리지 않도록 차츰 의식을 개선시켰다. 무력을 기르고 따르는 무리도 만들어 세력도 키웠다. 결국 부족장이 되어 이제 나르힘을 찾을 수 있겠다 여겼을 때 무녀님이 먼저 찾아왔다.

“나르힘을 찾을 겁니까?”

그녀가 갑자기 찾아와 말을 꺼냈을 때 바툰은 말문이 막혔다. 부족민 대부분이 나르힘의 존재 자체를 잊었다. 그날 이후로 아무도 나르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긴 시간 동안 바툰만이 그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랬던 이름을 무녀님 입에서 듣다니. 그것도 찾으려고 마음먹었을 이때. 역시 무녀님이었다. 미래를 보는 분이니 어차피 속일 수 없다면 진실을 말해야 했다.

“네. 그녀를 찾을 겁니다. 이번엔 말려도 소용없을 겁니다.”

바툰이 부러 단호하게 알렸을 때 무녀님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바툰의 몸이 순간 휘청였다. 충격적인 소식이라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죽었다고? 누가? 나르힘이? 믿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기다렸는데. 무사하길 바라서 찾지 않았던 건데!

“찾지 않으면 무사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노하고 절규하는 그에게 무녀님은 더 충격적인 말을 남겼다.

“대신 부족장의 딸이 남았지요.”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점차 흐릿하던 정신이 명확해졌다. 그의 인생에 여자는 나르힘뿐이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아이가 있다면 실종 당시 나르힘이 임신을 했었다는 소리였다. 처음엔 충격이, 그다음엔 분노가 치솟았다. 다 알면서 나르힘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란 말인가!

“그걸 알면서도 찾지 못하도록 한 겁니까!”

“다 부족을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발악을 무녀님은 짧은 말로 일축했다. 바툰도 부족장이 되면서 책임감이 커졌다. 그의 의견 하나에 부족의 운명이 흔들리니 최대한 공명정대하게 부족을 위해서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건 안다. 부족을 위해서란 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개인의 희생이 타당한가? 그 여린 이가 홀로 낯선 곳에서 애를 낳고 길렀다. 도대체 나르힘과 자신의 딸은 무슨 죄란 말인가!

“그들이 희생해서 얻은 게 무엇입니까! 왜 그들이 희생해야 했던 겁니까!”

바툰은 왜 나르힘과 자신의 딸이 희생되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허울뿐인 희생처럼 느껴졌다. 그 처절한 외침에 무녀님은 탁한 눈으로 빤히 바라봤다.

“부족장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바툰은 무녀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녀님은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처럼, 조금도 죄책감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덕분에 우린 훌륭한 부족장을 얻지 않았습니까?”

잔인했다. 자신을 부족장으로 만들기 위해 나르힘을 희생시켰단 말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까 나르힘과 딸이 자신 때문에 희생되었단 소리였다. 고작 자신 때문에! 자신이 뭐라고! 자신의 지위도, 이런 상황을 만든 무녀님도 다 싫었다. 표정을 읽기 힘들 정도로 자글자글 주름지고 늙은 그 얼굴이 징그러워 쳐다보기도 싫었다.

“나가십시오! 당장!”

바툰의 외침에 무녀님은 쉽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나가기 전에 한 장소를 알려 주었다.

“그곳에 가면 부족장의 딸이 있을 겁니다. 만나고 싶다면 직접 가지 말고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세요.”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찾아오라는 겁니까!”

“그녀가 무녀의 재능을 가졌으니까요.”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고 말하는 무녀의 행동은 잔인하기만 했다. 필요에 의해 버리고, 데려오고, 제멋대로 하는 꼴이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나르힘이 죽었단 사실에 비통함에 빠졌던 바툰은 곧 정신을 차리고 믿을 만한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탁했다. 제발 자신의 딸을 찾아 달라고. 무녀님은 데려오라고 했지만 그녀가 원치 않으면 강제로 데려오지는 말라고. 그는 힘을 키우면서 젊은 세대를 깨우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자카르와 그 일행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무녀님의 말을 따르긴 하지만 예전 그의 세대처럼 절대적으로 무녀님의 말을 신봉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떠나고 바툰은 한동안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찾지 못해서 헤맸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오고 싶어 하지 않다고 해서 따라다닌다는 이야기까지 전달받으며 속이 까맣게 탔다. 딸을 만나 보고 싶은 마음과 이 아집의 소굴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상반된 마음 사이에서 괴로웠다.

자카르에게 딸아이에 대해 서신으로 전해 들을 때마다 마음이 벅차고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흘러넘쳤다. 그리고 함께 이쪽으로 오겠다는 연락을 받은 후부터는 이제나저제나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겨우 만나게 된 딸은 제 어미를 똑 닮아 그의 죄책감을 더욱 건드렸다. 무녀의 자질을 가진 사람 특유의 해맑음까지 느껴져서 더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심성이 착했다.

모든 게 괜찮다는 말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이 아인 나르힘처럼 희생되도록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켜 줄 것이다. 바툰은 굳게 다짐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속죄였다.

“어머니가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요?”

올리비아의 물음에 바툰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지독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천진한 딸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도 따스해졌다. 안쓰러움과 기쁨이 뒤섞였다. 워낙 여러 감정이 요동을 쳐 감정의 홍수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모른다.”

바툰도 그 부분에 대해선 정말 잘 몰랐다. 무녀님의 협박으로 나르힘이 제 발로 떠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납치당한 것인지. 만약 납치라고 했을 땐 그 일에 무녀님이 연관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우연인지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무녀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부족장이라고 해도 입을 닫은 무녀님을 다그칠 수는 없었다.

“너무 늦게 찾아서 미안하다. 그땐 나도 너무 어렸고 힘이 없었어.”

그저 모든 게 미안했다. 나르힘과 올리비아가 고생한 게 전부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아니, 자신의 탓이었다. 자신과 얽히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고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뒤늦은 사과가 보상이 되지 못한단 것을 알면서도 바툰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장님이 진심으로 사과하자 올리비아는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말 괜찮은데, 왜 자꾸 사과하시는지 모르겠다.

“전 괜찮아요. 그만 사과하세요.”

올리비아는 정말 괜찮기 때문에 괜찮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게 바툰의 죄책감을 더욱 건드렸다. 처음 만나는 딸은 너무나 제 어미와 똑 닮았다. 외모뿐만 아니라 착한 심성까지 똑같았다.

이리 착한 아이가 노예로 살았다. 그동안 다른 가문의 노예로 살면서 얼마나 고생했을지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바툰은 올리비아에게 모든 걸 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었다.

“이젠 이곳에서 사는 거니?”

올리비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에이든 곁으로 돌아갈 거예요.”

에이든 도련님이 받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에이든 도련님 곁에 있고 싶었다. 물론 아직도 마음 정리가 안 되긴 했다. 아직 기쁜 마음으로 그의 결혼을 축하해 줄 자신은 없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힘든 일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졌으니까.

“그럼, 잠깐 온 것이구나.”

이상하게 부족장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시 에이든 도련님의 결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우울해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투정을 부렸다.

“네.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갈 곳이 없어서 왔어요. 잠깐만 있을 거예요.”

“속상한 일? 설마 그 에이든이란 놈, 크흠. 에이든과 관련된 일이더냐?”

올리비아는 부족장님이 바로 맞혀서 놀랐다. 에이든 도련님을 모르면서 자신이 속상한 이유가 그와 연관 있단 걸 바로 맞히시다니. 부족장님이라서 대단하신 건가?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더 속내를 터놓게 되었다.

“에이든이 결혼한대요. 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줄 수 없어서요.”

순간 부족장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미묘하게 몸을 떨더니,

“그, 사람을 좋아하니?”

쥐어짜듯 비틀린 목소리로 물어 왔다. 모든 인내심을 그러모은 물음이지만 올리비아는 알지 못했다. 그 물음에 다시금 도련님에 대한 감정을 떠올렸고, 그를 좋아한다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올리비아에게 에이든은 전부였다. 그와 있으면 행복했다. 그래서 그 감정을 내뱉었다.

“네! 진짜 좋아해요.”

우지끈!

엄청난 소리에 올리비아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다 멍하니 입을 벌렸다. 갑자기 부족장님이 손을 올리고 있던 부근의 식탁이 움푹 파였다. 마치 돌덩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괜찮으세요?”

“괜찮다. 식탁이 낡아서 그런 모양이다. 내일 새것으로 바꾸면 된다.”

부족장님이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아니, 식탁이 아니라 부족장님 손이요.’

올리비아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부족장님이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얼굴을 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사나웠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느낌이랄까. 식탁이 반으로 쪼개진 것은 아니지만 주먹 모양으로 구멍이 뚫렸다. 올리비아가 흘긋 식탁을 확인했다. 두께가 꽤 되는데 어떻게 저렇게 파일까?

“그럼, 혼자 그 녀석을 좋아하는 거냐?”

부족장님의 물음에 올리비아는 식탁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확신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에이든도 저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왜?”

“언니들이 그랬어요. 귀족의 애정은 쉽게 바뀔 수 있대요. 이젠 에이든이 저 싫어한다고 하면 어떡하죠?”

말을 하면 할수록 올리비아는 기운이 빠졌다. 정말로 도련님이 다른 사람이 좋다고, 다신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럼 진짜로 어디로 가지?

“그러면 내가 혼쭐을 내 주마.”

“혼쭐을요? 어떻게요?”

“……한 대 때려 줄까?”

“그러면 안 돼요.”

부족장님의 말에 올리비아는 기겁해서 말렸다.

“왜 안 되느냐? 네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에이든은 약해요. 부족장님이 때리면 크게 다칠 거예요.”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잘 안다. 유약해서 늘 호위 기사가 따라다니지 않던가. 저 커다란 덩치의 부족장님이 때리면 에이든은 정말 크게 다칠지도 몰랐다. 에이든 도련님이 다치는 건 정말 싫다.

올리비아가 절대 안 된다고 하자 순간 부족장의 표정이 굳었다. 얼굴 근육을 불만스럽게 씰룩거리던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때리지 않고 잘 다독이마.”

때리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만큼 에이든 도련님의 결혼식 이야기에 올리비아는 속상했다.

“그건 괜찮아요.”

그러자 이번엔 부족장이 한결 편해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머뭇거리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갈 곳이 없다면 언제든 이곳에 와서 머물러도 된단다. 난 네 방문을 언제든 환영한다.”

“진짜요? 왜요?”

올리비아는 놀라서 되물었다. 이런 식으로 말해 준 사람은 도련님 빼곤 없었다. 그녀에게 언제든 괜찮다고 말해 주는 존재는 에이든 도련님뿐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올리비아의 질문에 부족장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하지만 억지로 웃는 터라 미소가 서글퍼 보였다.

“난 네 아버지잖니.”

“아…….”

올리비아의 얼굴에 ‘아, 맞다. 이 사람 내 아버지였지.’라는 표정이 떠올라 부족장은 더 슬픈 눈을 했다.

올리비아는 괜히 미안해졌다. 아버지라는 느낌이 잘 생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제든 환영해 준다는 말이 기뻤다. 이젠 갈 곳이 또 한 군데 더 생겼다. 좋으면서 이상한 기분에 올리비아가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자, 이래선 안 되겠다는 것처럼 부족장님이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계속 머물지 않겠다고?”

“며칠만 있다가 가려고요.”

올리비아는 딱 잘라 말했다. 에이든 도련님을 보지 않고 살 자신은 없으니까 마음이 조금 진정되면 돌아가야 했다.

“혹시 우리 부족의 무녀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니?”

“네. 자카르가 설명해 줬어요.”

사실 오면서 마차 안에서 지겹도록 들었다. 무녀는 대단한 존재라고. 이곳에서 살면서 무녀가 되면 대접받고 살 거라고. 똑똑해질 수도 있다고. 하지만 올리비아는 관심 없었다.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지?”

“그거 하면 여기서 살아야 한다면서요. 그건 싫어요. 전 에이든이랑 살 거예요.”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알겠다.”

올리비아는 뭐가 알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니 부족장님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수프가 다 소화되었고 배가 꺼지니 하품이 나왔다. 올리비아가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자 부족장님이 먼저 쉴 것을 권했다.

“이런, 늦은 밤에 오래 잡아 뒀구나. 들어가서 쉬렴.”

잠이 급격히 몰려온 올리비아는 거절하지 않고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편하게 쉬렴.”

터덜터덜 아까 잠들었던 방으로 돌아가는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부족장의 시선은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곧 그녀가 보이지 않자 표정을 굳혔다.

이번엔 기필코 자신의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다. 무녀님이라고 해도 아이를 강제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절대 없었다. 서늘하고 예리한 시선은 그의 결심을 보여 주고 있었다.

* * *

속이 울렁거려서 에이든은 토할 것 같았다. 속으로도 하지 않던 욕설을 간만에 떠올렸다. 씨발, 씨발 하면서도 짜증은 더욱 커졌다. 며칠째 마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달리고 있었다. 마차를 계속 타서 피곤해서가 아니다. 이렇게 달렸음에도 올리비아를 따라잡지 못했다.

조금 전 선발대에게서 올리비아가 켈타족 마을에 들어간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신이 이렇게 강행군을 했는데도 잡지 못했다. 아무리 올리비아가 먼저 출발했다고 해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면 그녀도 똑같이 고생하면서 가고 있단 소리 아닌가.

그 여린 아이를 고생하게 만들다니, 그렇게 아끼는 척하더니 하는 꼴이 같잖았다. 켈타족 놈들을 전부 용서하지 않으리라. 자카르 그놈 아주 혼쭐을 내 줄 테다. 순진한 올리비아를 꼬신 것도 잘못이지만, 이렇게 고생하게 만든 대가를 치르게 만들 거다. 그래도 멀지 않았다.

이미 켈타족의 영토에 들어왔다. 마을까진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만나서 잘 이야기하면 올리비아를 데려올 수 있을 거다.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얌전히 따라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계속 달리길 한참.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아 식사도 거르며 마차를 달리고 또 달렸다. 사실 기동성을 생각하면 말을 타는 게 맞지만, 올리비아를 데려올 생각에 마차를 포기할 수 없었다.

“멈춰라!”

강한 외침에 마차가 급정거했다. 에이든은 창문 틈으로 이질적인 복장의 한 무장 세력을 발견했다. 왕국민이나 제국민보다 큰 체격을 소유한 켈타족들이었다. 그렇게 반나절 조금 덜 걸려서 결국 목표 영역에 도달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당신들은 무장한 세력이오. 함부로 마을에 들일 수 없소.”

앞으로 나선 이가 창을 겨누며 경고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에 하나 올리비아를 순순히 데려오는 게 힘들다면 힘을 쓸 작정으로 병력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켈타족이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밖에서 호위하던 케일럽이 마차 가까이 붙으며 물었다.

“어쩌겠습니까?”

‘이 씨발놈.’

케일럽을 보자마자 절로 욕설이 나왔다. 이 고생을 하게 만든 놈 아니던가. 에이든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케일럽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자기 죄는 알아서 추격하는 내내 케일럽은 깐죽거리지 않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같이 붙어 있었다고 케일럽이 에이든의 속내를 제일 잘 알아차렸다. 올리비아를 데려오는 일은 시급한 일이었고, 그때까지는 모든 일을 파악하고 있는 케일럽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일을 마무리하면 케일럽을 내치려고 에이든은 단단히 마음먹었다. 진정한 한직으로 보내 주리라.

“무슨 연유로 이리 오는지 모르겠지만 돌아가시오.”

다시금 켈타족 쪽에서 외침이 들렸다. 갑자기 무력 세력이 등장했으니 켈타족이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사실 호위들을 떼어 놓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마을에 접근해도 됐지만 반쯤은 무력시위의 의도가 있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올리비아를 데려갈 거라는 경고였다. 에이든은 차갑게 말했다.

“올리비아와 자카르 일행을 불러.”

“알겠습니다.”

죄인 케일럽은 에이든의 말에 즉각 반응했다. 그는 곧장 켈타족 경비대장을 향해 외쳤다.

“어제 도착한 손님을 모셔 가려고 왔습니다. 그녀와 그녀를 납치한 자카르 일당을 보내 주시죠.”

케일럽이 하는 말을 듣던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자신 옆에 있더니 제대로 물들었다. 굳이 납치라는 과격한 단어를 써서 저쪽이 문제인 것처럼 만드는 언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케일럽의 말이 끝나자 켈타족에서 동요가 생겼다. 경비대장도 당황한 듯 안쪽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케일럽을 향해 외쳤다.

“잠시 기다리시오! 당신의 주장이 맞는지 확인하겠소.”

그렇게 잠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켈타족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강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납치라고 했어?”

“어제 온 손님은 예비 무녀님 아니었어? 그분 납치되어 온 거야?”

“자카르가 납치라니…….”

“무녀님을 납치하다니 천벌받는 거 아니야?”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이 다가왔다. 선두에 선 중년인은 켈타족 중에서도 큰 체구를 가졌다. 단단한 근육질로 뒤덮인 그는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자카르와 라토리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경비대장의 옆에 서서 몇 마디 나누더니 에이든 쪽을 향해 외쳤다.

“어제 도착한 손님은 납치당한 게 아니다. 자의로 이곳에 온 것이다!”

그 쩌렁쩌렁한 외침에 에이든이 발끈해 마차에서 내렸다. 저들의 헛소리를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무슨 헛소리!”

“들어가 계십시오.”

놀란 케일럽이 말렸지만 에이든에겐 들리지 않았다. 저들의 주장이 에이든의 이성을 앗아 갔다.

“올리비아를 데려와! 그녀에게 직접 묻자고!”

올리비아가 절대 자신을 떠날 리 없다는 믿음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선두에 서 있던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중년인의 사나운 시선이 쏟아졌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난도질할 것 같은 맹렬함이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찢을 듯 울렸다.

“네놈이 에이든이더냐!”

케일럽이 저도 모르게 에이든을 돌아봤다. 너 이곳에서까지 이름을 알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냐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내 곧 그는 켈타족과 올리비아의 관계를 떠올리고, 저 중년인이 누군지 눈치챌 수 있었다. 바로 올리비아의 아버지, 켈타족의 부족장이었다. 케일럽이 알아챘는데 에이든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쓸데없이 과격한 적의에 혀를 찼다. 에이든은 상대가 올리비아의 아버지라고 해서 굽힐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미 올리비아가 아버지는 없어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관심 없다고 말하며 가족을 조금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보단 자신을 택한 게 확실했기 때문에 에이든은 자신감이 넘쳤다.

“네. 올리비아의 에이든입니다. 그러니 올리비아를 내놓으십시오.”

바툰은 에이든이란 놈을 위아래로 훑었다. 올리비아가 약하다고 하더니 정말 한 대 치면 죽게 생겼다. 비리비리해서 사냥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저런 연약한 놈을 좋아하다니. 게다가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한다면서 감히 올리비아를 찾아온단 말인가? 얼마나 파렴치한 놈이란 말인가. 바툰은 치를 떨며 외쳤다.

“이 파렴치한 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느냐!”

“네! 저 파렴치한 놈 맞습니다! 그러니까 올리비아를 주십시오!”

바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파렴치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욕하긴 했지만 그걸 스스로 인정해 버릴 줄이야. 그것도 망설임 없이. 자신만 기가 막힌 것은 아닌지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이든의 옆에 선 기사조차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파렴치한인 걸로 모자라 후안무치했다. 하긴 저렇게 뻔뻔하니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서 올리비아를 찾으러 왔겠지.

켈타족 문화엔 재혼이 없었다. 사별 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 후 다른 사람을 만나다니? 그 정도 신의가 없는 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그 신성한 결혼 후 다른 사람을 끼고 살겠다는 저놈을 도저히 좋게 볼 수 없었다.

“돌아가라. 그녀가 가겠다고 하면 보내 주겠다.”

“그러니까! 올리비아를 데려오란 소리 아닙니까! 직접 보면 그녀는 절 따라갈 겁니다!”

에이든이 자신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어젯밤 대화로 부족장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올리비아는 에이든 곁에 있고 싶어 했다. 왜 저런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을 좋아한단 말인가! 수치를 아는 인물을 좋아했다면 좋았을 것을!

“다시 말한다. 돌아가라.”

“싫습니다!”

“자꾸 버티면 부족을 노리는 걸로 보고 우리도 무력 대응하겠다!”

“부족에 관심 없습니다! 올리비아만 내주면 됩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어쩐지 상황을 다 알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이 난리가 났는지. 저건 어떻게 들어도 새신랑과 새신부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그리고 그 난리가 정말 엉뚱하게 튀어 무력 투쟁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어이없었다. 물론 황당함은 에이든을 따라온 사람들이 더 심했다. 그들은 하녀 출신의 여자 한 명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것처럼 느껴지는 거니까. 켈타족에겐 예비 무녀님을 데려가려는 극악무도한 자라 그래도 부족장의 말에 수긍하는 편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으르렁거리기 바쁜 그때였다.

“에이든? 정말 에이든이에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기쁨이 가득 담긴 맑은 목소리가 또랑또랑 울렸다. 어느 틈에 도착했는지 올리비아가 사람들을 헤치며 나오고 있었다. 에이든은 멀리서도 똑바로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올리비아! 나야! 나 여기 있어!”

그녀를 발견한 에이든이 신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난 여기 있다고, 얼른 오라고 소리쳤다.

“에이든! 전 여기 있어요!”

올리비아는 또 좋다고 같이 뛰었다. 에이든의 극성맞은 행동을 따라 했다. 며칠 만에 도련님을 봤더니 기뻐 더 신나서 뛰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그 열렬한 반응에 제 믿음이 맞았다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올리비아가 날 버릴 리 없지!’

“이리 와! 집에 가자!”

“네!”

에이든 도련님이 자신을 데리러 왔단 소리에 올리비아는 힘차게 답했다.

“올리비아.”

홀린 듯 저쪽으로 다가가려다가 들린 부름에 그녀는 멈춰 섰다. 부족장님이 슬픈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우물거리다가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 고개를 숙였다.

“하룻밤 재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든이 데리러 와서 가 봐야겠어요.”

“……괜찮겠느냐?”

“네?”

“저 사람 다른 사람이랑 결혼한다면서.”

올리비아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이 온 것이 기뻐서 결혼 이야기는 깜빡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다시 서러워졌다. 에이든 도련님을 따라갔는데 결혼 소식을 들으면 어떡하지? 아직 축하해 줄 자신이 없는데.

“올리비아 왜 안 와?”

올리비아가 머뭇거리는 걸 발견한 에이든이 재빠르게 외쳤다. 엉뚱한 생각 못하도록 제게 주의를 돌렸다. 어쩐지 올리비아가 저 멀리서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거 같았다.

“에이든, 언제 결혼해요?”

올리비아의 입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와 에이든은 깜짝 놀랐다. 아직 비밀이라서 나중에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어디서 들었지?

“어, 아직 날짜 확정은 안 됐어.”

에이든이 당황해서 답했다. 그러자 올리비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팩 쏘아보았다. 원망 가득한 시선에 에이든이 굳어 있는 사이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던졌다.

“그럼, 저 안 갈래요. 결혼식 끝나고 갈게요.”

“뭐? 씨발! 네 결혼식에 네가 안 오면 어떡해!”

에이든이 발끈해 외쳤다가 제가 내뱉은 단어를 깨닫고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다급한 나머지 에이든은 또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오는 동안 마차에서 또 속으로 씨발씨발 욕을 해 댔더니 금세 버릇이 되어 버렸나 보다. 이놈의 주둥이, 진짜. 에이든이 다급하게 올리비아를 살폈더니 아니나 다를까, 올리비아의 표정은 경악이었다.

“미안해! 이건 욕한 게 아니라! 아니, 욕한 건 맞지만! 네게 한 욕은 아니야! 그냥 당황해서 한 말이야!”

에이든은 다급하게 변명했다. 올리비아가 또 뒤돌아 도망갈까 봐 전전긍긍했다. 초조함에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올리비아가 뛰쳐나왔다. 예상과 반대로 자신 쪽으로 올리비아가 달려 나왔다.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에 에이든도 참지 않고 마주 달려 나갔다.

“아, 씨발!”

참고로 이건 에이든의 외침이 아니었다. 에이든의 돌발 행동에 놀란 케일럽이 던진 외침이었다. 그를 호위해야 하는 케일럽의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만했다. 다행히 켈타족 쪽이 얌전해서 케일럽도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올리비아와 에이든 두 사람은 한가운데서 만났다.

“헉, 에이든, 헉, 헉!”

올리비아가 다급하게 말을 했다. 달려오느라 호흡이 급했는지 숨결이 격했다.

“괜찮아. 기다릴게. 숨부터 쉬고 천천히 이야기해.”

이러다 숨넘어가게 생겨 에이든이 다독이자 올리비아가 다급한 표정으로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조금 호흡이 진정되자 물었다.

“저랑 결혼해요?”

“……당연하지. 내가 누구랑 결혼해?”

에이든은 기가 막혀 되물었다. 하지만 그런 에이든의 감정을 모르는 듯 올리비아의 표정이 활짝 폈다. 올리비아는 정말 꿈만 같았다. 에이든 도련님이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줄 알고 슬펐는데 그게 아니었단다. 자신과 결혼할 거란다.

‘나랑 에이든 도련님과 결혼이라니?’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상상해 본 적 없지만, 이렇게 말을 들으니 너무 좋았다. 이 넘치는 기쁨을 어쩌지? 행복해서 발을 동동거리던 올리비아는 뒤를 돌아보고 크게 외쳤다.

“에이든이 저랑 결혼한대요!”

아까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말했던 부족장에게 다시 알려 주려 외친 거지만, 그곳에 있는 건 부족장만이 아니었다. 켈타족을 지키는 경비대원들도 수두룩했고, 반대편엔 에이든이 끌고 온 병사들이 수두룩했다.

서로 무기를 겨누고 있던 그 상황에서 울린 올리비아의 외침에 모두 침묵했다. 그저 황당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반응뿐이었다. 그리고 케일럽은 언제나 제 살길을 잘 찾는 인물이었다. 정말 어이없고 황당해 미치겠지만 이럴 때 해야 할 행동은 잘 알았다.

“축하합니다!”

짝짝짝!

이것만이 제 살길이다를 깨달은 케일럽이 크게 외치며 박수를 쳤다. 에이든이 흘긋 돌아보는 걸 확인하고 아주 열렬히 쳤다. 그리고 옆에서 눈치를 보던 다른 기사를 툭 건드렸다. 얼른, 너도 동조하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 기사가 따라 했고, 기사들이 그러니 병사들도 하나둘 무기를 내리고 박수를 쳤다.

짝짝짝!

“결혼을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들은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열렬히 호응했다. 이쪽에서 축하의 박수를 치니 켈타족 쪽에서도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많은 병사들 앞에서 결혼식을 고백하고 축하받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에 올리비아는 더욱 헤벌쭉 웃었고 그녀가 행복하면 더 행복한 에이든은 어이없던 감정을 떨쳐 버리고 같이 웃었다. 아무렴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합동 축하를 했더니 두 무리의 팽팽하던 기운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들 화내는 게 부질없다고 여겼고 자연스럽게 무기를 집어넣었다. 어색한 대치 상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 부족장은 에이든 일행을 정식으로 초대했다.

에이든 일행은 다 함께 켈타족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다. 외부인이 거의 없는 마을이라 따로 숙소가 없어서 대부분은 마을 회관으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에이든과 케일럽만이 부족장의 집으로 초대받았다.

케일럽이 곤란해하는 동안, 에이든과 올리비아는 희희낙락했다. 손을 꼭 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빙긋 웃어 댔다. 그런 그들을 보는 부족장의 눈빛은 살벌했다. 옆에서 구경하는 케일럽조차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데 저 하찮은 상사 놈은 그게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보다 못한 케일럽이 나섰다.

“좀 떨어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며칠 동안 떨어져 있었거든?”

역시나 에이든다운 대꾸였다.

“맞아요. 우리 오랜만이에요.”

올리비아까지 덧붙이자 케일럽은 헛기침하며 부족장의 시선을 피했다. 이를 악물고 에이든과 올리비아를 노려보던 부족장이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려던 게 확실한가?”

“네. 올리비아와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몰래 준비해서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들켜 버렸네요.”

에이든이 재빨리 답했고 그 답에 올리비아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행복함으로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지금 당장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러기엔 훼방꾼이 너무 많았다.

바툰은 도저히 에이든이란 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파렴치한이라고 말할 정도인데 신용이 가겠느냔 말인가. 지금 하는 꼴도 그렇고. 그래서 그 옆에 있는 호위 기사를 노려봤다.

“맞습니다. 두 분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부족장의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케일럽이 재빠르게 답했다.

“그럼, 확실히 말했어야지. 왜 사람이 오해하게 하나?”

“깜짝 선물이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할 줄은 몰랐죠.”

“죄송해요. 제가 멍청해서…….”

부족장과 에이든의 대화에 올리비아가 지레 놀라 사과했다.

“아니야. 네 잘못이 어디 있어? 미리 말 못한 내 잘못이지.”

에이든이 다급하게 올리비아를 다독였다. 계속 괜찮다고 속삭여 주자 올리비아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그런 행동을 전부 보고 있던 부족장은 한숨을 삼켰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놈이지만, 꼴에 올리비아에겐 지극정성을 다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올리비아에게 저런 존재가 있어서. 그녀를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단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면 됐다. 그녀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다. 그는 올리비아의 선택에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같이 보내기엔 걱정이었다. 그래서 나섰다.

“어차피 할 결혼식이면, 여기서 하는 게 어떻겠나?”

이미 저쪽에서 준비 다 해 놨는데, 무슨 헛소리지? 그런 표정을 짓던 에이든은 부족장의 단호한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말만 권유고 숫제 협박이었다.

하지만 부족장 마음도 이해는 간다. 올리비아가 오해하고 슬퍼했으니 아버지 입장에선 신경 쓰일 수밖에. 확실히 하고 보내고 싶겠지.

사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아버지도 자신의 아버지 같을 줄 알았다. 그동안 찾지 않았기 때문에 백작 같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올리비아를 신경 쓰는 모습이 보였다. 에이든은 그게 다행이라고 여기는 한편, 올리비아의 아버지가 쓰레기라서 그녀에게 정말 자신밖에 없었으면 좋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결혼식을 한 번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쪽에서 하고 저쪽에 가서도 한 번 더 하면 되지.

“올리비아, 우리 여기서 결혼할까?”

“그래도 돼요?”

되묻는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행복함 그 자체였다.

“그럼,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그러면 할래요.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올리비아의 바른 대답에 에이든의 입가가 헤벌쭉 벌어졌다. 얜 어쩜 이렇게 예쁜 말만 찾아서 하는지 모르겠다. 올리비아가 결혼을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진작 말하고 같이 준비했을 텐데.

“그러죠. 여기서 결혼하죠. 뭐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에이든은 부족장을 향해 산뜻하게 알렸다. 사실 결혼이 더 다급한 건 에이든이었다. 좋고 멋진 결혼식도 중요하지만 이번 일로 확실히 느꼈다. 올리비아에겐 더 확실히 알려 주는 게 낫겠다고. 빨리 결혼해야 자신이 안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거면 되었네. 준비는 내 쪽에서 하지.”

부족장은 그렇게 말하고도 할 말이 더 남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서로 좋아 죽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케일럽은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섣불리 표현하지 않았다.

저 부족장이란 분은 어쩐지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저 단단한 몸이 쓸데없이 크기만 키운 근육이 아니라 제대로 단련된 근육인 걸 안 탓이다. 특히, 자신이 앉은 자리에 이상하게 부서진 식탁의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식탁을 반으로 쪼개는 것보다 이렇게 구멍을 뚫는 게 더 힘들었다. 잘못 덤볐다간 뼈도 못 추릴 수 있었다. 저런 사람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에이든 왜 이렇게 안색이 나빠요?”

“응?”

올리비아의 손이 올라와 에이든의 뺨을 감쌌다. 여기저기 쓰다듬는 손길이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살이 빠진 것 같아요.”

에이든은 이럴 땐 여우였다. 오랜만에 닿은 손길에 헤벌쭉해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그리고 올리비아가 자신의 약한 모습에 약한 걸 아니 더 힘든 척했다.

“너 보고 싶어서 그랬지. 다음부터는 나한테 말도 없이 어디 가지 마. 알겠지?”

에이든이 시무룩한 얼굴로 시름에 잠긴 목소리를 냈다.

“어? 자카르가 말했다고 했는데…….”

가녀린 에이든의 목소리에 올리비아의 놀라 우물거렸고, 에이든은 또 욕설을 참았다. 그 납치범이 보낸 느낌의 서신 말인가. 자카르 놈도 정신 교육이 필요했다. 봐줬더니 정도를 모르는 놈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케일럽 저놈도. 저놈이 아니었으면 이런 고생을 할 일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결혼에 대해 올리비아가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기뻐했으니 한 번쯤은 봐줘야겠다.

“그런 거 말고. 어디 가고 싶으면 네가 직접 말해. 알겠지?”

“네. 그럴게요. 이번엔 잘못했어요.”

“괜찮아.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어딜 보나 행복한 연인 사이의 대화였다. 바툰은 그들의 대화를 들을수록 조금 더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 모습을 계속 보긴 힘들었다.

“무리해서 움직였을 텐데 좀 쉬는 게 어떻겠나?”

빨리 놈을 방구석에 처박아 버리고 얼굴을 보니 않으려는 계획이었다.

“그게 좋겠네요.”

부족장의 제안에 에이든이 답하자 올리비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에이든의 손을 잡았다.

“이쪽이에요. 저는 저쪽 방 써요.”

“뭐!”

자연스럽게 에이든을 제 방으로 이끄는 올리비아의 행동에 바툰은 벌떡 일어났다. 격한 움직임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씩씩거리며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을 짓던 그는 올리비아의 맑은 표정에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올리비아 빼고 남들 다 의미를 아는 심호흡이었다.

“편히 쉴 수 있도록, 방을 따로 내주겠네.”

이를 악문 음성에 에이든은 잠시 제멋대로 할까 하다가 참았다. 아무리 인연이 깊지 않은 부녀라고 해도, 부족장과 올리비아가 부녀인 건 변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지켜야 할 땐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에이든이었다. 막 에이든이 알겠다고 답하려던 때였다.

“따로 안 주셔도 돼요. 에이든은 저랑 같은 방 쓸 거예요. 그렇죠?”

올리비아의 해맑은 음성이 울렸다.

‘얜 진짜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만 하지?’

에이든은 충격에 빠진 부족장을 슬그머니 쳐다보고 저를 바라보는 올리비아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네가 원한다면.”

“에이든 침대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둘이 누울 수 있어요.”

올리비아가 평소에도 같은 침대를 쓴다는 걸 암시하며 쐐기를 박았다. 우지끈. 엄청난 소리가 들리며 부족장이 짚었던 식탁이 또 부서졌다. 올리비아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어제 겪었던 일이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식탁을 빨리 바꿔야겠어요! 어젯밤에도 그러더니 계속 부서지네요.”

올리비아의 천진한 말에 부족장의 뺨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냈다.

“그래, 튼튼한 걸로 바꿔야겠구나.”

케일럽은 그 억지웃음이 오싹했지만 올리비아에겐 아닌 모양이었다. 이번엔 꼭 튼튼한 걸로 바꾸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케일럽은 부들부들 떠는 부족장을 보고 찔끔해서 에이든을 봤지만 얄밉게도 그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저분이 분노하면 감당하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닌가. 제발 도발 좀 하지 말아라. 왜 이런 놈의 호위 기사 노릇을 하게 되었는지 케일럽은 오늘도 자신의 일을 한탄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잘렸어야 하나 후회했다.

똑똑.

그 살벌한 공기를 꿰뚫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케일럽은 이 불편함을 벗어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경솔한 생각이었다. 부족장이 일어나서 문을 열었고 상대를 발견한 그의 음성이 차갑게 울렸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에이든을 상대할 때보다 더 서늘한 감정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 기색을 느낀 에이든과 케일럽은 긴장하며 방문자가 누군지에 집중했다.

“제가 온 게 불편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몸도 불편하신 분이 왜 직접 움직이셨습니까, 절 부르시지.”

부족장의 말에 노인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잠시 웃음을 터트렸던 노인이 되물었다.

“이젠 들어오란 소리도 하지 않으십니까?”

“손님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무녀님의 거처로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부족장은 손님의 방문을 돌려 거절했다. 하지만 상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자 들렀습니다. 비키시지요.”

“나중에 인사하시지요.”

“부족장, 현명하게 행동하시지요.”

살짝 협박처럼 들리는 어조였다. 결국, 부족장이 슬며시 몸을 비켰다. 그러자 큰 체구에 가려졌던 허리가 굽은 노인이 등장했다. 그녀는 안을 둘러보며 들어섰다.

그리고 앉아 있는 이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다. 흐릿한 눈동자가 노골적으로 사람을 훑어 그 시선을 받는 사람에게 퍽 불쾌한 느낌을 주는 눈길이었다. 에이든은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나서기 전에 부족장이 방문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 부족의 조언자이신 무녀님이네. 저쪽은 올리비아와 결혼할 에이든, 그의 호위인 케일럽입니다.”

“소문이 자자한 손님들을 이렇게 보는군요. 반갑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잠시만 머물다 가겠습니다.”

무녀님이란 소리에 에이든은 더욱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경계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케일럽은 절제된 태도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는 걸로 인사를 마쳤다.

“과연 잠시일까요?”

“잠시일 겁니다.”

무녀의 의미심장한 말을 에이든은 단호하게 잘라 냈다. 허튼짓은 시도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에이든은 자카르를 통해서 이들이 무얼 원하는지 들었다. 상대가 자신에게서 올리비아를 빼앗아 갈 생각이라면 에이든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무녀는 마치 에이든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흐릿하게 웃으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람의 속내를 파헤치는 듯한 노골적인 눈빛이라 에이든은 불쾌했다.

“제게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경계하고 있던 터라 다소 날카로운 음성이 튀어 나갔다.

“아닙니다. 그냥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에이든의 무례함을 무녀님은 그저 웃어넘겼다. 늙은이들이란 능구렁이 같았다. 에이든은 상대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어서 신경이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늙은이가 방해가 되었네요. 푹 쉬세요.”

무녀님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볼일을 다 봤다는 가뿐한 태도라 다들 당황했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찾아왔으면서 벌써 돌아가다니?

“가십니까?”

“네. 갑니다.”

정말 이대로 가는 건지 의아함을 느낀 바툰이 묻자 무녀님은 짧게 말하고 진짜로 떠났다. 바툰도 처음 보는 기이한 태도였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무녀님이 무엇을 보고자 찾아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본 건지 알 수 없었다.

“에이든, 우리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에이든도 같이 심각해질 뻔했지만 올리비아의 속삭임에 홀랑 넘어가 버려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럴까?”

“네. 얼른 들어가요.”

에이든은 모르는 척 올리비아의 손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홀라당 같은 방에 들어갔지만 바툰은 무녀님의 행동이 더 신경 쓰여 그들을 말리지 못했다.

* * *

올리비아와 단둘이 되자 에이든은 바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올리비아의 호응을 받으며 그리운 향기에 녹아내렸다. 입술이 너무 달콤했다. 침대에 눕히고 손으로 그녀의 온몸을 훑으며 올리비아 자체를 느꼈다.

“올리비아.”

황홀함에 빠져 연신 올리비아를 부르며 그녀를 느끼기에 여념 없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올리비아의 반응도 열정적이었다.

“하아, 에이든…….”

바짝 선 가슴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고, 파르르 떠는 몸짓이 유혹적이었다. 에이든은 인내심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껴 올리비아를 꽉 끌어안으며 참았다. 이대로 더 진도를 나가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올리비아를 안기엔 그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인물이었다.

“에이든?”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을 껴안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인내하자 올리비아가 그를 부르며 왜 더 하지 않느냐는 시선을 보냈다. 진짜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

“참자. 오늘은 이렇게 안고 대화를 좀 나누다가 그냥 자자.”

“네.”

다행히 오늘은 덜 달아올랐는지 올리비아가 쉽게 동의했다. 그녀가 먼저 달아올라 매달렸으면 에이든은 버틸 재간이 없었을 텐데 아쉬웠다. 에이든은 한참을 사랑스러운 뺨에 입을 맞춘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올리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거야?”

“뭘요?”

“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거라고 어떻게 오해를 할 수가 있어?”

“그러게요. 제가 멍청했어요!”

아니, 그렇게 해맑게 인정해 버리면 어쩌라고.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귀여움에 화를 낼 수도 없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다시는 그런 오해 하지 말고. 혹시 오해할 일이 생기더라도 꼭 나한테 먼저 물어봐. 알겠어?”

대신 단단히 일러뒀다. 다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랐다.

“네. 그럴게요.”

대답 한번 참 빠르다. 에이든은 귀여워서 올리비아의 입술을 또 한 번 훔쳤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살이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식한 자카르 놈이 올리비아를 제대로 못 챙겼을까 봐 걱정했는데 잘 챙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올리비아가 갑자기 입술을 삐죽였다.

“사실 그때 에이든이 화낸 게 속상했어요. 그게 그렇게 혼날 일이었어요?”

“내가? 무슨 일이었지?”

자신이 속상하게 만들었다니, 뭐지? 올리비아가 속상함을 드러냈지만 당황한 에이든은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사탕이요! 전 집사님 말씀 들은 건데. 그걸로 에이든이 무섭게 화내서 저 억울했어요!”

올리비아의 설명에 에이든은 피임약 이야기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사탕이라니. 예상은 했지만 올리비아가 정말 생각 없이 피임약을 먹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에이든은 안도하며 허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올리비아를 껴안고 사과했다.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다 나빴어. 속상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네 마음 몰라줘서 미안해.”

“……이젠 괜찮아요.”

이젠 정말 괜찮다는 듯 배시시 웃는 올리비아를 보며 에이든은 안도했다. 올리비아치고 꽤 오래 꿍해 있었던 거다. 진작 마음을 터놨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속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이든은 조금 느리게 의문이 들었다. 올리비아는 아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워낙 마음이 급해서 에이든은 음흉하게 혼자 임신 계획을 추진하긴 했지만, 이젠 올리비아의 의견을 들어도 될 것 같았다.

“올리비아, 혹시 아이가 생기면 어떨 것 같아?”

“아이요?”

“그래. 아이. 너와 나의 아이.”

올리비아의 눈이 커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단 놀란 표정이었다. 엄청 당혹스러운지 한동안 우물거리더니 곧 울먹이는 얼굴로 응시해 왔다.

“저 아이 가졌어요?”

‘아씨, 얜 왜 이렇게 멍청한 모습도 귀엽지?’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멍청한 물음이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뺨에 쪽쪽 입을 맞추며 에이든은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니. 아직 안 가졌어. 그냥 네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서 그래.”

에이든의 말에 올리비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편해졌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며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싫은 건 아닌데요…….”

“아닌데?”

“아직 무서워요.”

그렇게 말하고 올리비아가 눈치를 봤다. 정말 무서운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올리비아는 아직 어렸다. 임신이란 꽤 숭고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충분히 무서워할 만했다.

“그래, 그러면 나중에 갖자.”

“나중에요? 언제요?”

“네가 갖고 싶을 때.”

“그래도 돼요?”

“그럼, 갖고 싶을 때 말해. 그때 노력하자.”

전혀 어려울 것 없는 일이라 에이든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올리비아의 얼굴에 짙은 안도감이 퍼졌다. 두려움이 걷히는 그 맑은 표정에 에이든은 웃었다.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아이를 갖게 할 생각은 없었다. 올리비아가 자신을 사랑하는 이상, 아이가 급할 건 없으니까. 만약 올리비아가 자신을 떠날 생각을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억지로 갖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었다.

나중에 올리비아가 괜찮다고 여길 때 갖는 게 나았다. 앞으로 피임약이야 자신이 먹으면 되는 거고. 그걸 떠올리자 에이든은 한숨이 차올랐다. 오늘 밤 얌전히 자야 할 이유가 또 늘어 버렸다. 몸에 닿는 모든 부분이 유혹적이라 힘든데. 에이든은 애써 의식을 돌렸다.

“그리고 또 무슨 일 없었어?”

“무슨 일이요?”

“아버지 만났잖아.”

“아! 부족장님이 제 아버지래요.”

자카르가 숨기지 않았으니 올리비아 빼고 다 아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일이면서 이렇게 관심 없는 올리비아의 태도가 에이든은 좋으면서도 걱정이 됐다.

“응. 들었어. 아버지 만나니까 어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살짝 이상해요.”

올리비아의 애매한 표정에 에이든은 불안감을 느꼈다. 전처럼 완벽하게 타인을 대하는 감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족이라 의식은 하는 거였다. 단지 실감을 못하는 것뿐이다.

분명히 축하해야 할 일인데 에이든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는 올리비아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불안감을 숨기며 물었다.

“아버지랑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질문이 끝나는 순간 올리비아가 에이든을 밀어냈다. 얼떨결에 밀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엄한 시선이 닿는 순간 에이든은 안도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 에이든이랑 있을 거예요!”

제법 단호하게, 마치 혼내듯 야무지게 말하는 게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기뻐서 미칠 것 같았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듯한, 그녀의 전부가 된 것 같은 이런 순간이 정말 좋았다.

“진짜 좋다!”

“저도 에이든이 좋아요!”

에이든이 감격에 겨워 외치니 올리비아가 따라 외쳤다. 에이든은 그 의미가 아니었지만 올리비아의 반응이 귀여워 그저 웃었다. 둘은 며칠간 떨어져 있었던 시간에 회포를 풀 듯 그렇게 누워서 조곤조곤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 * *

“결혼식은 이틀 뒤 열겠소.”

다음 날 에이든은 부족장에게 결혼식 날짜를 통보받았다. 상식적으로 나올 리 없는 매우 급박한 날짜였다.

“이틀 뒤 말입니까?”

“왜 놀라지?”

“예상보다 빨라서 그렇습니다.”

사실 에이든은 부족장이 결혼식을 질질 끌 줄 알았다. 결혼식이 끝나면 에이든이 올리비아를 데리고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아는 부족장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혼식을 미룰 거라 생각했었다.

“빠른 게 좋지 않겠소?”

부족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물어볼 뿐이었다.

“뭐 저야 좋지요.”

빨리하면 에이든이야말로 좋았다. 올리비아와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서로를 구속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기는 건 언제나 기꺼운 일이다. 에이든은 결혼식 일정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순식간에 결혼식이 준비되었다. 에이든도 놀랄 정도의 추진력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합동하여 준비하니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사실 결혼식까지의 일정이 이틀 후가 된 것도 의상 준비 기간 때문이라고 들었다. 장소는 마을 회관에서 하고 음식은 함께 모여서 준비한단다. 몇몇은 마을 회관을 정돈하고 꾸몄고, 몇몇은 전통 의상 만들기에 매달렸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정신없이 결혼식을 준비하는 사이 에이든은 무턱대고 즐거워할 수 없었다. 거슬리는 점이 있어서 헤벌쭉 늘어질 수 없었다.

우선 자카르 일행을 만날 수 없었다. 일부러 찾아가 보았지만 만나지 못했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놈이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 것 같았다. 누가 봐줄 줄 알고? 에이든은 올리비아와 관련된 일은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기필코 납치한 복수를 할 거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점은 자꾸 무녀라는 늙은이가 눈에 띄었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작은 마을이니 그저 동선이 겹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무녀는 의도적으로 에이든과 올리비아의 곁을 방황했다. 웃긴 점은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저 멀리서 침묵하며 소름 돋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매우 불쾌했다. 에이든은 이곳에 올리비아가 얽매이는 걸 볼 생각이 없었다. 이 불길한 곳을 당장 떠나 버리고 싶었지만 올리비아가 정말 기쁘게 웃어서 그럴 수 없었다.

“저기서 우리 결혼해요?”

“응.”

“전통 의상이 예뻐요! 저한테 잘 어울릴까요?”

“네가 더 예뻐.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 걸 찾는 게 더 힘들지.”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돌아가서 결혼을 하자고 하기엔 올리비아가 너무 행복해했다. 그렇다고 무녀란 인물을 치워 버릴 수도 없었다. 켈타족 마을 내에서 무녀를 해칠 수도 없었다. 왕세자를 처리할 때와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

정말 거슬리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다 늙어서 힘도 없는 늙은이가 잘도 쫓아다녔다.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무녀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철통 방어했다. 늘 함께 붙어 다니며 다가오지 못하도록 무녀 쪽을 노려봤다. 다가와 개소리하면 당장 물어뜯어 줄 각오로 쳐다봤다. 그 흉흉한 기색을 느낀 듯 무녀는 더욱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에이든이 방심하면 무녀는 갑자기 나타나서 그저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결혼식 때까지 방 안에만 있어야 하나 고민될 정도였다.

하지만 들뜬 올리비아는 마을을 구경 다니길 원했고, 에이든은 그걸 말릴 수가 없었다. 좋아서 방방 뜨는 올리비아를 에이든이 어떻게 말린단 말인가.

그래서 에이든이 말 못할 예민함의 끝을 달릴 때, 그는 동지를 발견했다. 부족장 또한 무녀를 발견할 때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첫날 무녀의 방문에 목소리를 굳혔던 이유를 보여 주듯 딱딱했다. 에이든만큼 무녀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에이든은 결혼식 전날 밤 부족장을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올리비아를 무녀로 만들 겁니까?”

에이든은 진지했다. 올리비아와 다시 재회한 날 밤 그녀에게 확인했다. 똑똑해질 생각 있냐고. 올리비아는 이번에도 별로 생각이 없다고 그랬다. 관심이 없다는 올리비아를 굳이 설득할 이유가 에이든은 없었다.

이기적인 말이지만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아둔한 게 좋았다. 그녀가 똑똑해지면 그만큼 보는 눈이 넓어질 것 아닌가. 지금이야, 올리비아의 눈에 무언가 씌워져 있어서 ‘에이든은 정말 아름다운 거 같아요. 멋져요. 똑똑해요. 다정해요.’라고 외치지만, 그 아둔함이 걷히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랐다. 보는 눈이 밝아져서 ‘에이든은 하찮아서 싫어요!’라고 외치면 견디지 못할 거였다.

그녀가 총명해지고 싶다고 하면 그걸 막을 생각은 없지만 굳이 그쪽으로 유도할 생각은 조금도 없단 소리였다. 만약 이들이 올리비아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면 그건 에이든이 막아야 했다.

“아니요. 난 올리비아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오.”

다행히 부족장은 올리비아의 편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태도를 보면 올리비아를 신경 쓰는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부족장이란 지위를 생각해 혹시 모른다고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건 부족의 의견입니까? 개인의 의견입니까?”

에이든의 질문에 부족장이 눈빛을 새파랗게 빛냈다.

“개인의 의견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것이오. 당신도 올리비아를 지키시오.”

마지막 말까지 듣고 에이든은 부족장의 결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왜 이 결혼식을 서둘렀는지도. 올리비아를 부족에게서 떨어뜨리려 에이든의 손을 잡은 것이다. 에이든이 탐탁지 않아도, 그는 진짜 올리비아를 위한 선택을 했다.

에이든은 이 상황이 낯설었다. 부족장은 자신의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란 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에이든의 사전에 올리비아를 위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에이든은 태도를 달리했다.

“말씀 편하게 하시죠.”

이놈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툰은 갑작스러운 에이든의 말에 떨떠름하게 답했다.

“……차차 그러겠네.”

“결혼식이 끝나는 즉시 올리비아를 데리고 떠나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바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수락했다. 마을에 오래 머물러서 올리비아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걸 그도 알았다. 이렇게 헤어지는 게 아쉽지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라 가슴이 아프지만 그녀를 위해 보내 줘야 했다.

“올리비아가 원한다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고맙네. 올리비아를 꼭 지키게.”

“그럴 겁니다.”

바툰의 씁쓸함을 읽은 듯 에이든이 덧붙였고 그는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야심한 밤 두 사람은 올리비아를 지키기 위한 약속을 했다.

* * *

그리고 결혼식 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부터 일어나 두 사람은 준비를 마쳤다. 정확히는 마을 사람들이 들이닥쳐 두 사람을 인형 꾸미듯 꾸며 줬다. 켈타족의 전통 혼례복을 입은 올리비아는 너무 예뻤다.

“올리비아, 진짜 아름답다.”

“에이든도 너무 멋져요! 그 옷도 진짜 잘 어울려요!”

올리비아의 광대가 승천할 듯 올라가서 에이든도 행복했다.

사실 혼례복을 입을 때만 해도 별 감상은 없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실감하지 못했는데, 올리비아와 진짜 결혼하는 거였다. 그것도 오늘. 조금 후면 올리비아는 진짜 자신의 여자였다. 누구보다 올리비아의 일에 제일 강력하게 참견할 권리를 얻는 거였다. 그 상상만으로 달아올라서 심장이 뛰었다. 갑자기 이 상황이 강하고 현실감 없게 다가왔다.

“어서 출발하지. 이러다 늦겠네.”

바툰의 말에 에이든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올리비아 출발할까?”

“네.”

해맑게 답하는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그들이 부족장의 저택을 나설 때였다. 문 앞을 막아선 노인을 발견하고 모두 멈춰 섰다.

“어? 안녕하세요.”

해맑은 올리비아의 인사에 에이든은 재빨리 그녀를 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녀의 등장에 에이든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동안 얌전히 있다가 결혼식 직전에 이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비켜 주십시오.”

바툰도 여차하면 무녀님을 밀어낼 기세로 주시했다. 무녀는 두 남자의 흉흉한 기색에도 느긋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올리비아와 에이든을 번갈아 가며 봤다. 아주 잠깐인 듯, 어떻게 보면 꽤 길게 느껴질 만큼.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노회한 눈으로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천천히 몸을 비켜섰다. 마치 앞길을 터 주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가 보세요.”

“무슨…….”

“늦겠습니다. 어서 가 보세요.”

무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따지려는 에이든의 말을 끊었다. 에이든은 무슨 상황인지 알 수는 없지만 훼방꾼이 없다면 좋은 거였다.

“올리비아, 어서 가자.”

“네!”

에이든은 냅다 올리비아를 이끌었다. 재빠르게 마을 회관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무녀는 말없이 쳐다봤다. 그래서 바툰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막지 않으시는 겁니까?”

무녀가 바툰을 올려다봤다.

“막으면, 부족장님이 절 막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무녀는 낮게 웃을 뿐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태도였다. 예전부터 무녀님의 생각을 전부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요 며칠 정말 그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두 사람의 혼례가 시작되었다. 바툰은 그 모습을 보며 감격에 휩싸였다. 존재도 몰랐던 딸이 장성하여 결혼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가 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무녀님의 말에 바툰은 목이 막혔다. 그러고 싶었다. 저 아름다운 모습을 더 확실하게 눈과 기억에 담아 두고 싶었다.

“여기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가까이 서 볼 자격이 없었다. 하나도 해 준 것 없으면서 이제 와 나 설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눈에 담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무녀는 그런 바툰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혼례를 올리는 모습을 응시하는 걸 보며 바툰은 불안감을 느꼈다.

“저 아이를 차기 무녀로 받아들이시겠단 건 포기하신 겁니까?”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 기다릴 수 없었다. 올리비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그 어떤 끔찍하고 잔인한 행동일지라도. 무녀님이 혼례를 막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올리비아를 무녀로 만들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확인해야만 했다.

바툰의 결연한 목소리에 무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무녀는 다시 혼례를 진행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봐도 혼례 당사자인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보는 사람까지 설렐 정도로.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무녀님이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무녀가 된다면, 우리 부족 최고로 현명한 아이가 될 것입니다.”

무녀님의 나직한 말에 바툰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최고로 현명한 존재가 될 거란 소리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무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건가 심란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자신이 정리하면 될까? 허리가 굽어 자신의 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무녀님을 바툰이 무거운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녀가 되지 않는 게 낫겠지요.”

바툰의 손이 움찔 떨렸다. 적절한 순간에 내뱉은 무녀님의 말에 마치 제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심장이 뛰었다.

“무녀로서의 자질은 좋지만 심성이 너무 고와요.”

이건 또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심성이 고운 것도 문제가 됩니까?”

“그렇지요. 부족을 위해서 결정할 땐 비정한 면도 있어야 합니다.”

마치 그녀가 과거에 했던 것처럼, 그런 행동들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 같았다. 바툰은 올리비아에게 그런 걸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잔인한 짓을 하기에는 저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너무 예뻤다. 바툰이 주먹을 쥐고 떠는 걸 보며 무녀는 낮게 읊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고 싶어도 못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훌륭한 개가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바툰은 그 개가 에이든을 지칭하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알아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멈칫했더니 무녀가 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얼마 전부터 무녀의 미래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더군요. 음흉하고 사나우면서 집요하더군요. 그래서 서둘러 데려오려고 했는데, 늦었나 봅니다. 미래를 볼 때마다 그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더군요.”

“검은 그림자는 에이든을 말하는 겁니까?”

“만나 보니 확실하더군요.”

음흉하고, 사나우면서 집요하다니. 썩 좋지 않은 표현에 바툰은 미간을 좁혔다. 원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인데 본성이 그렇다니 더 마뜩치 않았다. 바툰의 그런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무녀의 웃음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그래서 포기하는 겁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저 남자가 그런 인물이라서 올리비아를 무녀의 길에서 놓아주는 겁니다. 그녀가 무녀가 된다면 부족을 택하겠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놓지도 못할 겁니다.”

무녀님의 설명만으로 올리비아가 겪을 고생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걸 막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겁니다.”

“부족장이 그리 말씀하지 않으셔도 저 남자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는 무녀가 된 올리비아의 주변을 끊임없이 배회할 겁니다. 그러다가 저 남자의 인내심이 끝났을 때 파멸이 되겠죠.”

“……그래서 계속 확인한 겁니까?”

“네. 아무리 봐도 미래가 변하지 않더군요. 저래 보여도 분탕질 치는 능력 하나만은 대단한 모양입니다. 거대 세력을 끌어들여 부족과 전쟁이라도 치를 인물입니다. 차라리 여기서 연을 끊는 게 낫습니다.”

무녀님이 올리비아를 포기한 이유를 듣고 나니 바툰은 기분이 더 찜찜해졌다. 이 굴레에서 올리비아가 벗어나서 기쁘면서도, 그녀와 같이 살 에이든이란 놈이 더욱더 거슬렸다. 하지만 그만큼 올리비아를 위해 최선을 다할 거란 것도 알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이걸로 안도할 수 있었다. 무녀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상, 올리비아는 부족과 연이 끊긴 거였다. 이 또한 올리비아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부족을 위해 결정한 거겠지만. 그게 무녀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유가 어떻든 올리비아만 자유롭고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바툰은 다시 혼례를 치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혼례가 막바지에 다다랐는지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올리비아!”

그때, 갑자기 에이든이 괴성을 질렀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쩌렁쩌렁하게 들릴 정도로 커다란 음성이었다. 댕그랗게 눈을 뜨고 놀란 올리비아를 보며 에이든이 이어 외쳤다.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

소리가 너무 커서 혼례를 구경하러 오지 않은 부족민까지 들을 수 있는 맹세였다. 어이가 없어서 넋을 뺐던 하객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을 축하하는 박수를 쉼 없이 보냈다. 에이든의 패기를 웃으며 받아 주었다. 모두의 축하에 신이 난 올리비아의 얼굴에 더욱더 밝은 웃음이 퍼져 바툰도 같이 웃었다. 어쩐지 저들은 평생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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