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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날 좋아하는 사람. (17/19)

16. 날 좋아하는 사람.

마을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세기의 사랑 고백에 구경꾼이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그들은 우선 자리를 이동해 대화를 이어 가기로 했다. 당연히 에이든과 올리비아의 행선지는 백작가였다. 그러자 켈타족이 강하게 나섰다.

“저흰 아가씨를 끝까지 따라갈 겁니다!”

“우릴 떼어 놓을 수 없을 겁니다!”

켈타족의 기세가 자못 맹렬해 그들과 함께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에이든도 이들이 왜 올리비아에게 그런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여겼다. 아무리 이들이 올리비아의 말에 꼼짝을 못해서 심리적으로 이쪽이 우위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다 함께 백작저로 이동해 익숙한 별채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에이든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올리비아를 향해 무릎을 두드렸다.

“올리비아는 여기.”

“네? 안 돼요.”

“왜 안 돼?”

“손님도 있고…….”

에이든의 당당함에 올리비아는 우물쭈물 주변의 눈치를 봤다.

“괜찮아. 다른 사람은 신경 안 써도 되는걸.”

“하지만…….”

“그래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손바닥을 검지로 살살 긁었다. 너와 닿고 싶어, 라는 속내를 내보이자, 올리비아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도요.”

“그럼 여기 앉으면 돼. 괜찮아. 정말 괜찮다니까?”

올리비아는 손님 앞에서 그럴 수 없다고 몇 번 거절하다가 에이든이 괜찮다고 살살 꾀니까 결국 모른 척 에이든의 무릎에 앉았다. 에이든은 기뻐 펄쩍 뛰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올리비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아당겼다. 자연스럽게 기대 오는 올리비아를 기쁜 마음으로 꽉 끌어안고 자신을 주시하는 인물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왜 찾아왔다고?”

에이든의 대화는 건성이었다. 빨리 대화를 끝마치고 올리비아의 치마를 뒤집고 싶어서 에이든은 안달이 났다. 올리비아가 품에 얌전히 기대 있는 게 너무 좋았다.

한쪽 손으로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조물조물 만져 주자, 아기처럼 소리 없이 배시시 웃는 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탐스럽게 올라간 뺨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또 배시시 웃는다.

‘이것이 바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감정인가.’

에이든은 심장이 계속 녹아내려서 이젠 형체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조심, 조심. 이러다가 또 심장 마비가 올지도 몰랐다. 에이든은 심장 보호를 떠올리며 격하게 감동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 에이든의 소소한 행복을 켈타족이 방해했다. 올리비아와 에이든, 두 사람의 꼴을 보다가 한 명이 나서서 말을 건넸다.

“우린 아가씨를 모셔 가려고 왔습니다.”

무슨 개소리를 저렇게 당당히 하는 거지? 흐물흐물 늘어지던 에이든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들이 할 중요한 말이란 것이 저따위 것이라면 괜히 시간을 냈다. 시간 아깝게. 당장 쫓아내라는 말을 하려던 에이든은 품 안의 여인을 돌아봤다.

“올리비아.”

“네.”

말간 표정에 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켈타족은 올리비아를 아가씨라고 부르며 모셔 간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건 올리비아를 존중한다는 소리였다. 마음대로 처리하기엔 자꾸 무언가 걸렸다.

에이든에게 올리비아는 물건이 아니었다. 내 올리비아, 내 것,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해서 올리비아를 소유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저급해서 저급하게 표현했을 뿐, 올리비아는 마땅히 존중받아도 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이들을 마음대로 내쫓을 수 없었다. 에이든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들이랑 대화했어? 무슨 말 들었어?”

“네. 아까 저 쫓아다니면서 설명해 줬어요. 하지만 저랑 상관없는 일 같아요.”

대답 한번 예쁘게 해서 에이든은 안도했다. 물론 그건 에이든의 시점에서 그럴 뿐이었다.

“제발! 아가씨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아가씨 재고해 주십시오!”

에이든과 올리비아의 말을 듣던 켈타족이 간절하게 외쳤다. 진심 가득한 호소는 살짝 처절하게도 느껴졌다.

“도련님 재고가 뭐예요?”

가만히 있던 올리비아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눈치를 보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러니까 얜 왜 이렇게 다 사랑스러운 거냐고.

“응. 다시 생각해 보라고.”

그게 그 뜻이었어? 하는 얼굴로 올리비아가 켈타족을 보며 눈을 흘겼다.

“다시 생각 안 해요.”

그리고 올리비아가 보란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켈타족은 울 것처럼 표정이 변했다.

“아가씨와 관련 있는 일 아닙니까.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그래도 켈타족의 행동 중에서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 올리비아를 계속 존중한다는 점. 그래서 에이든은 조금 너그럽게 굴기로 했다.

“우선, 당신들이 찾는 아가씨가 올리비아가 맞아?”

켈타족과 올리비아의 접점은 없었다. 저들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켈타족은 망설임 따위는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확신해? 올리비아는 백작가에서 나고 자랐어. 당신들 따위 모른다고.”

품에 안긴 올리비아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게, 진짜. 에이든은 이갈이 하는 짐승처럼 자꾸 이가 근질거렸다. 올리비아를 물고 우물거려야 이 근질거림이 조금 나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가씨가 맞습니다. 무녀님이 말씀해 주신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니까요.”

켈타족은 확신에 찬 대답을 했지만 에이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책으로 접하긴 했어도 에이든은 켈타족의 문화에 대해 조금 알았다. 무녀란 점성술사와 비슷한 존재였다. 미래를 읽을 줄 아는 신비한 존재. 부족의 조언자.

그리고 켈타족이 무녀의 말을 절대시한다는 건 안다. 가끔은 부족장보다 더 큰 발언권을 가진다는 것도. 그런 무녀의 말이니까 이들이 특징 하나를 가지고 올리비아를 자신들이 찾는 이라고 확신하는 건 알겠는데, 그건 에이든이 들은 정보와 다른 점이 있었다.

“난 당신들이 찾는 인물은 40대 여성이라고 들었는데.”

호위 기사는 처음부터 켈타족이 40대 여성을 찾고 있다고 언급했었다. 그게 갑자기 왜 올리비아가 됐냐는 거다. 에이든의 말이 끝나는 순간 켈타족이 표정을 굳혔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저들 중에도 머리를 쓰는 사람은 있었다. 에이든이 던진 힌트를 바로 알아차렸다.

“우리에게 가짜 정보를 주며 다른 영지로 유인한 게 당신이군.”

켈타족이 이를 갈며 에이든을 흉흉하게 노려봤다. 에이든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했단 걸 알아챈 것이다. 에이든은 굳이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올리비아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말했다.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봐. 어떻게 40대로 보여?”

귀여운 얼굴 소리에 올리비아의 뺨이 또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꼼지락거리는 게 진짜 예뻤다.

“처음부터 아가씨를 찾기 위해 아가씨의 어머니를 찾은 겁니다.”

켈타족이 단호하게 대꾸해서 에이든은 둘만의 시간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그래도 에이든은 이 상황이 참 흡족했다. 켈타족과 자신은 올리비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올리비아가 집중하고 있는 건 오직 자신이었다. 올리비아가 다른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어서, 다른 건 중요치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올리비아는 맹한 것 같다가도 사람을 미치게 하는 점이 있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에이든은 자신이 정말 미쳐서 짐승이 되기 전에 이 상황을 서둘러 마무리할 필요를 느꼈다.

켈타족이 처음부터 올리비아를 노렸다면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처를 할 테니까.

“그럼, 올리비아를 왜 찾는데.”

“다음 대 무녀가 될 분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게 무슨 헛소리야?”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정색하며 반문했다. 이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다음 대 무녀 자리가 연관된 거면 이들은 절대 올리비아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끈질기게 그녀를 데려가려고 노력할 거다.

자신과 올리비아를 떼어 놓겠다고? 이건 참기 힘들었다. 전부 죽여 버릴까. 에이든은 발끈하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올리비아를 좋아했다. 아니, 그걸로 부족해 사랑했다. 올리비아를 숭배하라면 할 수 있을 정도로 열렬한 감정이었다. 그런 자신의 감정은 감정이고. 실제로 올리비아의 단점을 모르는 건 아니다. 올리비아는 조금 맹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하고 착하며 빈말로라도 똑똑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올리비아가 무녀? 켈타족의 미래나 문화를 포함해 개인의 사소한 것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부족 망하려고 환장을 했나?

에이든이 황당해서 올리비아를 봤더니,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인데 신경도 안 쓰고 방긋거리고 있었다. 에이든은 켈타족보다 더 당황해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올리비아를 가리켰다.

“이것 봐. 올리비아는 관심이 조금도 없다고.”

“그래도 다음 대 무녀가 되실 분은 아가씨뿐입니다.”

여기도 벽이 있네. 켈타족이 꿋꿋하게 답해서 에이든은 또 욕할 뻔했다. 켈타족이 무녀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른다는 건 안다. 그래서 아까 올리비아의 사소한 말에 벌벌 떨었던 것도 이해하지만. 아무리 봐도 올리비아랑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란 말이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올리비아는……. 음, 좀 많이 착해. 아주 많이 착해.”

에이든은 최대한 단어를 골라서 말했다.

“저 많이 착해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올리비아는 제가 착하단 칭찬에 뺨을 붉히며 기뻐했다. 아, 진짜. 멍청하면 어때, 이렇게 귀여운데.

“그럼 많이 착하지.”

“앞으로 더 착하게 굴게요.”

헤벌쭉한 에이든의 말에 올리비아가 웃으며 응답했다. 에이든은 정말 기절할 것처럼 행복했다. 하지만 계속 둘만의 시간을 갖기엔 훼방꾼이 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거요? 그건 당연한 겁니다.”

놀랍게도 켈타족은 올리비아의 단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당연하다 말하고 있었다. 이 부족도 망하기 위한 지름길을 달리고 있나? 에이든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왜 당연해?”

“정식 무녀가 아니라서 아직 ‘하늘을 보는 눈’이 닫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뭔데?”

켈타족은 그것도 모르냐고 에이든을 향해 하찮은 놈 보는 시선을 던졌다. 저게 진짜. 에이든이 대화를 끝내 버릴 마음을 먹자, 그걸 알아차린 것처럼 켈타족이 설명했다.

“사람은 여기 또 다른 눈이 있습니다. 이건 하늘과 통하는 통로지요. 무녀는 그 눈을 통해서 미래를 엿보는 겁니다. 눈은 일반적으로 다들 어느 정도는 열려 있으며 인간의 오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눈이 크게 열릴수록 더 현명한 것이지요.”

정수리 부근을 가리키며 눈 타령을 하는 켈타족을 이번엔 에이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무녀의 자질을 가진 올리비아는 남들보다 더 현명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무녀의 자질을 가지신 분은 그 눈을 완전히 개방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훈련받지 않고 눈을 열어 두는 것은 위험하지요. 신체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눈을 닫아 두는 겁니다. 현 무녀님을 통해 안전하게 눈을 개방하고 닫을 줄 아는 능력을 배우면 그때 완벽한 오성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대충 켈타족의 문화를 알아도, 이런 내부 사정까진 알기 힘들었기에 에이든도 처음 듣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무녀의 능력과 특징이 관련된 이야기이니 아마 켈타족이라고 모두 아는 내용은 아닐 거다.

“확실한 거야?”

“그렇습니다. 역대 무녀님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가씨가 다음 대 무녀가 될 분이란 걸 확신하는 겁니다.”

이들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켈타족의 말이 전부 거짓이라고 치부하기도 힘들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를 돌아봤다. 자신의 이야기란 걸 알면서 지금 대화를 조금도 집중해서 듣지 않았는지 올리비아의 표정은 해맑았다. 에이든은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럼, 당신들은 올리비아를 데려가는 걸 포기하지 않겠군.”

“네. 그렇습니다. 아가씨가 같이 간다고 허락할 때까지 설득할 겁니다.”

올리비아에게 귀찮은 것들이 달라붙었다. 에이든은 턱을 올리비아의 어깨에 괴며 그녀를 더욱 끌어당겼다. 품에서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편한 자세를 찾아 기대 오는 올리비아의 행동에 더없이 마음이 꽉 찼다.

진짜 너무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 올리비아의 세상에 자신만 존재하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선 정리가 필요했다.

“당신들의 상황은 알겠어. 그만 나가 봐.”

“네?”

에이든의 선언에 켈타족이 대화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냐고, 아직 결정된 게 없다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당신들이 저택에 머무는 건 허용하지. 대화는 나중에 다시 하자고.”

“아니, 잠깐…….”

“그만하시죠.”

켈타족이 에이든과 올리비아를 붙들려 했지만 곁에서 대기하던 케일럽이 나서서 막았다. 에이든은 상대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제 할 말을 마치고 올리비아를 달랑 들어 안고 침실로 향했다.

“이야기를 제대로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가씨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조용하십시오!”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은 무시했다. 에이든에게 중요한 시간은 지금부터였으니까.

* * *

“도련님, 손님들을 저렇게 내버려 둬도 돼요?”

침실에 도착해 올리비아를 내려놓자마자 질문이 들려왔다. 그러면서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올리비아의 표정에 에이든은 실실 웃음이 나왔다. 얼굴만 봐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올리비아의 특별한 능력 아닐까?

“왜? 신경 쓰여?”

“저 사람들 이상하고 귀찮아요. 말을 잘 듣는 것 같은데, 또 엄청 안 들어요.”

에이든은 손으로 올리비아의 뺨을 감쌌다. 늘 닿던 피부인데 오늘따라 느낌이 너무 달랐다. 원래도 황홀했지만 지금은 정말 까딱 잘못했다간 심장 마비가 또 올 것처럼 절절하게 황홀했다. 에이든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올리비아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나만 신경 써.”

그러면서 올리비아를 단속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것도 싫었다. 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자신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특히 침대에선. 더욱더 나만 생각해. 알겠지?”

올리비아의 뇌리에 각인하듯 에이든은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뺨을 붉히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황홀한 말을 쏟아 냈다.

“전 늘 도련님만 생각해요. 다른 사람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걸요.”

진짜 너무 예뻐!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만 할 수 있지? 에이든은 욕설을 하지 못하자 가슴이 절절 끓었다. 뭐라도 격한 단어를 내뱉어야 이 격렬한 감정이 진정될 것 같은데, 욕을 하지 못하니 힘들었다.

그래도 고쳐야 했다. 또 실수해서 올리비아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 올리비아는 뭐만하면 예뻐서 숨이 막히니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참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에이든은 인공호흡을 위해 올리비아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한 번으로 부족해서 다시, 또다시, 또 한 번 하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이 상황에 대화를 먼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욕망은 당장 올리비아를 탐하라 하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자신이 제멋대로 올리비아의 인생을 결정해선 안 됐다. 대화가 필요했다. 에이든은 극강의 인내심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아까 그 사람들이랑 한 이야기 알아들었어?”

“적당히요?”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 대답은 애매했다. 알아들었단 건지, 알아듣지 않았단 건지 알 수 없네.

“저 사람들이 널 찾아온 건 알지?”

“네. 같이 가자고 마을에서부터 계속 졸졸 쫓아다녔어요.”

올리비아가 상황 파악은 했지만 일의 심각성은 모르는 것 같아 에이든은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했다.

“그들이 왜 찾아왔는지는 알고?”

“아버지를 만나게 해 준다고 했어요.”

“뭐?”

에이든은 몸을 펄쩍 일으켰다. 자신과 켈타족이 나눈 대화엔 쏙 빠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만큼 에이든에게 위험하고 반칙인 내용이었다. 사람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가족에겐 약했다.

특히 올리비아는 태어나서부터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한 번쯤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을까? 불안함이 에이든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그래서 넌 뭐라고 했어?”

“관심 없다고요.”

“뭐?”

올리비아의 말간 표정에 에이든은 반사적으로 질문하고 뒤이어 나오려는 격한 단어를 가까스로 참았다. 에이든 또한 부모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았다. 아버지의 그 꼴을 보아 왔는데 가족애 같은 게 있겠는가. 하지만 올리비아가 아버지의 존재를 단칼에 거부하니 놀랍다.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아?”

에이든은 참견처럼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아니요? 아버지가 처음부터 없었는데 지금 와서 찾을 필요가 있나요?”

그렇지. 처음부터 없었는데, 이제와 굳이 찾을 필요는 없지.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논리에 설득당했다. 절대로 올리비아가 아버지를 찾아 떠나겠다고 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간 것이 아니다. 필요 없다는데 찾을 필요가 뭐가 있나.

착한 답을 한 올리비아가 예뻐서 또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어쩜 답을 찾아도 이렇게 예쁜 답만 찾는지 모르겠다. 우선 한고비는 넘겼고 에이든은 다른 고비가 남은 걸 떠올렸다.

“그럼 그거 말고 그들이 또 무슨 말을 했어?”

“없어요. 아버지를 만나러 같이 가자고만 했어요.”

이런 사기꾼 같은 놈들. 착하고 어리숙한 사람을 부모로 꾀어내려 했다니. 양아치 사기꾼이 따로 없다. 에이든은 켈타족을 마구 욕하며 올리비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해 주었다.

“올리비아, 아까 그 사람들이 한 말 중에 네가 똑똑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대.”

그제야 알아들은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졌던 올리비아가 물었다.

“저 사람들이랑 같이 가야 하는 거죠?”

따라가는 것뿐인가. 도움을 받으면 부족의 무녀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에이든이 깽판을 치면 어떻게 빼 올 방법이 있긴 하겠지만, 켈타족에겐 부족장보다 무녀의 존재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도 술술 풀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응. 저들과 함께 가야 해.”

그러자 올리비아가 걱정되는 점이 있는 것처럼 우물거렸다.

“……도련님은 제가 똑똑하지 않으면 싫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네가 똑똑하지 않아도 좋아.”

에이든이 정색하면서 즉답을 하자 올리비아의 표정에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똑똑한 사람이 좋지 않으세요?”

“올리비아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똑똑하고 그렇지 않고와는 상관없어. 그냥 너니까 좋은 거야. 네가 눈이 안 보여도, 발을 절어도, 손을 못 써도 난 널 좋아할 거야.”

에이든은 단호하게 알렸다. 그러자 올리비아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며 웃음을 참았다.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표정도 참 예뻤다. 에이든이 뺨에 쪽쪽 입을 맞춰 주자 올리비아가 속삭였다.

“그럼, 안 따라갈래요. 전 도련님이랑 같이 있을래요.”

요즘 올리비아가 에이든을 잡기로 마음먹은 게 틀림없다. 에이든은 이번에도 기절할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두 번째 고백을 받은 느낌이다! 에이든은 와락 올리비아를 끌어안았다. 콧속 가득 차는 올리비아의 향기에 취해 몸이 흐물거렸다.

“똑똑해지는 것보다, 내가 좋아?”

올리비아에게 ‘에이든 도련님이 왜 좋아?’라고 물으면 장황하게 설명할 말은 없었다. 어느 순간,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저 전부였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도, 좋은 걸 선물해 준 사람도, 이렇게 좋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올리비아에겐 오직 에이든 도련님뿐이었다. 그러니 에이든 도련님 곁에 있고 싶은 건 당연한 거였다.

“네. 도련님이 더 좋아요.”

씨! 이번에야말로 에이든은 끊었던 욕을 다시 할 뻔했다. 그는 격해지는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했다. 그러고도 가라앉지 않아서 올리비아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는 살결의 향이 다디달아서 저도 모르게 올리비아의 옷을 풀어 헤쳐 뽀얀 가슴을 드러냈다. 탐스럽게 올라붙은 가슴을 한입 가득 담고 나서 에이든은 쪽쪽 빨았다. 야들한 살결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아이가 어미젖을 먹듯 가슴을 흡입하며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켰더니, 이번엔 하체가 불끈 일어섰다. 의지가 아플 정도로 빳빳해지며 얼른 올리비아의 안으로 들어가 달라고 애원했다.

‘정신 차리자, 에이든! 이성이 있는 에이든!’

에이든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대화를 이어 가려고 노력했다.

“만약 가고 싶다면 가도 괜찮아. 난 네가 어딜 가든 같이 갈 거야. 그러니까 네 생각을 말해 봐.”

올리비아가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서 한 선택이라면, 다른 선택지가 있을지도 몰라서 다시 물었다. 하지만 가슴 애무로 이미 달아오른 올리비아에겐 귀찮은 행동이었나 보다. 대화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하고 급해 보였다.

“전 똑똑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하던 거 하면 안 돼요? 더 만져 주세요.”

그렇지! 순진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유혹하는 게 올리비아지! 에이든은 기뻐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격에 겨워할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허겁지겁 올리비아의 옷을 벗겼다. 올리비아는 익숙하게 에이든의 행동을 도왔고 금방 나신이 되었다.

“올리비아, 나랑 하고 싶어?”

“네.”

에이든은 허겁지겁 올리비아를 덮치려다가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올리비아는 성급한 자신 때문에 늘 헐레벌떡 옷을 벗고 몸을 뒤섞기 바빴다. 뭔가 연인 관계에 맺는 애정 행각이라기보다 성욕을 풀기 바쁜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관계가 달라진 만큼 이런 점도 달라져야 했다.

“그럼 내 옷 벗겨 줘.”

올리비아는 즉각 몸을 일으켜 에이든의 옷을 벗겼다. 이미 시중을 드는 게 익숙한 올리비아라서 수줍음은 없었다. 오히려 ‘어휴, 우리 도련님 옷도 혼자 못 벗어요?’ 이런 태도였다. 에이든이 기대했던 야릇하면서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아니라 실망이었지만 그게 뭐 어떤가 싶다. 지금부터 노골적인 걸 할 건데.

올리비아의 손이 에이든의 상의를 걷어 내고 하의를 풀어 헤쳤다. 올리비아의 손이 속옷까지 단번에 내려 이미 발기한 성기가 흔들거렸다. 주책없긴. 에이든은 너무 솔직한 의지 녀석이 부끄러웠다.

“벌써 서 있어요. 도련님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 부끄러움은 올리비아의 물음에 완전히 사라졌다. 도련님‘도’ 하고 싶었냐니! 올리비아도 하고 싶었단 거 아닌가! 에이든의 의지는 더욱 불끈 일어섰다.

“그럼, 당연히 하고 싶었지!”

에이든은 바지를 벗고 올리비아를 껴안으며 침대를 뒹굴었다. 두 사람은 나신이 되어 뒤엉켰고 남은 건 본능에 몸을 내맡기는 것뿐이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부딪쳤다. 에이든의 손은 올리비아의 몸을 더듬고, 올리비아의 손은 에이든의 몸을 쓸었다.

어깨를 스치고 넘어와 등을 감싸 안는 올리비아의 적극적인 손짓이 서로를 원하는 느낌이라 에이든은 이 순간이 더 황홀했다. 에이든은 격한 호흡을 토해 내며 올리비아의 피부를 더듬던 입술을 떼어 냈다.

“올리비아.”

“하아, 네, 도련님.”

“또 말해 줘.”

올리비아의 상체에 입을 맞추며 에이든은 천천히 내려갔다. 가슴골에 입술을 찍고, 명치에도 찍고, 더 내려가 배꼽 위에도 찍고, 더 아래로 내려가 아랫배에 길게 입을 맞추며 시선을 들었다.

“뭘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올리비아가 질문했다. 기대감에 바들바들 떠는 올리비아는 사랑스러웠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허벅지를 벌리며 말랑한 살결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날 좋아해?”

“네. 좋아해요.”

이번에도 올리비아는 즉답을 했다. 에이든은 그 감격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올리비아의 다리 사이의 여린 살결 속으로. 자신을 유혹하듯 꿈틀거리는 은밀한 곳으로. 에이든은 손으로 올리비아의 아래를 활짝 벌리며 혀를 내밀었다.

“아읏! 도련님!”

올리비아가 몸을 뒤틀며 에이든을 말렸다. 하지만 에이든은 멈출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유혹적인데 어떻게 그만두겠는가. 하고 싶단 말이 거짓은 아닌지 미끈한 액체를 토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쉴 새 없이 올리비아의 아래를 빨았다. 혀를 뾰족하게 내밀어 찌르기도 하며 올리비아가 흘리는 액체를 받아마셨다. 여린 살결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입구가 경련하듯 흔들릴 때까지 아래를 쩝쩝거렸다.

“흣, 흐읏, 도련님! 그만, 이거 말고요. 우웃, 도련님 거 넣어 주세요.”

올리비아가 이렇게 솔직하게 애원할 때까지.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재촉이 있고 나서야 하체에서 고개를 떼어 냈다. 얼마나 열심히 빨았는지 격한 호흡이 나왔다.

에이든은 천박하게 질질 흘려 대고 있는 자신의 성기를 쥐었다. 자신의 물건이지만 정말 절제를 모르는 놈이다. 올리비아가 흐린 눈으로 올려다봤다. 열기에 가득 찬, 욕망에 빠져 버린 그 야한 얼굴에 에이든의 성기가 지끈거렸다.

“이거? 올리비아, 이거 필요해?”

말투는 질문이지만 에이든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다. 만약 이 순간 올리비아가 아니라고 거절하면 미쳐 버리는 건 자신이 될 거라는 그런 조급함이 담겨 있었다. 다행히 상대는 올리비아였고 그녀는 언제나 에이든의 마음을 충족시켜 줬다. 올리비아가 제 손을 무릎 뒤로 넣어 활짝 벌리며 답했다.

“네. 네! 흐으, 그거 넣어 주세요.”

그러니까, 천국이라고. 에이든은 지체하지 않고 제 성기를 질구에 맞추고 찔러 넣었다. 야들한 속살이 에이든의 성기를 순식간에 받아먹었다.

“흣!”

“하읏!”

에이든은 허리를 튕겨 더욱 깊게 삽입하며 올리비아를 끌어안았다. 간절하게 매달려 오는 가녀린 몸이 너무 사랑스러워 전율이 일었다. 올리비아의 내벽이 기둥 전체를 감싸며 에이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건 빨아들인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감각이었다. 이렇게 영혼까지 뽑아 가 버릴 것 같은 살 떨리는 감각을 뭐라 표현한단 말인가. 질벽이 꿈틀거리며 성기를 옭죄었다. 그때마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짜릿함이 퍼졌다.

“흐, 도련님……. 어서, 어서 움직여 주세요.”

귓가에서 울리는 올리비아의 가느다란 목소리에 에이든의 이성이 끊어졌다. 이렇게 예쁘게 애원하는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골반을 쥐고 허리를 움직였다.

배려고 뭐고 본능에 몸을 맡기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성기를 빼는 순간 내벽이 조여들며 기둥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 안달 난 움직임에 다시 성기를 깊게 처넣어 주자 올리비아가 신음을 흘렸다.

“흐응!”

미친다. 진짜. 오늘따라 올리비아의 내벽이 끈적이며 성기에 엉켜드는 것 같았다. 정말 많이 안달 났던 것처럼, 간절하게 페니스를 원해 왔던 것처럼. 계속 에이든을 부추겼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전부 내어 달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고, 에이든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전부 내어 주고 싶었다. 맨살이 부딪치는 철썩이는 소리가 울리도록 하체를 치댔다. 맞물리는 곳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액체로 찔꺽였다.

이렇게 흥건해서 움직이기 쉬워야 하는데, 오늘따라 더욱 내벽을 조여 대는 올리비아 때문에 움직이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아니, 자극이 너무 강해서 사정을 참느라 온몸에 힘을 줘서 더 힘든 건가? 에이든은 이게 쾌락에 겨운 건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쾌감이 강해서 고통스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후웃, 올리비아. 힘 좀, 힘 좀 빼! 흣!”

“하읏, 아니, 힉! 못해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쾌락에 겨워하는 올리비아의 얼굴은 예뻤다. 에이든은 그 눈매에 입을 맞췄다. 짭조름한 눈물이 달콤했다. 흰 살결이 열감에 붉게 달아올라 탐스러웠다. 뺨에도 입을 맞췄다. 이렇게 몸을 섞고 있는데도 안달이 났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온전히 마음이 통한 상태임에도 에이든은 조급함이 치밀었다. 어떻게 씹어 삼켜야 이 마음이 충족될까? 완벽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한 것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지우지 못하는 자신은 지독한 욕심쟁이였다. 사정 직전에도 그 욕심을 버리기 힘들었다.

“하아, 올리비아, 내가 좋아?”

“흣, 네, 네! 좋아요!”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었다. 에이든은 행복해서 온몸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나도, 나도 네가 너무 좋아!”

에이든이 감정을 쏟아 내자 쾌락에 겨워 어쩔 줄 모르던 올리비아가 눈을 반짝 떴다.

“하읏, 도련님 좋아해요. 흐으, 저도 좋아해요.”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도련님 좋아요를 연발하는 올리비아 때문에 에이든은 더 미칠 뻔했다. 올리비아가 좋아한단 소리를 좋아하는구나, 뒤늦게 깨달은 에이든은 끊임없이 좋아한단 말을 속삭여 주었다.

에이든이 그러자 올리비아 또한 좋아한단 말을 끊임없이 돌려주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은 짐승 같은 교미가 아닌 감정을 나눴다. 두 사람은 절정에 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서로에게 고백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차례 열락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야 에이든과 올리비아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이 순간이 에이든은 행복했다.

정사 후 홀랑 떠나 버리지 않는 올리비아라니, 얼마나 기쁜지. 나신을 끌어안고 작은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올리비아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올리비아 기분 좋아?”

“네!”

사랑스럽기도 하지. 에이든은 벌떡 일어서는 행복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 올리비아를 덮쳤다. 그녀의 위에서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마구 하자 또 올리비아가 꺄르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올리비아 내가 좋아?”

“네! 도련님이 좋아요!”

반복되는 질문이 질리지도 않나 보다.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나도 네가 정말 좋아!”

양 뺨을 붙잡고 쪽쪽거리며 외쳐 주자 올리비아가 배시시 웃었다.

‘올리비아의 마음이 이렇게 움직였으니 이제 이야기를 꺼내 봐도 되지 않을까?’

에이든은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백작가를 떠나는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올리비아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계속 지켜 주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영역으로 움직이는 게 나을 거다.

“올리비아. 나랑 같이 있는 게 좋아?”

“네.”

“그럼, 내가 떠나면 함께 갈래?”

“어디로요?”

“어디든. 난 백작가가 너무 싫거든.”

백작가가 싫다는 소리에 올리비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곧 아무 불안 없는 얼굴로 밝게 웃으며 답했다.

“전 도련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에이든을 최고로 행복하게 하는 답이었다.

* * *

드디어 올리비아가 백작가를 떠나겠다고 정하자, 그들의 이동은 빠르게 결정되었다. 애초에 에이든은 이곳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고 케일럽 또한 그걸 바랐다. 그래서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 왔기에 시간을 끌 일은 없었다. 에이든이 떠나자고 말하는 순간 케일럽은 환호를 하고 준비를 끝마쳤다.

그렇게 에이든과 올리비아는 케일럽의 주도하에 야반도주를 했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공공연하게 떠날 수는 없었다. 그 난리 후에도 에이든이 별채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작가에 남아 있는 사람들 몰래 빠져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질적인 존재들이 껴 있었다.

“뭡니까? 이들은 왜 데려갑니까?”

케일럽이 퉁명스럽게 에이든에게 물었다. 자신들을 지칭하는 건 아는지 켈타족이 눈을 부릅떴다. 떨궈 낼 생각하지 말란 경고였다. 그 가소로운 꼴에 케일럽은 콧방귀를 뀌었다.

“내버려 둬.”

“내버려 두긴 뭘 내버려 둡니까? 이러다가 위험해지면 어떡하려고요?”

케일럽은 에이든의 여유로움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하녀랑 잘되어 알콩달콩하느라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의심할 건 의심해야 했다.

특히 저들의 목적이 하녀를 데려가는 거니 더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에이든의 태도는 이상했다. 다른 남자가 하녀의 손목만 잡아도 개새끼처럼 냄새 맡고 킁킁거리던 인물과는 전혀 달랐다.

“저들은 위험해질 일 없어.”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케일럽의 목소린 뚱했다. 이동 중에 문제가 생기면 귀찮아지는 건 자신이었다. 늘 사고는 엉뚱한 놈이 치고 그걸 수습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돌아가서 다행이다. 얼른 돌아가서 보직 이동을 시켜 달라고 꼭 건의할 거다. 이 지긋지긋한 인연이 끝나면 자신의 닳아 가던 인성도 돌아올 것이다.

“켈타족은 올리비아를 무서워하거든.”

에이든이 킬킬거리며 하는 말을 케일럽은 납득할 수 없었다.

“하녀를 무서워한다고요?”

“어. 그래서 올리비아한테 나쁜 짓은 절대 할 수 없어. 오히려 쓸 만한 호위가 생긴 셈이지.”

기가 막혔다. 에이든이 뒤에 없다면 이 하녀만큼 무해한 존재도 없을 거다. 성격마저 약간 맹한 탓에 두려워할 일이 조금도 없는 사람인데, 무서워한다고?

“왜요?”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봐.”

그렇게 말한 에이든은 마차의 창문을 쾅 닫았다. 케일럽은 확신했다. 저건 설명하기 귀찮아서도 아니다. 안에 있는 하녀랑 꽁냥거릴 시간이 아까워서 저러는 거다. 케일럽은 이번에도 욕설이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나저나 궁금증이 남은 케일럽은 켈타족에게 다가갔다. 이 무리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는 사람과 친절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지만 궁금한 건 풀어야 했다.

“이봐요.”

“난 자카르라는 이름이 있다!”

케일럽이 말을 걸자 켈타족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몰래 이동하게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자카르, 저 하녀가 무섭습니까?”

“아가씨를 하녀라고 부르지 말아라! 고귀한 분이시다!”

케일럽은 짜증이 났다. 말만 하면 버럭 하니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버리고 가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소란을 피우며 쫓아와서 다른 문제가 생길까 봐도 걱정이었다. 데려가도 문제, 데려가지 않아도 문제라니. 그래도 계속 이런 태도면 함께하는 게 더 문제다. 일행을 이끄는 자로서 케일럽은 강하게 나갔다.

“자꾸 이렇게 굴면 일행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카르는 잠시 표정을 굳혔지만 쫓겨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단 걸 깨달은 사람처럼 순순히 굴었다.

“무섭습니다.”

너무 당당하게 시인해서 케일럽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른 켈타족도 동의하는지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에이든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케일럽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수습하며 되물었다.

“왜요? 뭐가 무섭습니까?”

“무녀가 될 분이지 않습니까?”

당연하단 자카르의 반응이었다. 케일럽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고, 켈타족은 그런 케일럽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서로에게 의문 어린 시선만 나눴다. 그러자 뒤에 있던 다른 켈타족이 설명했다.

“무녀님이 하는 말은 다 이루어집니다.”

태어나서부터 뼛속까지 제국민인 케일럽은 예언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다. 그에게 예언은 사기꾼이 하는 말일 뿐이다.

“그래서요?”

호위 기사가 그렇게 묻자 켈타족은 그를 이상한 사람 보듯 봤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녀님이 ‘넌 죽을 거야!’라고 선언한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켈타족은 모여서 오들오들 떨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우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제야 케일럽은 이들이 뭘 무서워하는지를 알아차렸다.

진짜로 예언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면, 저런 불길한 소리를 듣고 웃어넘기지 못하는 거다. 정말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게 되는 거다. 인생이 술술 풀리면 풀리는 대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인생이 고달프면 고달픈 대로 언제 죽음이 찾아올까 걱정하는 거고.

“무녀님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무녀님을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납니다.”

“그쪽도 조심하시죠.”

켈타족은 진지하게 하녀를 무서워하며 케일럽에게 충고까지 했다. 이들에게 대충 무녀가 어떤 의미인지는 확실하게 알겠다. 하지만 무언가가 남았다. 케일럽은 어쩐지 이들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그저 무녀란 이유뿐임이 아닐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무서워도 무녀가 그렇게 부족에게 중요한 존재라면 강제로라도 끌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전부입니까?”

“뭐가 말입니까?”

“당신들이 하녀를 조심히 대하는 이유가 그저 그녀가 무녀이기 때문입니까?”

켈타족이 허를 찔린 사람들처럼 눈치를 봤다. 이리저리 열심히 눈을 굴리는 그들을 보고 케일럽은 단호하게 굴었다.

“확실히 말하지 않으면 동행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숨기는 점이 있으면 같이 움직일 수 없다는 케일럽의 경고에 자카르가 나섰다.

“부족장님이 강제적으로 모셔 오진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의 의사가 최우선이라고 하셨죠.”

“부족장이? 왜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부족장이라면 부족의 안위를 생각해 무녀를 데리고 오려고 더욱 기를 쓸 줄 알았다. 그만큼 켈타족 내에서 무녀가 귀한 존재라고 들었으니까. 설마 부족장이 무녀의 존재를 경계하는 걸까? 케일럽의 상념을 깨뜨린 것은 자카르였다.

“아가씨가 부족장님의 따님이니까요.”

“뭐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 케일럽은 엉뚱하게 튄 이야기에 경악했다. 부족장의 딸이면 나름 엄청난 신분일 텐데, 왜 여기까지 흘러들어 와 하녀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부족장의 딸이면 왜 여기서 하녀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케일럽의 솔직한 질문에 자카르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부족장님이 젊을 적 사랑했던 여인이 갑자기 사라졌었습니다.”

케일럽은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그 사랑했던 여인이 하녀의 어머니겠지. 갑자기 사라졌단 건 도망일까? 납치일까? 납치일 확률이 높겠다. 백작가에 발견되었을 때 하녀의 어머니는 이미 노예였다고 했으니까.

“그럼 왜 여태껏 찾지 않았던 겁니까? 임신까지 한 연인이지 않습니까?”

그게 의문이었다. 부족장 정도면 권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은 걸까?

“찾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땐 부족장님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분의 임신 사실도 몰랐고, 결정적으로 무녀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당시엔 부족장님도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자카르는 입을 다물었다. 고집스러운 표정이 더는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케일럽은 탄식을 터트렸다. 저 하녀도 알면 알수록 복잡했다.

그래도 에이든의 말처럼 켈타족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하녀를 무서워하고 존중하니 오히려 훌륭한 호위 기사들이 생긴 셈이기도 했다. 어디서 이런 호구들이 넝쿨째로 굴러떨어진 것인지, 진짜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렇게 얼떨결에 예상외의 인물들을 포함한 이동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몇날 며칠을 달려 제국의 수도에 들어온 에이든은 올리비아와 떨어져야만 했다. 짜증 나지만 그동안 뒤를 봐준 사람에게 에이든은 보고를 해야 했다. 먼 여행길에 지친 올리비아는 먼저 자신의 저택으로 보냈다.

“뭐가 급하다고 벌써 불러?”

에이든은 케일럽에게 투덜거리며 안내를 따랐다.

“당연히 보고가 먼저지요. 그동안 그렇게 편의를 봐주셨는데.”

“넌 아주 신나지?”

케일럽의 목소리에 에이든이 이죽거렸다. 그러자 그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드디어 해방입니다.”

“그렇게 좋아해 봐라. 해방이 되나.”

“그렇게 협박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케일럽은 자신했다. 자신은 훌륭한 기사였다. 단장님이 능력 있는 자신을 이런 한직에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에이든이 안내된 곳은 한 고급 주택이었다. 겉으론 한적해 보였지만 안은 살벌할 정도로 경계가 바짝 선 곳으로 에이든이 마차에서 내리자 날카로운 시선 여럿이 몰렸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집사 차림의 남자가 나서서 알려 왔다. 에이든과 케일럽은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걸었다. 한 방문 앞에 도착해 집사는 안쪽에 먼저 알렸다.

“모셔 왔습니다.”

안쪽에서 희미한 허락의 말이 들리고 나서야 집사는 문을 열어 주며 에이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에이든은 담담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을 발견한 에이든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케일럽 또한 에이든의 행동에 맞췄다. 그저 예의를 차린 에이든과 다르게 케일럽은 충심 어린 태도였다.

“그만 일어나 자리에 앉게.”

“감사합니다.”

허락이 있기 무섭게 에이든이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그게 너무 빨라 케일럽은 놀랐다. 그는 에이든처럼 뻔뻔하게 행동할 자신이 없어 몸을 일으킨 후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오랜만일세.”

“네. 오랜만입니다.”

“자네가 저질렀던 이야기에 대한 마무리는 들었어?”

“아니요.”

에이든은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미 끝난 일 관심이 없단 태도였다. 황태자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자네가 저지른 일에 대한 끝은 들어야지.”

“계획대로 됐겠지요. 왕세자를 빌미로 얻을 거 다 얻은 다음 휴전 협정한 것 아닙니까?”

진짜로 전쟁이 일어났다면 케일럽이 따로 보고했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동안 이동해 오면서 도시의 분위기를 봐도 충분했다. 아무리 국경에서의 일이라고 해도 전쟁이 일어났다면 이렇게 제국이 조용할 수가 없었다. 정보가 통제된 왕국의 상황이 비상식적인 거였다.

“맞아. 그리고 그 왕세자가 어떤 놈을 잡기 위해 이를 가는 것도 아나? 그건 같은 남자로서 너무한 처사였지 않은가.”

뒤에서 가만히 듣던 케일럽만 괜히 찔끔해 몸을 떨었다. 에이든은 그게 마땅한 일이라는 듯 평온했다.

“그만큼 큰 죄를 지었습니다.”

“무슨?”

“올리비아를 겁박한 죄요.”

“허, 참. 그러고 보니 왜 혼자인가? 그렇게 아끼는 사람 얼굴 구경이나 시켜 주지.”

“올리비아는 구경시켜 줘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에이든은 단호하게 잘랐다. 상대가 누구든 다른 사람이 올리비아에게 관심을 갖는 걸 원치 않았다.

“그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일인가?”

“네. 딱 잘라 거절할 일입니다. 앞으로도 보실 일 없을 겁니다.”

에이든은 다신 이런 대화가 나오지 않길 바라서 더욱 단호하게 잘라 냈다. 황태자도 에이든이 무엇을 최고로 가치를 두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그것 때문에 곤란해졌지 뭔가. 왕국 측에서 공식적으로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지른 사람을 인도해 달라고 난리지 뭔가.”

무도한 짓을 저지른 사람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호위 기사는 뒤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에이든의 명령이었지만 저지른 건 그였다.

“내주세요.”

“뭐?”

에이든이 산뜻한 목소리를 내자 오히려 놀란 황태자가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에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제가 자른 것은 아니니까요.”

저 쌍놈! 호위 기사는 에이든을 향해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황태자 전하 앞만 아니었으면 대놓고 말했을 거다. 에이든의 파렴치한 대꾸에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챈들러 단장은 그대의 실종 소식을 듣고 무슨 사건에 휩싸인 것 같다고 분개하며 찾겠다고 난리던데. 그대를 꽤 좋게 봤나 봐.”

챈들러? 아니, 그놈 미쳤나? 뭘 찾겠다고 난리란 말인가?

“저랑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콜린스 백작가가 발칵 뒤집히고 집사와 챈들러 둘이 힘을 합쳐 자네를 찾겠다고 난리라지?”

잭슨 이야기에 에이든은 미간을 좁혔다. 사실 에이든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백작저에서 머물 땐 잭슨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를 끝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잭슨도 콜린스 백작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에이든의 의사보다 자신의 신념이 더 중요했다. 에이든에게 잭슨은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올리비아에게도 좋은 사람일까?

아니다. 아무리 에이든이 올리비아를 아껴도 잭슨은 그녀를 좋게 보지 않을 거다. 잭슨이 데이빗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천한 피가 섞여서였다. 그 신념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올리비아도 속으론 무시하고 에이든의 곁에 있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그건 잭슨이 에이든을 진심으로 따르는 게 아니란 소리였다. 그런 이를 계속 챙길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고생 좀 하라고 하죠.”

“어쨌든 대단한 사람을 끌어들인 덕분에 전쟁도 일으키고 별일을 다 하네.”

“말은 바로 하시죠. 원하시는 일을 대신해 드린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원하셨던 대로 분탕질 치는 사냥개 노릇은 제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이든의 시선은 불손하다 느껴질 정도로 도전적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경고를 황태자는 읽었다. 서로 계약한 대로만 잘하시죠? 라는. 황태자는 흡족하게 웃었다. 에이든과 황태자의 인연은 현자의 숲에서였다.

쓸 만한 책사를 얻으러 갔다가 웃기는 놈을 발견했다. 현자라 하면 고지식하고 꼬장꼬장한 성격일 줄 알았더니, 세상 무서운 것 없다고 왈왈 짖어 대는 꼴이 미친개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황태자는 에이든이 쓸모 있다 여겼다. 원하는 것이 확실하고 그것 말고는 자신의 목숨도 도외시하는 존재. 뒤는 보지 않는 것처럼 막 나서는 행동은 사냥개로 쓰기 딱 좋았다.

“사냥개 참 좋은 말이네.”

원하는 것만 충족시켜 주면 얼마든 써먹을 수 있으니, 자리를 잡아 가는 지금 황태자에게 에이든은 참 쓸모 있었다. 그래서 그의 방만함을 너그럽게 넘기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저 방만함도 쓸모가 있어서 봐주는 거였다. 앞으로 에이든이 상대할 귀족들은 저 꼴을 보고 난리를 칠 테고 그걸 빌미로 자신에게 반하는 인물들을 골라서 쳐 낼 거다.

“네. 약속했던 대로 전 제 역할을 충실하게 행할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쓸데없이 부르지 마시죠.”

“좋아. 나도 싫다는 사람 붙잡고 있고 싶진 않다고. 가 봐. 줄 것은 내가 적당히 신경 써서 챙겨 주지.”

가 봐, 소리가 끝나자마자 몸을 일으켰던 에이든은 뒤이어 챙겨 준다는 소리에 멈칫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케일럽을 바라봤다. 불길함을 느낀 케일럽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지만 에이든은 씨익 웃으며 황태자를 향해 요구했다.

“그것 말입니다. 원하는 게 좀 있는데요.”

“뭘 원하지?”

“저 사람, 앞으로 계속 제 호위 기사로 주시죠?”

에이든은 콕 찍어 뒤에 서 있던 케일럽을 지명했다. 케일럽은 다급하게 황태자를 응시했다. 그럴 리 없다고. 그래선 안 된다고! 황태자 전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빙긋 웃으며 들려준 답은 절망적이었다.

“앞으로도 힘내서 일하게.”

충성의 대가가 이런 것이라니. 상사란 것들은 다 똑같은 놈이었나 보다. 배신감으로 부들부들 떠는 케일럽에게 다가간 에이든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지금 약 올리냐고 응시하는 케일럽을 향해 산뜻하게 말했다.

“자, 출발하자고.”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퇴직해야 하나 케일럽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인생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동안 에이든은 즐거움에 들떴다.

새로운 저택에서 올리비아와 함께하게 될 걸 상상하니 설렜다. 황태자에겐 적당히 인사하고 넋 놓고 있는 케일럽을 닦달해 서둘러 출발했다.

* * *

올리비아는 얼떨떨했다. 에이든 도련님을 좋아한다는 마음을 인정한 이후부터 생긴 일들이 너무 폭풍 같았다. 고백하자마자 에이든 도련님이 욕을 해서 서러웠다가, 그 서러움을 드러낼 수 없어 마을에 갔다가 이상한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그들이 갑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서 불쾌했다가, 때마침 에이든 도련님이 데리러 와서 감동하기도 했다. 마지막엔 도련님이 좋아한다고 말해 줘서 기뻤다.

처음엔 도련님의 말이 잘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으로 이동 후 몸을 섞으며 계속 좋아한다고 말해 줘서 올리비아의 마음은 더없이 충만했다. 도련님이 왜 날 좋아할까? 라는 의문을 떠올릴 새도 없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도련님이 떠나자고 했을 때 올리비아는 고민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도련님과 함께라면 행복할 것 같았다.

같이 떠난다고 하자마자 그날 새벽 바로 백작가를 벗어났다. 놀라서 당황했지만 에이든 도련님이 괜찮다고 계속 말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꽤 오래 마차로 이동했고 어느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도련님이 떠났다. 잠깐 볼일이 있다고, 금방 돌아올 거니 ‘우리 집’에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도착한 집은 원래 살던 백작저보다 컸다.

“어서 오십시오.”

올리비아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백작 부인보다 더 우아한 분위기의 여성이 인사를 해 왔다. 놀란 올리비아가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전 올리비아예요.”

“네, 반갑습니다. 전 레이나입니다. 편하게 부르십시오. 주인님께 미리 연락 받았습니다. 편히 쉴 수 있도록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주인님이라니? 설마 에이든 도련님 말씀하시는 건가? 올리비아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우물거렸다. 게다가 레이나님이 왜 자신에게 존대를 쓰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레이나님의 밑에서 일하는 거 아닌가? 올리비아가 눈치를 보자 레이나가 나섰다.

“오랜 여행에 지치셨을 테니 우선 씻으시겠습니까?”

“네.”

원래 잘 모를 땐 우선 ‘네’라고 답하는 게 덜 혼났다. 올리비아가 냉큼 답하자 레이나가 나긋하게 웃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다른 손님들은 저쪽의 안내를 따르시죠.”

레이나는 올리비아의 뒤를 쫓으려는 커다란 덩치의 남자들을 단호하게 잘라 냈다. 이미 이들이 올 것도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켈타족은 눈치를 보다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레이나의 표정에 얌전히 말을 따랐다.

올리비아는 안내를 따라가며 감탄했다. 레이나님은 굉장히 우아한 분이셨다. 이렇게 아름답고 기품 있는 사람이 있다니. 먼저 목욕도 권해 주시고 정말 착하셨다. 백작가에 있던 하녀장님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분 밑에서 일하게 되어 올리비아는 설렜다. 예전처럼 혼나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올리비아는 어쩐지 새로운 저택에서의 생활은 멋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뒤이어 이어지는 건 올리비아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였다. 에이든 도련님이나 사용할 법한 고급스러운 욕탕에서 다른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씻었다. 자신은 하녀라고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지만, 레이나님은 부드럽게 웃으며 거절하지 못하게 행동하셨다.

그리고 다 씻고 나와 굉장히 좋은 침실도 배정받았다. 이렇게 좋은 방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이번에도 웃으며 거절당했다. 너무 호사스러운 것을 받는 것 같아 발을 동동 굴렀더니 간식을 챙겨 주셨다.

세상에, 케이크 말고도 다른 달콤한 것들이 탁자 가득 채워졌다. 너무 감동적인 맛이라 열심히 냠냠 집어 먹느라 정신이 팔려 버렸다. 더는 못 먹을 것 같을 정도로 배불리 먹고 입맛을 다시자 레이나님이 알려 왔다.

“주인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주인님이면, 에이든 도련님?

“저 마중 갈래요.”

그제야 에이든 도련님이 떠올라 올리비아는 냉큼 답하고 뛰어나갔다. 잠깐 헤어졌던 것뿐인데, 요 며칠 계속 붙어 있었더니 허전했었다. 케이크 먹으면서 잠깐 잊긴 했지만 그래도 에이든 도련님도 같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다. 올리비아는 열심히 달려 나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에이든 도련님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에이든!”

그 부름에 고개를 든 에이든 도련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실 에이든 도련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되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에이든 도련님이 이젠 도련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했더니 이름을 부르란다.

올리비아는 당황했다. 어떻게 도련님의 이름을 부르겠는가.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에이든 도련님이 치사하게 케이크를 들고 협박했다. 에이든이라고 부르면 케이크 한 입을 주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불러야 했다.

사실 처음엔 아무리 케이크가 걸렸다고 해도 어려웠다. 하지만 케이크를 얻어먹을 때마다 불러 버릇했더니 이젠 조금 편해졌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부를 수 있었다.

“올리비아.”

그리고 이렇게 이름을 부르면 에이든 도련님은 올리비아의 속이 녹아내릴 것 같은 달콤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래서 더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요즘 에이든 도련님의 미소는 케이크만큼 달콤했다. 에이든 도련님이 훌쩍 달려와 껴안아 주었다. 고백한 다음부터 에이든 도련님은 이렇게 다정해졌다.

“편히 쉬었어?”

그리고 질문하면서도 입술에 가볍게 입도 맞춰 주었다. 예전엔 왜 뽀뽀를 하는지 몰랐는데 요즘은 알 것 같다. 뽀뽀를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올리비아는 답하듯 에이든 도련님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네. 에이든은 볼일 다 봤어요?”

“어.”

그렇게 답한 에이든 도련님이 덥석 들어 올려 올리비아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리고 에이든 도련님이 데려간 곳은 침실이었다. 침대에 눕혀지고 얼굴에 마구 와 닿는 입술 때문에 올리비아는 간지러워 웃음만 흘렸다. 한참 입을 맞추고 난 후에야 에이든 도련님이 떨어졌다.

“나 없는 동안 어땠어? 사람들이 기분 나쁘게 하지는 않았고?”

“여기 사람들 진짜 친절해요. 먼저 씻으라고 권해 주기도 하고, 씻는 것도 도와줬어요. 엄청 좋은 냄새나는 향유로 씻었어요. 그리고 좋은 방도 줬어요. 아! 케이크도 잔뜩 먹었어요.”

올리비아는 신나서 재잘거렸다. 어쩐지 얼굴이 뽀얗더라니. 올리비아를 보며 에이든은 뿌듯했다. 사람들에게 단단히 일러 놓길 잘했다. 이젠 올리비아가 예전처럼 취급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좋은 것과 하고 싶은 것만 잔뜩 하게 해 줄 거다.

“친절했다니 다행이네.”

에이든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에이든을 잡는 건 역시 올리비아였다.

“참, 레이나님도 참 좋아요.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되니 좋아요!”

“뭐?”

‘누가 누구 밑에서 일을 해? 왜!’

에이든의 절규를 모르는 올리비아가 해맑게 외쳤다.

“레이나님은 전에 하녀장님처럼 막 혼내지 않을 것 같아요. 저 예전보다 덜 혼날 수 있겠죠? 에이든한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저 노력할게요!”

양손을 꼭 쥐고 나름 굳센 표정을 짓는 올리비아 때문에 에이든은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올리비아는 지금 자기가 여기에 하녀로 머무는 줄 아는 건가?

‘도대체 이게 무슨 엉뚱한 생각이야!’

미치겠다. 진짜 사람 열받아 환장하게 하면서, 또 반대로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어벙한 말에 화도 내지 못하게 한다. 귀여워, 젠장. 에이든은 참지 못하고 올리비아의 양 뺨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또 한참을 쪽쪽대고 나서야 입술을 떼어 낼 수 있었다.

“올리비아.”

“네.”

긴 키스에 제대로 호흡 조절도 못하는 올리비아를 향해 에이든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선 일을 하지 않아도 돼. 이젠 넌 하녀가 아니야.”

올리비아의 눈이 커졌다. 평생 하녀로 살아온 사람이라 하녀가 아니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와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요?”

“날 좋아하는 사람.”

하녀가 아니란 말보다 더 놀라운지 올리비아의 눈이 또 휘둥그렇게 변했다. 얜 맨날 뭐가 이렇게 놀라운 거지? 그래도 표정이 귀여우니까 쪽 하고 입을 맞추고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제야 올리비아가 배시시 웃었다. 천진하고 그 해맑은 미소를 보면 어쩐지 에이든의 말을 전부 알아들은 것 같지 않지만 저런 반응만으로 흡족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처럼 올리비아가 우물거렸다.

“그럼, 전 앞으로 뭐 해요?”

에이든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올리비아의 세상이 이렇게 좁음을 알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무조건 다 해 주겠단 말은 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제 안의 감정을 자각하고, 떠나자는 결정에 동의하길래 자신의 의지가 생긴 줄 알았더니 아직 아닌가 보다. 올리비아의 순진하면서 또 그 안에 두려움을 담은 눈동자에 에이든은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렸다.

“우선 날 더 많이 좋아하고.”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듯한 올리비아의 표정이 귀여웠다. 입술을 맞부딪치자 올리비아는 재빠르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많이 좋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해요.”

아씨, 진지하게 그렇게 답하면 어떡하라고! 에이든은 자글자글 끓는 심정을 억누르며 올리비아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하자. 뭐든지 이루어 줄게.”

에이든의 말이 끝나자 올리비아는 침묵했다. 처음으로 올리비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생각이 많아진 것처럼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올리비아의 머리를 에이든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음껏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잠시 뒤 무언가 떠올린 것처럼 올리비아가 에이든을 응시했다.

“왜? 뭐 하고 싶은 거 떠올랐어?”

“네!”

올리비아의 답은 힘찼다. 그래서 에이든은 기뻤다. 약속대로 뭐든 이루어 주고 싶었다.

“뭔데?”

말만 하라고, 너를 위해서라면 에이든은 못할 게 없단 심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올리비아가 이번에도 양손을 불끈 쥐며 굳세게 외쳤다.

“저 우선 늦잠 자 볼래요!”

비장하게 외친 것 치고 올리비아의 하고 싶은 일이 너무 하찮아서 에이든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귀여웠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온 답이 늦잠이라니. 에이든이 계속 웃자 올리비아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늦잠은 안 돼요?”

“아니. 얼마든지. 네가 자고 싶은 만큼 늦잠 자자.”

에이든이 답해 주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 올리비아가 사랑스러워 다시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게 올리비아였다. 늦잠조차 마음대로 자면 안 되는 게 올리비아의 세상이었다. 하녀가 아닌 삶은 생각할 수 없는 올리비아.

그랬으면 어떠한가, 앞으로 자신이 전부 주면 되는 것을. 호사롭고, 사치스럽게 사는 법도 가르쳐 주면 되는 거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다. 앞으로 이젠 계속 같이할 테니까. 올리비아, 행복하게 해 줄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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