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고백. (16/19)
  • 15. 고백.

    ‘와, 씨발. 어떻게 그 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지? 나 좋아한다면서!’

    에이든은 누워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감시하던 기사의 눈길을 느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때 올리비아가 보인 반응이 너무 충격이었다.

    “올리비아, 내가 좋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어?”

    에이든이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을 때, 올리비아가 대수롭지 않게 답할 거라 생각했다.

    “네. 좋아요.”

    이렇게 너무 가볍게 말해서 상처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무응답이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단 얼굴이라니! 씨발, 나 좋다면서! 좋아한다면서! 비록 케이크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좋아한다면서!

    정사 후라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그날 에이든은 너무 충격적이라 올리비아에게 아무 말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미친 듯이 화가 났다. 그래서 가만히 쉬다가 울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났다가도, 또 갑자기 모든 기운이 쭉 빠지면서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냥 죽자. 살아서 뭐 해. 이런 마음까지 들었다. 며칠째 에이든이 우울함에 빠져 있어도 올리비아는 다가오지 않았다. 신경은 쓰이는지 힐끔 보긴 하는데 저 멀리 피해 다니는 것 같았다.

    뭔가 알아채고 피해 다니는 걸까? 자신의 감정이 부담스러운 걸까? 올리비아가 피한다는 건 케이크보다 못하단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에이든이 시름에 잠겨 있는 동안 시간은 술술 흘렀고 에이든은 귀찮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챈들러의 방문에 에이든은 ‘아, 이 사람이 있었지. 아직 일이 안 끝났지.’ 하고 떠올렸지만 뭘 해 보겠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널브러져 있을 순 없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구려.”

    그런 에이든을 바라보는 챈들러의 시선은 의외로 한심함이 아니었다.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에이든은 이놈도 미쳤나? 생각하고 말았다. 몰론 속으로만. 에이든이 침묵하자 챈들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죄인들을 수도로 압송할 예정이오.”

    중요한 내용이기에 에이든은 그래도 정신을 조금 일깨웠다. 그리고 다시 상황에 몰입해 연기를 최대한 펼쳐 보였다. 표정 관리 후 이 참담한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당신의 처우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소?”

    챈들러의 눈빛이 관찰하는 걸 알아서 에이든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 어느 쪽이든 순순히 받아들일 겁니다.”

    에이든은 선택권이 전적으로 당신에게 있단 태도를 내보였다. 잠시 그런 에이든을 응시하던 챈들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째서요?”

    “데이빗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범인은 저라고 할 테지요.”

    “그렇소. 고신을 했음에도 자신의 잘못은 절대 아니라고 버티더군.”

    데이빗을 감옥에 가둔 후 취조를 끊임없이 했다. 잠도 자지 못하도록 기사들이 돌아가며 데이빗을 추궁했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외쳤다. 한시가 바쁜데 범인은 에이든이라고 자신은 무고하다고 주장했다. 정말 결백하다는 듯이, 간절하게.

    “그렇다고 저와 연관된 증거를 찾은 것도 아니니 헷갈리시겠죠.”

    “그것도 그렇소. 데이빗이 강력하게 당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제대로 된 증거가 없소.”

    챈들러가 개인적으로 에이든이 마음이 들어 그의 편의를 봐주기로 했다고 해도, 의심을 완전히 지운 건 아니었다. 에이든을 감시하는 동시에 사람을 시켜 별채를 다시 싹 뒤졌다. 하지만 제국과 연관된 증거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

    “당연하죠. 증거가 있을 턱이 없죠. 그럼, 제가 범인이 되려면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증인이 되어 줄 이는 한 명뿐이죠.”

    에이든은 여기까지 말하고 일부러 조금 쉬었다.

    “백작이지.”

    그쪽의 아버지. 뒷말을 삼킨 챈들러의 시선에 에이든은 슬쩍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그 상황에 제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저 따라야 하지요. 그 어떤 불합리함이라도 감내하겠단 에이든의 표정에 챈들러는 의심을 싹 지웠다. 이렇게 착하고 여린 사람이 어찌 반역이라는 잔악한 짓을 저지르겠나. 정말 가족을 잘못 만나 고생하는 인재였다.

    “당신은 저 죄인들과 관련이 없다고 내 재량껏 보고하겠소.”

    챈들러는 걱정 말라는 것처럼 목소리를 풀었다. 에이든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고개를 작게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니오. 당신의 훌륭함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이 안타까운 거지. 그리고 내 가능한 백작가가 존재할 수 있도록 힘쓰겠소.”

    챈들러의 말에 에이든은 놀랐다. 그냥 죄목도 아니고 왕실을 배반한 일이었다. 이건 죄인뿐만 아니라 가문과 연관된 이 모두가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저 제 한 목숨만 보존해 주길 바랐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지? 굳이 그럴 필요 없는 일을?

    “그런 큰일을…….”

    에이든이 놀라 중얼거리자 챈들러가 호기롭게 웃었다. 사실 그는 나름 수도에서 힘깨나 쓰는 귀족이었다. 죄를 완전히 없던 일로 만들 순 없지만 다른 귀족과 동조해서 사건을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챈들러는 에이든이 백작가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보아하니 멍청한 서자 놈이 주제를 모르고 혼자서 저지른 것 같은데 당신까지 처벌을 받는 건 아니지. 내 수를 씀세.”

    반역죄까진 아니니 내통죄로 보고하고, 콜린스 백작의 서자가 주제도 모르고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고 하면 된다.

    사실 챈들러가 속한 귀족 세력은 서자가 가문을 물려받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것들은 천한 피를 속이지 못하고 꼭 사고를 쳤다. 이래서 천한 핏줄은 들이면 안 되는 거다.

    당장은 시국이 이래서 법안을 진행하기 힘들지만. 이 사건을 이용해 법안도 넘기고 에이든도 구제할 수 있을 거다. 챈들러는 나름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젠 왕세자 전하만 찾으면 되었다. 얼른 이곳 상황을 마무리하고 데이빗을 수도로 압송해 가서 제대로 고신을 해야 했다. 자꾸 아니다, 모른다 하니 수도의 전문가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서둘러야 해서 우린 곧 떠날 걸세. 감시는 없겠지만 가능한 저택에 계속 머물게. 연락하면 언제든 수도에 올 수 있도록.”

    “그러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에이든의 배웅을 받으며 챈들러는 별채를 나섰다. 하지만 마지막 궁금증이 남아 돌아서며 물었다.

    “그것보다 궁금하지 않은가?”

    “무엇이 말입니까?”

    “백작이 무슨 말을 했는지.”

    챈들러는 에이든의 덤덤한 태도가 의아했다. 자신이라면 엄청 궁금했을 일을 묻지 않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에이든은 희미하게 웃었다.

    “단장님이 절 배려해 주셨으니 아무 말 안 하셨겠지요.”

    상황을 보고 판단했단 소리인데.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로 백작이 자네가 범인이라고 밀고했으면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나?”

    아버지가 배다른 형제를 위해 거짓을 말했을 때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가? 그런 질문에 에이든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챈들러와 다르게 에이든은 걱정하지 않았다. 식당 안에서 콜린스 백작이 마지막에 내보였던 눈빛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콜린스 백작은 어쭙잖은 위선자였다. 눈앞의 부채감밖에 보지 않는 무능력한 위선자. 에이든이 백작의 생각을 처음 알아차린 건 로저스 자작의 사건 때였다. 그때 백작은 묘하게 에이든의 뒤를 봐줬다. 그래서 상황이 쉽게 정리되었다. 갑자기 백작이 왜 자신의 편을 드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득이 되는 일이라 대충 넘겼다.

    그리고 데이빗과 함께 만났을 때 백작은 예전처럼 데이빗을 챙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을 엄청 챙긴 건 아니지만. 어쨌든 무작정 데이빗을 감싸던 태도가 어설프게 변했었다. 그런 태도 변화의 이유는 하나였다. 뒤늦게 에이든에게도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단 것.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이제야 죄책감을 가진다고? 처음부터 제대로 살 것이지 자신이 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것만 보는 어리석은 자였다. 백작이 에이든에게 부채감을 크게 느낄수록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걸 알았다. 이미 미안한 아들에게 또 죄를 지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단 태도를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약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에이든은 챈들러를 의식해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아들을 연기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요. 한 번도 애정이란 걸 주신 적 없는 분이니까요.”

    절대 과장되게 말해선 안 됐다. 최대한 담담하게, 이런 일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지만 슬픔을 완벽히 감추기 힘들단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챈들러는 그런 에이든의 연기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두드리며 기운 내라고 다독여 주기까지 했다.

    “기운 내게. 백작가를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에이든의 행동에 가상함을 느낀 챈들러는 이 안타까운 이를 밀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챈들러는 떠나기 전 백작가의 식속들을 전부 모아 놓고 상황을 공표했다.

    “다들 눈치챘다시피 백작과 그의 아들 데이빗이 제국과 내통죄를 저질렀다.”

    왕실과 관련된 일에 다들 숨을 죽였다. 자신들은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식솔들이 눈치를 보고 있자 챈들러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콜린스 백작가는 에이든이 차기 백작이 되어 존속할 것이다.”

    식솔들은 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몰락할 줄 알았던 가문이 존속하는 것도 놀랍지만 가문을 이어받는 이가 에이든인 것도 놀라웠다.

    한순간 콜린스 백작가의 분위기가 뒤집어졌다. 에이든을 지지하던 집사는 신이 났고 데이빗을 지지하던 이들은 몸을 낮췄다.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아들이 가문을 이어받게 되었다.

    저마다 혼비백산했고 하녀들 또한 급변한 분위기에 놀라 눈치를 보았다. 가문이 망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는지, 그동안 업신여긴 도련님이 가문을 이어받아서 도망가야 하는지 모를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선 수색을 샅샅이 하고 관련자를 모두 찾아 제대로 처벌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건 에이든에게 미룰 것이다. 백작가의 식솔들은 에이든의 심문을 성실하게 받으시오.”

    그렇게 챈들러는 에이든에게 권력을 쥐여 주고 나서야 데이빗과 백작을 압송해서 떠났다. 백작가의 내통죄는 그렇게 빠르면서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난 후, 백작가의 식솔들은 숨을 죽이고 에이든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가문이 크게 흔들려 백작가가 정신없는 동안. 올리비아는 다른 의미로 생각이 복잡했다. 이상하게 기운이 없었다. 마음이 무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최근 올리비아는 스스로가 너무 낯설었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불쑥 들었다가, 또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에이든 도련님과 관련되면 그랬다. 기분이 막 몽실몽실했다가 서운한 기분이 되었다가 정신이 없었다. 며칠 전 도련님과 관계를 맺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그날 이후 또 느낌이 달랐다.

    그날은 특히 더 이상했다. 기사님까지 내보내고 맺은 관계는 여태까지 중에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이러다 몸이 터져 버릴 거란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도련님과 결합되어 있는 순간 알 수 없는 충족감이 찾아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맞닿은 체온이 뜨겁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도련님의 시선이 다정해서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엄청 강렬하고 조급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나서 들려온 에이든 도련님의 질문은 낯설었다.

    “올리비아, 내가 좋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올리비아는 놀라 답하지 못했다. 왜 놀랐냐고 하면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어 숨이 막힐 정도였다. 도련님이 기다리시니 뭐라도 답을 해야 했지만 갑자기 목이 막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올리비아는 끝내 답하지 못했다. 말을 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올리비아는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도련님을 좋아하다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아니, 하녀가 주인님에게 가져선 절대 안 되는 감정이라 생각할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도련님이 물어 오니 덜컥하고 와닿았다. 올리비아는 둔할 뿐이지 생각이 없는 이는 아니었다. 그저 해선 안 되는 생각이었기에 억눌렀을 뿐이다. 그렇지만 직접 들은 말마저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는 제 감정을 자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느껴 왔던 몽글몽글함과 달콤함의 의미는 하나였다.

    ‘어떡해, 나 도련님을 좋아하나 봐.’

    그래서 올리비아는 심란했다. 주제도 모르고 도련님을 좋아하다니. 하녀는 이런 감정을 가져선 안 되는 거였다. 들키면 혼날지도 몰랐다. 그리고 도련님도 하녀가 이런 감정을 가지면 부담스러워할 게 뻔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도련님 곁에 다가가는 게 더 조심스러웠다. 그날 이후로 도련님도 생각이 많아 보여 자꾸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올리비아는 가져선 안 되는 감정에 심란해서 시무룩했다가, 그래도 에이든 도련님 정도면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떠올리고 히죽거리다가, 아차 이러면 안 되지를 생각하길 반복했다.

    그럴수록 올리비아는 초조해졌다. 이러다가 나중에 들켜서 더 혼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신경이 쓰여 고민하던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도련님은 현명하시니까. 계속 혼자 좋아해도 되는지, 안 된다면 전담 하녀 자리를 다른 하녀랑 바꿔 준다든지 등 해결 방법을 알려 줄 거다. 혼나더라도 에이든 도련님한테 혼나는 게 나았다.

    그렇게 정하자 올리비아는 망설임이 사라졌다. 허겁지겁 에이든 도련님을 찾아갔다. 말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찼다. 에이든 도련님은 오늘도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올리비아는 격랑 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도련님을 크게 불렀다.

    “도련님!”

    “뭐, 왜?”

    도련님이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감정이 격해진 올리비아는 그런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꾸 울렁거리는 마음을 참기 힘들어 토해 내듯 쏟아 냈다.

    “도련님 어떡해요? 저 도련님을 좋아하나 봐요.”

    그러자 늘어져 있던 에이든 도련님이 몸을 튕기듯 일으키며 외쳤다.

    “뭐? 씨발!”

    올리비아는 충격받았다. 좋아한다고 고백했더니 에이든 도련님이 욕을 했다.

    * * *

    “도련님!”

    에이든은 갑자기 올리비아가 뛰어와 도련님을 외쳤을 때만 해도 의욕이 없는 상태였다. 어차피 올리비아가 할 말은 엉뚱한 것일 테니까 말이다. 침묵의 올리비아 사건이 있기 전의 에이든이었다면 저렇게 뛰는 것도 귀엽다고 벌떡 일어서 반겼겠지만, 지금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다.

    케이크 때보다 타격이 더 컸다. 그래서 오랜만에 일어난 졸렬 도련님이 열렬히 반응했다. 사실 조금 원망의 마음도 있었다. 아무리 에이든이라고 해도 지금은 올리비아가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예쁘긴 하지만 이런 기분에 헐레벌떡 반응해 줄 정도로 자존심 없는 놈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이든은 차갑게 대꾸했다.

    “뭐, 왜?”

    일어서지 않고 뚱하게 말이다. 힐끗 눈만 움직여 돌아보자 올리비아는 그의 냉정한 태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씨발. 에이든이 한 번 더 울컥한 그때, 올리비아가 울먹이며 외쳤다.

    “도련님 어떡해요? 저 도련님을 좋아하나 봐요.”

    에이든의 귓속에 엄청 충격적인 문장이 파고들었다. 그의 몸이 절로 일으켜졌고 입은 반사적으로 늘 쓰는 단어를 내뱉었다.

    “뭐? 씨발!”

    그건 본능적인 것이었다. 늘 달고 사는 단어였기에, 너무 놀라운 말을 들어서, 믿기지 않아서 쏟아져 나온 놀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에이든을 좌절하게 했다. 올리비아의 눈이 커지더니 순식간에 물기를 머금었다.

    그리고 견디지 못해 한 방울 톡 쏟아진 눈물.

    ‘울다니. 올리비아가 울다니!’

    그에 맞춰 에이든의 심장도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에이든이 뭐라고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올리비아가 더 빨랐다.

    “죄, 죄송해요. 저 같은 것이 도련님을 좋아해서요. 죄송해요.”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가며 사과를 하더니 올리비아가 뛰쳐나갔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에이든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그냥 뭔가 굉장히 믿기지 않은 말을 들은 느낌일 뿐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쏟아진 올리비아의 눈물로 연달아 얻어맞아서 정신이 얼얼했다.

    ‘올리비아가 도련님을 좋아하다니? 도련님이면 나? 나를 좋아한다고? 올리비아가 나를 좋아한다고!’

    에이든은 뒤늦게 정신이 돌아오면서 다시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괴이한 경험을 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이 어질했다. 그 와중에 입은 히죽거렸다. 기뻐서 심장이 멎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에이든은 정말 쓰러졌다.

    암전이었다.

    짝! 하고 뺨을 강타하고 가는 엄청난 충격에 에이든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신체가 생존 본능으로 급격히 호흡을 찾아 댔다.

    “허억! 허억! 허억!”

    숨통이 막혔던 사람처럼 격하게 호흡을 들이켜는 동안 커다란 손이 등을 퍽퍽 치고 들어왔다.

    “그래요. 그렇게 숨 쉬세요! 계속!”

    “허억, 허억, 허억!”

    에이든은 얼떨결에 명령에 가까운 말을 따랐다. 씨발, 이게 무슨 일이지? 정신없는 와중에 호흡이 턱턱 막혀 억지로 숨을 쉬었다. 그 와중에 등을 치는 손길이 무자비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감정이 담긴 손길이 틀림없었다.

    “씨발! 그만 쳐!”

    에이든이 버럭 외치자 케일럽이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지금 생명의 은인에게 무슨 소리입니까?”

    “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케일럽이 버럭 외쳤다. 그제야 에이든은 자신이 기절했다가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방금 죽을 뻔했다고요!”

    분노한 케일럽이 계속 소리쳤지만 에이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에이든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네가 죽으면 내 탓이 되어 버리잖아! 라는 감정일 뿐이었다. 그것보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가 중요했다.

    심장이 아직도 벌렁거렸다. 뭔가 머리론 이해가 안 되는데 몸은 흥분한 느낌이다. 본능은 전율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도련님 어떡해요? 저 도련님을 좋아하나 봐요.”

    올리비아가 나를 좋아한다고! 씨발! 얼마 전 침묵이 매우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올리비아의 입에서 나온 인정이 더 격렬하게 다가왔다. 이건 앞 구르기 뒤 구르기 발광으로 끝낼 수준이 아니잖아! 좋아! 미쳐! 완전 행복해! 그러다가 에이든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도 떠올렸다.

    올리비아의 서러운 표정이. 툭 떨어지던 눈물이. 그리고 그 원인이 제 입으로 쏟아 낸 멍청한 말이란 것도.

    ‘씨발, 미친놈! 또 씨발이다.’

    에이든은 이때 철저히 느꼈다. 평소 말투가 굉장히 중요하단 것을. 다신 씨발이란 단어를 속으로도 쓰지 않으리라. 아니다, 중요한 건 자책이 아니다. 변명이다! 올리비아는 착하니까 설명하면 다 이해할 거다. 그럼, 행복한 나날만 남은 거지!

    “올리비아! 올리비아!”

    에이든이 허겁지겁 올리비아를 불렀다. 그의 발작 어린 태도에 케일럽이 에이든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지금 뭐 하십니까!”

    “보면 몰라? 올리비아 찾잖아! 아니다, 올리비아 어디 있어? 어? 어디 있냐고!”

    아무리 불러도 올리비아가 올 생각을 하지 않자 에이든은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올리비아가 더 서러워하기 전에 실수라고 빨리 말해 줘야 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의원의 진찰부터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케일럽은 이번에도 에이든을 말렸다. 바빠 죽겠는데 그깟 기절 좀 했다고 진찰을 받으라니.

    “뭐? 왜?”

    에이든의 대수롭지 않은 태도에 케일럽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내리쳤다.

    “방금 심장이 멈췄었습니다!”

    에이든은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기뻐서 심장이 멎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던 게 정말 심장이 멈추는 순간이었던 거다. 기절했던 게 아니라 죽었다 살아났다. 씨발, 아차! 쓰지 않기로 했지. 엄청 큰일 날 뻔했네. 고백받고 그 행복을 만끽하기도 전에 뒤질 뻔, 아니 죽을 뻔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의원을 몰래 불러오겠습니다.”

    케일럽의 말에 에이든은 다시 정신이 들었다. 잠깐 심장이 멈췄었다는 점에 놀랐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찰받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괜찮아.”

    그러고 다시 일어나려는 에이든 때문에 케일럽은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왕실 조사단이 찾아와 백작가와 떨어진 곳에서 머물러야 해 예민해졌었다. 조사단이 콜린스 백작가에 머물기 시작했을 때 케일럽은 몰래 숨어서 지키겠다고 했지만, 에이든이 반대했다.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아예 백작가를 떠나 있으라고 했었다.

    에이든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왕실 조사단이 자신에 비해 실력이 조금 떨어진다고 해도 상대는 기사였다. 운이 나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에이든의 말을 듣고 백작가를 나섰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내팽개친 것 같아서 불안했다. 혹시 떨어진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길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저 겁 없는 주둥아리가 왕실 기사에게 말실수를 해서 순식간에 목숨을 잃어버릴까 봐 진지하게 걱정했다.

    그런데 역시나 황금운빨 에이든이었다. 뭘 했는지 왕실 조사단이 콜린스 백작과 데이빗은 압송하면서 에이든에게는 좋은 일을 해 주고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찝찝한 기분으로 백작가에 돌아오자마자 발견한 건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에이든이었다.

    호위 대상이 쓰러졌다!

    이건 제 호위 경력에 크나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허겁지겁 다가가 보니 에이든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심장도 뛰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서 미칠 것 같았다.

    다행히 약간의 응급 지식이 있는 그는 에이든의 심장을 압박했고 곧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뺨을 때려 정신을 일깨워 겨우 제대로 호흡하게 만들어 놨더니, 뭐? 올리비아? 죽었던 사람 살려 놨더니 하녀부터 찾는 이 개새끼 같은 상전 놈 때문에 케일럽은 정말 분노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거면 어쩌려고요!”

    “너무 기뻐서 심장이 멈췄던 거야. 문제는 없어.”

    그러고 다시 벌떡 일어서는 에이든 때문에 케일럽이 이번엔 자신의 심장이 멈추는 기분을 느꼈다. 무슨 헛소리를 이리 당당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기뻐서 심장이 멈췄다고요?”

    “그래! 괜찮으니까 올리비아가 먼저야! 걔 어디 있어?”

    에이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고 일관되게 하녀만 찾았다. 케일럽은 뒷목이 뻣뻣해졌다. 아니, 씨발. 그래. 심장 마비의 원인이 지병이나 암살이 아니란 것만으로 다행이긴 한데. 그렇다고 쓰러졌던 사람이 어딜 빨빨거리겠단 말인가!

    “이유야 어쨌든 쓰러졌었습니다! 멀쩡히 돌아다니는 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케일럽은 에이든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상대가 이성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잘 알았다. 알지만 지금 움직였다가 무슨 큰일이 나면 자신이 더 큰일이기에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에이든이었다. 뒤이어 그가 외치는 말을 듣고 케일럽은 자신이 아직도 에이든을 얕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씨발! 사랑의 힘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왜 자꾸 말리냐고 발악하는 에이든이 너무나 진심이라 케일럽은 기가 막혔다. 알았지만 미친놈이다. 진짜 미친놈이 여기 있었다. 케일럽은 순간 정말 절실하게 에이든을 죽여 버리고 싶어졌다.

    케일럽이 감정을 삭이는 동안 에이든은 기다리기 힘든지 몸을 일으켰다. 제법 멀쩡한 모습으로 걷는 걸 확인한 케일럽은 말리길 포기했다. 저 꼴을 보아하니 심장 마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 비슷한 거일지도.

    ‘그런데 심장 마비 비슷한 거라도 말짱히 움직일 수 있나?’

    씨발, 알 게 뭔가. 사랑의 힘으로 다 해결하겠다는데, 힘없는 호위 기사가 어쩔 것인가. 대화해 봤자 제 속만 터지지. 케일럽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올리비아! 올리비아!”

    하녀 한 명 찾겠다고 방금 전 심장 마비 비슷한 걸 일으켰던 인물이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그런 에이든을 보며 케일럽은 또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사랑의 힘은 위대한 건가 보다.

    케일럽이 놀라건 말건 에이든은 미친 듯이 뛰었다. 별채 내를 다 뒤지며 올리비아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전부 열고 다녔지만 올리비아가 보이지 않았다.

    “올리비아 어디 있냐고!”

    에이든은 별채 내에서 올리비아를 찾지 못하자 몸을 숨기고 쫓아다니는 케일럽에게 화를 냈다.

    “저도 모릅니다.”

    “뭐? 왜 몰라?”

    “조사단 때문에 호위 인원은 다 나가서 지금 여기에 저밖에 없습니다. 저도 상황을 파악하려고 먼저 온 것이고요.”

    별채가 통제되지 않고 있단 소리였다. 에이든은 일을 그따위로밖에 하지 못하냐고 버럭 화를 내고 올리비아를 찾았다.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올리비아가 보이지 않았다. 별채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자, 하녀 한 명이 저 멀리서 눈치를 보는 게 보였다.

    “올리비아 어디 있는지 알아?”

    “아까 별채를 나갔어요.”

    에이든의 날카로움을 읽은 듯 하녀는 즉답했다. 에이든은 욕설을 삼키며 밖으로 나갔다. 우선 정원을 둘러봤다. 하지만 그곳에도 올리비아는 없었다. 결국 에이든은 본채 쪽으로 움직였다. 올리비아가 허락 없이 본채를 가지 않기로 했지만 혹시 몰랐다.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본채로 들어서자 에이든을 발견한 하녀 한 명이 재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에이든은 이 하녀를 알았다. 평소 제 주제를 모르고 자신을 낮잡아 보던 하녀였다. 곧 쫓겨나지 않을까 몰래 비웃었었다. 그랬으면서 백작가를 이어받을 사람이 확실시되니 아주 목소리가 살랑거렸다. 말도 걸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지금은 이런 얍삽한 인간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였다.

    “올리비아 봤어?”

    하녀가 순간 표정을 굳혔다가 곧 미소를 만들어 냈다.

    “올리비아를 찾으시는군요.”

    “그래서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방금 저택 밖으로 심부름을 나갔는데요.”

    하녀의 애매한 말투에 신경질을 내려던 에이든은 이어지는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뭐? 누가 내보냈어!”

    “그게, 원래 제 일인데 올리비아가 하겠다고 나섰어요.”

    에이든의 서슬 퍼런 기운에 놀란 하녀가 재빨리 답했다. 올리비아가 외출을 하다니! 그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던 올리비아가 말도 없이 나간 이유는 뻔했다. 자신을 피하기 위해서!

    에이든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착한 애가 집을 나갈 정도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다는 소리란 말인가! 쓸모없는 주둥아리, 쓸모없는 주둥아리! 에이든은 신경질적으로 제 입을 몇 대 때리고 하녀를 향해 다그쳤다.

    “무슨 심부름? 어디로 갔어?”

    “상점들이요. 오늘부터 들여올 물자를 줄이기로 했으니까 그거 알리러 갔어요.”

    올리비아에게 고작 그따위 일을 시키냐고 버럭 외치려던 에이든은 참았다. 마을을 전부 뒤지려면 화내고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자꾸 엇갈리는 것 같아 에이든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에이든이 크나큰 실수를 했지만 올리비아라면 사과하면 당연히 받아 줄 거였다. 그만큼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이대로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마치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에이든은 헐레벌떡 뛰어 백작가를 나섰다. 백작저를 막 벗어날 무렵 케일럽이 뛰쳐나와 에이든의 앞을 막아섰다.

    “멈추십시오.”

    “왜! 바쁘다고!”

    바빠 죽겠는데 방해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아 소리쳤지만 케일럽은 꿋꿋했다.

    “잠깐, 저기 확인 좀 해야겠습니다.”

    케일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백작저 담벼락 끝이었다. 척 봐도 수상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쓰러진 사람의 발끝으로 보이는 게 튀어나와 있었다.

    “사람이야?”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여기 계십시오.”

    케일럽은 에이든을 백작저 담벼락에 붙도록 하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에이든은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저 발이 올리비아의 발로 추정되었으면 기절할 정도로 놀랐겠지만 대충 봐도 남자의 발이었다. 다른 사람은 죽든 말든 에이든은 상관이 없었다.

    이게 함정이 아니면 좋겠는데. 막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던 중 케일럽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런, 젠장!”

    “왜? 뭔데?”

    “잠시 확인부터.”

    케일럽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살폈다.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케일럽도 자신 못지않은 성격이었다. 괜한 사람을 보고 저렇게 놀랄 일은 없었다.

    그럼 연관이 있는 사람이란 건데, 누구지? 설마, 납치했던 왕세자가 저기 버려져 있는 건 아니겠지? 막 그런 생각을 떠올릴 때, 케일럽은 에이든이 무시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뭐? 무슨 문제?”

    에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람이 쓰러진 것보다 올리비아를 만나는 게 더 중요했고, 케일럽이 문제라고 해도 자신의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이 사람 켈타족을 유인하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케일럽의 말에 에이든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튀어나와선 안 되는 인물이 튀어나왔다.

    “뭐? 그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에이든의 머릿속엔 이미 답이 나왔지만 부정해야 했다. 제 생각이 맞아선 안 됐다.

    “손목과 발목에 흔적이 남았습니다. 포박되어 옮겨진 흔적으로 보아 진작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켈타족이 진작 영지에 들어와 있었는데 몰랐다는 거야?”

    “그게…….”

    케일럽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열이 확 받았다. 지금 발견했으니 켈타족 사람들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는 건 당연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들어왔을까? 백작저를 찾았다는 건 뭔가 눈치를 채고 온 것일까?

    아니, 왜 하필이면 지금이란 말인가. 계속 저택에만 머물던 올리비아가 외출한 순간에! 불안감이 에이든의 정수리에서부터 내리꽂혔다. 아니다. 이건 불안감 같은 불확실한 게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에이든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발악처럼 외쳤다.

    “올리비아! 올리비아를 찾아! 당장!”

    “알겠습니다. 바로 대기하고 있는 인물들을 풀겠습니다.”

    에이든이 그럴 걸 알았다는 것처럼 케일럽은 즉답했다. 그리고 즉시 몸을 날렸다. 그가 본인의 업무인 에이든의 호위를 뒤로하고 떠났지만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그동안 조사해 오면서 알아챈 건 켈타족이 찾는 인물이 올리비아의 어머니란 것이다.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특징이 뚜렷하다 보니 오히려 특정하기 쉬웠다. 올리비아가 가진 은발은 왕국 내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색이었다.

    설혹, 찾는 인물이 올리비아의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켈타족은 우선 그녀에게 접근부터 하고 볼 거다. 그만큼 은발이란 특징은 독특했다. 켈타족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애초에 만나지 않길 바랐다.

    가정을 해 보았다. 만약 그들의 목적이 올리비아의 어머니를 제거하는 것이라면? 그녀를 찾아 데려가려는 거면? 그들의 목적이 어떤 것이라고 해도, 에이든에겐 절대 좋을 일이 없었다. 마지막은 전부 이별로 통하니까.

    올리비아와 이별.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에이든은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의 피가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당장 쓰러질 것처럼 몸이 휘청였다. 초조함에 내장 안쪽이 쥐어짜졌다.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본능적으로 올리비아와 켈타족이 만났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저기 쓰러져 있는 인물이 증거였다. 같이 떠났던 인물을 왜 묶어 가지고 여기까지 돌아왔겠는가. 켈타족 중 누군가가 저 사람이 의도적으로 접근한 걸 알아차린 후, 일부러 외부로 이끄는 것까지 눈치챘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겠는가.

    이곳에 무언가 있단 걸 짐작하겠지. 켈타족도 바보는 아닐 테니 곧장 영지로 돌아왔을 거고, 쓰러진 남자는 방해를 했으니 어떤 정보를 갖고 있을지도 몰라서 끌고 온 것일 거다.

    그렇게 영지에 도착해서 무언가를 알아보려다가 올리비아를 발견했다면? 그들이 올리비아를 데려간 것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럴 때 머리가 돌아가는 게, 그래서 최악의 결과를 알아 버린 상황에 짜증이 났다.

    켈타족은 뛰어난 전사였다. 야생에서 생활해서 그런가, 왕국 사람들과 다른 짐승적인 신체 능력을 가졌다. 그들이 마음먹고 올리비아를 빼돌렸다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올리비아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다. 이런 불길한 상상을 해선 안 됐다. 에이든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올리비아를 되찾을 거다. 자신의 삶은 전부 올리비아로 통했다. 올리비아는 에이든의 전부였다. 그녀가 있기에 살 수 있었다. 제 품에 돌아올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올리비아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힘들 걸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졌다. 벽을 붙잡고 헛구역질하며 위액을 쏟아 냈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자꾸 감정이 앞서서 냉정한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이든은 멍청한 제 입을 저주했다. 진작 올리비아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따위 단어는 속으로도 쓰지 말았어야 했는데!

    불길함은 늘 망상을 부풀렸다. 올리비아의 애처로운 모습을 떠올리며 어느새 최악의 가정까지 가고 있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를 잃을 수 없었다. 죽어서라도 쫓아갈 것이다.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괜찮으십니까?”

    언제 다가왔는지 케일럽이 에이든의 상태를 확인했다. 에이든은 이 다급한 상황에 자신의 상태 따위나 여유롭게 묻고 있는 게 짜증이 났다.

    “지금 괜찮게 생겼어? 올리비아는!”

    에이든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케일럽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다급함은 조금도 없었다. 이 심각한 상황에 여유를 부리는 꼴에 에이든은 격하게 분노했다.

    “올리비아 찾았냐고!”

    에이든의 발작 비슷한 외침에 케일럽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보고했다.

    “찾았습니다.”

    “찾았어? 어디 있어? 무사해?”

    에이든은 와락 달려들어 올리비아에 대해 물었다.

    “무사합니다.”

    케일럽은 멱살이 잡힌 상황에서도 분노나 반발보다는 기가 막히다는 헛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위기감이 조금도 없는 그 음성에 에이든의 이성이 슬슬 돌아왔다. 자신의 더러운 성질을 아는 케일럽이 이런 식으로 답한다고?

    “무사해? 켈타족 사람을 만난 거 아니었어?”

    “그게…….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이번에도 케일럽의 대답은 이상했다. 조금도 화급을 다투는 기색이 없었다. 아까 명령하자마자 올리비아를 찾으러 떠났던 것과는 다른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를 벌써 찾았다고?’

    켈타족이 어떤 목적이 있어서 올리비아를 데려갔다면 당장 영지를 떠날 거라 예상했다. 그들의 영역으로 빠르게 달려가 쫓기 힘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에이든의 혼란스러움을 읽은 듯 케일럽이 한숨을 흘렸다.

    “가서 봅시다. 가서 보면 이해가 안 될 겁니다.”

    “뭐? 이해가 안 될 거라고?”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케일럽의 말이 너무나 이상해서 에이든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이해가 안 될 겁니다.”

    그리고 케일럽은 단언했다. 그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며 에이든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초조함과 불안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기묘한 감정을 가지고 케일럽을 따라 움직인 곳에서 에이든은 그의 말대로 정말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을 눈으로 확인했다.

    의외로 올리비아를 발견한 건 상점가에서였다. 마을에 안전한 모습으로 있어서 에이든은 우선 안심했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얌전했던 건 아니었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움직이는 올리비아를 발견한 순간 에이든이 주인 찾은 개새끼처럼 달려가려는 걸 케일럽이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안전합니다. 요원들이 전부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 상황을 확인하시죠.”

    입을 틀어막고 움직이지 못하게 잡은 케일럽의 손길을 에이든이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에이든은 강제적으로 올리비아를 살피게 되었고 그녀에게 위험이 없어 보여서 점차 여유가 찾아왔다. 그러자 우스운 꼴이 보였다.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올리비아가 종종종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켈타족이라 짐작되는 엄청 큰 덩치의 남자 넷이 졸졸 쫓았다. 그리고 올리비아가 멈추면 같이 멈췄다. 올리비아가 몸을 휙 돌려 쫓아오는 남자들을 째려보자 그들은 그 큰 덩치를 떨며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다. 그걸로 모자라 서로의 몸 뒤로 숨는 모습이 마치 올리비아의 눈빛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다시 올리비아가 걷자 남자들이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올리비아를 뒤쫓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독특한 건 남자들의 태도였다. 올리비아를 굉장히 어려운 상대처럼 대하고 있었다.

    “저거 뭐 하는 짓거리야? 왜 저래?”

    황당해진 에이든이 묻자 케일럽도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모르죠. 그것보다 계속 보십시오. 더 웃깁니다.”

    더 웃기다고? 에이든이 묻기 전에 올리비아의 뾰족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꾸 쫓아오지 말아요!”

    그러자 켈타족 남자들이 펄쩍 뛰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미루듯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더니 누구 한 명이 떠밀려 나왔다. 그는 덩치에 알맞지 않게 주춤주춤 올리비아에게 다가간 후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지 마시고 이야기 좀 들어 주십시오.”

    “아까 다 들었잖아요. 관심 없어요!”

    올리비아가 제법 똑 부러지게 말하자 남자는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뒤에 물러서 있던 인물들 또한 다 같이 기죽은 표정을 지었다. 켈타족인들은 신체가 월등히 우월한 편이었다. 대부분 왕국민보다 커다란 키와 단단한 근육질을 가졌다. 그래서 올리비아의 작은 덩치보다 남자들은 두 배는 커 보였다. 그런 인물들이 올리비아의 말에 움찔거려 대니 어색하면서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자꾸 쫓아오면 저 화낼 거예요!”

    맹해 보이다가도 필요할 땐 똑 부러지게 말하는 올리비아가 귀여워 에이든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역시 올리비아는 최고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에이든은 이어지는 상황에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켈타족 인물들이 바닥에 엎드리는 것 아닌가!

    “제발, 제발 화내지 마십시오!”

    “화내지 말아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기분을 푸십시오!”

    “용서해 주세요!”

    그들은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치 왕을 영접한 노예처럼 그들은 몸을 웅크리고 진심으로 올리비아가 화를 내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얼마나 착하고 그만큼 맹한지 아는 에이든으로선 기가 막힐 정도였다.

    “진짜 왜 저래?”

    “그러게 말입니다.”

    에이든이 황당해서 중얼거렸더니 케일럽 또한 동의했다. 그렇게 에이든과 케일럽이 이해 못할 상황에 놀라고 있는 동안, 올리비아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엎드려 빌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지 마세요. 엎드려서 빌지 마세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올리비아가 울먹이며 말하자 켈타족 인물들은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습니다! 빌지 않습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말을 참 잘 안 들으면서, 또 잘 듣는 이상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저 낯선 사람들은 올리비아가 아까 백작저를 나왔을 때부터 쫓아오면서 말을 걸었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관심 없다고 대답했는데, 왜 자꾸 곤란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얼른 백작저로 돌아가야겠다. 거기까진 쫓아오지 못하겠지. 생각을 정리한 올리비아는 다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진짜로, 진짜로 저 쫓아오지 마세요.”

    “제발, 그것만은…….”

    “쫓아오지 마세요!”

    이젠 쫓아오지 못하게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올리비아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올리비아!”

    익숙한 목소리에 올리비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을 쫓아다니는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아까 있었던 속상한 일이 떠올랐다. 빳빳한 몸을 돌려 돌아보니 에이든 도련님이 달려오고 있었다.

    에이든 도련님이다!

    막상 에이든 도련님의 잘생긴 얼굴을 보자 올리비아는 히죽 웃었다. 하지만 곧 아까 서운했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게 욕하셨었지. 갑자기 감정이 다시 복받쳤다. 참아야하는데, 도련님한테 서운한 티 내면 안 되는데 올리비아는 서러웠다.

    아무리 별로여도 그렇지, 하녀가 좋아하는 게 싫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다고 욕을 하나? 이건 도련님이 나빴다.

    올리비아는 말을 참 잘 듣는 하녀였다. 그냥 좋아하지 말라고 하면 따랐을 거다. 좋아하지 않는 건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노력했을 거다. 그러니까 욕을 한 에이든 도련님이 나쁜 거다.

    서러움이 몰려와 에이든 도련님을 보고 싶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도망가려고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열렬히 찾던 에이든은 그 기색을 단박에 눈치챘다.

    “올리비아! 도망가지 마!”

    벼락처럼 내지른 말에 올리비아는 움찔 떨고 우뚝 섰다. 그 상태로 어쩌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도망가지 말란 소리에 꼼짝 못하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더욱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것만으로 완벽했다.

    에이든은 다시금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번에 또 심장 마비를 겪을 순 없지 않은가. 천천히 심호흡하며 올리비아의 곁에 다가섰다. 막 거리를 좁히고 감격의 순간을 가지려는 찰나.

    “멈춰라!”

    훼방꾼이 나섰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켈타족 인물들이 올리비아를 감싸며 에이든을 경계했다. 그 태도에 케일럽과 숨어 있던 요원들도 튀어나왔다. 얼떨결에 올리비아와 에이든 사이에 경계가 생겨 버렸다.

    “함부로 다가오지 말아라!”

    “다가오면 공격할 거다!”

    갑자기 튀어나온 인물들 때문에 놀란 켈타족의 경계심은 더욱 강해졌다. 상대의 숫자가 꽤 많았다. 그들은 무기를 뽑아 들고 언제든 휘두를 준비를 했다.

    “무기를 버려라.”

    케일럽이 외쳤다. 상대가 공격성을 드러내자 케일럽과 요원들의 기세도 날카로워졌다. 켈타족이 에이든을 해치지는 못하겠지만 하녀를 인질로 잡기라도 하면 일이 커졌다. 에이든이 하녀를 구해 내라고 난리를 칠 테니까 말이다. 두 무리의 흉흉한 기운이 폭발하려는 찰나였다.

    “무, 무슨 짓이에요?”

    올리비아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이 상황이 무섭다는 애처로운 목소리라 에이든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얼른 저것들을 치워 버리고 올리비아를 구해야 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켈타족이 자신들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올리비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에이든은 기가 막혀서 소리를 질렀다.

    “지키긴 뭘 지켜! 올리비아를 내놔! 그 애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리면 너흰 다 죽는다!”

    “당신이야말로 싫다는 사람에게 접근하지 말아라! 이분이 원치 않는 이상 더는 접근할 수 없다!”

    싫다는 사람이라니? 누가? 올리비아가 나를? 에이든은 켈타족이 외친 말에 상처를 받았다. 좌절의 바다에 침몰하려는 에이든을 다시 띄운 건 올리비아였다.

    “도련님께 무슨 짓이에요? 나쁜 짓 하지 말아요! 비켜요!”

    올리비아가 에이든의 편을 든 순간 시들어 가던 그는 다시 활짝 폈다. 해맑은 얼굴로 반색하는 에이든을 보며 케일럽은 혀를 찼다. 사람이 이렇게 하찮고 가볍기도 힘들 거다.

    그리고 그런 에이든만큼 하찮은 인물들이 또 있었다. 켈타족들은 하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나쁜 짓 하지 않았습니다.”

    “비켜섰습니다!”

    도대체 저 하녀의 정체가 뭐길래 저렇게 말을 잘 듣는단 말인가. 혹시 켈타족의 공주라도 되나? 케일럽은 이 상황을 겪으면 겪을수록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켈타족이 뒤로 빠지자 에이든과 올리비아의 사이를 가로막는 방해물은 사라졌다. 에이든은 뿌듯했다. 자신이 얄미울 텐데 올리비아가 편을 들어줬단 게 기뻤다.

    하지만 다시 성큼 거리를 좁히자 올리비아는 또 등을 돌렸다. 아직 얼굴을 마주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물론 에이든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기다리기엔 잠깐 사이에 마음고생이 너무 심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되어서야 에이든은 멈췄다.

    그리고 어깨를 좁히고 서 있는 올리비아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당장 안고 싶을 정도로 가녀린 뒷모습이었다. 심장이 자꾸 빨리 뛰었다. 이 사랑스러운 이가 나를 좋아한단다. 이 넘실거리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올리비아.”

    에이든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심장이 벅찼다. 숨 막힐 듯한 감동이었다.

    “올리비아, 계속 무시할 거야?”

    그러자 올리비아가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에이든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코끝이 빨개진 채 눈물을 참고 있는 올리비아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원망스러운 눈빛조차 짜릿했다. 에이든은 숨 쉬는 법을 잊을 뻔했지만, 이 순간엔 절대 기절할 수 없어서 억지로 호흡을 조절했다.

    “저 조금만 내버려 두세요. 금방 진정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할게요.”

    올리비아가 다시 등을 돌리며 저를 내버려 두라고 하자 에이든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거부에 대한 좌절감과 자신 때문에 이런다는 기쁨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이었다.

    에이든은 느릿하게 걸어가 올리비아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그는 아래서 올리비아를 올려다보며 불렀다.

    “올리비아.”

    “…….”

    꿍해져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올리비아를 보고 에이든은 이대로 심장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저 모습까지 예뻐서 미쳐 가고 있었다.

    “올리비아.”

    “……네, 도련님.”

    도련님이 지금은 너무 미워서 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불러서 올리비아는 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신이 주제넘은 감정을 가진 건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련님이 너무했다.

    싫으면 싫다고 하시지, 욕까지 하다니. 영문을 모르고 혼난 것보다 더 서러웠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게 올리비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그때 도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말해 봐.”

    “뭘요?”

    “아까 날 찾아와서 했던 말.”

    욕할 정도로 싫었으면서 에이든 도련님이 왜 또 묻는지 올리비아는 알 수 없었다. 놀리려는 건가? 올리비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에이든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싫지 않았어. 그러니까 다시 말해 봐. 응?”

    이렇게 다정하게 말하는데 올리비아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직 서럽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했다.

    “……도련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드디어! 에이든은 귓가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견디지 못하고 덥석 올리비아를 끌어안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온갖 기쁨의 욕이 다 나올 것 같아서, 그랬다간 또 올리비아가 놀랄 것 같아서 참아야 했다. 하지만 꾹꾹 눌러 담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외쳤다.

    “너무 좋다!”

    품 안에 갇힌 올리비아가 움찔 몸을 흔들었다. 큰 소리에 놀라 뽀시락거리는 움직임이었다. 에이든이 살며시 팔을 풀어 주자 서러웠던 표정을 살짝 지운 올리비아가 눈치를 봤다.

    “좋으세요?”

    “어! 진짜 기쁘다.”

    에이든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해서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표정도 환장하게 귀엽네. 올리비아는 아직 무슨 일인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싫으신 거 아니었어요? 아까 막…….”

    올리비아가 꼬물거리는 모습을 더 보고 싶다가도 헷갈려하는 게 안타까워 에이든은 바로 알려 줬다.

    “너무 기뻐서, 감격스러워서 절로 나온 말이야. 절대, 진짜로 기쁘다고!”

    “왜요?”

    올리비아는 도련님이 저렇게 기뻐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표정을 보면 진심인 것은 맞는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기뻐하시지? 아까는 욕했으면서. 그런 의문을 에이든은 읽었다. 상대는 올리비아였다. 이런 식의 표현은 틀렸다. 올리비아에겐 그녀의 언어로 들려줘야 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기쁘지.”

    조금의 어긋남도 없도록. 직설적으로. 이번엔 알아들은 듯 올리비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걸 보며 에이든은 더 확실하게 알려 줬다.

    “나도 널 좋아해.”

    “정말요?”

    그렇게 속삭여 주자 올리비아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어지럽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고 또렷하게 응시해 오며 배시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에이든은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어. 정말.”

    그 녹아내리는 심정을 내뱉자 올리비아의 눈이 사랑스럽게 반짝였다. 기쁨을 주체 못하는 솔직한 얼굴은 역시나 어여뻤다. 에이든은 참지 못하고 올리비아의 뺨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올리비아는 그 키스에 기꺼이 응했다.

    드디어 올리비아가, 자신만의 올리비아가 됐다. 에이든은 혀를 섞으면서도 참을 수 없었다. 달콤함에 이성이 사라졌다. 올리비아의 향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에이든의 손이 자연스럽게 올리비아를 마구 더듬어 갔다. 당장, 흠뻑 취하도록 올리비아를 느끼고 싶었다.

    “저기요. 여기 사람 있습니다. 구경꾼은 더 많습니다.”

    케일럽이 바짝 붙어서 이렇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래도 아까워서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입술을 몇 번 빨고 나서야 놔주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예뻐서 올리비아를 품에 폭 안기까지 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얼굴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다들 황당하다는 듯 에이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이든은 물었다.

    “왜? 사람이 고백하는 모습 처음 봐?”

    그 뻔뻔함에 케일럽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젠 발끈하기도 지쳤다. 세기의 사랑을 하는 참사랑꾼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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