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왕실 조사단.
조용하던 콜린스 백작가가 하루아침에 발칵 뒤집혔다. 갑자기 엄청난 수의 기사와 병사가 백작가를 방문했다. 문을 두드리는 손길은 거칠었고 직접 맞이한 그들은 흉흉한 기세를 숨기지 않아 살벌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게 된 잭슨은 긴장감에 온몸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잭슨은 숙련된 집사였다. 콜린스 백작가의 집사로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최대한 덤덤하게 방문 연유를 물으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갑자기 이렇게 적대적인 병력이 도착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기에 당황한 상태였다. 그런 잭슨을 보고 무리의 대표로 보이는 이가 나섰다. 기사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철컹이는 갑옷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왕성에서 나왔소. 콜린스 백작님을 만나고 싶소. 중요한 소식이라 직접 전해야 하오.”
기사의 체구는 듬직해 마주 서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왕성, 중요한 소식. 두 단어가 잭슨의 머릿속에 똑똑히 박혔다. 집사인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닌 걸 판단한 그는 빠르게 알렸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바로 알리겠습니다.”
“기다리겠소.”
“기다리시는 동안 쉴 곳으로 이 하녀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리고 잭슨은 바로 옆에 있던 하녀에게 손님들을 응접실로 안내하라고 명령한 후 아직 식사 중이라 이 소란을 모를 백작 내외를 찾았다.
똑똑.
“주인님 잭슨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안에 먼저 알리고 문 너머에서 허락을 듣고 나서 잭슨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엔 백작 내외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들인 데이빗까지 있었다. 셋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은 참 단란했다. 부족함 하나 없는 그림 같은 귀족가의 모습.
그래서 잭슨은 분했다. 저 자린 에이든 도련님의 자리였다. 주제도 모르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여자와 데이빗을 보니 잭슨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론 그는 숙련된 집사이기에 그 불만을 내색하진 않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편하게 식사 중이던 콜린스 백작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아침 식사를 방해하냐는 신호였다. 잭슨은 불순한 속내를 다스리며 차분하게 답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백작의 얼굴에 의아한 감정이 떠올랐다.
“약속이 있었나?”
“아니요. 없었습니다.”
잭슨이 대답하기 무섭게 백작 내외의 표정이 굳는 게 보여 재빠르게 덧붙여야만 했다.
“왕성에서 온 손님입니다. 주인님이 직접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콜린스 백작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는 살면서 작위를 물려받을 때 빼고는 왕성에서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왕성에서 연락이 왔다? 그는 이게 과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왕성에서? 혹시 왕세자 전하가 우릴 초대한 건 아닐까요? 그동안 잘 머물다 갔잖아요.”
심각하게 굳은 백작의 상태를 모르는 듯 왕성 소리에 데이빗의 희망에 들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며칠 전 갑자기 떠나게 된 일에 대해 사과도 할 겸. 그렇지 않을까요?”
데이빗의 말에 편들어 주듯 백작 부인 또한 말을 덧붙이며 백작에게 동의를 구했다. 가만히 있던 잭슨이 흘긋 확인한 모자의 낯빛은 기대하는 기색만 가득했다.
잭슨도 모든 상황을 아는 건 아니지만 기사들이 워낙 흉흉했기에 그들의 방문이 좋은 의도가 아닐 걸 짐작했다. 잭슨은 희망으로 들뜬 모자를 보며 절로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어쨌든 지금은 백작가의 주인이 앞에 있었으니까.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백작가의 주인이 인정한 백작 부인이었다. 싫은 내색을 해선 안 된다. 얼른 에이든 도련님이 백작가를 물려받으셔야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모실 텐데.
“식사는 이만해야겠군.”
콜린스 백작은 덤덤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아니다. 마저 식사해라. 네 어머니가 홀로 식사하게 둘 수 없지 않느냐.”
데이빗이 기대감에 부풀어 함께하길 요청했다. 하지만 콜린스 백작은 백작 부인을 핑계 대며 그를 말렸다. 데이빗은 잠시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얌전히 앉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말처럼 어머니를 챙겨야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먼저 나가서 미안하오. 마저 식사하시오.”
백작이 백작 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을 나섰다. 잭슨은 백작의 뒤를 따라나섰다. 적막한 복도를 거닐며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손님의 분위기는 어떻지?”
“심상치 않습니다. 기사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여럿 대동하고 왔습니다.”
손님의 방문 목적이 좋은 일은 아니란 걸 예상했다는 것처럼 백작의 표정이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묵묵한 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잭슨은 병사와 기사들이 자신이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 대기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어쩐지 예감이 더 좋지 않았다.
“손님을 입구에 세워 뒀나.”
“아닙니다. 분명히 안으로 안내하라고 일렀습니다.”
집사의 흐려지는 대답에 콜린스 백작의 미간은 더욱 좁혀졌다. 하인들이 집사의 말을 듣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저기 손님이 계속 서 있는 이유는 그들이 거절했단 소리였다. 정말로 이 저택을 찾은 이유가 달갑지 않은 일임을 알리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며 생긴 인기척을 느낀 듯 그들의 시선이 콜린스 백작을 향해 쏠렸다. 백작은 그 시선을 인식하자 순식간에 온화한 얼굴을 그려냈다. 그리고 계단을 마저 내려가며 적대적인 빛을 띠는 손님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했다.
“이거 손님을 이렇게 입구에서 기다리게 만들었군요. 미안합니다. 이 저택의 주인인 리처드 콜린스입니다.”
“아닙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준다고 했지만 제가 기다렸습니다. 왕실 소속 제 3기사단 단장을 맡고 있는 앰버튼 챈들러입니다.”
백작가의 배려를 받아들이지 않았단 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가뜩이나 불길하던 기분이 더욱 바짝 따라붙었다. 콜린스 백작은 불안한 속내와 다르게 너그러운 웃음을 지어내며 인사부터 했다.
“반갑습니다. 앰버튼 챈들러 경.”
“갑자기 연락도 없이 방문한 점은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만큼 급한 일이셨겠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전 왕성의 손님이 이곳에 머물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챈들러의 질문은 기습처럼 쏟아졌다. 콜린스 백작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네. 맞습니다. 제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우연하게 지나가시던 귀한 분이 방문해 주셨습니다. 저흰 성심을 다해 보필했고 며칠 전 새벽에 그분은 떠나셨지요.”
“정말 떠난 게 맞습니까?”
뒤따르는 질문에 콜린스 백작은 대답 대신 집사를 돌아봐야 했다. 손님을 배웅한 것은 잭슨이었으니까.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잭슨은 대화 내용을 전부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가 떠나시는 귀한 분을 배웅했습니다. 정확히 며칠 전 새벽에 출발하셨습니다. 확실합니다.”
잭슨이 확언했음에도 챈들러의 서늘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차디차게 가라앉았다. 기사가 낱낱이 살펴보는 시선은 그걸 받아들이는 이에게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 잭슨은 이런 상황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그래서 긴장감에 꼼짝도 못하자 백작이 나섰다.
“이제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전 그분을 중간에 만나 왕실까지 호위하기 위해서 온 겁니다. 하지만 중간에 만나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챈들러가 건넨 말은 담담하게 넘길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잭슨은 순간 크게 숨을 들이켰고 콜린스 백작 또한 잠시 표정이 흔들렸었다. 하지만 챈들러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더 위험한 말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났다는 소식 이후로 그분과 연락도 끊겼습니다.”
챈들러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왕세자의 실종!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이게 사건이 되면 콜린스 백작가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린 콜린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중간에 길이 엇갈린 것 아니겠습니까?”
“길이 엇갈릴 순 있지요. 하지만 연락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콜린스 백작의 말에 챈들러가 단호하게 반박했다. 사실 백작의 가설은 희박하긴 했다. 왕성으로 가는 길이 여러 개라고 해도 빠르고 편한 길은 하나였다. 굳이 왕세자가 다른 험한 길을 택해서 갔을 리도 없고, 택했다고 해도 챈들러의 말처럼 연락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럼, 실종이란 겁니까?”
제발 그것만은 안 된다는 콜린스 백작의 간절한 물음에 챈들러는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걸 알아보기 위한 겁니다. 백작가를 수색하게 해 주십시오.”
최대한 정중한 어조를 사용했지만 챈들러의 말은 부탁이 아니었다. 당장 허락하라는 명령이었다. 여기서 거부했다간 실종된 왕세자를 납치한 범인이라고 몰릴 수도 있었다.
수도에 연이 닿은 귀족이 없는 콜린스 백작은 자신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렸을 때 벗어날 구멍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그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니, 납치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해선 강력하게 도와야 했다.
“마음껏 조사하십시오. 콜린스 백작가는 수색을 적극 돕겠습니다.”
“다들 흔적이 남아 있는지 샅샅이 조사해라.”
콜린스 백작이 허락하자 챈들러는 지체 없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미 말을 전해 두었기 때문에 기사들은 각각 병사를 이끌고 체계적으로 백작가 내에서 흩어졌다. 그들이 멀어지자 챈들러는 집사에게 요구했다.
“우선 전 왕세자 전하가 머물렀던 곳을 보고 싶습니다. 어떤 흔적이 남았을지도 모르니까요.”
떠난 지가 언젠데 그 방을 그대로 뒀겠는가. 잭슨은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청소를 했을 텐데요.”
“그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챈들러의 답은 변하지 않았고 잭슨은 백작의 도와주란 눈짓에 순순히 그를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왕세자가 머물렀던 방에 도착해서 챈들러는 세심하게 살폈다. 이 저택의 사람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오는 동안 전투의 흔적을 발견했다. 다급하게 조사에 들어갔고 적지 않은 수의 무리가 꽤 강력한 무력을 지닌 이들과 전투를 벌였음을 알 수 있었다.
왕세자 전하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콜린스 백작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전투.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무력 집단. 그리고 연락이 끊긴 왕세자 전하. 어딜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시기가 너무 나빠 그저 길이 엇갈려서 생긴 실수라 치부하기 힘들었다.
챈들러는 왕세자 전하의 실종에 콜린스 백작가가 연관 있음을 확신했다. 그들이 진범이 아니더라도 방조범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콜린스 백작가에서 왜 이런 위험한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기엔 콜린스 백작가는 얻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 했고, 만약 어떠한 것을 얻는다고 해도 그 결과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백작가처럼 능력 없는 가문이 도모하기엔 왕세자 납치 사건은 너무 거대한 일이다.
특히, 이 위험한 시기에 벌어진 일이라 더 신경 쓰였다. 챈들러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방 안을 한참을 살폈지만 결국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혹여 왕세자 전하가 이곳에 머물며 어떤 낌새를 느끼고 흔적을 남겨 두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건 헛된 희망이었다. 챈들러가 방 안을 살피던 것을 멈추자 잭슨이 나섰다.
“다 살펴보셨습니까? 역시 의심스러운 것은 없지요?”
긴장된 기색으로 바라보는 집사를 챈들러는 잠시 응시했다. 의심스러운데, 증거가 없으니 막막했다. 그래도 당장 잡히는 것이 없으니 한발 물러서야 했다.
하지만 콜린스 백작가가 왕세자 전하 납치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속단한긴 아직 일렀다. 챈들러가 확인한 곳이라곤 왕세자 전하가 머물렀다고 백작가 측에서 주장하는 방 안이니까.
“다른 곳도 둘러보겠소.”
“네. 그러시지요.”
집사는 의외로 순순히 답했다. 그렇게 챈들러는 주변의 방 안까지 샅샅이 살폈다. 아직 손님이 머물러 주인이 있는 방은 양해를 구해 가며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수색에 협조해 주십시오.”
“왕실에서 나왔습니다.”
기사들이 백작가를 뒤집어엎을 것처럼 수색하는 터라 콜린스 백작가에서 머무는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기사단의 요청에 협조하면서도 구경하기 바빴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몰라요. 왕실에서 나왔대요.”
“왕실에서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죠?”
“혹시 백작가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가요?”
숙덕거리는 손님들의 면면을 살피며 챈들러는 딱 변방 시골 귀족 가문답다고 여겼다. 익숙한 얼굴이 한 명도 없으니 다 그저 그런 가문일 거다.
그러니 이 시국에 한가하게 남의 저택에 놀러와 파티나 하고 있겠지. 부담 갖지 않고 수색을 이어 가도 되었다. 챈들러는 손님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지만 구경꾼들 중엔 수색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챈들러는 패기 있게 나서는 인물을 쳐다봤다. 바들바들 떠는 귀부인을 뒤로하고 나선 이는 젊은 남자로 매우 당당했다.
“왕실의 일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수색을 하는 기사를 앞에 두고 당당할 수 있는 인물은 왕실을 무시할 수 있는 엄청난 가문의 사람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데이빗 콜린스입니다. 콜린스 백작님이 제 아버지입니다. 손님도 많은데 이런 무례한 행동이라니요. 왕실에서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겁니까?”
그래, 이렇게 콜린스 백작 가문의 사람이니까 나설 수 있는 거다. 챈들러는 눈앞의 젊은 남자를 훑었다. 흥분으로 씩씩거리며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아직 어설펐다.
빈틈투성이라 상대하기 어렵지 않은 존재다. 막 챈들러가 입을 열려는 순간,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냉큼 나섰다.
“데이빗 도련님, 자중하시지요. 주인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기사님에게 최대한 협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집사가 모시는 주인의 아들에게 사용하는 말투치고는 과했다. 챈들러는 두 사람을 유심히 살폈다.
데이빗은 이 무례에 대해 더 따지고 싶지만 이미 아버지가 허락했다고 하자 차마 기사에게 더 소리칠 수 없었다. 손님들의 시선이 느껴졌고 수치스러웠다. 갑자기 왕실에서 등장해서 왜 이런 무안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건드릴 수 없는 왕실 기사 대신 잭슨을 쏘아붙였다.
“도대체 무엇을 찾는 겁니까?”
신경질적인 그 물음에 잭슨은 흘긋 챈들러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건 제가 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사실 이마저 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데이빗이 길길이 날뛰면 백작가가 망신이기에 이런 대답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성의 없는 답을 하고 한발 물러서는 잭슨을 보며 데이빗은 이를 악물었다. 건방지긴. 잭슨은 분명히 왕실 기사들이 무얼 찾는지 알 거다. 그러면서 그 중요한 내용을 백작가의 장자인 자신에겐 알려 주지 않다니.
잭슨의 가문은 대대로 백작가를 모셔 왔다. 그래서인지 도가 지나쳤다. 백작가 자체를 우상시하고 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잭슨이 출신이 미천한 어머니와 자신을 싫어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도 알지만. 손님들 앞에서도 이러다니.
괜히 잭슨과 실랑이하며 집사에게도 무시받는 존재란 걸 타인에게 알릴 수 없었다. 데이빗은 잭슨에게서 답을 듣지 못할 것을 알기에 대표로 나선 이를 향해 물었다.
“우리 가문을 이렇게 뒤집어엎으면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챈들러는 이 짧은 일로도 대충 콜린스 백작의 아들과 집사의 알력 싸움을 눈치챘다. 아랫사람에게 무시당하는 존재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기밀을 요하는 일이고, 아직 단서를 찾고 있소. 확실시되면 알려 드리겠소.”
이런 챈들러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데이빗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챈들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왕세자 전하를 후하게 대접한 결과가 고작 이런 겁니까?”
“그만큼 중한 일이니 기다리시오.”
분노한 데이빗을 챈들러는 단호하게 잘라 냈다. 백작도 아니고 그 아들이 하는 경고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챈들러의 오만한 시선에 데이빗은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더는 방해꾼이 없으니 수색은 계속되었다. 모든 방과 빈 공간을 뒤지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한참 뒤에 부기사단장인 제이크가 다가와 챈들러에게 속삭였다.
“사람을 숨길 만한 곳과 다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챈들러는 미간을 좁혔다. 정말 백작가와 왕세자 전하의 실종이 연관이 없는 것일까? 그러기엔 무언가 찜찜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사람들을 한 명씩 불러 대화를 나눠 보지.”
이곳엔 꽤 많은 손님들이 있었고 그들이 무언가 눈치챈 점이 있을지도 몰랐다.
“동의할까요?”
챈들러의 말에 제이크가 반문했다. 다들 귀족들인데 심문을 순순히 받아들일까가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납치라면 시급을 다투는 일이니까. 그리고 이런 하급 귀족들의 불만은 왕실의 힘으로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다.
“진행하도록.”
챈들러가 단호하게 말하자 제이크가 결국 사람들에게 면담을 갖겠다고 알렸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대화를 나눠 볼 겁니다.”
그러자 다들 웅성거리면서 반발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유라도 알려 주시죠?”
“맞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비협조적으로 나올 것 같자 챈들러는 일부러 소리를 내며 검을 움켜쥐었다. 철컹. 쇠가 부딪히는 위협적인 소리가 울리자 반발하던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챈들러는 그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중요한 일입니다. 협조해 주시죠. 아니면 왕성에 가서 대화하겠습니까?”
그곳에선 이렇게 정중하게 묻지 않을 거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챈들러의 위협에 귀족들은 불만을 잠재웠다. 겉으론 살짝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면담 시간을 가졌다.
질문은 간단했다. 왕세자 전하를 만난 적 있는지, 만난 적 있으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콜린스 백작가에 머물면서 혹시 뭐 특별한 점은 없는지였다. 그리고 은근슬쩍 이 저택에서 수상한 기류를 느끼진 못했는지도.
다들 특별한 일은 없다고, 그냥 평범했다고. 오히려 지금 이 일이 가장 큰일이라고만 대답했다. 정말 쓸모없는 대답들이었다. 도대체 이들이 여기 모여서 하는 일은 무엇일까? 영양가 없는 인물들이 영양가 없는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 아닌가. 챈들러는 보면 볼수록 이들이 한심했다.
“왕세자 전하가 떠나시는 모습을 봤소?”
“못 봤습니다. 연락을 받고 새벽같이 떠났다고 합니다.”
“전하를 마지막으로 본 건 집사란 말이오?”
“네. 그 전날까지 아무런 말씀 없으시다가 갑자기 떠나셨으니까요. 왕세자 전하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마지막 면담자인 데이빗의 다소 신경질적인 대답에 챈들러는 묵묵히 답변했다.
“알겠소. 답해 주셔서 감사하오. 그만 나가 주시오.”
별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냉정하게 나가라고 하는 챈들러를 바라보며 데이빗은 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무시하다니.
“그래서 뭐 찾은 게 있습니까?”
“아직 없소.”
“뭐가 문제인지라도 알려 주십시오!”
질문의 내용이 왕세자 전하에 대한 것임을 알았으면 대충 알아채고 조심해야 할 것을. 백작의 아들이란 자가 참으로 눈치도 없었다. 챈들러는 점점 더 데이빗을 상대하기 싫어졌다.
“기밀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나가 보십시오.”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데이빗이 욱해서 외쳤다. 그 신경질적인 태도에 챈들러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물었다.
“콜린스 백작님은 만나 보셨습니까?”
데이빗이 움찔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며 화를 삭였다. 저건 만나 봤단 소리였다. 그러고도 저런 질문을 했다는 건 콜린스 백작이 자신의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단 소리기도 했다. 백작이 아들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가?
“콜린스 백작님이 알려 주지 않으셨으면, 저도 알려 드릴 필요 없다는 것 아닙니까?”
“오만하시군요.”
데이빗은 챈들러에게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고 거친 몸짓으로 돌아섰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챈들러야말로 갑자기 궁금해졌다. 저 인간이 뭘 믿고 저리 방자하게 굴 수 있는지.
아버지에게도 신용받지 못하는 아들인 주제에 지금 누가 누구더러 오만하다는 것인가. 혹시 뭔가 대단한 걸 숨기고 있기라도 한 걸까? 하는 의심이 가면서도 저렇게 멍청해서 무언 갈 속일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챈들러는 불쾌감에 창밖을 내다보던 중 어렴풋이 나무 사이로 건물 한 채가 보이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밖에 대기하고 있는 집사를 불러들여 물었다.
“저건 무엇이오?”
“백작님의 아드님이신 에이든 도련님이 머물고 있는 별채입니다.”
“왜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왕세자 전하는 저곳에 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리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러운 집사의 대답에 챈들러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제이크를 돌아봤다.
“수색은?”
“별채가 있는지 몰라서 수색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이크가 눈치를 보며 답했다. 비밀을 숨기기엔 사람이 많은 본채보다 조금 멀리 떨어진 별채가 더 낫겠지. 의심스러운 곳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챈들러가 명령했다.
“저곳도 수색하지.”
* * *
별채에 있던 올리비아는 뒤늦게 소란을 느끼고 본채 쪽을 응시했다. 이미 한창 구경 중이던 샬롯은 뭔가 알까 해서 물어봤다.
“무슨 일 있어요?”
“난리도 아니야. 왕성에서 사람이 찾아왔나 봐.”
“왕성에서 누구요? 백작님을 찾아오신 건가요?”
올리비아는 백작가에서 나고 자랐다. 그동안 왕성에서 사람이 왔단 소린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신기했다. 샬롯 또한 처음 겪는 일이었고 소란의 원인을 정확하게 모르니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어. 근데 좋은 일은 아닌 거 같네.”
“왜요?”
“너무 소란스러워.”
샬롯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채 쪽에서 사람이 걸어왔다. 집사님과 낯선 기사가 앞장섰고 뒤로 여러 명의 병사들이 흉흉하게 뒤따라와 올리비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찾아온 사람들이 무서워 괜히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별채 입구에 와서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알렸다.
“잠시 집 안 수색 좀 하겠습니다.”
샬롯과 올리비아는 눈치만 봤다. 별채에 에이든 도련님의 허락 없이 사람을 들이면 혼날 텐데, 안 된다고 하기 힘들었다. 올리비아가 머뭇거리자 집사님이 나섰다.
“우선 에이든 도련님을 뵈어야겠다. 도련님은 어디 계시지?”
“서재에 계셔요.”
집사님의 물음이니까 답해도 된다. 올리비아는 반색하며 답했다.
“너희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거라. 우선 위층에 올라가 도련님을 뵙지요.”
올리비아가 답하자 집사님이 그녀들에게 대기할 것을 명령하고 기사님과 함께 서재로 올라갔다. 남은 병사들의 눈빛이 흉흉해 샬롯과 올리비아는 주눅이 들어 가만히 서 있었다. 소곤거리는 말조차 병사들의 심기를 거슬려 혼날까 봐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올리비아는 어쩐지 이 상황이 불안했다.
똑똑. 잭슨은 서재에 다다라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갑자기 백작가에 떨어진 날벼락에 정신이 없었다. 안쪽에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아 잭슨은 조심스럽게 다시 노크하고 알렸다.
“도련님 잭슨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자 소파에 편하게 앉아 책을 읽고 계신 에이든 도련님이 보였다. 잭슨은 도련님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에이든 도련님 왕성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왕성에서?”
에이든 도련님이 고개를 들자 잭슨은 얼른 소개를 했다.
“왕실 제 3기사단 단장인 앰버튼 챈들러 경입니다. 왕성에서 백작가에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잭슨은 제발 에이든 도련님이 태도를 조금 조심해 주길 바라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에이든 도련님은 현 상황을 모르니 실수할지도 몰라 조마조마했다. 그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으니까.
사실 잭슨은 이미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잘 놀다가 멀쩡히 떠난 왕세자가 실종되었단다. 마지막 배웅을 자신이 했으니 그분이 백작가를 떠난 건 확실했다.
그런데 왕실 기사단이 아무래도 납치가 의심된다고 수색을 하겠다고 요구하고 있으니, 잭슨이 버티는 것만으로도 용하지 않은가. 왕세자의 납치는 왕실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었고, 반역은 용서받기 힘든 중죄였다.
그래서 지금은 굉장히 조심스러우며 위험한 상황이었다. 콜린스 백작가의 운명이 걸린 일이 될지도 몰랐다. 제발 오늘만이라도 에이든 도련님이 너그럽게 상황을 넘겨 줬으면 좋겠다고 잭슨은 정말 간절하게 바랐다.
“왕실 제 3기사단 단장 앰버튼 챈들러요. 잠시 협조 좀 부탁드리겠소.”
그러는 사이 챈들러가 딱딱한 어조를 사용했다. 말은 협조였지만 어투는 강압적으로라도 행하겠단 태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에이든 도련님이 늘어졌던 몸을 바로 세우며 책을 덮었다.
“우선 만나서 반갑습니다. 앰버튼 챈들러 경. 에이든입니다. 무슨 협조가 필요하다는 겁니까?”
잭슨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왕실에서 나온 사람이란 걸 알아서 그런지 나름 에이든 도련님이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도련님의 예의 있는 행동에 날카롭던 챈들러 경도 살짝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잠시 별채를 수색해도 되겠습니까? 실종에 관련된 일이오.”
이만하면 데이빗에게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정중함이라 잭슨은 나름 뿌듯했다. 그는 별채로 이동하면서 챈들러 경에게 에이든 도련님은 왕세자 전하의 방문도 모를 거라며 간절하게 알려 놨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에이든 도련님이 본채를 거의 방문하지 않아서 왕세자 전하를 따로 만날 틈이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챈들러 경도 에이든 도련님에게 딱히 왕세자 전하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데 별채에 누가 드나드는 걸 싫어하시는 에이든 도련님이 타인이 수색하는 걸 허락할까가 문제였다.
“실종이라…….”
에이든 도련님과 챈들러 경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두 사람은 모종의 시선이라도 나누는지 미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잭슨만 불안해서 속으로 덜덜 떨었다.
“당연히 도와야죠. 마음껏 둘러보시죠.”
다행히 에이든 도련님이 선뜻 허락했다. 잭슨은 짙게 안도했다. 그리고 그 선선한 허락에 챈들러는 잠시 의아한 듯 에이든을 응시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에이든은 담담해 보였다. 챈들러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호의를 받아들였다.
“도움에 감사드리오. 바로 수색을 시작하겠소.”
챈들러가 아래로 내려가자 잭슨은 머뭇거리는 눈치를 봤고 에이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 해? 나가 봐. 저 사람이 혼자 둘러보게 할 거야?”
“네. 나가 보겠습니다.”
잭슨이 곧바로 답하고 챈들러를 따라나섰다. 홀로 남은 에이든은 덮었던 책을 다시 폈다. 밖의 정신없는 상황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 에이든은 여유로운 자세였다.
밖으로 나온 챈들러는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알렸다.
“주인의 허락을 받았으니 지금부터 별채 수색에 들어가겠다. 집주인에게 예의를 갖춰 조심히, 그러나 수상한 점이 없는지 샅샅이 조사하도록.”
“네!”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수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병사들이 별채 구석구석을 전부 살폈다. 혹시 숨겨진 공간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은 전부 조사했다.
물론 별채에 그런 특별한 장소는 없었다. 본채보다는 작은 터라 비교적 빠르게 수색을 마쳤고 병사의 보고가 이어졌다.
“아무것도 나온 게 없습니다.”
콜린스 백작가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은 잘못된 거였나. 짐작이 틀렸다는 점에서 챈들러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 곁에 있던 잭슨이 얼른 나섰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떠나시는 걸 제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챈들러는 대답 없이 딱딱한 표정만 지었다. 여기까지인가. 집사의 말도 있고 이미 한차례 수사를 하며 뚜렷한 흔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더 조사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의심스러웠다.
왕세자 전하의 마지막 연락이 닿은 곳이 여기란 점.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전투의 흔적. 그 두 가지 상황이 합쳐져서 의미하는 바는 하나 아니겠는가. 왕세자 전하는 콜린스 백작가를 나오자마자 습격을 받았단 소리다.
‘누가 어떻게 알고?’
왕세자 전하가 콜린스 백작가를 방문한 건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었다. 방문과 머문 것도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왕성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특정한 사건 때문에 급히 움직이게 된 거였다. 즉, 정말 왕세자 전하의 이동은 예측 불허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 누가 왕세자 전하를 납치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막막해서 차라리 백작가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면 편했을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갑자기 전시 상황인 것도 짜증이 나고. 하필 왕세자가 이 시기에 이런 곳을 돌아다녀 문제를 일으키고, 그 뒷수습을 위해 이렇게 수색을 하게 된 것도 짜증이 났다. 더 불만인 건 왕세자 전하의 신변을 확보하기 전에는 전시 소식에 대해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괜히 수색에 혼란을 줄지도 모르고 왕실에서 내려온 명령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전쟁이 확실시된 상황이 아니니 함부로 소문내지 말라는 엄명이었다. 괜한 소식에 왕국 전체가 혼란에 휩싸이는 걸 막자는 의도였지만. 과연 그게 도움이 되는 상황일지.
“수색은 끝난 겁니까?”
때마침 목소리가 끼어들며 챈들러의 생각을 방해했다. 계단에서 내려다보는 에이든이란 자는 백작의 아들이라고 했다. 아까 본채에서 봤던 다른 아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차분하면서 이지적인 분위기의 남자는 정중하게 굴지만 전혀 정중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게 불쾌하게 느껴졌는가? 기이하게 그건 또 아니었다. 오만이 아니라 적당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달까. 묘한 설명이지만 딱 그런 느낌이었다.
어쨌든 왕세자 전하의 방문조차 모른다는 이에게 무례하게 군 것은 맞기에 챈들러는 정중하게 사과와 감사를 표했다.
“실례했소. 도움을 줘서 감사하오.”
“별로 한 것도 없는걸요. 찾으시던 건 찾지 못하셨을 텐데, 오늘 바로 저택을 떠나십니까?”
“실종된 인물이 중요한 인물이라 여유가 없소.”
챈들러는 서둘러 떠나겠다는 말을 돌려 했다.
“아쉽군요. 백작가의 저녁은 맛있을 뿐만 아니라 여유를 찾도록 도와줄 텐데요.”
에이든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서늘했다. 챈들러는 그 얼굴에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했다. 그건 명백한 신호였다. 그는 몸을 돌려 수색 내내 줄곧 쫓아다니던 집사를 향해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밤 여기서 머무를 수 있겠소? 급하게 움직여 병사들도 지친 듯해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소.”
“당연히 되지요. 백작님이 무슨 일이든 도와드리라고 했습니다. 본채로 이동하시지요. 머물 곳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초조함을 숨기고 따라다니던 집사는 바로 손님으로 모시겠다고 나섰다. 겉으론 환영한다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내는 복잡해 보였다. 물론 챈들러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집사를 따라 나가면서 챈들러는 에이든을 한번 돌아봤다. 가만히 서 있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차분하게 말했다.
“편히 쉬다 가세요. 아마도 즐겁고 유익한 저녁 식사가 될 겁니다.”
그 담담한 말에 챈들러는 자신의 선택이 정답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 무엇이 준비되어 있기에 저런 신호를 주는 것일까? 백작의 아들이면서 어째서 이런 눈치를 주는 걸까?
그러고 보면 아무리 차남이라고 해도 본채가 아닌 별채에서 이렇게 홀로 지내는 것도 이상했다. 대충 봐도 데이빗보다 에이든이 사람 됨됨이가 괜찮아 보였는데 두 사람의 위치가 왜 이렇게 다른지도 궁금했다.
아무래도 저녁 식사 때까지 콜린스 백작가의 내부 사정을 조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때가 되면 다 알게 되겠지.
‘무슨 꿍꿍이인지.’
챈들러는 다시금 에이든을 응시하고 등을 돌렸다.
에이든은 멀어지는 챈들러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삼켰다. 대어가 미끼를 물었다. 일이 이렇게 잘 돌아갈 줄은 몰랐다. 챈들러가 눈치 빠르게 신호를 알아들은 것도 좋았고. 멍청해서 더 노골적인 신호를 줘야 했으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마지막 함정 하나만 파면 백작가의 일은 곧 정리될 거다.
“나와 봐.”
에이든이 부르기 무섭게 케일럽이 인기척을 드러냈다. 다행히 조사단은 숨어 있는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숨어 있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저렇게 경박한 성격과 다르게 실력 하나는 믿을 만했으니까 처음부터 걱정하지 않긴 했다. 에이든은 품에 들고 다니던 봉투를 꺼내 계속 투덜대는 케일럽을 향해 건넸다.
“이것 좀 그놈의 방에 숨기고 와.”
“뭡니까?”
케일럽은 순순히 봉투를 받아 들고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눈을 부릅떴다.
“이걸요?”
이 귀한 걸 어째서 쓰냐는 케일럽의 반응에 에이든은 산뜻하게 대꾸했다.
“응. 그걸.”
“어째서…….”
케일럽은 자신의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안타까움을 질질 흘렸다. 그러다가 에이든의 의도를 떠올린 듯 눈빛을 달리했다.
“누명을 제대로 씌우시려는 거군요.”
딱히 에이든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계획을 알아차린 점에서 흡족했다. 정말 갈수록 훌륭한 보좌관이 되어 갔다.
“그리고 왕세자 놈은 그만 옮기고 적당한 데 숨겨 봐. 여기서 멀지 않은 곳으로.”
“꽤 멀리까지 옮겨 가 다시 데려와야 할 텐데요.”
케일럽의 목소린 불만이 가득했다.
“알면 서두르라고.”
언제나 그렇듯 에이든의 음성은 산뜻했다. 케일럽은 또 생각했다. 에이든이 왕세자의 거시기를 자르라고 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사람이 간악하기 그지없었다. 기분은 더럽지만 어쩌겠는가. 하라면 해야지.
“하지만 이거 잘못 얽히면 같이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 지금 상황에 이건 들키면 독인 물건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백작가와 같이 몰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일이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왜? 난 밀고자인걸.”
씨익 웃는 얼굴이 참 화사했다. 에이든의 빙글거림에 케일럽은 혀를 차고 말았다. 꼭 좋게 풀린다는 보장은 없지만 어쩐지 에이든의 말처럼 잘 풀릴 것 같아서 짜증이 났다.
‘음흉한 놈.’
그래도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는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케일럽은 우선 시킨 일이나 처리하기로 했다.
* * *
“성의껏 준비했습니다. 편하게 즐기십시오.”
갑작스러운 손님의 존재에도 백작가의 저녁은 성대하게 준비되었다. 이미 계속 손님이 머물러 왔기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든 걸 지켜보는 챈들러는 비소가 새어 나올 뻔했다.
“과분할 정도군요.”
“왕실에서 온 분에게 이 정도 성의도 못 보이겠습니까?”
별채를 조사하는 동안 콜린스 백작에게 무슨 언질을 들었는지 데이빗이 눈치를 봤다. 챈들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호화로운 식탁이 눈에 거슬렸다.
‘비꼬는 것도 못 알아듣고.’
아무리 변방에 있다고 해도 이렇게 소식이 느려서야. 힘 있는 귀족과 연이 하나라도 있다면 지금 시국에 이렇게 낭비를 할 수 없었다.
자칫하다간 전쟁이 날 판이었다. 제국과 맞닿은 국경에서 병사들이 집결했다. 그리고 제국으로부터 곧 쳐들어오겠다는 선전 포고를 받았다. 이것도 조약 때문에 선전 포고를 한 거지, 습격이었으면 왕국의 경계는 벌써 무너졌을 거다.
그런 흉흉한 상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이렇게 즐기고 있다니. 물론 제국의 선전 포고에 대해 왕실 내에서 쉬쉬하고 있긴 했다.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던 왕국은 뒤집어질 테니까. 서로 살겠다고 혼돈의 상태가 될 거다.
너무나 평화의 시기가 길었다. 제국이 무역을 중단하긴 했지만 무력 대응은 없었다. 왕국은 제국이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인 챈들러 본인 또한 그랬다. 얼마 전까지 전쟁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왕국은 무방비 상태였다. 지금 전쟁이 터진다면 왕국은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할 거였다.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순식간에 무너질 게 뻔했다. 그 와중에 왕세자마저 실종되었다. 막막함의 끝을 달리는 이 순간에, 이리 여유로운 자들을 보니 어찌 속이 편할 수 있을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생각이 길어져 챈들러가 식기를 들지 않자 데이빗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챈들러는 차분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콜린스 백작과 백작 부인, 그리고 데이빗과 몇몇의 가솔들이 함께하게 된 식사 자리였다. 예상했던 인물이 없었다.
“그것보다 사람이 한 명 비는군요.”
“네? 누구 찾으시는 인물 있습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데이빗의 반응이었다. 당연히 제외되어야 한다는 태도. 챈들러는 담담하게 여기에 없는 인물을 언급했다.
“아드님이 두 분이지 않으십니까?”
콜린스 백작을 향해서 물었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콜린스 백작을 제외한 다른 이들만 찔끔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녀석은 원래 함께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상황을 무마하고 싶은지 데이빗이 다급하게 말했다.
“원래?”
같은 식구면서 한 명만 따로 먹는다? 챈들러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데이빗은 더욱 당황해서 되는대로 나불거렸다.
“예. 그 녀석이 조금 제멋대로거든요.”
상황은 대충 다 알지만 정말 가소로웠다. 챈들러는 별채 조사를 마치고 본채로 돌아와 저녁 식사 전까지 손님과 하녀들에게 은근슬쩍 콜린스 백작가에 대해 물었다.
“백작가의 내부 사정을 알고 싶은데.”
“내부 사정이라면…….”
“가족사 말일세. 특히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군.”
잠시 눈치를 보던 하녀들은 백작가의 사정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했다.
“젊은 시절 백작님에게 연인이 있었어요.”
“하지만 연인의 신분이 미천해 선대 백작님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다른 분과 정략결혼을 하셨죠.”
“그분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둘째 도련님인 에이든 도련님이에요.”
“여기서 둘째 도련님인 이유는…….”
여태껏 줄줄 잘도 나불거렸으면서 하녀는 마지막에 눈치를 보았다. 뭐 이야기하지 않아도 대충 상황은 뻔했다.
“백작님이 결혼하고도 그동안 계속 옛 연인과 관계를 이어 오며 아이도 낳았던 거죠. 그리고 백작 부인이 돌아가시자마자 그 연인과 서자를 데리고 들어왔어요.”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인지, 백작보단 왕실의 권력이 더 무서웠던 건지 모르겠다. 하녀들이 마지막까지 순순히 말해 준 덕분에 챈들러는 이 집안의 기이한 분위기를 전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데이빗이 귀족치고 천박한 태도였던 거다. 천한 피가 흐르니 당연했다. 에이든이 별채에서 조용히 머무르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부족한 서자 놈이 주제도 모르고 정통 후계자에게 열등감을 갖고 그 자리를 탐내는 거겠지. 그리고 콜린스 백작은 무능하게 천한 피가 흐르는 아들을 더 아끼는 것이고.
챈들러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콜린스 백작이 행한 일은 명망 있는 귀족으로서 해선 안 될 꼴사납고 천박한 일이었다. 귀족의 품위를 잃어버린 행동을 한 인물들은 상대하기도 싫었다. 머물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엔 나름 유용해 보였다. 아버지가 실은 배신자였다면 그를 믿었던 아들은 얼마나 복수심에 불타오르겠는가. 그리고 서자 따위에게 얌전히 당하지 않으려 할 테지. 충분히 가문의 비밀을 밀고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식사 자리에서 에이든을 만나길 기대했는데 오지 않다니? 이건 챈들러가 바라는 상황이 조금도 아니었다. 눈치만 보고 있는 이들에게 대놓고 요구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전 그 아드님과도 식사를 함께하고 싶습니다만.”
챈들러가 요청하자 백작 부인과 데이빗의 표정이 휙 변했다. 특히, 데이빗은 당혹감과 불만을 숨기지 못했다. 가신들은 의외의 상황에 숨을 죽였고 콜린스 백작은 침착하게 챈들러를 응시했다. 챈들러가 느긋하게 시선을 마주하자 백작은 집사를 불렀다.
“에이든을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이 행사에 에이든 도련님만 참석하지 못했단 사실에 불만이던 잭슨이 감격 어린 표정으로 답하고 물러갔다. 그리고 콜린스 백작이 에이든을 부르라 명하자 데이빗의 표정은 더없이 구겨졌다. 식당 안의 미묘한 공기를 먼저 깨뜨린 것은 백작이었다.
“에이든과 아는 사이십니까?”
“아닙니다. 아까 수색하면서 만났는데 침착하고 이성적이더군요. 품위 있는 귀족으로 보여 더 대화를 나눠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챈들러는 일부러 에이든을 칭찬했다. 백작의 동요는 없지만 저 어설픈 데이빗은 흔들릴 것 같아서. 아니나 다를까, 데이빗이 발끈해서 중얼거렸다.
“침착하고 이성적이라니요. 그저 게으른 거겠죠.”
“데이빗.”
백작 부인이 조용히 말렸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데이빗이 입을 다물려 했다. 하지만 챈들러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게으르다? 동생 분을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굉장히 이지적으로 보였습니다.”
이지적이란 단어가 데이빗의 이성을 앗아 갔다. 그는 에이든이 자신보다 똑똑하단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에이든이 가문을 떠난 후 그를 가르치던 가정 교사들이 데이빗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배움을 얻게 된 데이빗은 헤맸다. 어머니와 둘이 살 때도 적당히 공부를 배우긴 했지만 이런 본격적인 수업은 아니었다.
지지부진한 데이빗의 실력에 가정 교사들은 난색을 표했다.
“이게 데이빗 도련님에겐 어려운 일인가 보군요.”
“에이든 도련님은 이런 것쯤은……. 쯧.”
“에이든 도련님은 현자의 숲에 갈 정도인데…….”
슬쩍 드러나는 눈빛과 스쳐 지나가듯 내뱉는 말이 데이빗에게 굴욕감을 줬다.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데이빗은 에이든보다 못한 사람이었다. 그걸 데이빗은 견딜 수 없었다.
특히, 에이든이 떠났던 곳이 현자의 숲이란 사실을 알았을 땐 분노가 치솟았다. 자신이 그 녀석보다 못한 게 뭐라고! 데이빗은 늘 열등감에 시달렸다.
한동안은 그래도 나았다. 에이든이 현자의 숲으로 떠나 꽤 오랜 시간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에 대한 반감은 점차 사그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에이든이 돌아오고 그를 다시 본 순간. 데이빗은 자신의 감정이 다시 들끓는 걸 느꼈다. 이건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반감이었다.
데이빗은 어떻게든 에이든을 짓밟아 버리기로 했다. 이미 가신들 대부분이 제 편이기에 무리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났다는 챈들러는 왜 에이든을 칭찬하고 찾는단 말인가!
“아닙니다. 현자의 숲에서 공부하고 왔지만 돌아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택에서 빈둥대기만 하는걸요.”
챈들러의 눈엔 데이빗이 에이든의 무능함을 증명하고 그를 깎아내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게 제 얼굴에 침 뱉는 거란 것도 모르는 멍청이였다. 챈들러는 데이빗이 어디까지 가나 볼까 싶어서 일부러 호응했다.
“이런, 그렇군요…….”
“그것뿐인 줄 아십니까?”
“데이빗 그만하렴.”
데이빗이 더 주절거리려 했지만 보다 못한 콜린스 백작이 나섰다. 하지만 챈들러는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일부러 더욱더 데이빗을 도발했다.
“그런데 다른 아드님이 현자의 숲에서 배움을 얻은 겁니까? 굉장하군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어 주자, 아니나 다를까 데이빗의 얼굴은 또 굳었다. 가까스로 이미지를 실추시켰는데 자꾸 대단하단 식으로 언급하는 게 싫은 거였다. 어리석긴.
“지금 와 있는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중도 포기하고 온 거지요.”
데이빗은 질투를 참지 못하고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건 맞았다. 현자의 숲에서 충분히 배움을 얻고 나왔다기엔 에이든은 너무 젊었다. 이런 변방에서도 인재가 나오나 했는데.
“흠, 도움을 청할까 했는데 아쉽군요.”
챈들러가 아쉬움을 표하자 데이빗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드디어 에이든에 대한 이야기를 막았다고 기뻐하는 게 보였다.
‘그것보다 언제까지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챈들러는 얼른 에이든이 와서 그가 가진 비밀이 뭔지 알려 주길 바랐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왕세자 전하를 찾아야 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점차 짜증이 치밀었다. 만약 에이든이 쥔 비밀이 왕세자 전하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마음먹는 중이었다.
그때 데이빗이 놀라운 소리를 했다.
“제 동생에 대한 쓸데없는 소리 말고, 왕국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지요.”
챈들러는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전쟁에 대한 소식도 접하지 못하는 이 작은 영지에서 왕국에 도움이 될 일이 뭐가 있을까? 거짓이라고 하기엔 데이빗이 너무 자신만만해했다.
“왕국에 도움이 되는 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직 이렇게 이야기하기 조금 이르지만. 곧 저희가 왕국의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것 같습니다.”
“데이빗.”
콜린스 백작이 단호하게 잘랐다. 그는 엄격한 눈빛으로 더 말하지 말라고 데이빗에게 경고했다. 아직 확실시된 상황이 아니니 자중하란 소리였다. 하지만 데이빗은 이게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왕실의 눈에 띌 기회.
“무슨 일인지 궁금하군요.”
챈들러의 물음에 데이빗은 미소를 지었다. 왕실의 사람과 연이 닿아 두면 수도 진출이 쉬워질 것 아닌가.
“제가 얼마 전에 야만족과 거래에 성공했습니다.”
어쩐지 도가 넘치게 먹을 게 많더라니. 척박한 땅덩어리에서 음식을 과하게 준비한다 했다. 대충 이 동네 사정을 알아서 그게 영지에 도움이 될지언정 왕국에 득이 될 일은 전혀 아닌 것 같아서 챈들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이렇게 식량이 풍부했군요.”
그걸 알아챈 듯했지만 어쩐 일인지 데이빗은 모른 척했다. 아니, 오히려 뭔가 더 의미심장한 척 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뭐가 또 있습니까?”
“네. 그건 바로…….”
데이빗은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말을 끌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계속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던 챈들러가 관심을 기울였다.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이 달콤했다.
그래서 데이빗은 들떴다. 이걸 이야기하면 에이든이 아니라 자신이 이 상황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외쳤다.
“제국과 무역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국과의 무역!”
챈들러가 놀라서 소리쳤다. 커다랗게 뜬 눈이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어서 데이빗은 신이 났다. 왕국 사람이라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몇 년간 교류가 끊겼던 제국과 다시 교역을 시작하는 거니까. 자신도 에이든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열받아서 미치는 줄 알았다. 집에서 팽팽 놀기만 하는 놈이 어떻게 그런 일을 손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녀석의 말대로라면 가문에 엄청난 득이 되는 일이었다. 데이빗은 그게 에이든의 공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걸 당신이 해냈단 소리입니까?”
챈들러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과하게 굳은 것 같지만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일임을 데이빗은 알기에 그냥 넘겼다.
“뭐……. 저희 가문이 한 일이지요.”
대신 데이빗은 여유롭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행동을 했다. 일부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제국과 연이 있단 겁니까?”
역시 챈들러는 계약을 얻어 낸 이가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데이빗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참았다.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일부러 야만족과의 계약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뒤이어 제국의 계약을 말하면 챈들러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계약을 따낸 것처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장난 하나로 에이든의 일을 빼앗을 수 있다니. 데이빗은 자신이 생각해 낸 묘수에 들떠 차게 식은 챈들러의 눈빛을 발견하지 못했다.
* * *
‘이건 또 무슨 웃기는 상황이지?’
에이든은 계획했던 대로 챈들러의 초대를 받고 막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순간, 데이빗의 삽질을 전부 듣게 되었다. 멍청하면 사서 고생한다더니, 이건 그걸 넘어서 제 무덤 자리 찾는 격 아닌가.
‘저 멍청이가 자신의 입으로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알기나 할까?’
에이든은 너무 웃겨서 폭소를 터트릴 뻔했다. 이 황당하게 운 좋은 상황에 웃음을 참느라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사실 에이든이 먼저 챈들러에게 백작가와 제국과의 무역 건을 꺼낼 생각이었다. 제국이 선전 포고를 한 이 상황에 제국과 무역을 준비하고 있다면 챈들러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이놈이 왕세자를 팔아넘겼구나, 하고 의심하겠지.
콜린스 백작가가 왕세자를 노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던 것에서 제국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했구나 생각하게 될 거고. 왕세자를 잡고 있으니 이렇게 패기 있게 구는구나, 하고 여길 거였다.
그래서 제국과의 무역 이야기를 꺼내서 데이빗이 주도했다고 착각하도록 만들려고 하긴 했지만 스스로 그걸 뒤집어쓸 줄이야. 멍청함이 놀라울 정도였다.
에이든도 처음부터 제국과의 무역 건을 이런 식으로 쓸 생각은 아니었다. 올리비아가 원하는 대로 자신도 일을 한다는 걸 알려 주려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리기 위해 백작과 데이빗에게 제국과의 무역에 대해서 알렸더니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그들은 에이든을 불러 제국과의 무역에 대해 다시 묻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가솔들 앞에서 증명할 수 있냐고 묻지 않았다. 제국과의 전쟁 소식을 모르는 상태에선 무역을 하루빨리 실천하는 게 가문을 위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말이다.
에이든이 정말로 무역에 성공하면 제 자리가 위험하다고 여긴 데이빗이 수를 쓴 것이겠지, 여기며 넘어갔다. 그리고 그 이후로 엉뚱한 소문이 솔솔 도는 걸 호위 기사가 알려 왔다.
“백작가에 이상한 소문이 돕니다. 첫째 아들이 다시 큰 계약을 따낼 것 같다고.”
그것만으로 데이빗이 제국 무역을 주도한 이가 자신이라고 사기 칠 거란 걸 눈치챘다. 미리 주변에 의미심장하게 흘려 놓는 거다. 그 상황에 에이든이 제국 무역 계약을 얻었다고 하면 모두들 의아하게 여길 거고, 데이빗이 그때 나서서 공을 빼앗긴 것처럼 꾸미려는 거겠지.
그걸 알아차린 호위 기사도 소문을 듣자마자 에이든에게 언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달받은 에이든은 호위 기사에게 간단하게 말했다.
“내버려 둬.”
“내버려 둡니까?”
오히려 호위 기사가 놀라서 되물었다.
“응. 그건 그거대로 쓸 일이 있겠어.”
그렇게 데이빗의 수작질을 보류해 놨다. 그래서 언젠가는 데이빗이 나서서 제국 무역 건을 탐할 걸 알았지만 오늘 그걸 가지고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을 줄은 몰랐다.
에이든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멍청한 실수라 챈들러가 의심하지 않을 걸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하긴 그러지 못하게, 그러니까 의심을 이어 가도록 만들면 되지.
에이든은 안쪽의 상황이 이상해지기 전에 식당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걸 확인하며 에이든은 심각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물론, 말만 느릿하게였지 실제론 데이빗을 향해 강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긴? 너도 아는 사실 아니냐.”
그리고 지레 찔린 것이 있는 데이빗은 에이든의 말을 잘라 내려고 했다. 그는 일부러 딱딱한 어조를 사용해 더는 이야기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았다. 데이빗은 수작질을 들켜 버린 상황에 짜증이 났다.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된 다음에 올 것이지. 하필 이 타이밍에 도착할 건 뭐란 말인가. 만약 여기서 에이든이 왜 남이 한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속이냐고 직설적으로 물으면 그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었다.
가솔들은 이미 대충 선동해 놓았다. 제국과 무역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아챈 에이든이 자신의 일을 빼앗으려고 한다고. 형 된 도리로서 동생이 계속 무능하게 살도록 할 수 없으니 적당히 양보해 에이든이 한 것처럼 만들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라고.
그랬기에 지금 에이든이 그건 자신이 한 일이라고 주장해도 가신들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다. 하지만 가능한 왕실 기사인 챈들러에게 의심의 여지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혹여 자신이 수도에 진출했을 때 흠이 될 점은 없었으면 했다. 그러니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눈빛을 열렬하게 빛냈지만 에이든은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전 모릅니다. 언제부터 우리 가문이 제국과 손을 잡았단 말입니까?”
아니, 못 알아들은 게 아니다. 알고 협박하는 거다. 에이든의 행태에 데이빗은 짜증스러웠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제국과의 무역을 없던 일로 만든다고 협박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제국과의 무역이면 벌게 될 돈이 얼마인데 그걸 없던 일로 만든단 말인가.
“언제 손을 잡았다고 했나? 곧 잡을 거라 했지. 가문을 위한 일이다. 자꾸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고 너도 태도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물론, 그 계약이 에이든의 공이 되어서는 더 안 됐다. 에이든의 표정이 더욱 분노로 굳는 걸 알면서 데이빗은 뻔뻔하게 나갔다. 괜히 판을 뒤엎지 말라고, 다 가문을 위한 일이라고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게 귀족이라는 것들은 가문의 명예에 약했다. 에이든 또한 고고한 귀족 나리니까, 가문에 누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그게 형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에이든의 입에서 나온 형님 소리에 데이빗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저 녀석의 입에서 형님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자신만 놀란 게 아닌지 어머니와 가신들까지 놀라 술렁거렸다.
그래서 데이빗은 에이든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그렇게 우습게 보더니 그래도 왕실 기사 앞이라고 조심하나 보다. 평소 그렇게 자신을 업신여기더니 꼴에 백작가의 명예가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콧대 높은 놈이 존칭을 쓰고, 자신이 한 일을 자신이 했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로.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왕실 기사 앞에서 네가 했네, 내가 했네, 따지는 것도 얼마나 우스운 일이란 말인가.
그것만으로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놈의 명망 높은 가문이라고 고고한 자존심을 세우는 귀족들을 이해 못했는데 덕분에 계약을 날로 뺏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데이빗은 얄팍한 계산이 순식간에 끝났다. 그는 속으론 에이든을 비웃으며 챈들러를 향해 말했다.
“내가 어찌 전부 했겠느냐. 가문이 함께한 것이지.”
챈들러에게 시선을 보낸 건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건 내가 한 일이란 걸 똑똑히 알아 달란 의미였다. 그리고 이렇게 가문의 덕임을 밝히면 에이든이 더 반박하지 못할 거란 점도 계산했다. 아니나 다를까 에이든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감정을 삭일 뿐 반박하지 않았다.
데이빗은 반대로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에이든의 공로를 빼앗고 제대로 약 올리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데이빗은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챈들러의 말을 한순간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 범죄 사실을 시인하고 협박하는 건가?”
챈들러의 음성엔 노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정말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범죄 사실이라니? 누가? 내가?’
뒤늦게 그 기색을 알아챈 데이빗은 당황스러웠다.
“무슨…….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지금 협박하냐고 묻고 있다.”
챈들러는 이를 악물며 말을 딱딱하게 끊어 가며 말했다. 챈들러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콜린스 백작 또한 나섰다.
“무슨 소리입니까?”
콜린스 백작이 담담하게 묻는 상황이 챈들러는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처음에 제국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자신이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설마하니 정말로 제국의 이야기가 나온 건가 싶었다. 그래서 재차 제국과의 관계를 물었을 때 데이빗은 가문이 연관 있단 식으로 말을 했다.
그때 챈들러는 분노로 눈앞이 빨갛게 변한다는 걸 실감했다. 지금 멍청하게 무슨 짓이냐고, 언제부터 제국과 손을 잡았냐고, 왕국을 배신한 거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에이든이 등장했고 두 사람의 실랑이를 들으며 전체적인 상황이 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다급하게 식당으로 들어서며 에이든은 충격으로 목소리를 떨었다. 자신에게 눈치를 줬을 때부터 알아챘지만 에이든은 대충 백작가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을 눈치채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언제 손을 잡았다고 했나? 곧 잡을 거라 했지. 가문을 위한 일이다. 자꾸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고 너도 태도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가문이 왕실을 배신한 걸 믿지 못하고 되묻는 에이든에게 데이빗은 가문이 정한 일을 조용히 따르라고 협박까지 했다. 그것도 왕실 기사단장인 자신이 있는 상황에서. 살다 보니 이런 한미한 가문에 무시당하는 날도 왔다. 챈들러는 굴욕감에 이를 악물었다. 콜린스 백작 가문에 제정신이 박힌 사람은 단 한 사람, 에이든뿐이었다.
“그게 형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내가 어찌 전부 했겠느냐. 가문이 함께한 것이지.”
이어지는 대화는 더 가관이었다. 데이빗은 이 상황이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백작가가 결정한 일이라고 알리며 협박했다. 어쩐지 아무도 데이빗의 방만한 행동을 말리지 않더라니. 다들 공범이었던 거다. 기가 막혔다. 콜린스 백작가가 제국과 내통했다는 사실을 대놓고 말한 건 자신에게 하는 경고 아니겠는가.
왕세자는 우리가 잡고 있으니 조용히 있으라는 협박.
챈들러는 치를 떨었다. 의심스럽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변방 가문에서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니다. 그래서 통한 걸지도 모른다. 정계와 먼 가문이라서 방심할 테니까.
그래서 왕세자 전하도 이 저택에 머문 것이었다. 왕국 내 그 어느 파벌도 아니어서. 웃기게도 왕국의 파벌은 아니지만 제국의 파벌이란 것은 꿈에도 모르고. 완벽한 함정이었다.
밖의 상황은 모르는 척,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게 아니라 훌륭한 인질이 있으니 정말 여유로웠던 거다. 에이든이 언급해 주지 않았다면 이 상황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의심은 되지만 이깟 한미한 가문이 무슨 일을 벌이겠어? 하고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백작가가 대단하군. 아주 대단해.”
챈들러가 이죽거렸다. 그러자 모욕적인 소리를 들은 모두의 표정이 변했다.
“그만두시지요. 갑자기 무슨 무례입니까?”
이들은 왕세자 전하가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으니 이렇게 무방비하게 구는 거겠지만.
“무례? 내 행동이 무례라고 생각하기 전에 네놈들이 한 짓을 생각해야지!”
챈들러는 버럭 외치며 몸을 쏘았다. 탁자 위를 달려 화들짝 놀라는 데이빗의 목을 먼저 틀어쥐고 반대쪽으로 몸을 튕겨 콜린스 백작의 목마저 틀어쥐었다.
“꺄악!”
“무, 무슨 짓이오!”
백작 부인의 비명과 가신들의 비명을 들으며 챈들러는 양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컥!”
“으윽…….”
손아귀에 잡힌 두 남자가 괴롭다는 듯 발버둥을 쳤다. 아들과 남편의 비명에 백작 부인이 먼저 소리쳤다.
“그만! 그만! 무슨 짓인가요!”
차마 다가오지는 못하고 빽빽 소리치는 게 시끄러웠다. 챈들러는 맞받아쳤다.
“보면 모르나? 인질을 잡았지.”
그래, 인질은 그쪽만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상대로 너무 손쉽게 잡혀서 우스울 정도였다. 이들이 배신자란 걸 인식한 순간 챈들러는 주변을 확인했다. 식당 안에 있는 누구도 검술을 수련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비밀을 밝혔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혼자라서 방심한 건가? 그도 아니면 이게 엉뚱한 오해란 말인가? 챈들러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놔, 놔주…….”
얌전히 있는 백작과 다르게 데이빗의 필사적인 버둥거림에 챈들러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그 혼란은 금세 사라졌다.
‘이렇게 멍청한 이가 있으니 실수인 줄도 모르고 실수했겠지.’
모든 게 오해일 리 없다. 이런 자를 데리고 그런 큰일을 도모한 콜린스 백작이 어리석은 거였다.
“이성적인 대화를 했으면 합니다.”
모두가 경직된 가운데 챈들러의 기습에도 조용히 있던 에이든이 나서며 말했다. 역시나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챈들러는 다시금 백작에 대한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차라리 둘째 아들을 아낄 것이지. 눈치 빠르고 왕실에 대한 충성심도 있는 에이든이었다. 분명히 왕세자 전하의 납치 전에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백작가에서 그의 세력이 너무 한미해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없었겠지. 그리고 도와줄 이가 등장하자 참지 않고 나선 걸 거다. 비록 에이든의 일 처리가 훌륭하다고 할 순 없지만 중요한 상황에 신호를 줄 정도면 인성은 훌륭했다.
에이든은 콜린스 백작과 데이빗의 행동을 반대하니 왕세자를 찾는 일에 적극 협조할 게 틀림없었다. 여기 있는 다른 극악무도한 이들과 다르게 제대로 된 귀족이니까. 챈들러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현재 왕세자 전하의 납치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누군가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슬쩍 돌아보니 백작 부인과 가신들이 입을 틀어막고 경악하고 있었다. 의외로 콜린스 백작이 이 상황에 대해 가신들에게 말을 전하지 않은 걸까? 챈들러는 서서히 눈을 돌려 백작 부인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파리하게 질려 있던 백작 부인이 그 시선을 느끼고 번뜩 외쳤다.
“저흰 아니에요! 저희가 왜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두 사람을 놔주세요!”
“맞습니다! 저흰 아닙니다. 분명히 왕세자 전하는 몸 성히 떠나셨습니다!”
데이빗이 악을 썼다. 오해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은 것 같았다. 얌전히 잡혀 있는 콜린스 백작과는 다른 태도였다. 챈들러는 구질구질한 변명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조용.”
“윽!”
챈들러가 시끄러워 손에 힘을 주니 그제야 조금 조용해졌다.
“제국과 무역을 한다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챈들러의 질문에 데이빗이 마지막 희망이라도 잡는 듯 힘겹게 답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챈들러에겐 우스운 것이었다.
“제국이 왕국에 선전 포고한 이 상황에 제국과 무역을 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하는 이를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서, 선전 포고라니요!”
데이빗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놀람을 드러냈다. 정말 몰랐다는 듯 몸을 파들파들 떨었지만 챈들러의 눈엔 가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콜린스 백작가가 제국과 내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내, 내통!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가신들 또한 더욱 파리하게 질렸다. 자신들의 예상보다 더욱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에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백작 부인은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풀썩 주저앉았다.
“왕세자 전하의 정보도 제국에 넘기고 그분을 납치했겠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내통도 큰일이지만 왕세자 전하 납치는 감당할 수준의 죄목이 아니었다. 데이빗은 발악하듯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처절한 모습에 챈들러의 눈빛이 달라졌다.
‘뭐지?’
어쩐지 데이빗의 반응이 격렬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전쟁에 대해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왕세자 전하의 납치 소식도 진짜로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 다 오해라고? 콜린스 백작가는 무관하다고? 하지만 제국과는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상황이 이상해서 막 챈들러의 손에서 힘이 빠지려 할 때였다.
“경의 합리적 의심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에이든의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렸다. 나직하고 동요 없는 목소리는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챈들러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풀리던 손에 다시 힘을 주며 에이든을 경계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챈들러는 어쩐지 자신의 혼란을 전부 들킨 것만 같았다. 그리고 뒤늦게 에이든의 말이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합리적 의심. 당연하다.’ 그 단어를 듣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맞다. 자신이 하는 건 합리적 의심이었다. 이들이 스스로 한 말이 있는데 콜린스 백작가가 완전히 무고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원래 범죄자는 자신의 죄를 부정하고 보는 것 아니겠는가. 챈들러는 약해지려던 마음을 다잡았다.
“죄질이 워낙 커야지.”
“압니다. 그만큼 사건의 무게가 큰 일임을 잘 압니다만, 그런 만큼 더욱 철저히 알아보고 추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챈들러는 에이든의 눈빛에서 질책하는 기색을 느꼈다. 이렇게 무례하게 굴었는데 백작가가 아무 관련이 없으면 어쩔 거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에이든에 대한 실망이 찾아왔다.
‘이 상황까지 와서 자신의 가문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런 실망감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꼿꼿하게 서 있는 에이든의 몸이 묘하게 흔들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의지를 읽은 챈들러는 그의 가문에 대한 자긍심을 알아봤다. 역시 천한 피가 섞인 자와는 달랐다.
그래서 챈들러는 에이든을 조금 존중해 주기로 했다. 손아귀에 있는 썩어 빠진 귀족과는 다른 제대로 된 귀족이니까.
“제이크!”
챈들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식당을 넘어 저택 내에 울렸다. 그는 애초에 어떤 사건이 있음을 예견했기 때문에 식사 시간 전에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경계를 하라고 일러두고 왔다.
“단장님!”
그렇기 때문에 기사들이 검을 들고 순식간에 쏟아지듯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삽시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들의 단장이 백작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기사들은 재빠르게 챈들러를 감싸고 경계 태세를 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외침은 당연히 백작가의 사람들도 들었다.
“히익!”
무슨 일인가 싶어 기웃거리던 하인이 식당 안의 심각한 상황을 발견하고 후다닥 도망쳤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했다.
“왕성의 손님에게 백작님이 잡혔다!”
“백작님이 잡혔다고?”
“백작님이 잡혔다!”
백작가의 식솔들 사이로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흉흉한 분위기를 전해 들은 백작가의 사병들이 머지않아 무기를 쥐어 들고 들어섰다. 식당 안이 무기를 든 자들로 꽉 찼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왕실 기사단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요! 당장 백작님을 내려놓으시오!”
콜린스 백작가의 기사가 대표로 나서서 외쳤다. 대치 상황에서도 챈들러는 여유로웠다. 말단 병사처럼 보이는 이들은 왕실 기사에게 무기를 들이댄다는 상황만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역시 백작가 가솔들 모두가 가담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챈들러는 큰 소리로 선언했다.
“현재 콜린스 백작은 왕실에 반역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짧은 선언에 콜린스 백작가의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평민들에게 제일 무서운 단어가 반역이니 그럴 만했다.
“그럴 리 없소!”
백작가의 기사 또한 기겁해서 소리쳤다. 그럴 리 없다고 완벽하게 믿고 있는 이들을 향해 챈들러는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며칠 전 제국이 왕실에 선전 포고를 했다. 여기까지 소문이 닿지 않았지만 곧 전쟁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런 위급 상황에 왕세자 전하까지 실종되었지. 이곳에서 떠나자마자 바로.”
콜린스 백작가의 병사들 대부분이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그래도 백작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지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무기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모함이오! 그건 콜린스 백작가와 관련이 없소!”
백작가의 기사가 계속 버럭 외치는 소리에 챈들러는 눈을 빛냈다.
“방금 이자가 제국과 무역을 할 거라고 알렸는데 과연 아무 관계가 없을까?”
챈들러가 데이빗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 틈으로 술렁거림이 번졌다. 데이빗 도련님이 제국과 무역을 할 거라는 소문을 들은 이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대표로 나선 기사였다.
“그, 그건…….”
챈들러는 말문이 막혀 더듬대는 기사의 말을 잘랐다.
“이제부터 확인해 보면 되겠지. 제이크, 지금부터 이 저택을 다시 샅샅이 뒤지도록. 이번엔 제국과 백작가를 연결 짓는 물건이 있나 찾아보도록.”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짧게 답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백작가의 기사가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뽑은 검을 집어넣지는 않았다. 지나가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막을 것이오?”
제이크의 물음에 백작가의 기사는 잠깐 고민했다. 진짜로 데이빗 도련님이 반역을 했을까 봐 걱정이었다. 슬쩍 바라보니 데이빗 도련님은 자신은 아니라는 듯 눈알을 바삐 흔들고 있었다.
‘정말 아닐까? 진짜일까?’
백작가의 기사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시간을 끌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결백을 밝혀야 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거래를 청했다.
“백작님에 대한 예우를 먼저 보이시오. 아직까진 그대의 의심일 뿐이니.”
목이 잡힌 저 꼴사나운 모습만 벗어나도 그래도 얻는 건 있는 상황이었다. 백작가의 기사의 요구에 챈들러는 순순히 답했다.
“좋다.”
그리고 챈들러가 눈짓하자 눈치 빠르게 병사 한 명이 의자 두 개를 가져와 앞에 내려놓았다. 챈들러는 잡고 있던 콜린스 백작과 데이빗을 내려놓으며 경고했다.
“얌전히 앉으시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챈들러의 손이 떨어지자 그들은 순순히 응했다. 이미 다른 기사들이 검을 목 가까이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수가 없었다. 백작과 데이빗이 추한 꼴을 면하자 백작가의 기사는 서서히 검을 집어넣었다.
“제국과 콜린스 백작가가 연관되었단 증거를 찾지 못할 시엔 아무리 왕실 기사라고 하더라도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당연하오.”
백작가 기사의 경고에 챈들러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게 묘한 대치 상태에 들어갔고 왕실 기사단은 다시 수색에 들어갔다. 이번엔 아까와 다른 수색이었다. 아깐 혹시 사람이 숨겨져 있을 상황에 대비한 수색이었고 이젠 작은 흔적을 찾는 거였다. 제국과 연관이 있다면 그동안 주고받은 서신이 있을 테니까.
우선 콜린스 백작의 서재와 집무실, 사적인 공간인 침실까지 제이크는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데이빗의 침실에서 한 장의 서류를 찾아냈다. 제이크는 그걸 가지고 식당을 찾았다.
수색이 길어진 만큼 긴장감 때문에 생긴 피로에 지쳐 늘어지던 이들이 제이크의 등장에 다시 경계를 했다. 제이크는 묵묵히 걸어가 챈들러에게 손에 든 물건을 내밀었다.
“백작의 아들 방에서 이걸 찾았습니다.”
그걸 확인한 챈들러의 눈빛이 빛났다. 챈들러가 손에 넣은 건 한 장의 서류였다.
제국과의 무역을 허락한다는 허가서.
피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이것만으로 충분한 증명이 되었다. 허가서를 내줄 정도라면 콜린스 백작가는 제국의 우방이란 소리였다. 그리고 제국이 아무 연유 없이 이런 걸 주었겠는가. 그만큼 큰 걸 넘겼으니 이런 엄청난 혜택을 주었겠지. 가령 왕세자 전하 같은, 제국이 매력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미끼를 말이다.
챈들러는 나란히 앉아 있는 콜린스 백작과 그의 아들 앞에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손에 든 서류를 그들이 볼 수 있게끔 펼쳤다.
“제국과 내통한 증거는 여기 있군.”
그걸 확인한 콜린스 백작의 눈동자는 한번 출렁였을 뿐이다. 충격인지, 어쩌면 예상했던 것인지 모를 동요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시 무덤덤해졌다. 챈들러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백작과 반대로 데이빗의 얼굴은 정직했다. 숨기지 못한 경악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제국과 무역 허가서라니요? 그게, 그게 왜…….”
데이빗의 눈동자가 탁해졌다. 오히려 기운이 쭉 빠진 사람처럼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악을 쓸 줄 알았는데 감당하기 힘든 일에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이렇게 증거가 있지 않은가.”
챈들러는 식당 안에 있는 모두가 확인하도록 보란 듯이 서류를 팔랑 흔들었고 그에 사람들 사이로는 동요가 퍼졌다. 제국과 무역 허가서가 있단 소리에 백작가의 사병들은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처졌다.
“아아…….”
주저앉아 있던 백작 부인은 기어이 옆으로 쓰러졌고 가신들은 파리한 안색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체념이 담긴 그 행동을 챈들러는 잡아냈다.
“지금부터 콜린스 백작과 그의 아들을 포함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지위를 가진 자들은 전부 포박해서 감옥에 구금하라.”
제이크가 먼저 나서서 백작을 포박했다. 의외로 콜린스 백작은 반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모시는 분이 덤덤해서 그런지 백작가의 기사 또한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놓고 순순히 잡혀들었다.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한곳에 구금시킨다.”
자기들에겐 선처가 주어질 걸 알아챈 병사들도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무기를 바닥에 버리고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착착 정리가 되어 가던 중 병사 한 명이 다가와 챈들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작 부인은 어떻게 할까요?”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백작 부인은 혼절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퍽 가녀려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저 사람 또한 주요 용의자였고 주요 사건 용의자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었다.
“같이 감옥에 가둬라.”
싸늘한 그 명령에 병사는 백작 부인을 향해 달려갔다.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망설임은 없었다.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병사 하나가 에이든을 향해 다가갔다. 그 또한 백작가의 식솔이기 때문이었다.
“손을 주십시오.”
병사는 말을 걸면서도 주의했다. 별채를 수색했기에 에이든의 정체가 누군지 안다. 억울하다고 난리를 칠지 모르기 때문에 경계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놀라울 정도로 선선히 손을 내밀었다. 막 손을 묶으려던 그때, 그 모습이 챈들러의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갈등한 그는 병사를 향해 말했다.
“그 사람은 놔둬라.”
“네?”
놀란 병사가 챈들러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도 하지 못하고 참담한 표정에 잠겨 있던 에이든 또한 의아한 듯 응시했다. 그 모습에 챈들러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확신을 얻었다. 에이든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도와주려고 했던 이를 이들과 한데 묶어 취급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이들과는 다른 입장 같으니까 처우를 좀 봐주겠소.”
챈들러의 말에 에이든은 잠시 그를 주시했다. 할 말이 많은 듯, 하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 침묵했다. 에이든의 파리한 안색이 그만큼 지금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 같았다.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끝내 고개를 작게 숙였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잠시 거절을 생각했다가 마음을 돌린 모양새였다. 넙죽 받아들이지 않은 점도, 그리고 거절하지 않은 점도 챈들러는 마음에 들었다. 자존심이 있으면서도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눈까지 가진 거니까. 하지만 아무리 에이든을 좋게 봐도 지킬 건 지켜야 했다. 챈들러는 엄중하게 경고했다.
“자유를 주겠단 소리는 아니오. 별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기사 한 명이 그대를 계속 감시할 것이오. 받아들이겠소?”
“……알겠습니다.”
사실상 받아들이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겠단 경고였으니 받아들여야만 했다. 에이든의 대답을 듣고 챈들러는 옆에서 대기하던 기사 케인에게 눈짓을 했다. 이만, 별채로 데려가서 감시하라는 신호였다. 케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에이든을 향해 다가왔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에이든이 기사를 따라 식당을 벗어나려 할 때, 병사가 데이빗을 향해 다가갔다.
“손을 내주시지요.”
엄청난 선언에 넋을 놨던 데이빗은 병사가 제 팔목을 결박하는 손길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리고 기사와 함께 유유히 빠져나가는 에이든을 보는 순간 데이빗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포박당하는데, 저놈은 유유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데이빗은 이렇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외쳤다.
“아, 아닙니다! 전 제국과 연관이 없습니다!”
“제국과 연관이 없는데 이런 문서가 있나?”
챈들러의 손에 들린 종이 쪼가리가 데이빗은 너무 무서웠다.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 수 있는 물건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건 진짜로 처음 보는 물건이란 말입니다! 그건, 그러니까 그래! 에이든! 저 녀석 짓입니다!”
필사적으로 부정하다가 번뜩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국과의 무역 이야기를 처음 꺼낸 건 에이든이었다. 서류가 왜 자신의 방에 있었는지는 저 녀석이 알 거다!
데이빗의 손가락이 식당을 막 빠져나가는 에이든을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 손가락을 따라가며 기묘한 적막이 식당 안에 퍼졌다.
케인이 반사적으로 에이든을 막아서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에이든은 당혹감은 조금도 없는 무표정으로 데이빗을 돌아봤고 모두의 시선이 다시 데이빗에게 쏠렸다. 제게 집중된 시선을 느낀 데이빗은 이게 기회임을 알아챈 듯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입니다! 저 녀석이 먼저 제국과 무역이 가능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전 그런 서류 따위 본 적 없습니다!”
에이든은 데이빗의 행태에 조소를 애써 눌러야 했다. 하긴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그 길밖에 없긴 하지만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한 거다.
“이상하군.”
챈들러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들어 데이빗의 목소리를 끊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런데 왜 아까는 그게 자신이 한 일이라고 했지?”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챈들러가 착각한 거지만 그게 도리어 문제가 되었다. 데이빗은 다급하게 반박했다.
“아,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직접 했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사실 그랬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일부러 착각하도록 했지 제 입으로 제국과 무역 건을 따냈다고 확언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그걸 노렸고 지금은 그게 참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챈들러는 무덤덤하게 데이빗을 응시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묻지.”
그렇게 말한 챈들러는 식당에 앉아 있던 백작가의 가신들을 돌아봤다.
“당신들은 아까 대화를 나눌 때 어떻게 생각했지? 제국과 무역을 따낸 게 이자가 한 일처럼 들렸나? 아님 저자가 한 것처럼 들렸나?”
당연히 챈들러가 처음 가리킨 것은 데이빗이고 두 번째 가리킨 이는 에이든이었다. 챈들러의 시선이 닿은 가신들은 긴장했다. 그들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제국이 선전 포고했다는 것도. 모시는 백작가가 그 일에 동조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인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은가, 제국이 내통자를 찾는다고 해도 왜 이 작은 가문을 택한단 말인가. 수도에서 힘을 쓸 수 있는 가문을 택하겠지. 하지만 증거까지 나온 이상 백작가가 제국과 연관이 없다고 발뺌하기 힘들었다.
문제는 그들은 제국과의 거래가 데이빗이 한 일인 줄 알았단 거다. 얼마 전부터 데이빗이 자신들을 불러서 은근슬쩍 그런 기색을 내비쳤으니까.
데이빗이 이 저택에 들어온 후부터, 가신들은 그가 콜린스 백작가를 이어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콜린스 백작이 대놓고 데이빗을 챙겼으니까. 차별이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에이든이 아니라 데이빗을 더 아꼈다.
물론 데이빗은 평민으로 자라 왔기에 귀족으로서 부족한 게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시골 영지에서 가문을 잇는 것은 백작의 의사가 제일 중요했다. 결국 백작위를 물려받는 건 데이빗이라고 생각했기에 가신들 대부분은 일찌감치 데이빗을 따랐다.
그래서 데이빗이 제국과 무역을 따냈다고 했을 때 그게 그의 능력으로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떠나서 데이빗이 했다고 믿었다.
이런 상황에 가신들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비록 데이빗이 추태란 추태는 다 부리고 있지만 선뜻 어떤 말도 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그들의 고민을 덜어 준 것은 그 모든 고민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챈들러였다.
“뭘 그렇게 고민하지? 그대들은 제국과 거래를 성공시킨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만 말하면 된다.”
지금 이곳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챈들러였다. 어차피 데이빗이, 아니 백작가가 이 상황을 벗어나긴 힘들어 보였다. 가신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만 말하면 되었다. 데이빗이 그들에게 직접 한 말이 있으니까. 가신들이 데이빗의 시선을 피하며 줄줄 고백했다.
“데이빗 도련님이 하신 일처럼 들렸습니다.”
“저 또한 그런 의미로 들렸습니다.”
“전 데이빗 도련님이 직접 하신 일이라고 한 것까지 들었습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가신들의 잇따른 배신에 잠시 굳어 있던 데이빗이 바락 악을 썼다. 자신의 최측근이라 믿었던 자들의 배신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데이빗의 의견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데이빗이 발버둥치자 챈들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면 왜 내가, 아니 모두가 착각하게끔 말했지?”
“그, 그건…….”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할 정도면 착각하도록 말한 거 아닌가?”
데이빗은 잠시 눈을 굴렸다. 식당 안에는 꽤 많은 이들이 있었고 저를 주시하는 여러 눈동자가 부담스럽게 와 닿았다. 왕실에서 나온 사람들은 상관없었지만 백작가의 식솔들까지 바라보고 있으니 차마 제 추태를 밝히기 힘들었다.
하지만 챈들러의 냉엄한 눈동자를 보고 재빨리 결정했다. 어느 쪽이 더 자신에게 유리한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수치스럽더라도 사는 게 낫다.
“그렇게 하면 제 공이 될 것 같아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래도 부끄러움을 알긴 하는지 데이빗은 말끝을 흐렸다. 백작가의 가신들과 기사, 병사까지 작게 술렁거렸다. 믿었던 도련님이 그럴 줄 몰랐다는, 그래서 실망이라는 반응이었다. 챈들러는 데이빗을 묵묵히 내려다봤다. 간절하게 호소하는 그 눈동자에 챈들러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동생의 공을 빼앗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
다 알아들었으면서 챈들러는 냉정하게 되물었다. 네 입으로 다시 인정하란 소리였다. 그리고 그 의도는 하나였다. 스스로가 얼마나 저급하고 꼴사나운 존재인지를 모두가 알도록 확실하게 밝히란 소리였다.
다들 제발 거기까진 하지 말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데이빗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살고 싶었다.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다. 그 상황에 적국과 내통한 죄다. 이 죄를 뒤집어쓰면 절대 왕실에서 살려 둘 리가 없었다. 고작 공을 빼앗으려다가 죽을 수는 없었다. 치졸한 존재가 되더라도 살아남는 게 더 나았다.
“네. 제가 에이든의 공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설마 진짜 스스로 인정할 줄은 몰랐다. 말을 하는 데이빗보다 그걸 듣는 백작가의 사용인들이 더욱 수치스러워하는 상태였다. 챈들러는 비소가 새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멍청하면 답이 없다더니. 챈들러는 이 상황에 희망을 갖고 응시하는 데이빗을 보며 물었다.
“공을 빼앗기 위해 그런 짓도 했는데, 이번엔 살기 위해서 동생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믿지?”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듯 데이빗의 눈이 느리게 커졌다. 그리고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자신을 저열한 놈 취급하는 그 시선에 데이빗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수치보다 생존이 더 중요하단 걸 떠올린 듯 그는 악을 썼다.
“정말 제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저 녀석이 문제라고요!”
참 한결같이 비열한 인간이었다. 더 들을 가치도 없어 챈들러가 턱짓했다.
“그건 조사해 보면 나오겠지. 얼른 끌고 가라.”
병사는 챈들러의 명을 듣고 데이빗의 손을 억지로 묶었다.
“아니야! 악! 난 아니란 말이다!”
반항하는 그를 병사는 꽤 거칠게 다뤘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제국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저 서류는 언제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데이빗에게 번뜩 깨달음이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에이든이 제국과의 무역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부터 이상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랑하기도 바쁜 것을 왜 자신과 아버지 앞에서만 말했을까? 처음부터 이걸 노린 것이 아닐까?
그런 엄청난 공을 선보이면 자신이 탐할 게 뻔하니 일부러 이런 함정을 판 거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확실해졌다. 저 서류는 에이든 놈이 가져다 놓은 게 확실했다. 그러자 데이빗은 무언가 놓치고 있음을 떠올렸다. 이 일이 에이든과 연관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아버지. 데이빗은 콜린스 백작을 향해 외쳤다.
“아버지! 말씀하십시오! 아버지도 함께 듣지 않았습니까! 저 녀석이 제국과의 무역을 가져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데이빗은 아버지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태껏 에이든과 문제가 생겼을 때 아버진 언제나 자신의 편이었다.
에이든이 제국과의 무역 거래가 가능하다고 고백한 날, 그걸 가신들에게 알리지 말아 달란 부탁도 들어줬다. 그리고 그걸 가신들에게 자신이 해낸 일처럼 떠벌려도 모른 척해 주었다. 이제 와서 아버지가 에이든의 편을 들 리는 없었다.
“저 녀석이 가져온 일이라고 확실하게 말해 주세요!”
데이빗의 외침 후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 전부터 백작은 굳어 버린 사람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그게 챈들러는 의아했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다지도 동요를 하지 않는 것일까? 첫째 아들의 추태에 표정을 일그러트리지도 않았다.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보여 방관자처럼 느껴졌다.
이들의 시시한 가정사 따윈 관심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콜린스 백작은 어떤 선택을 할까? 어쨌든 둘 다 자신의 자식 아니던가.
“그래, 말해 보시오.”
콜린스 백작의 시선이 챈들러를 담았다. 또렷한 시선은 그가 정신을 제대로 잡고 있음을 보여 줬다.
“증인이 당신밖에 없다고 하니, 누구 짓이오?”
콜린스 백작의 눈이 간절하게 응시하는 데이빗과 무덤덤하지만 서늘하게 응시하는 에이든을 오갔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째서 이제야 이렇게 또렷하게 보이는 것일까?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을까?’
악에 받쳐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데이빗과 그저 시린 눈빛으로 가문을 파멸시키겠다는 에이든. 아이들이 이렇게 망가진 건 다 부덕한 자신 탓이었다.
어린 시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빗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컸다. 밖에서 자라게 한 점이 미안하고 또 안쓰러웠다. 그래서 에이든을 외면했다.
데이빗이 투정을 부리는 걸 알지만 더 많이 가졌던 에이든이 참아 주길 바랐다. 잠시 뿐일 줄 알았다. 가족으로 어우러지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 또한 이기심이었다는 건 에이든이 떠난 다음에 깨달았다. 자신의 죄책감을 달래자고 어린 다른 아들을 희생시켰다.
7년이 지나 보게 된 아들에게선 더는 아버지를 보는 시선을 찾을 수 없었다. 냉정한 눈빛을 보고 에이든이 좋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짐작은 했었지만 이런 큰일이었다니. 그렇다고 원망할 수는 없었다.
저 아이를 이렇게까지 몰아간 건 자신이었다. 그때 에이든의 편을 한 번이라도 들어줬다면 이런 상황이 왔을까?
데이빗의 간절한 시선이 와 닿았지만 눈을 감았다. 그동안 에이든에게 수많은 죄를 저질러 왔다. 하물며 최근까지 데이빗의 편의를 더 봐줬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선택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데이빗과 에이든, 둘 중 한명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는 이번마저도 에이든을 외면할 수 없었다.
챈들러는 콜린스 백작의 답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어떤 쪽을 선택해도 아들 하나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백작의 답이 늦는 건 이해한다. 그래서 기다렸다. 하지만 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콜린스 백작의 선택은 침묵이었다.
“아버지! 어떻게 제게 이럴 수 있습니까!”
참다못한 데이빗이 절절하게 소리칠 정도로 백작은 입을 열지 않았다. 콜린스 백작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래서 챈들러는 이 장소에선 콜린스 백작이 절대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답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더 묻지 않겠소. 나중에라도 할 말이 있으면 말하시오.”
챈들러의 말에도 콜린스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챈들러는 병사들을 향해 알렸다.
“뭐 하지? 하던 일을 해라.”
챈들러의 명령에 병사들은 다시 백작가의 사람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움직이시지요.”
케인은 에이든에게 다시 별채로 향할 것을 종용했다. 에이든은 마지막으로 콜린스 백작을 한번 쳐다보고 얌전히 케인을 따라 나갔다. 그렇게 폭풍 같은 저녁 식사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