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낯선 냄새. (10/19)

9. 낯선 냄새.

순간 극치의 행복을 맛보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돌이켜 생각해 본 에이든은 자괴감이 몰려왔다. 기껏 의지의 에이든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버티지 못하고 싸 버렸다.

‘1초, 1초……. 내가 조루라니……. 크흑…….’

삽입 2초보다 더했다. 고작 올리비아의 ‘할짝’ 한 번에 넋이 나갔으니까. 누가 조루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었다. 올리비아가 조루란 단어의 뜻을 모른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것보다 언제쯤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도 좋았지. 행복했어. 올리비아의 입에 전부 넣으면 끝내주겠지?’

에이든은 아련함이 몰려왔다.

“……입니다. 듣고 계십니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에이든의 멍했던 정신을 일깨웠다. 에이든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더니 케일럽은 언제나처럼 짜증스러운 눈길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저 인간도 참 존경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았다. 아닌가? 갈수록 과격해지나?

“뭐라고 했지?”

“어디까지 들으신 겁니까?”

챙겨 준다는 약발이 벌써 떨어졌나 보다. 케일럽의 목소리엔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뭐 에이든은 별로 신경 안 쓰지만.

“처음부터. 그러니 다시 말해 봐.”

굴하지 않고 케일럽에게 답하자 그는 잠시 씩씩거리는 시선으로 보다가 다시 설명했다.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벌써? 예상보다 빨랐다. 에이든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케일럽은 기대감과 불안감이 섞인 괴이쩍은 얼굴로 에이든의 손 위에 두툼한 봉투를 올려 줬다.

봉투를 여니, 두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중 서신을 먼저 꺼내 심드렁하게 읽던 에이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히 될 거라 여겼지만 막상 확답을 받으니 기뻤다. 상대의 허락 자체보다 이걸 알리면 기뻐할 올리비아를 생각하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올리비아도 날 대단한 도련님이라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겠지?’

하, 올리비아가 자신에 대해 자랑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사랑스러워 하체가 불끈 선다. 도련님 멋져요! 라고 외치며 올리비아가 말랑하게 안겨 들지 않을까?

망상으로 느슨하게 미소 짓던 에이든은 뺨을 찌르는 시선을 느꼈다. 호기심과 걱정으로 조마조마한 기색을 드러내는 케일럽을 향해 서신을 흔들었다.

“보고 싶어?”

“네.”

거절 없는 즉답에 에이든은 키득거리며 케일럽을 향해 서신을 내밀었다. 그는 공손한 손으로 서신을 받아 들고 빠르게 읽었다.

읽을수록 점차 커지던 눈은 마지막 문장에선 찢어질 듯 커졌다. 그리고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참담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정말 허가가 날 줄이야…….”

서신을 보내면서도 긴가민가했나 보다. 케일럽은 에이든을 노려봤다. 질투심 가득한 시선에 에이든은 소리 내 웃었다.

“왜? 억울해?”

“네. 억울합니다.”

어째서 너만 이렇게 편애를 받냐고, 케일럽은 참 솔직했다. 에이든은 그 반응이 웃겨 웃음을 터트렸다. 서신과 함께 동봉된 건 한 장의 허가서였다. 바로, 제국의 무역 허가서.

이게 왜 엄청난 일인가 하면 지금 제국은 왕국과의 교류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제국은 왕국을 압박하기 위해 무역을 금지했다. 왕국에서 아무리 풀어 달라고 해도, 제국이 받아들이지 않아 왕국은 경제적으로 꽤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걸, 제국에서 허락한 거다. 케일럽은 부러움과 분노로 에이든을 노려봤다.

“내가 왜, 그리고 어떻게 그분의 총애를 이렇게 받는지 궁금해?”

“네.”

케일럽은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했다. 왕국을 집어삼킬 계획을 짜고 있는 제국에서는 쉽사리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제 제재는 왕국을 압박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걸 승인한다고 했을 때 아마 많은 귀족들이 반대했을 거다. 그걸 무릅쓰고 허락했다니, 그분은 이 놈팡이를 얼마나 아끼는 거란 말인가.

‘고작 하녀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발정하기 바쁜 한심한 놈에게!’

에이든의 몹쓸 요구 때문에 모시는 분이 위기에 몰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차올랐다. 그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에이든이 케일럽을 향해 물었다.

“너 나 개새끼라고 생각하지?”

“네.”

망설임 없는 답이었다. 순간 케일럽과 에이든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니요. 그런 생각 하지 않습니다.”

케일럽은 정색하고 정정했다.

‘이놈의 성질머리.’

자기도 모르게 솔직하게 답해 버리다니, 이놈의 혀를 잘라 버려야지. 케일럽은 더는 헛소리를 이어 하지 않게 혀를 약하게 깨물었다. 당연히 에이든이 지랄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성질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본인 앞에서 개새끼라고 생각했단 걸 밝혔으니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에이든은 씩 웃었다.

“맞아. 내가 개새끼라 그래.”

“네?”

“그분에게 총애받는 이유, 내가 개새끼라서 그렇다고. 쓰고 버리기 좋잖아?”

에이든의 적나라한 말에 케일럽의 입이 벌어졌다. 나중에 버려질 것을 알면서 옆에 있다는 건가?

“그러니 억울해하지 마.”

이런 놈을 개새끼로 쓰는 모시는 분도 이해가 안 갔지만, 스스로 개새끼임을 인정하면서 이용당하는 이 사람도 참 대단하다.

케일럽은 속내를 삼켰다. 저런 말을 한 당사자는 멀쩡한데 이야기를 들어 버린 그만 불편해서 눈알을 굴리다가 또 다른 목적을 떠올렸다. 최대한 늦추고 싶은 보고였지만, 언젠간 알리긴 해야 하는 내용이었다.

“전에 켈타족이 찾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자신이 내린 명령을 잊어버릴까. 에이든이 고개를 까딱였다.

“사람을 찾는 것 같습니다. 오래전 일인지 이곳에서 20년 이상 산 사람들만 찾아다니면서 수소문하고 다닙니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

“모르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찾는 걸지도.”

케일럽의 말처럼 물건을 찾기 위해 사람을 뒤쫓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래된 일이란 게 걸린다. 그때의 일을 왜 지금에서야 찾는 것일까? 그땐 중요하지 않던 일이 지금은 중요해진 건가? 설명하기 힘든 찝찝함에 에이든의 손가락이 소파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누굴 찾는지는 모르고?”

“이름이 아니라 특징으로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케일럽은 말을 잇지 않았다. 왜 더 설명을 하지 않냐고 에이든이 눈을 치켜뜨자 그는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말했다.

“40대의 여성을 찾는 모양입니다.”

“그게 뭐.”

너무 포괄적이잖아. 그리고 그게 말을 끊을 이유가 되나? 에이든의 짜증이 스민 눈빛에 케일럽은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은발을 가졌다고 합니다.”

계속 소파를 두드리던 에이든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 표정이 사라진 사람처럼 무감각해진 얼굴에 케일럽은 보고한 걸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어.’

그 또한 정보원에게 보고를 받는 순간, 어떤 여성이 연상됐다. 자신이 떠올릴 정도면 에이든의 생각도 당연히 거기까지 닿을 거다. 그리고 저 개새끼는 제 주인을 위협하는 적을 본 것처럼 으르렁거리겠지.

“더.”

당연히 이렇게 물을 줄 알았다.

“그것밖에 모릅니다.”

그 어떤 말 대신 에이든의 날카로운 시선이 할퀴듯 달려들었다. 케일럽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다른 정보를 풀지 않고 그것만으로 찾고 있습니다.”

“무능하군.”

무감각한 시선으로 던지는 한마디.

짧게 내뱉는 말이 더없이 싸늘해 케일럽의 피부 위로 오싹함이 번졌다. 이럴 땐 신기했다. 자신은 기사였고, 에이든은 무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사람이다. 지금이라도 손만 뻗으면 단숨에 쳐 죽일 수 있는 자가 에이든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의 에이든에게서는 알 수 없는 기세가 느껴졌다. 꼭 에이든이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 것처럼.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생겼다. 하긴, 이런 면이라도 있으니 그분이 에이든을 아끼는 걸 거다.

“먼저 접근해 볼까요?”

“정보원을 심자?”

“네.”

멈췄던 에이든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이상적인 방법인 걸 알면서도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고민하는 게 보였다. 톡톡톡. 소파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작은 소리가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켈타족에서 파견된 자들의 실력은?”

에이든의 질문에 케일럽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살인으로 입을 막겠다는 에이든의 생각이 읽혀서 그렇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할 일도 아니다.

“원하실 땐 흔적을 지울 수 있습니다.”

언제든 처리할 수 있다는 대답이 만족스러운 에이든의 입매가 비틀렸다.

“접근해서 알아봐. 그들이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케일럽이 조심스럽게 답하고 물러났다. 에이든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눌렀다. 감이 좋지 않았다.

왕국민 중에 은발은 드물었다. 실제로 잘 나오지 않는 머리카락 색이었고, 대부분의 은발을 소유한 자는 왕국민이 아닌 타국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켈타족이 이 특징으로 사람을 찾는다는 정보를 얻었을 거다. 여기서 더 얻지 못해서 문제지만.

그때 밖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천진한 웃음소리에 에이든의 발걸음이 절로 창가로 움직였다.

올리비아와 다른 하녀가 무슨 재미난 일이 있는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아이 같은 그 해맑은 올리비아의 미소에 에이든은 짜증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 내 예쁜 올리비아.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평생 저렇게 웃을 수 있도록 지켜 줄 거다. 그것만이 에이든의 삶의 목적이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올리비아의 은빛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 * *

“우흥, 진짜 좋다.”

따스한 햇살에 바짝 마른 시트를 챙기며 올리비아는 콧소리를 냈다. 빨래는 싫었다. 특히, 시트나 커튼 빨래는 굉장히 힘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린 빨래를 걷는 건 태양의 따스한 냄새가 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깨끗한 시트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더니 절로 헤헤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애써 세탁해 놓은 시트가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잘 챙겨서 걸음을 옮겼다. 별채 뒷문으로 들어와 계단을 올라가려던 올리비아는 막 별채 정문이 열리는 걸 발견했다.

‘누가 오나?’

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리려던 올리비아는 상대를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상대도 올리비아를 발견했는지 씩 웃음을 지었다.

“안녕, 올리비아 또 보네.”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보며 올리비아는 몰래 입을 비쭉였다. 첫째 도련님 손님이라던 저번에 만난 강간범이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친한 척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퍼뜩 어떤 것이 떠올랐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에이든 도련님한테 초대받으신 거예요?”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한테 누가 올 거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괜히 안으로 들였다가 또 짜증을 내실지도 모른다. 그러니 허락받은 손님인지 꼭 확인해야 했다.

“아니. 초대받은 것 아닌데.”

초대받은 손님도 아니라면서 참 당당했다. 올리비아는 기가 막혀서 안으로 들어서려는 남자의 앞을 막았다. 비록 시트를 들고 있어 양팔을 쫙 벌리진 못했지만 온몸으로 막을 거였다.

“그럼, 돌아가세요. 지금 그쪽이 들어오시면 제가 혼난단 말이에요.”

올리비아의 결연한 표정을 확인한 남자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게 뭐라고 필사적인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전에도 그러더니 유독 맹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더 놀리고 싶게.

“그 도련님 좀 만나게 해 줘. 만나야 허락을 받든가 말든가 하지.”

그래서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더니.

“그것도 안 돼요. 제가 혼나요.”

올리비아가 정색을 하는 것 아닌가. 그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둘째 도련님의 정체가 궁금해서 살짝 알아보고는 왔다. 콜린스 백작과 현 백작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던지.

처음부터 백작에 대해 좋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있던 감정마저 사라질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티 낼 정도로 어리석은 성격은 아니라 조용히 넘어갔을 뿐이다. 그러는 한편 그 둘째 아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딱히 어떤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걸 빼앗기고 쫓겨났다가 돌아온 자의 기분은 어떤가,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가 궁금했을 뿐. 그런 상황이면 당연히 원래 제 것을 되찾으려는 야망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일까? 올리비아의 반응을 보아하니 손님의 방문 자체를 기피하는 것 같았다. 다시 제자리를 찾으려는 사람이라면 손님의 방문을 반길 거다. 도움을 줄 사람을 구해야 목표에 닿기 쉬우니까. 그래서 손쉽게 만날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이건 예상 못한 상황이었다.

차라리 본채 사람을 통해서 소개받을 것을 그랬나? 에이든을 만나고 싶다고 언급을 하면, 다른 의도가 있다고 느껴질 수 있어서 타인에게 함부로 부탁하지 못하고 직접 찾아온 거였다.

“손님이 왔다고 물어보는 것도 안 돼?”

“네. 도련님이 손님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내 신분이 대단할지도 모르는데?”

올리비아는 그것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는지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눈동자를 바삐 흔들었다.

그러게 엄청 대단한 귀족이면 어떡하지? 라고 뒤늦게 고민하는 걸 표정으로 전부 드러냈다. 그제야 제가 모시는 도련님보다 대단한 사람일 수 있음을 떠올린 것 같았다. 진짜 솔직하고 귀엽다.

남자는 왜 스스로 이렇게 올리비아에게 호감을 갖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보나 멍청한 모습인데 그게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라 이상하게 자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이질적인 외모라 끌리는 건가? 빛을 반사할 것 같은 찬란한 은발과 뽀얗게 살이 오른 흰 뺨을 보니 흰 토끼가 연상되었다. 폭 찔러 보면 굉장히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울 것 같은, 어딘지 달큰한 감각이 퍼질 것 같은 뺨이었다.

“대, 대단하신 분이세요?”

올리비아의 떨리는 목소리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별생각 하지 않았지만 저 겁에 질린 눈을 보니 제가 한 생각이 어쩐지 엉큼했던 것 같아 지레 뜨끔했다.

“큼, 내가 아무렇게나 내쳐도 될 신분은 아니지.”

큰 눈동자 가득 겁이 들어찼다. 저러니 더 잘못한 기분이 든다. 만진 것도 아니고 고작 생각만 했을 뿐인데.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는 그를 강간범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바로잡아야 했다. 그걸 떠올리고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올리비아가 먼저 말했다.

“그래도 에이든 도련님 말씀 들을래요. 전 도련님 전담 하녀니까요.”

마지막에 덧붙이며 은근슬쩍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회피성을 드러내는 점은 또 의외였다.

‘아닌가, 영악하지 못해서 대놓고 드러내는 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놀랐다. 또 이랬다. 마치 올리비아의 편을 드는 것처럼 자꾸 생각이 흘렀다. 자신의 생각인데 이상하게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올리비아를 빤히 쳐다봤다.

예쁘긴 예쁘다. 오밀조밀한 입술은 한번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워 보였다. 방금 강간범이라는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 저 천진한 얼굴을 보고 입술을 물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스스로가 어쩐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제정신 차리자고. 정상이 아니라고 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럼, 그 도련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집사님께 말씀드리면 되죠.”

엄한 생각으로 뻗치려는 머릿속을 비울 겸 질문을 했더니 산뜻하고 빠른 답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집사는 확실히 둘째의 사람인가 보다.

“좋아. 그럼 집사한테 말해서 약속을 잡을게.”

그는 재빠르게 한발 물러섰다. 더 있다가는 올리비아의 오해를 정말 사실로 만들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나름 신사적인 태도를 잘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올리비아 앞에선 가끔 이성이 통제를 벗어나는 것 같았다.

“잘 생각하셨어요. 얼른 가세요.”

올리비아가 얼른 가라고 내쫓듯이 말하며 활짝 웃으니 미묘한 감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얄미운 것도 같고.

그냥 가야지 하는데 이상하게 또 발이 안 떨어진다. 왜 안 가냐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게 뭐가 예쁘다고 이리 발이 무거운지. 꼭 이번이 마지막 만남인 것처럼 자리를 뜨기 싫었다. 그래서 불쑥 요구했다.

“우리 악수 한번 하자.”

“그건 왜요? 저 짐 들었어요.”

품 안 가득 안고 있는 시트를 내밀며 올리비아가 거절의 의미를 내비쳤다.

“잠깐 내려놓고 하면 되지. 악수하자. 안 해 주면 안 갈 거야.”

답지 않게 떼를 쓰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어쩐지 닿아 보면 이 혼란스러움의 해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짜 안 가려고요?”

“그래.”

싫다고 거절하면 여기서 버틸 거란 눈빛을 보내 주자 올리비아가 시트에 고개를 박고 입을 삐쭉삐쭉 내밀더니 시트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 어설프게 시트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올리비아가 하녀였기에 예상만큼 부드러운 손은 아니었다. 분명히 거칠고 투박한 손인데, 보드라움이 느껴져서 몸 안쪽이 같이 울렁거리는 기분이다.

“됐죠?”

올리비아가 재빨리 손을 내빼며 저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계속 쥐고 있었을 정도로 생경한 느낌이었다. 아직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올리비아가 새치름하게 말했다.

“얼른 가요.”

그는 기분이 이상해서 인사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별채에서 나왔다. 본채로 걸어가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심장은 크게 뛰는 것 같고 발밑의 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진짜 이상하다. 이상하단 말밖에 안 떠오른다. 그저 이상했다. 그는 악수했던 손을 바라보며 쥐었다 폈다 했다.

* * *

“큰일 날 뻔했네.”

올리비아는 손님을 내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입구라고 해도 별채에 손님이 왔던 걸 에이든 도련님한테 들키면 혼날지도 몰랐다. 시트를 다시 추켜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시트를 잘 개어 보관함에 넣고 에이든 도련님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올리비아.”

뒤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놀라 올리비아의 어깨가 펄쩍 뛰었다.

“네? 네?”

올리비아의 과격한 반응에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놀라?”

“가, 갑자기 부르시니까 놀랐죠.”

에이든의 눈이 의심으로 더욱 가늘어졌다. 올리비아는 벌렁거리는 심장 근처를 조심히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리고 에이든 도련님의 눈치를 봤다. 바로 화를 내지 않는 걸 보니 별채에 손님이 들어왔던 건 못 보신 게 틀림없다. 괜찮을 거다.

“이리 와 봐.”

에이든의 손바닥이 올리비아를 향해 까딱였다. 머뭇거리며 다가온 올리비아의 어깨에 에이든은 코를 박았다. 그리고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왜, 왜 그러세요?”

“가만히 있어 봐.”

한결 서늘해진 도련님의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꽁꽁 얼었다. 에이든 도련님의 얼굴이 올리비아의 몸 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가 오른손을 쥐어 채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올리비아의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몇 번 더 호흡을 크게 하던 에이든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너, 누구 만났어?”

“아, 아니요.”

“정말이야?”

“네. 정말 아무도 안 만났어요.”

올리비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별채에 손님이 들어왔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였다. 조마조마하게 쳐다보는 올리비아의 눈빛에 에이든은 잡았던 손을 놔주었다.

“알았어. 가 봐.”

“네?”

“볼일 보라고.”

“네!”

올리비아가 도망가듯 헐레벌떡 아래로 뛰어갔다. 시야에서 올리비아가 사라지자 에이든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진짜야?”

에이든의 물음이 혼잣말처럼 허공에 울렸다. 침묵이 유지되자 에이든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듣고 있잖아, 대답해. 올리비아가 누구를 만나지 않은 거 확실해?”

“……저한테 물으신 겁니까?”

몸을 숨기고 있던 케일럽이 에이든을 향해 물었다.

“그럼, 여기에 누가 또 있어?”

에이든의 당연하다는 말투에 케일럽은 이를 악물었다. 이젠 하다하다 하녀의 뒤꽁무니까지 쫓게 생겼다. 물론 그는 저 질문의 답을 알았다. 하녀는 누구를 만났다. 그리고 그 상대가 누군지도 안다.

에이든과 함께 이 방 안에만 있었지만 이미 은밀하게 보고를 받았다. 일이 어그러질 수 있는 변수는 확인해 두는 게 좋았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그 만남을 안다고 말할 정도로 케일럽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걸 알렸다간 정말 하녀의 뒤에도 사람을 계속 붙여야 했고, 자신이 보고하지 않았던 일도 들킬 거다.

케일럽은 일이 더 복잡해지지 않기를 정말 간절하게 원했다.

“아니라고 하는데 왜 믿지를 못하십니까?”

케일럽의 질문에 에이든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당연히 올리비아의 태도가 이상하니까 그렇지.”

“……저라도 그렇게 갑자기 코를 킁킁대면 놀랄 것 같습니다만.”

케일럽은 진실을 알려 줬다. 하지만 에이든은 콧방귀를 뀌었다.

“냄새가 났어. 낯설고 불쾌한 냄새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에이든은 진지했고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케일럽은 매우 놀랐다. 속으로 에이든을 개새끼 개새끼 불렀더니, 신체도 정말 개새끼화 되어 가나 보다. 냄새로 다른 남자와 접촉했는지를 알아챌 정도라니. 이젠 질리기보다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저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에이든은 갈수록 몸도 마음도 완벽한 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분명히 처음 맡아 본 냄새였어.”

에이든이 손가락으로 제 코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케일럽은 네가 모든 사람의 냄새를 다 기억하냐고 반박하고 싶은 걸 참았다. 어쩐지 답을 들어도 화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냥 찜찜한 수준이 아니야. 불쾌하기까지 해.”

에이든은 초조한 사람처럼 주변을 어슬렁어슬렁거렸다. 진심으로 위기감을 느낀 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면서 계속 킁킁거리며 냄새 되새김질 비슷한 행동을 했다.

아까 맡은 그 향을 잊지 않겠다는 것같이 보여 케일럽은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이 인간이 얼마나 변태인지 갑자기 하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하녀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하면 잠깐 닿은 다른 남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걸까? 그 하녀, 앞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까? 이 인간이 눈을 벌겋게 뜨고 관찰할 텐데?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에이든과 하녀의 미래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케일럽은 본능적으로 진저리를 쳤지만 생각보다 두 사람의 미래가 그렇게 끔찍하지 않을 것 같단 생각도 곧 떠올렸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맹한 하녀와 그 하녀가 구르라고 하면 구르기까지 해 주겠다는 남자의 사이인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냥 자기들끼리 좋고 행복하고 말겠지. 약간의 삽질은 있겠지만 어쩐지 이 커플의 앞날에 고난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에이든이 미래에 행복하다니, 그건 또 다른 의미로 끔찍했다. 저런 놈도 행복한데, 자신의 인생은 왜 계속 이런가. 케일럽은 세상에서 자신 빼고 다 행복한 것 같다고 느끼며 좌절을 삼켰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한참을 서성이며 고민하던 에이든이 하녀를 쫓아갈 것처럼 외쳤다. 누군가와 접촉했단 걸 확신하는 저 엄청난 본능에 감탄하며 케일럽은 에이든의 정신을 돌리려 노력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뭐.”

“그거 왜 안 쓰십니까?”

“무역 허가서?”

대충 던진 케일럽의 말을 에이든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네. 전 바로 백작에게 알릴 줄 알았습니다만.”

그러고 하녀 앞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칭찬을 바랄 줄 알았다. 그 대단한 걸 받은 이유가 고작 하녀에게 칭찬받기 위해서였으니까.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끔찍하다.

어쨌든 케일럽은 에이든이 허가서를 받고도 움직이지 않는 점이 의아했고 이 기회에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이 작은 시골에 뭐 볼 게 있다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손님들 때문……. 그렇군, 손님이야!”

에이든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다가 갑자기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에이든의 이상한 의식의 흐름에 케일럽은 껄끄러움을 느꼈다.

“외부에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손님이 떠난 다음에 무역 허가서를 사용하겠단 의미입니까?”

다른 생각에 빠진 것처럼 허공을 매섭게 노려보던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손님의 냄새라면 낯설 수도 있지.”

고개를 끄덕여 질문에 답하면서도, 입과 머릿속으론 하녀에게서 풍기는 낯선 향기를 좇다니 케일럽은 점차 존경심이 치솟았다.

‘이 개새끼 같은 게 진짜…….’

너무 존경스러워서 욕설을 버럭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가 봐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든이 걸음을 옮겼다. 케일럽은 생각을 비우며 기척을 감추고 몰래 뒤따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속만 터질 테니까, 그냥 생각 없이 일이나 하자 싶었다. 그리고 새삼 떠올렸다. 호위 기사란 은근히 극한 직업이라고.

* * *

에이든이 본채에 들어서자 그를 알아본 하인들이 경직되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꼴을 보아하니 백작이 자신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나 보다. 혹시 손님과 마주칠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손님 중 누가 에이든을 보고 누구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문제일 테니.

에이든이 비웃음을 지으며 두리번거리는 사이 그를 발견한 집사 잭슨이 빠르게 다가왔다.

“아니, 도련님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왜? 잭슨도 내가 못 올 곳 왔다고 생각해?”

에이든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잭슨이 표정을 굳혔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도련님이 못 갈 곳이 어디라는 겁니까? 여긴 엄연히 도련님의 집입니다. 누가 그런 무엄한 행동을 한다는 겁니까?”

경고하듯 하인들을 둘러보는 잭슨을 향해 에이든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괜한 드잡이질을 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백작님은?”

손님을 만나러 왔다고 할 수 없어서 에이든은 괜히 백작을 찾았다. 하지만 잭슨은 에이든이 먼저 백작을 찾았다는 사실에 감격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감정을 다스리고 조심스럽게 에이든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집무실에 계십니다.”

에이든이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자 잭슨이 뒤따랐다.

“볼일 봐. 나 혼자 가도 되는데.”

“아닙니다. 도련님이 주인님을 찾으셨는데, 당연히 제가 안내해야죠.”

에이든의 말에 잭슨이 단호하게 답했다. 절대 혼자 보낼 수 없다는 태도였다. 잭슨의 성격을 알기에 에이든은 귀찮다고 생각하며 집무실을 향해 걸었다.

사실 에이든은 당장 백작을 만날 생각은 아니었다. 잭슨 때문에 살짝 꼬이고 말았다. 자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올리비아에게 접근한 놈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거였다. 냄새를 잊기 전에 찾아야 했다. 잭슨에게 손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 저택 내의 손님은 전부 만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잭슨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주는 거라 그러기 싫었다. 에이든이 본격적으로 후계자 쟁탈전에 뛰어든다고 잭슨이 오해하는 끔찍한 일만큼은 일어나선 안 됐다.

“백작님께 도련님이 오셨다고 알리겠습니다.”

백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해 잭슨이 에이든에게 허락을 구했다. 에이든은 최대한 느리게 걸었지만 결국 손님 한 명 만나지 못한 채 집무실에 도착하고 말았다. 다들 대낮부터 뭘 하는지 방구석에 처박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보려는 손님은 보지도 못하고 보기 싫은 백작만 보게 생겼다. 짜증 난 에이든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잭슨이 노크를 했다.

“무슨 일이지?”

“주인님 에이든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안에서 들린 희미한 물음에 잭슨이 답했다. 마치 당황한 것처럼 한동안 안쪽에선 답이 없었다. 에이든은 한쪽 입매를 저도 모르게 비틀었다.

“들여보내게.”

그래도 내칠 수는 없는지 허락이 떨어졌다. 잭슨이 열어 준 문을 통해 에이든은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엔 백작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백작이 앉은 상석 옆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이든은 선객이 있을 줄 몰라서 멈칫했다. 상대도 에이든을 보고 놀란 듯 경직됐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인물임에도 단번에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만큼 백작과 닮았으니까. 자신보다 더 백작을 닮은 남자. 7년 만에 보는 이복형이라는 작자였다.

“오랜만이다. 에이든.”

상대의 인사에 에이든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이복형이라는 작자는 다시 멈칫했고 백작은 표정을 굳혔다.

“에이든.”

경고성이 담긴 백작의 나직한 부름에 에이든은 제 할 말을 했다.

“손님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할 말도 없는 찰나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다.

“난 괜찮다. 이리 와 앉아. 오랜만이잖아? 아버지, 함께 대화해도 괜찮지요?”

하지만 에이든이 등을 돌리기도 전에 배다른 형제가 선수를 치며 백작에게 허락을 구했다. 내가 괜찮지 않다고 쏘아 주는 것조차 사치라 여겨져 에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백작이 나섰다.

“에이든, 데이빗이 배려해 주지 않느냐.”

에이든은 기가 찼다. 이게 정말 배려라고 보는 건가? 제대로 된 배려를 해 줄 거였으면 애초에 이 집구석에 들어오질 말았어야지! 남의 가정을 파탄 내 놓고 하는 짓이 정말 같잖았다. 에이든이 표정만 구기고 있자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앉아라.”

마치 명령하는 것처럼 말투가 차가웠다. 백작의 말이 끝나자 에이든을 유심히 관찰하던 데이빗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정말 꼴 보기 싫었다. 백작이나 데이빗이나 둘 다 보기 싫었지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나 들어 보기 위해 에이든은 데이빗의 맞은편, 즉 백작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차를…….”

“차는 마시고 왔습니다.”

데이빗이 사람을 부르려는 것 같아 에이든이 말을 잘랐다. 그러자 데이빗의 얼굴에 의도적인 안타까움이 번졌다. 그리고 담담한 척하면서도 슬그머니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꼬락서니를 보니 짜증이 났다.

에이든은 데이빗이 정말 싫었다. 데이빗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해 온 증거였다. 그 생리적 거부감 말고도 인간 데이빗 자체도 싫었다.

“에이든 그동안 잘 지냈어? 힘든 일은 없었지?”

너그러운 형 흉내를 내며 먼저 말을 걸려는 데이빗의 태도에 에이든은 미간을 팍 구겼다. 더 말 걸지 말란 신호를 대놓고 보냈다.

에이든은 이래서 데이빗이 싫었다. 빤히 보이는 가식적인 연기를 했다. 혼자 세상 착한 척은 다 했다. 배다른 동생을 감싸는 다정한 형 연기. 뻔히 보이는 가증스러운 연기인데 백작의 눈엔 그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현자의 숲에선 예절은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구나.”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에이든도 오랜만이라 낯설어서 그런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백작이 에이든의 행동을 지적했고, 데이빗은 에이든의 편을 들었다. 또 에이든만 치졸하고 나쁜 놈이 되는 거다. 저기 있는 데이빗은 세상에서 제일 착한 놈이 되는 거고. 씨발, 진짜 나가고 싶다.

“제가 그곳에서 쫓겨난 이유가 괜히 있겠습니까?”

에이든은 그냥 제 부덕한 탓이라고 돌려 버렸다. 백작은 곤란한지 입을 꾹 다물었고 데이빗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번뜩이는 눈동자가 승리감에 젖어 있었다. 저걸 숨기지 못하는 것도 웃기고,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으스대는 꼴이 저놈도 참 한심한 놈이다. 어릴 땐 그렇다 쳐도, 다 커서도 저러니.

에이든은 팔짱을 끼고 ‘내가 여기에 왜 앉아 있을까?’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판단했다. 그냥 잭슨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말 것을.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에이든이 막 일어서려는 찰나 백작이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

올리비아에게 접근한 놈을 찾으러 왔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 행동 자체가 부끄러운 게 아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를 쫓아다니는 일에 당당했다. 다만, 알 만한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해도 자신이 올리비아를 아낀다는 걸 데이빗에게 대놓고 말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격적인 언사가 튀어 나갔다.

“이유가 없으면 찾아오면 안 되는가 봅니다?”

에이든의 질문에 백작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그 말에 답하지는 않았다. 마치 에이든의 말에 긍정을 표현하듯. 그리고 그 짐작이 정말인지 이어지는 부정의 말이 없었다.

에이든은 헛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기가 막혔다. 그래도 백작이 데이빗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에이든을 거부하는 꼴을 보일 줄은 몰랐다.

슬쩍 확인해 보니 데이빗이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게 보였다. 이를 악물고 기쁨을 억누르는 데이빗을 보니, 에이든은 갑자기 그냥 넘어가기가 싫어졌다.

저 알량한 만족감에 취해 있는 데이빗의 얼굴이 시궁창에 처박힌 사람처럼 일그러진 모습을 봐야겠다. 소란스러워지는 게 싫어서 나중에 쓰려던 물건을 지금 쓰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용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에이든이 용건이 있다는 소리에 데이빗의 눈빛이 대번에 사납게 변했다. 그냥 꺼져 버리지 무슨 용건이냐는 의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흠, 별채에서 쉬기도 빠듯했을 텐데, 부지런하구나.”

저 인간도 참 한심하다.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볼 때마다 자신에게 열을 내는지 에이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치하게 딱히 가해자 피해자 나누고 싶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저쪽이 가해자고 이쪽이 피해자였다.

하지만 저열한 인간이 으레 그렇듯 저놈도 자기 편할 대로 생각했다. 데이빗의 모친과 백작이 먼저 만났을지는 몰라도 백작의 정실부인은 에이든의 어머니였다. 데이빗과 그의 모친은 에이든의 어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에는 자신들의 존재를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백작이 나름 금전적 지원을 해 줬겠지만 백작가에서 자란 것만 했을까. 백작가에 들어온 데이빗은 자신이 자라 온 환경과 너무 다른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에이든을 질투했다.

평범하게 자란 데이빗은 하루아침에 귀족의 화려한 세상에 들어섰다. 평민일 땐 상상도 할 수 없던 황홀하고 탐나는 것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그 호화로움에 데이빗은 빠르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건 귀족 사회의 단면만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존심이 높았고 그런 만큼 스스로가 우월하다 생각했다. 서자 따위가 자신들의 무리에 들어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걸 겉으로 드러내는 어리석은 귀족은 없었다.

콜린스 백작가는 비록 가문의 위세는 많이 줄었지만 어쨌든 백작가였다. 그리고 이 근처의 가문들은 다 고만고만하였기에 콜린스 백작과 굳이 척을 지고 싶은 자들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은 겉으론 데이빗과 그 모친을 환영했다.

“어머, 결혼 축하드려요.”

“이런 훤칠하게 생긴 아드님이 백작님께 있는 줄 몰랐네요.”

“환영해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고귀한 사람들에게 처음 받은 환대에 어린 데이빗은 수줍게 그걸 즐겼다. 아버지와 함께 살기 전엔 말 거는 것도 허용되지 않던 부유한 자들이었다.

번쩍이는 보석을 차고 값비싼 옷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저도 그런 부류가 된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만날 때마다 그들이 환대해 주니 어찌 들뜨지 않을까. 데이빗은 자신이 정말 대단한 존재가 된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얕은 꿈은 쉽게 깨어졌다. 평소와 같은 모임인데 그날따라 데이빗은 늦고 말았다. 허겁지겁 그들이 모인 가게에 들어서려던 순간,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놈 늦나 보네? 시간 약속도 지킬 줄 모르는군.”

“출신이 그런 걸 어쩌겠어요.”

“아, 데이빗의 모친 출신이 미천하다고 했지?”

“평민도 아니고 노예란 소리도 있더군요. 그러니 숨겼겠죠.”

“어쩐지 아들이란 자도 격이 떨어져 보이더라니.”

“당연하죠. 어미의 출신이 그러한데 제대로 교육받았겠어요?”

“본처의 자식보다 형이던데, 백작가를 이어받을 수 있기나 할까요?”

“능력이 되어야 하지요. 어릴 때부터 귀족으로 자라 온 본처 자식만 한 능력이 있을지…….”

그들이 그와 모친을 한낱 가십거리로 여기고 헐뜯고 비웃었다. 그 내용 중엔 자신을 저보다 어린 에이든과 비교를 하며 무식하다고 깔보는 내용도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데이빗도 처음엔 어째서 에이든과 비교를 당하는지 이해 못했다. 하지만 그런 수군거림을 계속 들을수록, 데이빗은 왜 그들이 자신을 욕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에이든에 대한 반감만 갖게 되었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이유가 다 에이든 때문인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아버지를 빼앗은 건 에이든이 아닌가.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든 건 악독한 그 여자였다. 아버지가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귀족으로 자랐을 거다.

에이든이 자신과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고 온갖 부유한 걸 다 누렸다. 데이빗의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팽배했다. 자신도 처음부터 백작의 아들이었다면 이렇게 비참할 일은 없었을 거라 여겼다. 데이빗의 에이든에 대한 감정은 점차 열등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한번 싹트자 당연히 걷잡을 수 없이 빠르고 크게 번졌다. 데이빗은 점차 에이든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그리고 백작의 관심이 에이든에게 쏠리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렇기에 데이빗은 에이든이 백작에게 말을 붙이는 것도 싫어했다.

에이든과 백작이 단둘이 시간을 보낸 것을 알아내면 그는 기를 쓰고 백작에게 붙어 있었다. 데이빗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애 같은 행동을 했다.

‘그런 유치한 행동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이야.’

어떻게 보나 빤히 보이는 데이빗의 행동인데, 역시나 이번에도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간에서 데이빗의 엇나가는 마음을 다독여야 할 텐데 백작은 그러지 못했다. 방관하고 가끔은 편을 들어주며 오히려 데이빗의 어리광을 전부 받아 줬다.

백작 또한 데이빗과 어린 시절을 함께해 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죄책감과 안쓰러움이 뒤섞여 은연중에 데이빗을 챙기게 되었고 에이든이 피해를 받았다.

사실 에이든 입장에선 웃겼다. 멀쩡한 사람의 뒤통수를 친 주제에. 그 아비나, 그 자식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 남을 달달 볶는 꼴이었다. 두 사람 다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이지 않은가. 이 정도면 지랄과 환장의 대잔치였다.

그렇게 절절하면 차라리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되지. 권력과 부는 필요해서 어머니를 택해 놓고. 사람 좋은 척은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데이빗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사람은 참 간사하고 욕심 많은 인간이었다. 그러면서 비열하게는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주변 사람들만 피곤하게 만드는 인간.

따지고 보면 에이든 또한 어린 시절엔 구질구질하게 반응했다. 데이빗과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했다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갑자기 제게 닥친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어서 발악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나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이들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지만. 지금도 예전처럼 싫어하고 있다. 다만 그거에 발끈해 발악할 필요성도 못 느끼는 거다.

어쨌든 데이빗은 에이든이 백작과 대화하는 상황을 꺼렸다. 그러니 에이든이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저리 긴장해서 쳐다보는 거다. 부자간의 화목한 대화를 할까 봐서, 그따위 애정은 조금도 없는 사이인데 말이다. 데이빗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태연하게 받으며 에이든은 입을 열었다.

“영지에 좋은 소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한 손 보탰다고요?”

에이든이 데이빗을 턱짓해 보이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정보도 좀 얻을까 했다.

에이든의 태도가 아니꼽지만 데이빗은 대화의 주제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거라 경계심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별채에만 있던 에이든도 알다니 일부러 사람을 시켜 소문을 낸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득이 되는 내용을 에이든이 먼저 꺼낸 점에서 공교로움을 느끼면서도 데이빗은 우쭐함을 숨기지 못했다.

“뭐 어쩌다 보니 내가 우리 영지에 한 손 보탤 수 있게 되었다.”

흡족한 웃음을 짓는 데이빗이 에이든은 가소롭기만 했다. 칭찬한 거 아닌데 눈치도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어릴 때보다 더 덜떨어져 보였다. 그때 백작이 입을 열었다.

“영지 운영엔 별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찌 소식을 듣긴 했구나.”

이것 봐라? 에이든은 백작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운영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경고인 건가, 관심을 갖고 있다니 다시 보겠다는 신호를 준 건가. 데이빗을 보니 그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조심스럽게 백작과 에이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눈을 모로 세우고 쉴 새 없이 훑는 꼴이 쥐새끼가 따로 없었다.

“운영에 관심은 없습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듣게 되었습니다.”

에이든의 말에도 백작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영지에 관심을 가져야지. 앞으로 차차 갖고 움직이다 보면 네게도 좋은 기회가 올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데이빗이 참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에이든이 영지 일에 관심을 갖는 순간 눈에 불을 켜고 발악할 거면서 입으론 잘도 내뱉었다. 아, 저건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올려치기 위해 하는 말인가?

“어쩌다가 켈타족과 거래를 트게 되었지?”

역시나 에이든의 질문에 데이빗의 눈빛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왜 자세한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건지, 말은 저렇게 하면서 실은 영지 운영에 관심을 갖는 건 아닌 건지 의심하는 걸 거다.

“운이 좋았지. 내가 그들이 원하는 걸 쥐고 있었거든.”

아무리 멍청해도 순순히 알려 줄 생각은 없나 보다. 에이든은 정말 안타까워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 저 인간이 정말 켈타족이 원하는 걸 쥐고 있는 걸까? 원하는 걸 쥐고 있다고 착각하는 걸까? 에이든은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후자다. 데이빗이 켈타족이 원하는 걸 쥐고 있었다면 당연히 올리비아에게 접근했을 거다. 그런 흔적은 없으니 저 말은 허언이었다.

진짜 사람이 어디까지 덜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머리도 텅텅, 인성도 텅텅. 저 녀석에게선 켈타족에 대해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나 보다.

우쭐한 척하는 데이빗의 꼴을 봐 주기 싫어 에이든은 툭 내뱉었다.

“참, 저도 어쩌다 보니 영지에 좋은 일을 하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일부러 여지를 주는 말투를 사용했다. 그러자 백작과 데이빗의 얼굴에 어리둥절함이 떠올랐다.

“영지에 좋은 일이라니?”

에이든이 헛소리한다고 여기는지 데이빗이 실실 웃는 낯으로 되물었다. 사람이 모두 자신같이 거짓말만 하는 줄 아나 보다.

“댁이 한 것과 비슷한 일.”

에이든의 무성의한 대답에 데이빗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켈타족과 거래를 텄다고?”

“비슷한 일이라고 했지, 똑같은 일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정말 한심한 표정을 안 지을 수가 없었다. 에이든의 표정을 읽은 데이빗은 더욱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비슷한 일이라니? 어디 좋은 곳과 거래하기로 했단 거야?”

데이빗의 목소리엔 부정의 기색이 가득했다. 에이든은 데이빗이 아니라 백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끝까지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에이든, 애써 그러지 않아도 돼.”

데이빗이 뜬금없이 너그러운 척을 했다.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꼴이 재미난 것을 봤단 태도였다. 어리둥절해진 에이든이 뭘? 이라고 묻기도 전에 데이빗이 덧붙였다.

“아무도 네 부족함을 탓하지 않아. 괜히 나를 따라 할 필요 없단다. 없는 일을 말하는 건 큰일 날 일이야.”

그러니까, 성과에 밀릴 것 같으니까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거야? 에이든은 헛헛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이거 머릿속이 꽃밭인 새끼네. 완전히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게 백작가도 다음 대엔 끝나게 생겼다.

더 같이 있다간 멍청함이 옮을 것 같아 에이든은 몸을 일으켰다. 거짓말을 하고 도망가는 패잔병 보듯 거만하게 올려다보는 데이빗을 보며 에이든은 무심하게 내뱉었다.

“제국과의 무역.”

에이든은 별거 아닌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그걸 듣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한 박자 늦게 데이빗이 놀라 소리쳤다. 백작 또한 이건 충격적인 소식인지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두 사람의 놀란 꼴을 보니 속은 좀 시원했다.

“무슨 소리야? 정말 제국과 무역이 가능하다고?”

희게 질린 얼굴로 데이빗이 물었다. 정말 제국과 무역이 가능하다면 자신이 한 켈타족과의 거래 따위완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럴 리 없다. 넌 계속 별채에만 있었잖아!”

믿을 수 없다는 부정이 담긴 데이빗의 외침에 에이든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예상대로 썩어 들어가는 데이빗의 표정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 눈빛을 본 데이빗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에이든이 너무 당당해서 불길함을 느꼈다.

“거짓말하지 마라!”

“정말이냐? 이건 장난이었단 말로 끝날 일이 아니다.”

“곧 거래가 가능하다는 증거를 들고 오죠.”

백작의 질문에 에이든은 오만하게 답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얼마나 놀랐는지 두 사람은 에이든을 잡지 못했다.

당장 품속의 허가서를 꺼내서 보여 줄 수 있지만 에이든은 일부러 다음으로 미뤘다. 이런 건 백작가의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알려야 했다. 그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저 저 음험한 부자만 있을 때 내어 줬다간 이 공로가 엉뚱한 사람에게로 돌아갈 수 있어서 그랬다.

백작가가 이득을 얻는 것도 짜증 나는데, 데이빗이 한 것처럼 되어 버리면 올리비아에게 칭찬을 듣지 못하게 되지 않는가. 뭐 때문에 귀찮게 편지까지 썼는데, 그런 최악의 사태가 와선 안 됐다. 지금은 저들이 당황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벌써 나오십니까?”

막 에이든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는지 잭슨이 조용히 다가왔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냐는 잭슨의 안타까운 표정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겼다.

“별로 유쾌한 대화가 아니어서.”

“바로 별채로 가십니까?”

“아니, 잠깐 둘러보고.”

여기까지 와서 짜증 나는 대화만 나누고 갈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 냄새를 찾기 위해 움직이려는데, 잭슨은 기꺼이 자신이 안내를 하겠다고 나섰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괜찮아. 혼자 다녀도 돼.”

“아니요. 도련님은 당연히 제가 모셔야지요. 저만 믿으십시오!”

에이든이 필요 없다고 말해도 잭슨은 극구 괜찮다고 말하며 따라나섰다. 손님들에게 에이든을 제대로 소개하려는 잭슨의 속셈을 알아서 귀찮았다. 에이든은 대충 훑고 지나가자며 빠른 걸음으로 본채를 살폈다.

“누구 만나시고 싶은 분 있습니까?”

손님방 쪽으로 움직이니 잭슨이 은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아니라고 손을 휘젓고 그냥 걸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에이든은 단순히 냄새로 무언가를 찾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모든 손님을 만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사용하는 침실에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손님방 중 최고로 좋은 방 앞을 지나가는 순간, 에이든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뒷덜미가 쭈뼛하며 모든 감각이 일어섰다.

맡아 본 냄새다. 쿵쿵쿵 커다란 심장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방문 앞에 서서 조금 더 킁킁거려 보고 에이든은 확신했다. 씨발, 이 방에서 머무는 놈이 올리비아에게 접근했었다.

‘도대체 어떤 새끼지?’

대번에 에이든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에이든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자 잭슨도 그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 방 쓰는 놈 누구야? 어떤 새끼기에 감히 올리비아에게 찝쩍대는 거야?’

에이든은 목 끝까지 치미는 질문을 삼켰다. 이 상황을 잭슨에게 알려서 좋을 건 없었다. 감정을 억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피곤해서 돌아갈 거야.”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내고 아쉬워하는 잭슨을 뒤로하고 에이든은 별채로 향했다. 잭슨에게 묻지 않아도 어차피 뒤따르던 케일럽이 저 침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거다. 얼른 별채에 돌아가서 호위 기사의 멱살을 잡아 흔들든가 해야겠다.

‘뭐? 접근한 사람이 없어? 이렇게 냄새를 확 묻혀 놨는데?’

에이든은 씩씩거리는 걸음으로 별채 현관을 쾅 하고 열었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가는 걸음이었다. 그래서 그런 에이든의 뒤를 따르며 케일럽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에이든의 분노와 생각을 전부 읽었다.

정말 놀랍게도 에이든은 정확하게 올리비아에게 접근했던 남자의 방을 찾았다. 와 그걸 어떻게 찾지? 개새끼도 이런 확실한 개새끼가 없었다.

냄새만으로 접촉의 흔적을 찾다니, 훈련받은 군견 중에도 이리 뛰어난 개는 없을 것 같았다. 에이든이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제 방으로 향하자, 케일럽은 저 지랄을 어떻게 받아 내야 하나 고민하며 조용히 뒤따랐다.

그리고 케일럽의 예상대로 에이든은 폭발 직전이었다. 별채로 오는 동안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심장이 분노로 터질 것 같았다.

케일럽은 몰랐다 치자. 무능력하면 그럴 수 있긴 했다. 에이든 사전에 그런 실수, 특히 올리비아와 관련된 실수는 해선 안 되긴 하지만 세상에 절대는 없으니까.

별채에만 있는 애한테 무슨 벌레가 꼬이겠는가, 에이든 자신이 방심한 것처럼 안일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럼 여기서 아까 올리비아와 한 대화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너, 누구 만났어?”

“아, 아니요.”

“정말이야?”

“네, 정말 아무도 안 만났어요.”

어여쁜 올리비아가 순진한 얼굴로 뻔뻔하게 거짓을 말했다.

그러니까 어째서 올리비아가 자신의 질문에 거짓말을 했을까? 그렇게 손목에 냄새를 묻힐 정도면 확실히 접촉이 있었던 건데, 왜 그놈의 편을 들어 숨겨 줬을까? 도대체 무슨 사이기에 그 착한 아이가 거짓말까지 해 가며 그 새끼를 감싼 거지?

설마, 설마!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에이든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눈앞이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이런 분노는 처음이었다. 심장이 뇌에 처박히기라도 했는지 쿵쾅쿵쾅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더욱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당장 소리쳐 올리비아를 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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