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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뭐가 더 좋아? (9/19)

8. 뭐가 더 좋아?

찬장을 열었던 올리비아는 텅 비어 버린 사탕 통을 발견하고 시무룩해졌다. 벌써 떨어지다니. 집사님께서 꼬박꼬박 챙겨 먹으라고 했던 거라 또 받으러 가야 했다.

‘가지러 가기 귀찮은데.’

올리비아답지 않게 작게 투덜거린 후 위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위쪽이 조용했다. 올리비아는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얼마 전 에이든 도련님에게 로라에 대해 말실수할 뻔한 후부터 이상하게 도련님이 조용하셨다. 낮 시간에 부르지도, 일하지 못하게 달라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따로 힘든 일거리를 만들지도 않았다.

‘귀찮게 부르지 않아서 좋긴 한데…….’

분명히 편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올리비아는 기운이 빠졌다. 영문 모를 감정에 입을 몇 번 삐죽이다가 집사님이나 찾아가기로 했다.

다 떨어졌다고 먹지 않으면 집사님께 혼날 거다. 잠깐 도련님한테 본채에 다녀온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금방 다녀오기로 했다. 요 며칠과 같다면 에이든 도련님이 딱히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기에 본채로 향하는 올리비아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본채에 도착해 다행히 집사님을 빨리 발견했다. 올리비아는 작게 용건을 꺼냈다.

“집사님 전에 주신 사탕 다 떨어졌어요.”

“뭐? 벌써 다 먹었느냐?”

집사님이 놀람을 드러내서 올리비아는 괜히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네. 전에 도련님의 시중을 들 때마다 먹으라고 하셔서…….”

그때마다 먹어서 그런 건데. 맛있다고 몰래 챙겨 먹은 적 없는데. 올리비아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집사님이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차서 올리비아는 안절부절못했다.

“조금 아껴 먹을까요?”

“아니다. 잘했어. 더 챙겨 주마.”

그렇게 말한 집사님이 수납장을 뒤져 다시 사탕을 한 통 주셨다.

“도련님의 시중을 들거든 그때마다 빼먹지 말고 먹어야 한다.”

“네.”

집사님의 엄한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알겠다고 답하고 안쪽 주머니에 사탕 통을 넣었다. 그리고 집사님께 인사드리고 별채로 향했다.

본채에서 이동하는 올리비아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사실 요즘 본채는 위험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전에 자신이 에이든 도련님이 대단하다고 소리를 쳤던 일로 로라가 화가 엄청 났다고 했다. 이를 갈고 있다고 잡히면 쥐 잡듯 잡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올리비아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별채는 로라가 올 일이 없어서 안전했지만 본채에선 만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쫓기는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움직였다. 본채를 벗어나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어 별채로 가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저 멀리서 로라처럼 보이는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새 자신이 본채에 왔단 소리를 전해 들은 로라가 저를 찾기 위해 쫓아온 것이 틀림없다.

“힉!”

올리비아는 비명을 삼키며 로라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오기 전에 옆에 서 있는 큰 나무 뒤로 몸을 피했다. 로라가 화내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아는 올리비아는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미 선객이 있었는지 턱 하고 몸에 부딪혀 올리비아는 뒤로 튕겨져 나갈 뻔했다. 다행히 상대가 붙잡아 줘서 엉덩방아를 찧는 건 면했다. 아픈 코를 찡그리며 고개를 올렸다가 사람이 있어 놀란 올리비아의 입술이 스르르 반사적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비명으로 나오기 전에 커다란 손에 입이 턱 막혔다.

“쉿, 비슷한 상황 같은데 조심하지.”

낯선 손길이 얼굴 위를 덮자 올리비아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작게 눈웃음을 짓는 잘생긴 남자는 백작가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

처음 보는 남자와 닿아 있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올리비아는 얼어 버렸다. 저 아래 덮어 놓은 끔찍한 기억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총관님의 명령으로 어떤 귀족의 밤시중을 억지로 들 뻔했을 때가.

그날 올리비아는 너무 무서웠다. 창고에 갇혔을 때보다, 체벌을 받을 거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두렵고 끔찍했다.

귀족에게 반항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낯선 손이 닿자 징그럽고 소름 끼쳐 필사적으로 반항하게 되었다. 그랬음에도 올리비아는 그 귀족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 몸을 억누르던 손길, 몸에 올라타 내리누르던 무게, 음흉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때 에이든 도련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만으로 진저리가 쳐졌다.

올리비아는 둔했다. 다른 사람에게 멍청하단 소리를 수도 없이 들을 정도로 생각 없어 보이고 해맑게 살았다. 실제로 행동도 굼뜨고 빠릿빠릿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올리비아가 아예 생각이 없는 우둔한 존재는 아니었다. 계속 생각해 봤자 끔찍할 뿐이라 그 기억을 묻어 뒀을 뿐이다. 안 좋은 일은 기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거다. 그렇게 덮어 뒀던 기억이 되살아나 버렸다.

지금 제 입을 틀어막은 커다란 손은 ‘낯선 남자’의 손이다. 언제든 자신을 힘으로 억누르고 고통을 줄 수 있는. 이 남자도 끔찍하게 돌변할 수 있었다.

툴툴거릴지언정, 유치하게 방을 어지럽히는 걸로 괴롭힐지언정 제게 해를 끼치지 않는 에이든 도련님과는 다른 낯선 사람.

그걸 자각하자 올리비아의 몸이 덜덜 떨렸다.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올리비아의 그런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제게 맞닿은 하녀가 떨고 있다는 것을. 처음엔 그냥 놀라서 그런 줄 알았다. 갑자기 누군가가 입을 틀어막으면 누구라도 놀랄 거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단순히 그 점에 놀란 건 아닌 것 같았다.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굳어 버리더니 떨림이 커졌다. 점차 창백해지는 피부, 흔들리다 못해 초점을 잃어 가는 눈동자는 무서워서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그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자신은 잘생겼다. 게다가 부드러운 인상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초면부터 남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하녀이니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채고 신분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럼 도대체 왜 이렇게 과하게 놀라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보다 하녀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라 판단했다. 하녀의 반응이 점점 심해지는 걸 보아하니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직 주변에 있는 다른 하녀가 신경 쓰여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알렸다.

“괜찮아. 해치지 않을게.”

정신없는 상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해 봤자 변명처럼 들린다. 그래서 짧게 하녀가 듣길 원하는 내용만 말했다.

그리고 최대한 담담한 미소를 짓고 신뢰감 있는 시선을 보냈다. 약속하겠노라고. 믿음직스럽게 보이도록 행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하라고 교육받아 왔으니까.

효과가 있는지 하녀의 눈동자에 점차 초점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말 한마디에 완전히 진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떨림은 숨길 수 없는지 하녀의 눈이 빠르게 깜빡이며 속눈썹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파들파들. 그 모습이 참으로 가녀리고 순수해 보였다. 그래서 기분이 묘했다. 사람을 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인간만큼 탐욕적인 존재가 없다는 걸 어린 시절부터 뼈저리게 깨달은 그였으니까.

하지만 맞닿아 있는 하녀는 순수해 보였고 그만큼 연약해 보였다. 괜히 어린아이를 괴롭힌 듯한 미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하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다시금 약속했다.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이번엔 제대로 들렸는지 하녀의 떨림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초점이 맞지 않던 눈에 생기가 돌며 또렷한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멍청한 건가, 순진한 건가. 하녀는 약속 몇 마디에 빠르게 진정되었다. 언제 두려움에 떨었냐는 것처럼 이번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다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두려움에 잠식되었던 눈동자가 먹구름이 사라지고 맑게 갠 하늘처럼 청명하게 자신을 응시했다.

초록색보다 옅은 청명한 빛. 너무나 천진하고 깨끗한 눈동자. 탐욕 같은 더러운 감정으로 오염되지 않는 눈동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명 못할 기분이 들었다.

손바닥을 덥히는 색색거리는 가쁜 호흡이 느껴졌다. 이 또한 불쾌감으로 느껴야 할 덥고 습한 기운이지만, 이상하게 불쾌감보다 어딘가 자극받는 느낌이다.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귓가에 숨결을 불어 넣는 것처럼.

하녀가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숨쉬기 불편해서 한 행동일 거다. 알지만 손바닥 아래로 그 감촉이 선명하게 전달됐다. 화들짝 놀라 손바닥을 뗄 뻔한 걸 참고 물었다.

“소리 지르지 않을 거지?”

하녀의 고개가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너무 순순히 답해서 믿을 수 없지만 호흡이 불편해 발갛게 달아오른 하녀의 얼굴이 보여서 손을 떼야만 했다. 숨이 가쁘긴 했는지 하녀는 입을 살짝 벌리고 입과 코로 격하게 숨을 헐떡였다.

그제야 하녀의 얼굴이 제대로 들어왔다. 이 저택에서 처음 보는 하녀다. 어쩔 수 없이 신분을 밝혔던 터라 여기 온 후부터 그는 꽤 많은 접근과 접대를 받았다. 그래서 백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만나 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눈이 마주쳤을 때, 눈만 보고도 미인일 거라 짐작했지만 손을 떼고 본 하녀의 오밀조밀한 얼굴은 역시나 예뻤다. 묘하게 이국적으로 생겼는데 거슬리기보단 그게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았음에도 벌어진 입술이 탐스러워 보이고, 더위 먹은 개처럼 헐떡이느라 살짝 드러난 혀는 야릇해 보였다. 어디를 봐도 예뻐 보이려 행동하는 게 아닌데 시선을 끌었다.

순수함 속에 담긴 은은한 농염함. 하녀는 마치 베어 물어 달라고 향긋한 향을 내뿜으며 유혹하는 농익은 과일 같았다. 갑자기 그는 갈증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고 바짝 마른 듯한 입술을 혀를 내밀어 적셨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때마침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녀에게 손을 뻗을 뻔했다. 귀찮은 이를 피해 숨은 상황에서 이 무슨 저속한 생각을 떠올렸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에 그는 자책했다.

그리고 점차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앞에 있던 하녀도 그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는지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예상대로 눈앞의 상대도 저 귀찮은 하녀를 피하는 동지였던 모양이다.

아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것 같아 이번엔 덜덜 떨고 있는 하녀의 눈앞에 손을 내보였다. 그 손을 하녀가 인식한 걸 확인하고 그는 조심스럽게 하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동그래지는 눈에 소리 죽여 경고했다.

“쉿.”

그러자 하녀가 제 손을 들어 입을 가리는 게 아닌가.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진하게. 꾸밈이라곤 조금도 없는 진솔한 움직임이었다. 순간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녀에게 그는 어딜 봐도 수상한 사람일 텐데, 조용히 하란다고 입을 틀어막다니.

올려다보는 하녀의 눈동자는 천진했다. 아이도 아닌데 아이처럼 순진해 유쾌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더 장난치고 싶은 마음을 그는 억눌렀다.

장난 따위 칠 상황이 아니었다. 커다란 나무 하나를 두고 숨어 있는 상태였다. 쫓아오던 이가 지나치다가 볼 수 있는 상황이라 그녀가 지날 때에 맞춰 반대로 자리를 옮겨 줘야 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입 밖으로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벙긋거려 의사를 전달했다.

‘움직여야 해.’

다행히 하녀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하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으로 바짝 당겼다. 흠칫 몸을 떨었지만 의도를 알아챈 건지 하녀가 반항하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자 하녀도 종종걸음으로 따라 움직였다.

작은 보폭으로 서로의 걸음에 맞추니 꼭 춤이라도 추는 기분이다. 나무를 반 바퀴 돌고 멈췄다. 가던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는지 쫓아오던 이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렸다. 바로 움직이면 소리로 들킬지 모른다. 잠시 그대로 귀찮은 이가 더 멀어지길 기다렸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이를 떼어 내는 순간이니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는 이상하게 품에 기댄 하녀가 의식됐다. 제대로 안아 보고 싶다.

누군가와 닿고 싶다는 욕구는 처음이라 혼란스러웠다. 하녀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작고 연약해서 지켜 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아까부터 꽉 끌어안아 보고 싶은 아슬아슬한 마음을 참았다.

현재 사회에 만연하는 방만한 성관념을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무릇 이성이 제대로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 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품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는 쉽사리 여인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욕구에 취한 짐승처럼 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하녀에게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가슴에 이마를 대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하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것마저 귀여워 보였다. 살짝 닿은 상태가 더 갈증이 났다.

품에 차도록 당겨 안으면 이 조급한 마음이 충족될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막 손을 하녀의 허리로 내리려는 찰나. 고개가 들렸다. 순진하게 응시하는 눈동자에 지레 놀라 손을 멈췄다.

“로라 언니 갔어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영롱한 목소리라는 건 이런 거라는 것처럼 귓가에 달짝지근하게 얽혀 드는 예쁜 음성이었다. 의구심과 긴장감은 조금도 없는 천진한 눈동자에 그는 괜한 죄책감을 느꼈다.

“잠시만.”

그리고 고개를 빼내 동태를 확인했다. 끈질기게 쫓아오던 하녀는 사라졌다.

“갔어.”

그러자 하녀는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품 안에 가둬 뒀던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멀어져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의 정체가 뭔지 안다.

아쉬움.

하녀가 자신과 떨어진 것이 그는 아쉬웠다. 다시 손을 뻗어 제대로 안아 보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손바닥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우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하녀가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뒤늦게 정체를 물어 왔다. 그러자 기분이 또 묘했다. 이 저택에서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존재가 있을 줄 몰랐다. 그는 이 저택 내의 최고의 귀빈이니까. 사실 이 한미한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손님이었다. 그래서 아까 그 하녀도 기를 쓰고 자신을 찾아다닌 것이고.

“생일 파티에 초대된 손님.”

“아, 첫째 도련님 손님이시군요.”

그러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걸 보니 하녀가 이 가문의 식솔인 건 확실했다. 그런데 첫째 도련님이라니? 저택에 온 뒤로 처음 들어 본 호칭이었다.

그가 만났던 이 집안의 식솔들 전부는 파티의 주인공을 그냥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가문의 주인인 백작에게 소개받기로도 자식은 한 명뿐이었는데…….

“그러는 넌? 처음 보는 하녀인 거 같은데.”

“전 별채 담당이라서요. 가끔 필요한 거 있을 때만 이쪽으로 와요. 방금은 집사님 뵙고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올리비아는 손님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긴 했지만, 하녀가 얼쩡거렸다고 괜히 집사님께 전달해서 혼날까 봐 잽싸게 답했다.

“별채 담당?”

“네.”

해맑게 대답하는 하녀를 보며 그는 더 의아했다. 처음 저택을 안내하며 백작은 딱 하나만 부탁했었다. 모든 것이 제공되었지만 별채는 손님을 받기 힘든 상태이니 그쪽으론 가지 말아 달라고.

이상한 부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백작 가문이지만 가세가 다 기운 상태라 무슨 수작을 부릴 여유가 없을 거라 판단했다. 딱히 숨기는 것이 없을 거라 여기고 신경을 껐다.

게다가 별채는 멀리서 보기에도 허름한 상태였다. 겉이 저러니 안쪽은 손님을 받지 못할 정도로 어수선한 거라 생각했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라고 여겼는데, 담당이 있다? 담당이 있을 정도면 내부 유지가 되고 있다는 소리다.

그런 곳에 가지 못하게 한다는 건 어떤 이유가 있을 건데……. 콜린스 백작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경각심이 몰려왔다. 막 콜린스 백작에 대한 의심을 키워 갈 무렵,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이 하녀 때문일까? 그는 하녀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아까도 느꼈지만 참으로 천진한 얼굴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묘한 색스러움이 숨겨져 있었다. 보통 귀족이 어리고 예쁜 하녀를 동떨어진 곳에 빼놓는 이유는 하나였다.

‘혹시 백작의 숨겨 둔 애첩인 건가?’

그렇게 떠올리자 그는 갑자기 기분이 저조해졌다. 아니, 저조해졌다는 표현으로 부족했다. 이 찝찝하고 짜증 나는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으라면 그래, 불쾌함. 정의하니 그 불쾌감이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도대체 뭘까 이 불쾌한 기분은.’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알 수 없는 불쾌감에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하녀가 인사하고 냉큼 몸을 돌렸다. 도망가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잠깐.”

그는 반사적으로 하녀를 불렀다. 돌아서는 하녀의 눈은 놀라긴 했지만 역시 맑은 눈동자였다.

“할 말 있으세요?”

어찌 보면 욕망이란 게 전혀 없어 보이는 깨끗한 눈. 그제야 불쾌함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천진하고 연약해서 지켜 줘야 할 여인이라고 느꼈는데. 백작의 애첩이라는 사실에 불쾌한 거다. 저 순진한 얼굴로.

백작을 홀릴 정도니 자신의 혼을 빼는 건 일도 아니었던 거다. 어쩐지 자꾸 눈길이 가더라니. 이상한 기분이 계속 들더라니. 사람을 이리 쉽게 홀리다니 천생 요부가 따로 없다.

그도 하녀의 삶이 어떤지는 뻔히 안다. 인격을 존중받지 못하고 재산 취급이란 것도 안다. 백작이 손을 뻗었을 때 하녀에겐 거부권이 없고 그에 따라야 하는 것도.

그러면서도 그런 삶에 찌들어 버린 이들이 얼마나 영악한지도 알아서 짜증이 났다. 환경이 바뀌면 사람들은 쉽게 변했다. 특히 순진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영향이 컸다.

이 하녀도 결국 백작이 주는 쾌락과 재력에 취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다. 이 모든 게 연기란 소리다. 끔찍하게도.

“내가 별채에 가 봐도 되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아까 놀란 하녀를 달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와 다르게 냉담한 목소리가 나왔다. 영문을 몰라 깜빡이고 있는 하녀를 보면서 자꾸 사나운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순진한 척 그만하라고. 속지 않는다고.

짜증이 나는데. 가식인 걸 아는데. 어째서 막상 내뱉지는 못하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겪는 모순된 감정에 더 이성이 날뛰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손님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정한 목소리와 담담한 시선으로 괴롭히지 않는다고 약속해서 믿긴 했다.

특히 손님의 도움으로 로라의 눈을 피해 혼나지 않은 건 좋았다. 화가 난 로라와 단둘이 있을 때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곳을 골라 사정없이 꼬집었고, 피부가 달아오를 정도로 때리기까지 했다. 가끔 기분이 많이 나쁘면 손톱으로 피를 흘릴 정도로 상처를 내기도 했다.

이제는 숙소가 에이든 도련님 옆으로 바뀌어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서 올리비아는 좋았다. 그런데 저번에 화를 참지 못해서 소리 지르고 난 후 로라가 벼르고 있다고 들었다. 오늘 로라에게 잡혔다면 어떤 봉변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런 로라의 손길을 벗어나 좋은 건 좋은 거고.

이 손님도 많이 이상했다. 자신이 나무 뒤로 뛰어들기 전부터 숨어 있었던 것도 그렇다. 차마 손님에게 왜 숨어 있냐고 묻지 못해 그냥 넘어가려 했다. 얼른 별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자신을 불러 세운 손님이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딱딱해지는 손님의 얼굴에 올리비아는 눈치를 봤다.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곧 화를 내니까.

‘내가 또 뭐 잘못했나? 아차!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올리비아는 뒤늦게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로라를 신경 쓰느라 그걸 신경 쓰지 못했다. 올리비아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손님과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손님이 다시 손을 뻗는 것에 놀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말했다.

“안 돼요.”

그는 하녀가 물러서는 행동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다가 단호한 말투에 멈칫했다. 하녀가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말한 점이 조금 놀라웠다. 귀족에게 거부 의사를 밝히는 건방진 하녀는 처벌을 받으니까.

그만큼 백작의 총애를 받는단 의미일까? 백작이 뒤를 봐줄 거라 믿어서 이리 당돌한 걸까? 그는 더더욱 기분이 저조해짐을 느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에이든 도련님에게 허락받으셨나요?”

“에이든 도련님?”

그건 또 누구야? 그는 저절로 인상이 써지면서도 방금 저 ‘안 돼요’가 잡으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까 그가 물었던 ‘내가 별채에 가 봐도 되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임을 알아차렸다.

“네. 아무리 손님이라고 하셔도 별채는 에이든 도련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못 들어와요.”

별채는 백작님이 인정한 에이든 도련님만을 위한 장소였다. 그리고 도련님은 별채에 누가 드나드는 걸 싫어했다. 아무리 첫째 도련님의 손님이라고 해도 올리비아가 함부로 별채 방문을 허락할 수 없었다.

“에이든 도련님의 허락을 받으면 가도 되는 건가?”

“당연하죠.”

하녀가 백작이 아니라 에이든 도련님이란 사람과 연관이 있음을 알아챘다. 지금의 대화로 추측해 보면 백작이 에이든 도련님이란 사람의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것 같은데 콜린스 백작의 친자식인 걸까?

‘그럼, 그 아들은 왜 소개해 주지 않은 거지?’

생각할수록 의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녀는 아까부터 술술 대답하고 있었다. 하녀의 경계심 없는 말간 얼굴에 혹시나 싶어서 질문을 던져 봤다.

“에이든 도련님이 누구지?”

하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느리게 끔뻑이더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백작님의 둘째 아드님이시죠.”

손님이면서 그것도 모르냐는 하녀의 기색을 보며 그는 말문이 막혔다. 둘째 아들이라니. 분명히 콜린스 백작에게 식구를 소개받을 때 그런 소리는 없었다.

사실 이렇게 손님 자격으로 머물긴 하지만, 우연히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는 콜린스 백작을 알지 못했다. 워낙 한미한 가문이라 작위가 백작임에도 그와 안면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가문의 세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더 자세히 물을까 하다가 하녀의 얼굴에 떠오른 의심의 눈길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손님이 맞아요?”

술술 불다가 이제야 몸을 사리는 하녀를 보니 정말 순진한 건지, 저것도 연기인지 모르겠다. 정체불명의 도련님보다 자꾸 하녀에 대해 궁금해지는 것 같았다.

“맞아. 못 믿겠으면 본채에서 일하는 사람 중 누구에게라도 물어봐.”

엉뚱한 말이 나올 것 같아 하녀가 곤란할 만한 질문을 했더니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입을 꼭 다물어 버린다. 아까 쫓아오던 하녀를 피할 때부터 느끼긴 했는데, 다른 하녀들과 친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눈앞에 있는 하녀는 유독 눈에 띄는 외모였고, 그만큼 주인의 편애를 받았겠지. 다른 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다. 그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니 불쾌감이 더욱 짙어졌다.

“저 돌아갈래요.”

“잠깐!”

할 말이 없는지 하녀는 도망을 택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또 하녀를 부르고 말았다. 부르고 아차 했는데, 달려갈 것 같던 하녀가 또 멈추고 돌아섰다.

“무슨 일이세요?”

진짜 멍청한 건지, 순종적인 건지 모르겠다. 멈췄지만 머뭇거리는 하녀의 태도는 그가 불편해 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챘다. 다른 사람들은 대화 한 번 더 하고 싶어서 안달인 존재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하녀는 도망가고 싶어서 안달이다. 순간 정체를 밝히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러면 하녀의 태도도 달라지겠지.

“이름이 뭐야?”

하녀는 알려 주기 싫은 것처럼 머뭇거렸다. 평소의 그였다면 됐다고 그냥 가 보라고 말하겠지만 이번엔 하녀의 이름을 꼭 듣고 싶었다. 하녀가 자꾸 피하니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왜 자꾸 이런 마음이 드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진짜 혼란스러웠다.

“올리비아요.”

조심스럽게 말하고 큰 눈을 깜빡이며 눈치를 보는 행동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탐스럽게 빛나는 뺨을 건드려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손이 얼굴 쪽으로 다가오자 올리비아는 한 발 물러서서 피했다. 아까야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이번엔 아니었다. 얼떨결에 허공에 손을 휘젓게 된 그가 놀라고 있는데, 하녀가 짐짓 화난 사람처럼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아까는 위급 상황이라 제가 뭐라고 못 했는데요. 자꾸 사람에게 함부로 손대는군요.”

“아, 미안. 그러니까 이건…….”

정말 반사적인 거라 그는 변명하다시피 말했다. 정말 만질 의도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제대로 된 변명을 끝내기 전에 하녀가 빽 외쳤다.

“변명하지 말아요! 강간은 나쁜 거예요!”

조금 전 올리비아는 뒤늦게 남자가 강간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엔 얼떨떨하고 로라 때문에 놀라서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화도 못 내고 있었는데 또 손을 대려고 하니 용서할 수 없었다. 다시 당할 수는 없었다. 올리비아는 매섭게 강간범을 쏘아보았다.

‘세상에, 강간이라니? 누구? 내가?’

짐짓 엄한 시선을 보내는 하녀를 보며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워낙 황당한 소리라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 적도 없는 강간 소리를 들은 게 기가 막혔다.

왕국 내에서 그가 품고자 한다면 손에 넣지 못할 여성은 손에 꼽았다. 여자가 아쉬울 일은 없는 위치란 거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강간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범죄다. 하녀가 노려보는 눈빛이 진심이라서 더 어이가 없었다. 정말 강간범이라고 오해한다고?

“이봐, 그러니까……. 올리비아라고 했지?”

하녀는 불손한 눈빛으로 대답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 참, 하녀는 온몸으로 범죄자를 상대하고 있음을 표현해 주고 있었다.

“강간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아무리 제가 멍청해도 그건 알아요! 여성의 몸에 허락도 없이 손대는 사람을 말하는 거죠!”

하녀가 당당하게 외쳤다. 그게 그 의미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건가? 살면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어떻게 지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 왔음에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흥!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올리비아는 넋 놓은 손님에게 외치고 재빨리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다 보니 시간을 너무 끌어 버렸다. 잠깐 갔다 올 거라 에이든 도련님에게 설명도 안 했는데, 그사이 도련님이 부르기라도 했다면 날벼락을 맞을 거다.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서둘렀다.

“아니, 잠깐…….”

멀어지는 하녀를 부르려던 그는 순간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녀가 강간의 의미를 제대로 모른다는 건 그만큼 성에 무지하다는 소리 아닌가.

이렇게까지 순수한 건 백작이든, 백작의 아들이라는 에이든 도련님이란 놈이든 하녀와 상관없단 소리였다. 아까 엉뚱한 오해를 한 거다. 하녀는 처음 느낌 그대로 순수한 여인이란 것.

순수. 그 얼마나 아득한 단어란 말인가. 그가 보아 온 존재들은 다들 제 욕심만 차리는 악귀들 투성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혈육조차 제거하려 드는 비정한 이들만 보아 왔다. 당연하게 세상에 깨끗한 사람은 없을 거라 여겼다. 아까 말갛게 올려다보던 하녀의 연두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탐욕이란 걸 모르는 그런 사람. 너무나 순수해서 고귀해 보이기까지 했던 눈동자. 그는 갑자기 배 속에서부터 어떤 감정이 맹렬하게 치솟는 걸 느꼈다. 갖고 싶다. 그 순진한 시선을 오롯하게 차지하고 싶다.

자신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맑음을 얻고 싶었다.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하녀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여인은 하녀였다. 백작가를 벗어날 수 없으니 조급해할 필요 없었다.

앞으로도 기회는 있으니까.

* * *

“흣!”

뒤에서 파고드는 물건에 올리비아의 상체가 크게 휘청였다. 덩달아 훤히 드러낸 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올리비아는 미끄러지지 않으려 욕조의 턱을 강하게 붙들었다. 집요하게 하체를 접붙여 오는 에이든의 행동에 올리비아의 다리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서서 버티려니 너무 힘들었다.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눈을 사납게 뜬 도련님의 손에 욕실로 끌려와 그의 성기를 받아 내야만 했다.

“도, 도련님…….”

올리비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도련님을 간절하게 불렀지만 그의 행동은 더 격렬해졌다. 다리 사이를 홧홧하게 달구고 있는 성기를 느릿하게 뽑았다가 세차게 박아 넣었다. 물기에 젖은 올리비아의 엉덩이와 에이든의 사타구니가 맞부딪히며 철썩이는 소리가 욕실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뭘 잘했다고 울먹여? 내가 본채 갈 일 있으면 말하고 가라고 했지?”

에이든 도련님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등 뒤에서 쏟아졌다. 그리고 그런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듯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에이든의 성기는 난폭하게 움직였다.

“흐윽…….”

이미 진득하게 괴롭힌 터라 성기가 드나드는 게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쾌감이 너무 강해서 문제였다. 벌을 주는 것 같은 격한 움직임에도 몸에 짜릿함이 번져 올리비아의 눈에 눈물이 글썽 차올랐다.

“그러다가 또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도련님이 허리를 감싼 손을 강하게 당겼다. 푹 하고 파고든 성기에 눈앞이 번쩍이며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학!”

등줄기를 타고 무언가가 흘렀다. 올리비아는 살짝 억울했다. 자신도 무서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본채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든 도련님의 밤시중을 들기 시작한 다음부터 집사님이 꼬박꼬박 챙겨 먹으라고 한 사탕이 떨어졌다. 그걸 먹지 않으면 혼쭐을 낼 거라고 집사님이 워낙 엄하게 말씀하신 탓에 떨어진 사탕을 받으러 갔다 온 것뿐이다.

재빨리 갔다 올 거고, 요즘 도련님이 혼자 독서하는 시간이 길어서 낮 시간에 부르지 않아 괜찮을 줄 알았다.

“히잉…….”

“뭘 잘했다고 칭얼거려?”

“그치만…….”

“그치만?”

도련님의 엄한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울먹임을 삼켰다. 이게 다 그 강간범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잡힌 탓에 시간을 너무 끌어서 들킨 거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고 도련님 식사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별채에 돌아오자마자 부랴부랴 도련님의 식사를 챙기려 했지만 그러지 못해 이렇게 화나신 것이 틀림없다.

“자, 잘못했어요. 흐읏……. 용서해 주세요.”

철썩 소리를 내며 또다시 삽입된 성기에 아득함이 찾아왔다. 안쪽 깊은 곳에서 퍼지는 쾌락의 열기에 올리비아의 눈이 흐려졌다. 도련님과 이런 행위가 익숙해져서 그럴까?

처음엔 아프기만 했던 것이 요즘엔 격렬하게 움직일수록 짜릿했다. 가끔 더 하고 싶어서 안달 날 정도로 좋았다. 지금도 혼나는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엉덩이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빠져나가는 성기가 아쉽다는 듯 엉덩이가 흔들렸다.

“윽, 잘못했지?”

“네, 네! 잘못했어요.”

에이든 도련님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진 것 같아 올리비아가 재빠르게 답했다. 그제야 끊임없이 다리 사이를 파고들던 성기가 쑥 하고 빠져나갔다.

“하으…….”

이미 한 차례 사정했던 터라 결합 부위에서 흥건한 액체가 후드득 흘러나왔다. 다리 사이가 홧홧하면서도 허전해 올리비아는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자세 그대로 몸을 떨었다. 허리를 잡고 있던 에이든 도련님의 손이 몸을 돌렸다. 확실히 한결 누그러진 표정의 에이든 도련님이 보였다.

아까 다짜고짜 화난 표정으로 끌고 와 고개도 돌리지 못하게 하며 뒤에서 쑤시기만 해서 불안했다. 얼굴을 보지 못하고 화난 목소리만 듣는 상황이 무서웠다. 벌주듯 앉지도 못 하게 자세를 고정시켜서 더 무서웠었다.

“히잉, 도련님…….”

에이든은 제게 달려드는 올리비아를 마주 안았다. 눈물을 흘려 발갛게 달아오른 눈과 코가 귀여워 욱하던 감정이 사르르 녹을 수밖에 없었다. 서러운 표정으로 목을 끌어안으며 나신으로 치대는 것도 사랑스러웠다. 다 괜찮다고 둥개둥개 해 주고 싶은 어여쁜 표정이었다.

그래도 에이든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아까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본채에 갔다 온 걸 안 순간 머리로 열이 확 뻗쳤다. 올리비아의 안일함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본채에서 그런 험한 꼴을 당할 뻔했으면서 거기가 어디라고 보고도 없이 제 발로 기어간단 말인가. 자신이 신경을 못 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애가 순진하다 못해 맹해서 탈이다.

“잘못했지?”

“네. 진짜 잘못했어요. 훌쩍, 다음번엔 꼭 말하고 갈게요.”

아, 진짜. 더 화내지도 못하게 환장하게 귀엽네. 올리비아의 발갛게 달아오른 코끝이 체리 같았다.

사실 올리비아의 입장에선 에이든은 이미 화를 낼 만큼 모두 낸 상태였지만 그는 진짜 못 당하겠단 생각을 하며 더 화내는 걸 포기했다.

에이든은 훌쩍이느라 오물거리는 올리비아의 입술을 찾았다. 익숙하게 내미는 혀를 빨아 당겼다가 도로 밀어 넣으며 올리비아의 입안을 탐닉했다. 입안이 열로 뜨끈뜨끈 달아올라 더 자극적이었다. 중간에 그만둔 터라 하체가 얼른 이 욕망을 풀어 달라 성을 내고 있었다. 우선 이것부터 해결하고 더 깊은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리 와 앉아. 다리 벌리고.”

에이든은 욕조에 주저앉으며 올리비아를 제 다리 위에 올렸다.

“넣어야지.”

올리비아가 정말 걸터앉기만 하려고 해서 에이든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올리비아가 에이든의 목을 감쌌던 팔을 풀어 제 손으로 흉흉하게 서 있는 성기를 끌어다가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으응…….”

무리 없이 한 번에 쏙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에이든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득함에 떨었다. 올리비아 또한 제 안을 차지한 물건에 몸을 잘게 떨었다. 제게 기대 오는 작은 몸짓이 얼마나 황홀한지.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입술을 길게 빨았다가 놓으며 양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그 신호를 알아듣고 올리비아도 몸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에이든은 참지 않고 허리 짓을 했다.

“흣, 도련님!”

아까 울먹이며 용서를 빌던 것과 다르게 호응해 오는 올리비아의 몸짓에 에이든은 더욱 격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올리비아의 엉덩이가 적극적으로 흔들리며 성기를 삼켰다 뱉길 반복했다.

“아응, 아응, 좋아…….”

뒤로 할 땐 그렇게 서러움을 토해 내더니, 지금은 더 해 달라고 안달하고 있었다. 내벽이 능숙하게 성기를 물며 사정을 재촉했다. 에이든은 아까부터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태라 눈앞이 쾌락의 빛깔로 번쩍였다. 당장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아직이다.

“하악, 도련님 좋아요. 아웃, 거기 좀만 더…….”

쾌감에 잠식되어 내뱉는 말인데, 올리비아의 입에서 나오는 ‘좋아’ 소리를 들으면 에이든은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올리비아의 촉촉한 뺨에 입술을 붙이며 허리를 쳐올렸다. 더 버티다간 먼저 미쳐 버릴 것 같은 순간 올리비아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호흡이 터져 나왔다.

“흑, 흣, 흑, 도련님 싸 주세요.”

절정에 달할 것 같으면 말하기로 한 신호였다. 드디어 올리비아의 입에서 기다리던 말이 터져 나왔고 에이든은 강하게 허리를 쳐올려 그녀의 안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흣!”

꽉 끌어안은 올리비아의 몸이 요동치며 절정을 알려 왔다. 하찮음을 졸업한 의지의 에이든은 오늘도 올리비아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 또한 흡족하게 사정의 여운을 만끽했다.

잠시간 흥분이 진정될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저녁도 먹지 않고 초저녁부터 진탕 몸을 섞은 탓에 올리비아는 기력이 빠져 보였다.

에이든은 대충 씻고 옷도 입지 않은 채 올리비아를 침실로 이끌었다. 어차피 또 할 거니까 가운도 필요 없었다. 터덜터덜 힘없이 따라온 올리비아가 침대를 보더니 기운 없는 표정을 지었다.

“또 해요?”

올리비아의 질문에 에이든의 뺨이 불만으로 씰룩였다. 물론 자신이 과하게 하는 편이지만 지금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아니, 또 하긴 할 거지만, 지금은 올리비아가 좋아하는 걸 주려고 했던 건데. 에이든도 손톱만 한 양심은 있었다. 저녁도 굶고 기운 없어 하는 게 빤해서 아까 준비해 둔 케이크를 주려고 했었는데, 올리비아가 노골적으로 저런 질린 표정을 지으니 화가 났다.

“이거 주려고 한 거거든?”

침대 옆 협탁 위에 있던 접시를 보여 주자 올리비아의 얼굴에 생기가 돌며 눈이 반짝였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

“케이크네요? 저 주려고요?”

그 환한 얼굴을 보며 에이든은 찝찝함을 느꼈다. 분명히 저 좋아하는 표정을 보려고 준비한 거긴 했다. 하지만 저렇게 좋아하니 이상하게 뱃속이 부글거렸다.

특히, 아까 ‘또 해요?’라고 물어볼 때의 질린 표정이 떠올라서 더욱더. 그래서 에이든은 유치한 걸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 케이크가 좋아? 내가 좋아?”

처음엔 에이든도 아무 생각 없이 한 반사적인 질문이었다. 그저 올리비아의 해맑은 얼굴에 울컥함이 생겨 던진, 아주 큰 의미를 담지는 않은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질문을 듣고 바로 올리비아의 얼굴에 떠오른 무구한 표정을 보는 순간, 무슨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한 눈동자로 느리게 벌어지는 입술을 보는 순간! 에이든은 또 제 무덤을 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듣고 싶지 않았고, 들어선 안 된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이럴 때만 올리비아의 행동은 잽쌌다.

“당연히 케이크죠!”

에이, 뭘 그런 걸 물어요? 세상에 케이크보다 좋은 게 어디 있다고? 하는 반짝이고 해맑은 올리비아의 표정을 보는 순간 에이든의 마음이 처절하게 부서졌다.

그를 자극하기 위한 계산이 조금도 없는 선택이라 더 뼈아팠다. 심장에 큰 타격을 받았고 그만큼 옹졸함으로 불타올랐다.

에이든은 빈말로라도 제 성격이 좋지 못함을 알았다. 굳이 좋다고 포장할 생각도 없었다. 태도를 고칠 생각도 없었고 평생 제멋대로 살 거라 마음먹었지만, 그래도 올리비아에게만은 작은 친절을 베풀 거라 다짐했었는데.

‘착한 도련님인 척해 주려고 했는데!’

저 미안함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올리비아의 밝은 얼굴을 보자 에이든은 치졸함에 이성이 흐려졌다.

“그거 저 주실 거 맞지요?”

에이든이 올리비아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자주 케이크를 선물했던 터라 그녀는 케이크가 제 손에 떨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히 제 것이라고 여기고 들떠하는 모습을 보자 에이든은 그렇게 심사가 뒤틀릴 수 없었다.

‘감히 내 심장엔 비수를 박아 놓고 저렇게 들떠 있다니! 빈말로라도 내가 좋다고 해야지! 당연히 케이크를 줄 사람에게 아부를 떨어야지!’

이성적으론 올리비아가 그런 약삭빠른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둔하게 구는 그녀의 행동에 에이든은 분노에 휩싸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좋아하냐는 질문에 저따위로 대답하다니! 에이든은 이 상황을 용서할 수 없었다.

“도련니임, 케이크 언제 먹어요?”

얼마나 안달이 났는지 올리비아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재촉하는 음성을 냈다. 그게 에이든을 더 열받게 했다.

성관계 전에도 멀뚱멀뚱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케이크를 저렇게 사랑스럽고 황홀하게 바라보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케이크 따위를 라이벌로 여기고 질투하게 된 상황에 에이든은 더 이성을 붙잡을 수 없었다.

“안 줄 건데?”

“네?”

에이든의 불퉁한 말에 올리비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럴 리 없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올리비아의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보며 에이든은 보란 듯이 손으로 케이크를 집어 제 입에 마구 쑤셔 넣었다.

“나 혼자 먹을 건데?”

평소 이런 우악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올리비아가 케이크 모양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스럽게 야금야금 먹는지 알아서 일부러 더 마구 먹었다.

“도, 도련님?”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부름을 무시하고 계속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사실 그는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달짝지근함과 느끼함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건 올리비아에게 주는 벌이었다. 먹기 싫다고 멈출 수 없었다.

손으로 먹다 보니 뭉개지고 입 근처를 더럽히고, 부서진 조각이 후드득 가슴팍에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에이든은 무식하게 케이크를 먹었다. 흘리며 먹는 터라 버리는 게 반이었다.

배고 허벅지고 생크림이 떨어지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에이든은 게걸스럽게 접시를 비우는 데 열중했다. 작은 조각 케이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더는 케이크 조각이 남아 있지 않은 접시와 입안 가득 케이크를 물고 오물거리는 에이든을 보며 올리비아의 입술이 앙다물리고 눈에 글썽이며 눈물이 차올랐다.

도련님 미워요! 하고 소리칠 것 같은 배신감 가득한 눈빛에도 에이든은 더욱 열심히 보란 듯이 오물거렸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아둔함까지 좋아했지만 그만큼 가끔 그녀의 무지함에 속이 터졌다. 아무것도 모른 척 맹하게 행동하면 얼마나 얄미운지.

‘그러게 누가 나보다 케이크를 더 좋다고 하래?’

올리비아는 꿍해서 입술을 비죽거리면서도 에이든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억울한 눈빛으로 보기만 하는 게 참 그녀다웠다.

지금이라도 ‘에이든 도련님이 제일 좋아요’ 하고 속삭이면 봐줄 텐데. 되레 아깝다는 듯 생크림이 잔뜩 묻은 그의 손을 쳐다보는 올리비아의 모습에 에이든은 더욱 분통이 터졌고, 보란 듯이 제 손가락을 핥았다.

“아! 맛있다! 역시 케이크는 최고네!”

일부러 소리까지 내며 손가락을 쪽쪽 빨자 올리비아의 표정은 더욱 서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변했다.

올리비아를 부둥부둥하는 평소의 에이든이라면 그 안쓰러운 모습에 안달하겠지만 지금의 그는 옹졸함 그 자체라 끄떡하지 않았다.

‘내가 졸렬함의 끝을 달리는 졸렬 도련님이 되어 주겠다! 도리어 더 심술부릴 거다! 케이크 한 판 가져다 올리비아 앞에서 혼자 다 먹어야지!’

그런 치졸함의 끝을 달리는 생각만 했다.

“혼자 다 먹어서 더 맛있네!”

에이든 도련님이 보란 듯이 외쳐 올리비아는 서러웠다. 분명히 접시를 내보일 때만 해도 자신에게 주려는 줄 알았는데. 도련님이 생전 처음 보는 무식한 모습으로 케이크를 먹어 버려서 속상했다.

야금야금 한 입씩 크림까지 싹싹 긁어 먹는 것도 아까운데, 그걸 막 흘려 가면서 한 입도 나눠 주지 않고 먹다니!

게다가 에이든 도련님이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달려들어 자신은 아직 저녁도 못 먹지 않았는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은데. 올리비아는 서글퍼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혼자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에이든 도련님의 입 주위가 번들번들한 크림 범벅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얄미워서 에이든 도련님을 사납게 노려보다가 올리비아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

도련님이 워낙 게걸스럽게 먹은 터라 케이크의 잔해가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턱에서부터 가슴을 지나 배, 그 더 아래 허벅지까지.

오늘따라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도련님이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 가며 마구잡이로 드시긴 했지만 저것들을 다 훑어 드시진 않을 거다. 대부분 귀족들은 떨어진 음식을 욕심내지 않았으니까.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이 씻으러 가기 전에 그의 팔을 잡았다.

“왜? 다시 주방에서 가져다가 나 혼자 다 먹을…….”

올리비아는 도련님의 툴툴거림을 끝까지 듣지 않고 턱에 묻은 커다란 생크림 덩어리를 핥았다. 어차피 닦아 버릴 거니까 이 정돈 용서해 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범하게 입을 가져다 댔다.

세상에……. 순식간에 혀끝에서 퍼지는 달콤함에 올리비아는 부르르 떨었다. 다 뭉개진 잔해일 뿐이라고 해도 역시 케이크는 최고다. 케이크 맛에 들떠 있다가 아차 싶어 흘긋 에이든 도련님의 반응을 살피니 이상하게 도련님은 굳어 있었다.

누가 케이크 먹으래? 라고 호통치지 않는 걸 보니 이건 봐줄 건가 보다. 그렇게 판단이 선 올리비아는 신이 났다. 도련님이 말리기 전에 입술을 재빨리 다시 붙였다. 도련님의 턱에 남은 케이크를 남김없이 핥았다.

달콤하기 그지없다. 맛있어서 계속 혀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눈을 뜨고 계신데 이상하게 잠든 사람처럼 움직임이 없는 도련님 덕분에 더 호기롭게 남은 생크림을 넘볼 수 있었다.

에이든은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호흡을 멈췄다. 지금 호흡을 흐트러뜨리기라도 한다면 바로 올리비아가 행동을 멈출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 올리비아의 입술이 턱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꿈인 줄 알았다. 잦은 섹스를 하며 짙은 키스를 수없이 했지만 올리비아가 먼저 손을 내민 적은 없었다. 그래서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상황도 올리비아가 그저 케이크의 잔해를 먹기 위해 하는 행동이란 걸 알지만. 혀가 유혹적으로 피부를 핥고 지나가는 감각은 전율이었다.

특히, 턱을 샅샅이 핥은 올리비아의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가 가슴을 간질이고 더 아래 배꼽을 훑을 땐 자극적이라 성기를 만지지 않았어도 사정할 뻔했다.

에이든은 마비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굳은 상태로 올리비아가 주는 자극에 헐떡였다. 더 이상 훑는 혀가 느껴지지 않았을 때야, 에이든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올리비아를 볼 수 있었다.

“너 무슨…….”

에이든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배를 핥느라 허리를 굽힌 그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런 시선을 보내는지 알 수 없어서 에이든은 유일하게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목울대를 움직여 침을 꿀꺽 삼켰다.

‘헉! 어딜 보는 거야?’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망설이듯 어딘가를 보는 걸 알아챈 순간, 에이든은 속으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아, 아닐 거다. 올리비아가 그럴 리 있겠는가…….’

에이든은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을 부정하면서도 올리비아라면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에 심장이 펄떡였다. 기대감과 그것만은 안 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의 이 엄청난 고뇌는 제 성기 위에 떨어져 있는 한 덩이의 생크림에서 비롯되었다.

에이든은 성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는 올리비아를 제 취향대로 길들였다. 절정에 달할 땐 천박한 말을 하게 만들고 자신이 원할 땐 언제든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삼키도록 교육시켰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서도 한 번도 올리비아에게 적극적으로 애무를 하도록 시킨 적이 없었다. 그도 남자인데, 어찌 올리비아가 봉사해 주는 걸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했다. 올리비아가 자라길 바라는 동안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도 했다. 하지만 막상 몸을 섞기 시작한 이후로는 그런 걸 요구할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그냥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 에이든은 당황했다. 올리비아가 해 줬으면. 아니 하면 큰일 날 것 같으니까 이번만은 피했으면. 설명하기 힘든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올리비아도 성기에 입을 대는 건 망설여지는지 가슴과 배를 핥을 때와 다르게 시간을 끌었다. 에이든은 애간장이 타는 느낌이었다. 스스로도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초조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올리비아의 결심이 서고 혀가 그곳에 닿았을 때, 에이든은 삽입 2초보다 더 심한 핥기 1초에 사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다. 보라, 이것이 천국이다. 라고. 오늘의 에이든은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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