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돌아온 도련님. (4/19)
  • 3. 돌아온 도련님.

    올리비아는 빨랫감이 그 남자라도 되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밟았다. 강간범은 때려 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가랑이를 노리고 걷어차라고 그랬다. 빨랫감이 그곳인 양 더 힘차게 짓밟았다.

    그런데 어째 때가 더 잘 지는 것 같았다. 중간에 구정물을 버리고, 다시 물을 뜬 후 남자를 생각하며 힘차게 밟았다. 밟고, 헹구고, 밟고, 헹구고. 물기를 탈탈 털어 빨랫줄에 널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빨래를 널고 기지개를 켰다.

    “으그그그!”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자마자 빨래를 시작했는데, 끝마치고 나니 정오였다. 오전 내내 빨래만 했더니 어깨가 아프고 허리가 뻐근했다.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피로함이다. 그래도 널린 빨랫감을 보니 속이 후련했다.

    꼬르륵.

    그리고 그만큼 배도 고팠다. 제 배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올리비아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식당으로 향했다. 고용인 숙소에 딸린 식당에 도착하니 저마다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올리비아의 등장에 하녀들은 흘깃 그녀를 확인하고 다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식사했다. 잠시 앉아 식사할까 고민하던 올리비아는 눈을 흘기고 있는 애니를 발견하고 그냥 음식을 챙겨 가기로 했다.

    올리비아가 음식을 떠 오는 즉시 다가와 바닥에 내던질 기세였다. 애니는 로라와 함께 유독 올리비아를 괴롭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저렇게 심술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땐 높은 확률로 골탕을 먹이려 들었다. 식사하기 힘들 게 뻔했다.

    거기다가 별채의 청소는 이제 시작이 아니던가. 벌써 하루가 지나 이제 6일밖에 남지 않았다. 남아 있는 청소는 산더미고. 차라리 음식을 별채로 싸 가서 혼자 먹는 게 나았다.

    배식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아주 바쁜 시간은 지났는지 조금 한가했다. 한쪽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는 주방장님을 불렀다.

    “주방장님!”

    “오! 올리비아! 점심 먹으러 왔니?”

    올리비아를 발견한 주방장님이 환하게 맞아 주었다. 올리비아는 기뻐 생글생글 웃었다. 주방장님은 이 저택에서 올리비아에게 친절하게 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녀도 편하게 말을 걸고는 했다. 아무리 남의 구박에 무던한 성격이라도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 더 좋은 건 당연했다.

    “주방장님 저 접시 하나랑 컵 하나만 가져갔다가 저녁에 돌려드려도 돼요?”

    귀족들이 사용하는 고급 제품도 아니고, 여기서 접시 하나쯤은 없어져도 모를 거였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 때마침 접시 개수를 확인하고 없어진 걸 찾으려 난리 칠지도 모르지 않는가.

    올리비아는 남들과 비교하면 더 자주 혼나는 편이라 사소한 것 하나까지 윗사람에게 전부 물었다. 그런 행동에 답답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려니 넘어가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주방장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왜? 밖에서 먹게? 바쁜가 보구나?”

    올리비아가 종종 일을 제시간에 못 끝낼 것 같으면 이렇게 음식을 싸 갔던 것을 아는 주방장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네. 별채 청소 맡았거든요. 혼자 하려니 일이 많아서요.”

    올리비아는 자신에게 친절한 주방장님을 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주절주절 평소에도 보고를 많이 했다. 올리비아의 말에 주방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별채 청소를 혼자 해?”

    “네. 다들 데이빗 도련님 연회 준비하느라 바쁘잖아요.”

    헤실헤실 웃는 올리비아를 보며 주방장은 욕설을 삼켰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이 다 그려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넓은 곳을 이 어린 아이가 혼자 청소하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답답해도 무슨 말도 못하고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릴 때도 불안하더니 이제 곧 성인인데도 불안하다.

    그도 고용 숙소 식당이지만 한 집단의 우두머리였다. 당연히 백작가의 내부 사정에 대해 적지 않게 주워듣는 게 많았다. 둘째 도련님의 귀환 소식과 백작가에서 암묵적으로 일어나는 후계자 싸움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질 것 같은 싸움엔 끼고 싶지 않은 게 사람들 심리니까 생각 있는 사람들은 별채 청소는 꺼렸겠지. 안쓰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올리비아만 곤란해질까 걱정이다. 약삭빠르게 굴면 좋으련만 그런 여우 같은 구석이 없는 아이였다.

    워낙 꼬마일 때부터 보아 온 터라 주방장의 눈엔 올리비아가 마냥 어리게만 보였다. 그녀의 맹한 성격도 한몫했고.

    “기다려 봐라.”

    주방장은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작은 피크닉 바구니를 꺼내 준비해 놓고, 토마토, 양상추, 치즈에 살짝 구운 고기까지 꺼내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올리비아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주방장님이 기다리라고 하고 이렇게 샌드위치를 싸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제 것임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화급히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소리 죽여 말했다.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빵만 챙겨 갈게요.”

    하녀는 백작가의 자산이었다. 농노와 마찬가지로 허드렛일을 전담했고 공들여 먹일 필요가 없어 백작가에서 주는 음식은 초라했다. 잘 나와야 멀건 수프와 식은 빵과 치즈, 우유가 끝이었다.

    햄도 1년에 몇 번 먹을까 말까 한 특별식인데, 고기는 매우매우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런 걸 챙겨 주시다니! 다른 하녀들이 보면 또 샘을 내리라. 그리고 또 구박하겠지. 아니면 하녀장님이나 집사님에게 고할지도 몰랐다.

    올리비아가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굴렀다.

    “괜찮다. 혼자 청소하려면 힘써야 하는데 잘 먹어야지.”

    “그래도…….”

    “내가 먹을 거 대신 주는 거니 괜찮다.”

    올리비아가 계속 불안해하자 주방장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제야 올리비아가 한시름 놓았다. 백작가의 식품을 몰래 빼 주는 것이랑 주방장님이 먹을 걸 나눠 주는 것은 달랐다. 하녀들이 시샘해 투덜댈지언정 하녀장님에게 구박받을 이유는 없었다.

    맛있는 것을 먹을 생각에 입가에 침이 고여 꼴깍하다가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올리비아가 죄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주방장님이 드실 게 없잖아요…….”

    ‘이런 기특하고 착한 애를 도대체 다른 사람은 왜 미워할까?’

    주방장은 올리비아가 미움받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 번은 궁금해서 물어봤다. 도대체 저 착한 아이를 왜 미워하냐고.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그냥 올리비아를 보면 꺼림칙함을 느낀다나? 자신은 그런 감정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으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그저 만만해서 그런 거겠지. 사람이 너무 순수하고 여려도 문제인 거다.

    “나야 저녁에 나올 음식 먹으면 되지. 자, 여기 저녁에 먹을 것까지 넉넉하게 쌌다. 왔다 갔다 할 시간도 부족하잖아.”

    거부해도 끝까지 챙겨 주실 주방장님의 성격을 알아 올리비아가 머뭇거리며 바구니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올리비아가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바쁜 것을 알고 저녁까지 챙겨 준 점도 고마웠다. 실제로도 정신없이 청소해야 할 예정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얼른 가 봐.”

    계속 인사하고 있는 올리비아를 보다 못해 주방장이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그 담담함에 올리비아는 마지막 인사를 한 후 바구니를 들고 별채로 향했다.

    점심 먹을 생각으로 신이 난 올리비아가 흥얼거리며 걸었다. 빨리 주방장님 특제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고 싶단 마음뿐이었다. 입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깡충깡충 아무 생각 없이 뛰어가던 중 별채 앞에 다다르자 그녀는 멈칫했다.

    그제야 어제의 남자가 또 오지 않을까가 퍼뜩 떠올랐다. 무섭고, 무례한 강간범.

    ‘어? 그런데 유령도 강간을 하나? 그럼 유령이 아니라 사람인가?’

    혼란스러워서 올리비아의 작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약속 지켰는데. 설마, 또 오진 않겠지?’

    잠시 끙끙 고민하던 올리비아는 남자의 생각을 털어 버렸다. 머리 아프게 걱정할 시간 따위 없었다. 그녀는 강간범인지 유령인지 모르는 남자보다 하녀장님이 더 무서웠다.

    잡아먹히는 고통은 모르지만 하녀장님의 으르렁거림은 잘 알지 않은가. 청소를 제대로 해 놓지 않으면 잔소리로 끝나지 않고 체벌이 있을 거였다. 매서운 손찌검에 눈물, 콧물이 쏙 빠지게 혼나고, 집사님에게까지 이야기가 들어가 채찍을 맞을지도 몰랐다.

    ‘얼른 먹고 열심히 청소하면 다 할 수 있을 거야!’

    몸을 살짝 부르르 떨어 잡념을 지운 올리비아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피크닉 바구니를 열었다. 맛깔스럽게 담긴 샌드위치와 후식으로 놓인 과일, 유리병에 담긴 우유까지 발견하니 그녀의 얼굴이 헤벌쭉해졌다.

    주방장님이 최고다. 넉넉히도 챙겨 주셨다. 올리비아는 들썩이는 어깨를 숨기지 않으며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누가 뺏어 먹을세라 입을 크게 벌려 냉큼 베어 물었다.

    바삭한 바게트의 감촉 다음으로 아삭하고 시원한 양상추가 느껴졌다. 그리고 중앙에 숨겨져 있던 고기가 황홀한 자태를 드러냈다. 양념해서 구웠는지 살짝 달짝지근하며 감칠맛 나는 고기의 영광에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입안으로 밀어 넣는 양이 많아졌다. 먹다가 목이 막히면 우유도 마셔 가면서 열심히 먹었다. 세상에 이런 맛있는 음식은 처음인 것 같았다. 샌드위치를 벌써 절반쯤 먹고 다시 크게 한입 베어 물었을 때였다.

    “그렇게 맛있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가 음식을 잘못 삼켰다. 말을 건 상대는 어젯밤의 그 괴한이었다. 목이 턱 막혔다.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목에 걸린 음식 때문에 괴로워 격하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콜록, 콜록!”

    “괜찮아?”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기침해 대는 올리비아의 등 뒤로 다정한 손길이 닿았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남자는 작게 토닥토닥하며 우유를 들어 건넸다. 올리비아는 그걸 받아 벌컥벌컥 마셔서 목에 걸린 샌드위치를 넘겼다.

    “푸하!”

    한시름 놓게 된 올리비아는 자신을 이렇게 괴롭게 만든 남자가 원망스러워 째려보았다.

    “갑자기 말을 걸면 어떻게 해요?”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면 당연히 놀라죠.”

    감정이 격해진 올리비아는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퉁명스럽게 쏘았다. 남자는 원래 그녀와 친근했던 사이처럼 가볍게 받아넘겼다.

    “너무 맛있게 먹어서 궁금했어. 그렇게 맛있어?”

    “당연히 맛있지요. 주방장님 특제 샌드위치인데요.”

    뿌듯하게 답하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렇게 다정하게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맞다! 이 사람은 무서운 유령이거나, 나쁜 사람일 텐데!’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가 경계의 기색을 띠었다.

    ‘그런데 유령이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나?’

    하지만 유령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예쁘게 생겼다. 낮에 보니 더 어여쁜 미모에 헷갈렸다. 손에 쥔 샌드위치를 꼭 움켜쥐며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요. 유, 유령 아니죠? 사람이죠? 유령이면 이렇게 낮에 못 돌아다니잖아요.”

    희망을 담아 물었더니 남자가 물끄러미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저 주홍빛 눈동자는 강렬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그런 걸까? 콩닥콩닥 그녀의 심장이 초조하게 뛰었다.

    ‘헉! 유령인 걸 들켜서 잡아먹으려 고민하는 걸까?’

    번뜩 떠오른 생각에 올리비아가 울상을 지으며 도망갈 준비를 하자 남자가 그런 생각을 전부 알아챈 듯 실실 웃음을 흘렸다.

    “나는 사람이야.”

    올리비아는 사람이란 소리에 긴장이 탁 풀렸다.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내리며 다시 확인했다.

    “정말 사람이죠?”

    “맞아. 사람이야.”

    남자의 친절한 말투에 올리비아의 두려움이 싹 사라졌다. 유령이 아니라니까 화가 난다. 그녀는 빽 외쳤다.

    “아니, 사람이면서 왜 잡아먹는다고 거짓말을 해요?”

    아닌 게 아니라 남자가 남긴 말 때문에 어젯밤에 악몽을 꿨다. 검은 그림자가 자는 그녀 위에 올라타 손가락부터 오도독오도독 뜯어 먹는 끔찍한 꿈이었다.

    ‘덜덜 떨면서 깼는데!’

    왠지 억울해진 올리비아가 눈을 치켜세웠음에도 남자에겐 당혹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느슨한 웃음을 짓는데 그게 오싹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올리비아의 머리끝을 잡아챘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은빛 실타래가 엉켜들었다. 그렇게 신체 일부분이 제 손에 묶이자 남자는 눈을 빛냈다.

    어제 만났을 때부터 이렇게 꽁꽁 묶어 두고 싶었다. 드디어 만났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너는 알까? 내가 너를 얼마나 열망하는지, 얼마나 잡아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지.’

    아직 순진한 소녀를 지켜 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제 욕구에 마음이 타들어 갔다. 보이지 않을 땐 상상으로 튀어나와 괴롭히더니, 눈앞에 있으니 만지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껴안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동안 소녀는 자라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로. 그래서 지독한 갈증이 났다. 그 짙은 욕망을 담아 속삭였다.

    “거짓말 아니야. 나는 널 잡아먹을 수 있는걸.”

    올리비아는 남자의 스산한 기운에 따스한 햇볕을 받고 있는데도 오소소 솜털이 곤두섰다.

    * * *

    에이든은 개새끼였다.

    워낙 싹수없고 안하무인인 성격에 남들이 뒤에서 그리 부르기도 했지만, 7년 전 천진한 열한 살짜리 꼬마에게 발정한 순간 스스로 인정했다. 자신은 고칠 수 없는 변태에 구제 불능이고, 개화할 수 없는 개새끼라는 것을. 그리고 더한 짐승 새끼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솔직히 지금은 시간이 흘러 이렇게 담담히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 그 감정을 자각했을 때는 미친 줄 알았다.

    열여덟 살, 아무리 성욕을 주체 못할 나이라고 해도 몽정 상대가 고작 열한 살 소녀였다. 여성이라 부르기 민망한 작고 빼빼 마른 몸이었고, 어머니보다 케이크가 좋다고 외치는 순박하다 못해 모자란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상대로 욕정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몹쓸 상변태가 따로 없었다.

    이게 얼마나 변태적이냐 함은 미성년자와의 관계는 국법으로도 금지했다. 정부를 여럿 두고 성노예가 있는 문란한 사회임에도 어린아이를 탐하는 것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색을 밝히는 귀족들도 그것만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여겼다. 그런 상황에 소녀에게 몽정했다.

    사실 어린 그 모습 그대로 완벽한 형상을 가지고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꿈속에선 좀 더 성숙한 모습이었고 막연한 상상으로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상대가 올리비아란 걸 자각한 순간부터 잘못이었다.

    에이든은 자괴감에 수치스러웠다. 밤마다 꿈에서 깨어 젖은 속옷을 손에 쥐고 자학하고 고민했다. 스스로에게 이상한 성벽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정체성까지 의심했다.

    요염함이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상대에게 발정했으니까. 숫자도 제대로 못 세는 아이를 보고 그런 거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에게 소아성애 기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어린아이들을 보면 짜증만 치솟았다. 그들은 시끄럽고 무례하며 저속했다. 한 공간에 있는 것마저 불쾌할 정도였다. 그럴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변태적인 성향을.

    그의 갈증은 소녀만을 향했다. 오직 소녀를 원하고, 그녀에게 욕정 했다. 소녀가 해맑게 웃으면 웃을수록 물고, 빨고, 핥으며 제 욕심껏 하고 싶었다. 상상 속에선 매일 온갖 음란한 생각뿐이었다. 어서 소녀를 오직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마음이 허할 때 들어온 소녀의 존재는 그에겐 너무 컸다.

    그녀를 바라는 마음이 커질수록 죄책감이 커졌다. 소녀는 온전한 믿음의 시선으로 에이든을 믿고 따랐다. 그 올곧고 순진한 눈동자에 시간이 흐를수록 소녀에 대한 에이든의 갈망과 집착만 강해졌다. 그 마음이 얼마나 큰지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서 떠났었다. 발정 난 개새끼지만 최소한의 도의는 지키기 위해서. 잘못된 욕망으로 소중한 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

    7년은 지독히 긴 인내의 시간이었다. 이제나저제나 소녀가 자라길 기다렸다. 하루하루 달력에 표시하며 날짜만 꼽았다. 그리고 곧 정식으로 소녀를 손에 넣어도 되는 시기가 되어 한달음에 달려왔다. 다른 사람의 손을 타게 둘 수 없어 서둘렀다.

    너무 몰아친 탓에 예상보다 일찍 영지에 도착했다. 가문에서 에이든을 환영하며 맞아 주지는 않겠지만, 소녀의 눈에 조금이라도 멋지게 재회하고 싶어 약속의 시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일부러 여관에 자리를 잡고 귀환을 미뤘다. 7년을 기다렸는데 일주일을 더 기다리지 못할까.

    전날의 재회는 에이든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시간을 보내기 무료했다. 남는 시간에 차디찬 추억이 담긴 장소가 보고 싶어 방문했을 뿐이다.

    별채의 처참한 모습을 발견하자 쌓아 둔 해묵은 감정이 커졌다. 아무리 자신과 어머니가 싫다고 하여도 이렇게까지 방치되어 있을 줄 몰랐다. 백작가에서 유일하게 내어 준 자리이면서 그마저도 이리 처참하게 버려 버리다니. 제 아비란 작자가 얼마나 파렴치한인지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다.

    어둠 속에서 에이든은 미소 지었다. 짐승 새끼도 하지 않을 추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돼서 정말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감정을 불태우고 있을 때 운명처럼 소녀가 나타났다. 7년을 그리워했는데 먼지를 뒤집어쓰고 우스꽝스러운 꼴로 얼굴을 가렸다 해도 몰라보는 게 말이 안 됐다. 심장이 먼저 올리비아의 존재를 알아챘다. 먼지 속에서도 그녀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몰래, 잠깐 방문했을 때 이런 폐허에서 바라던 이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올리비아와 그의 관계는 운명이란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는 에이든의 상상보다 더 달콤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비록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 잠시 짜증은 났지만. 그녀가 워낙 어릴 때 헤어진 터라 그럴 수 있다 스스로 다독였다. 올리비아의 맹함은 알고 있었다. 과거의 짧은 시간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평생 그녀가 자신만 보면 되었다.

    온전한 내 것, 나의 올리비아.

    너무나 원했기에. 그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절대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었다. 전날 뺨에 입을 맞춘 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참으려 했다. 만나지 않으려 했다. 만나면 손대고 싶을까 봐.

    하지만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잠깐 몰래 보고 가려고 방문했다. 보고 나니 욕심은 더 커져서 말을 걸고 싶었다. 말을 걸고 나니 이 욕망을 알아주길 바랐다.

    올리비아 앞에만 서면 자제력이 사라졌다. 현자의 숲에서 최고라 인정받았던 이성적이고 똑똑한 남자도, 안하무인 성격으로 언젠간 칼 맞아 뒈질 거라던 싸가지도 전부 사라진다. 오직 그녀만 원하고 발정하는 개새끼만 남았다.

    수십 번 참아야 한다고 다짐한 결심과 다르게 에이든은 자신의 음험한 속내를 드러냈다.

    “거짓말 아니야. 나는 널 잡아먹을 수 있는걸.”

    조금만 알아달라고. 이렇게 애타게 짐승처럼 너를 원한다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어요? 어떻게요?”

    하지만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올리비아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아름다운 얼굴에 경악과 두려움을 담아냈다.

    올리비아는 충격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면서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다니!

    ‘산 채로? 아니면 잠든 사이에? 그거도 아니면 죽이고?’

    파랗게 질려 오들오들 떠는 올리비아의 반응에 에이든은 쓰게 웃었다. 화르르 타오르던 욕망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가라앉았다. 예상했던 올리비아의 순수함과 무지함이 사랑스럽다가도 이럴 때면 가슴이 콱 막혔다.

    ‘도대체 얼마나 둔한 것인가. 앞으로 갈 길이 멀겠네.’

    “어린애를 두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걸까? 그렇지?”

    탄식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닌 자조 섞인 말이었는데, 그걸 알 리 없는 올리비아가 쭈뼛대며 반박했다.

    “저, 저는 어린애 아니에요.”

    지금 상황에 무슨 의도를 갖고 하는 말일까? 올리비아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던 에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그의 주황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더 또렷이 보였다. 올리비아는 그가 지금 당장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입을 삐쭉였다.

    “제가 조금 멍청하긴 하지만 어리지 않아요. 며칠 뒤면 성인이란 말이에요.”

    욱해서 말해 놓고 화들짝 놀라 올리비아가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대다수 사람이 그녀가 말대꾸하는 것을 참 싫어했다.

    ‘왜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발끈했을까…….’

    참는 것은 잘하는 성격이었는데 겁도 없이 소리 내어 말했다. 올리비아는 남자가 성을 낼까 봐 흘끔흘끔 눈치를 봤다.

    참 아이 같은 반응이다. 어쩜 저리 속내가 잘 보일까. 그의 기억 속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이 사랑스러운 여인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았다. 에이든은 화를 내는 대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화나지만 그래도 어쩌리. 이리도 어여쁜걸.

    “거봐 어린애 맞잖아.”

    올리비아는 안도하는 한편 바뀌지 않은 남자의 평가에 불만으로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이번엔 잘 참아 내는 모양새에 에이든이 덧붙였다.

    “아직 열아홉 살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성인이 아닌 거고, 성인이 아니면 어린애지.”

    나라에서 인정한 성인은 열아홉 살 생일이 지난 사람이다. 올리비아의 생일은 한 달 정도 뒤였으니 아직 성인이 아닌 셈이 맞았다.

    그런데 성인이 아니라고 어린애는 아닌 거 같은데. 조금 교묘한 논리에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올리비아가 인상을 찌푸리고 끙끙댔다.

    고민하는 얼굴도 귀여웠다. 에이든은 이제야 올리비아의 입가에 묻은 소스가 보였다. 닦아 줘도 괜찮을까?

    “그럼 어린애는 잡아먹히지 않는 건가요?”

    그럼, 나 안 잡아먹히는 거야? 라는 밝은 얼굴로 올리비아가 질문을 하자 에이든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저 환하고 순진무구한 얼굴에 무슨 대답을 해 줘야 할지 난감했다. 잡아먹는다는 것이 식인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그것보다 조금 더 고차원적이고 농밀한 것이라고. 어찌 알려 준단 말인가.

    에이든은 올리비아를 지켜 주고 싶다는 이성과 빨리 커서 제 욕망 좀 알아달라는 본능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미 7년이나 기다려 왔다. 그에겐 매우 길고도 긴, 인고의 시간이었다.

    “아니, 어린애도 잡아먹을 수는 있지……만 먹어선 안 되지. 그럼, 안 되고말고.”

    잠깐 본능에 흔들려 의미를 전달하려던 에이든은 말이 이어질수록 오들오들 떠는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말을 급히 바꾸었다.

    “휴우, 그럼 전 어린애 할래요.”

    그랬더니 저런 속 터지는 소리를 하며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해맑은 얼굴로 생글생글 난 어린애니까 잡아먹히지 않아! 하고 웃는다.

    에이든은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부질없고 허망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올리비아가 남들보다 약간 모자란 구석이 있는 건 알았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하나를 까먹었으니까.

    글을 가르친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겨우 가르쳤던 기억이 있으니 올리비아가 똑똑하지 않다는 건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그저 아둔하다고 하기엔 심각해 보였다.

    아닐 거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그냥 조금 어려서 그런 거라고. 생일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스스로 되뇌며 에이든은 짙게 올라오는 불안함을 달랬다.

    “그런데 여기 또 오면 어떡해요? 함부로 오면 안 되는 곳이라니까요.”

    안도감을 느끼고 좋아하던 올리비아가 뒤늦게 지적을 했다. 에이든은 대답 대신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타는 속을 나타낸 쓰린 미소였지만 올리비아는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양 뺨을 부풀렸다. 나쁜 사람이라 그런가?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엄청 나쁜 사람이지?’

    올리비아가 경계하기 전에 남자의 손이 불쑥 다가왔다. 움찔 뒤로 몸을 뺄 새도 없이 엄지가 그녀의 입가를 훔치고 지나갔다.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그 와중에 손가락이 살짝 아랫입술에 닿았다.

    “아!”

    깜짝 놀라 심장이 덜컥했다가 당황스러움과 뒤늦은 화가 차례로 밀려왔다.

    ‘또 만졌어!’

    이 남자 너무 무례하다. 아무렇지 않게 또 자신을 강간하다니! 남녀가 조심해야 하거늘! 두 번째는 얌전히 당하지 않으려 다짐했던 올리비아가 씩씩대며 막 한소리 하려는 찰나였다.

    “소스가 묻은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맛있나 봐?”

    남자가 들어 보이는 엄지에 소스의 흔적이 있어 올리비아의 입이 꾹 다물렸다. 뺨이 달아오른다. 민망해 화내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아무도 안 본다고 그냥 먹었더니 덜렁거리며 묻혔나 보다.

    에이든이 자신의 손과 올리비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수줍어하는 얼굴에 갈등했다. 어쩜 저렇게 탐스러워 보일까. 그냥 슥 닦아 버리면 될 것을 어쩐지 그리하기 아까웠다. 참으려 했지만 자제할 수 없었다.

    작은 욕심을 부렸다. 7년을 기다린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라 합리화했다.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혀를 내밀어 핥았다. 올리비아의 피부에 닿았던 것이라 그런지 황홀하도록 달콤하다. 이런 작은 접촉만으로 하체가 뻐근했다.

    조금 전 스친 말랑한 입술의 감촉이 뇌리에서 느껴지는 것 같다. 어찌하여 이 여인은 이리도 달콤할까? 잦아들었다고 여긴 열기가 다시 치민다. 갈증이 심해져 말라죽을 것 같았다. 저 입술은 얼마나 아득하고 달콤할까. 에이든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맛있네. 다디달아. 또 먹고 싶을 만큼.”

    순간 올리비아는 치밀어 오르는 비명을 삼켰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오싹하니 저절로 비명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져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게 맛있었나? 저렇게 강렬하게 바라볼 만큼? 어린아이는 안 잡아먹는다더니 거짓말일까?’

    남자의 눈동자는 굶주려 있었다. 올리비아는 이대로 산 채로 뜯길 것 같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었다.

    “배, 배고프세요?”

    그래서 간신히 소리 내 물었다. 계속 주시하는 남자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무언갈 바라는 것 같아 올리비아의 배가 바짝 조여들었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가녀린 새 같았다. 자그마하게 억눌린 목소리가 마치 신음처럼 들렸다. 큰일이다. 쌀 것 같았다. 제 여인이 될 아이가 너무 어려 7년 동안 억눌린 욕구가 터져 나왔다.

    지금 당장 바지춤을 푸르고 제 물건을 잡아 흔들고 싶었다. 그녀 앞에서 하는 것만으로 극락을 맛볼 것 같았다. 저 순박한 올리비아에겐 어울리지 않는 저속한 일이지만, 이미 스스로도 개새끼라고 인정했는데 그쯤이야 아무렇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에이든은 올리비아에게 미쳐 있고 중증의 욕구 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에이든이 이렇게 제 욕구를 풀 생각밖에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닿을 수 없기에 더 큰 갈망이었고, 가질 수 없기에 더 큰 욕심이 생겼다. 원한다는 마음이 너무 커 비이성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성욕을 느꼈을 때부터 스물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욕구를 해소해 본 적이 없었다. 잠결에 흘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이 물건은 올리비아만을 위한 물건이었다. 다른 여인에게 푼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고, 제 손으로 만지는 것도 아까워 자위조차 제대로 못 해 봤다.

    눈앞의 여인만이 그의 희망이었다. 애처롭게 바라보는 작은 여인을 잡아채 눕히고 싶었다. 울리고 찢어지는 교성을 토해 내게 하고 싶었다. 에이든은 제멋대로 나가려는 손을 막기 위해 상의를 꽉 쥐었다.

    “갈증 나고 허기져서 미쳐 버릴 것 같아.”

    너라는 사람으로 나를 채우고 싶어.

    에이든이 쥐어짜듯 말했다. 흔들리는 눈동자, 발갛게 변한 뺨, 초조한 몸짓이 아까와 다르게 올리비아가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희망으로 그의 감정이 타올랐다.

    ‘어떡해. 미쳐 버릴 것 같다니! 어쩌지?’

    남자가 간절히 말할수록 올리비아는 안절부절못했다. 어째서 이렇게 추운 느낌일까. 긴장감과 갈등이 강해졌다. 올리비아가 초조함에 손을 불쑥 내밀었다.

    “드, 드실래요?”

    아깝지만, 저렇게 먹고 싶다니 눈물을 머금고 나눠 줘야겠다. 자신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배가 더 고파졌나 보다. 무려 고기가 들어 있어서 그녀도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맛있는 음식이었다. 진짜 맛있는 건데. 혼자 다 먹고 싶은데.

    ‘허기져 미쳐 버릴 것 같다 하니 이거라도 먹으면 좀 낫지 않을까?’

    올리비아는 욕심을 참고 선심을 썼다. 남자는 그녀가 내민 샌드위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시선이 옮겨 간 것만으로 올리비아는 편함을 느꼈다. 그런데 남자의 표정이 점차 딱딱해지는 것 같아 올리비아는 불안했다.

    ‘설마, 눈치챈 건가? 그래서 기분 나빠 하는 건가? 안 되는데. 아까운데.’

    올리비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눈치를 보다 남자가 화낼 것 같아 올리비아가 먼저 선수 쳤다.

    “앗, 죄송해요. 먹던 건데.”

    그에게서 짜증이 스며 나와 내밀었던 손을 재빨리 회수했다. 아무래도 먹던 음식을 내밀어서 화났나 보다. 보통은 남이 먹던 음식을 싫어하니까. 진짜 속 쓰림을 무시하고 바구니에서 저녁용으로 잘 포장된 샌드위치를 꺼냈다. 바구니에서 꺼낸 적도 없는데 이걸 언제 봤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엄청 무서운 사람이다.

    “이, 이거 드세요.”

    아까워서 목소리가 흔들리고 샌드위치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쩐지 눈물이 고인다. 내 샌드위치. 내 고기. 다음에 꼭 또 먹을 일이 있길. 미련이 뚝뚝 흐르는 눈을 숨기지 못하고 올리비아가 제 손 위의 샌드위치를 응시했다.

    “후우…….”

    얼마나 아깝고 처량맞게 보는지 올리비아의 얼굴이 불쌍해서 에이든이 짙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제야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에이든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기대했던 자신이 병신이었다.

    잡아먹는다는 말을 식인으로 알아듣는 사람에게 뭘 바랐을까? 허기지다는 말을 들으면 당연히 배고픔을 연상했겠지. 우리 예쁜 올리비아는 그런 아이지. 에이든은 짜증과 자조로 신경질적이 되어 갔다. 그가 샌드위치를 받지 않자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올리비아가 물었다.

    “이제 허기 안 지세요? 드시기 싫어요?”

    ‘먹기 싫어서 그런가? 그럼 안 줘도 되는 거야?’

    남자가 샌드위치를 안 먹는다면 기쁘긴 한데, 저리 신경질적으로 구니 신경이 쓰였다. 순진한 눈망울이 에이든을 주시하자 그는 탄식했다.

    “내가 뭐 하는 짓인지.”

    그리고 자조적인 목소리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화내는 것 같지는 않아 올리비아는 어리둥절했다. 변덕스럽게 구는 연유를 모르겠다. 어쨌든 남자가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이 없어 보여 올리비아의 축 처졌던 기분이 들떴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남의 식사를 뺏어 갈 생각은 없나 보다. 착한 점도 있는 사람이다.

    “드시지 않겠다는 소리지요?”

    혹시 몰라 한 번 더 물었다. 그렇다 답하면 샌드위치를 다시 바구니에 넣으려고. 저녁에 이 황홀한 맛을 또 느낄 생각을 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신나서 팔짝 뛰고 싶다. 올리비아가 즐거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에 에이든은 못된 심술이 샘솟았다. 지금 저 샌드위치를 자신에게 주는 것이 그리도 아깝단 말인가! 자신은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 줄 수 있는데! 그녀에게 주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은데! 손으로 제 얼굴을 쓰다듬던 에이든이 뚱한 표정으로 올리비아의 손에 있던 샌드위치를 낚아챘다.

    “아니. 먹을 거야.”

    ‘어?’

    올리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이든은 포장을 벗기고 보란 듯이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충격에 빠진 그녀를 두고 그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와삭 소리를 내며 남자의 입속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샌드위치를 올리비아가 처량하게 바라보았다.

    재빠르게도 먹는다. 남자는 벌써 반 이상을 꿀떡꿀떡 삼키고 있었다. 아까워서 짜증 나는데, 먼저 먹을 거냐고 물어봐서 화도 못 내겠다. 미련하게 왜 준다고 했을까? 아무리 허기지다고 탐욕스럽게 봐도 모른 척할걸.

    ‘뺏어 먹을 게 없어서 하녀의 음식을 뺏어 먹는단 말인가!’

    남자가 비양심적으로 먹어 치운 것은 그녀의 저녁 식사였다. 즉, 저녁을 따로 또 받지 못한다는 소리. 올리비아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은 먹을 걸 나눠 주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제일 얄미운 사람은 먹을 것을 뺏어 먹는 사람이다. 이 남자 너무 싫었다. 무례한 사람이 얄밉기도 했다. 서러움과 억울함으로 올리비아의 양 볼이 퉁퉁 부었다.

    화는 못 내고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는 게 귀엽다. 도대체 얘는 무엇을 해도 이리 안 예쁜 구석이 없는 걸까? 제 것을 나눠 주는 것을 아까워하는 귀여운 모습에 에이든의 꽁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사랑스러움을 참을 수 없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얼른 커서 나를 봐 줘.’

    그리고 그 행동에 올리비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음식을 뺏어 먹고도 나쁜 짓을 하다니! 소중한 음식을 줬는데! 올리비아가 남자의 손을 쳐 내며 빼액 외쳤다.

    “왜 자꾸 강간해요! 이 강간범아!”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입에서 터져 나온 엄청난 발언에 놀라 쩍 굳어 버렸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강간? 강간범? 누가? 자신이? 왜? 뭐를 했다고!’

    이미 언급했듯 에이든은 자신이 개새끼임을 인정했다. 현자의 숲에서 남들은 어렵다는 문제를 풀 때도, 대현자라 불리는 이들과 정치와 전쟁을 주제로 토론할 때도, 하물며 잠을 자는 무의식 상태일 때도 음란한 생각밖에 안 했다.

    실제로 하지 못하니 온갖 짐승 같은 상상을 하며 버텼다. 누가 알면 기겁할 일들을 거리낌 없이 망상했다. 그래서 자신이 변태임도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이 변태에 개새끼라고 해도 지킬 건 지켰다. 모든 욕심을 억누르고 버티고 있는데!

    ‘왜!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강간범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수많은 상상 속의 하나라도 해 보고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지도 않았다. 너무 소중하고 소중해서, 손대기도 아깝고 두려워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는데! 강간범이라니!

    올리비아의 입에서 나온 무자비한 단어에 에이든은 완벽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어째서 내가 강간범이야!”

    필사적인 외침에 올리비아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지지 않고 소리쳤다.

    “제게 손댔잖아요!”

    에이든은 황당해서 입만 뻥긋거렸다. 그래, 손댄 게 맞긴 맞았다. 뺨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었으니까. 근데 정말 뽀뽀만 했거든? 머리만 쓰다듬었거든? 막 음란하게 매만진 거 아니거든? 더한 거 하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거거든!

    “그건 강간이 아니야! 내가 한 것은…….”

    “거짓말하지 말아요!”

    올리비아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단 것을 알아챈 에이든이 제대로 된 설명을 하려 했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화난 짐승처럼 아르르거리며 올리비아가 제법 성을 냈다.

    “무지해도 알 건 알아요. 여자의 몸에 함부로 손대는 거 아니에요! 어제도 그러더니 왜 자꾸 강간해요!”

    ‘그게 아니라고! 손대는 건 말 그대로 손대는 거지, 강간이 아니라고!’

    에이든은 억울했다. 올리비아는 철석같이 자신이 강간당했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저 어여쁜 얼굴이 어찌 이리 악랄하게 보일 수 있는지.

    “그러니까 내가 네 머리를 쓰다듬은 것은 맞는데…….”

    “어머어머, 본인 입으로 강간한 것 인정하는 것 봐.”

    이번에도 올리비아가 에이든의 말을 끊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파렴치한을 보는 눈빛에 그의 심장이 뜯겨 나갔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래도! 속 타는 에이든을 모른 채 올리비아가 벌떡 일어섰다.

    점심만 먹고 바로 일하려고 했는데, 남자 때문에 시간이 너무 흘러 버렸다. 나쁜 사람과 계속 말장난하고 있을 시간 없었다. 올리비아는 남자를 떼어 버리기로 했다.

    올리비아는 전에 애니가 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하면 남자들이 다시 안 다가올 거라나? 표정은 최대한 표독스럽게 하라고 했지. 그날의 기억을 더듬더듬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당신은 대단히 나쁜 사람이에요. 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한 번만 더 나타나면 그때는 확! 터트려 버릴 거예요.”

    다리 사이를 노려보고 주먹을 꽉 움켜쥐는 올리비아의 행동에 에이든은 반사적으로 그 부위를 가렸다.

    ‘아직 제대로 써 보지도 못 한 물건인데 터트리면 어떡하라고!’

    에이든이 억울하게 바라보았는데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떼어 버리고 싶은지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 허망하고, 무섭다. 자신의 어여쁘고 귀엽던 작은 천사가 7년 사이에 악랄한 악마가 되어 있었다.

    “흥!”

    올리비아는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별채로 향했다. 시킨 대로 했는데 잘 말했나 보다. 의미가 제대로 잘 전달되었는지 남자의 얼굴이 확실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바쁘디바쁜 하녀였다. 그렇게 올리비아의 기억 속에서 남자는 사라졌다.

    별채 안에 들어오니 또 숨이 막혔다. 이미 털고, 쓸고를 여러 번 해 처음보다 나아졌지만 아직 한참 남았다. 오늘은 먼지를 닦아 내기로 했다. 가구, 창문, 바닥, 벽 할 것 없이 죄다 닦아야 했다.

    양동이에 물을 받고 걸레를 챙겨 든 올리비아는 일을 시작했다. 방 하나를 닦는데도 양동이의 물을 열 번은 갈아야 할 정도로 지저분했다. 고된 노동에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 뒤로 걸레질만 하는 데 이틀이 더 흘렀다. 기일에 맞추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다시피 했다. 올리비아는 반쯤 졸고 다녔다.

    모든 먼지를 쓸어 내 적당히 별채가 쓸 만한 건물이 되자 그제야 다른 하녀 한 명이 별채 단장에 배정되었다. 혼자 일하지 않게 되었다고 좋아했더니 하필이면 그 사람이 애니였다. 그녀는 올리비아와 있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제 일을 떠넘겼다. 지금도 사람은 두 명이 되었지만 올리비아는 두 명의 몫을 혼자 해야 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우울했다. 일은 산더미고 피곤해서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데, 이상하게 짜증을 내는 애니의 심기도 맞추려니 힘들었다. 별채에 왔을 때부터 애니는 굉장히 성질을 냈다.

    올리비아는 차라리 혼자일 때가 편했다. 잔소리는 듣지 않아도 되니까. 이런 올리비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올리비아! 무슨 잡초를 온종일 베니?”

    “네? 으어어!”

    대답 대신 비명이 나왔다. 너무 쪼그리고 있어 뻣뻣한 허리를 두들기며 일어섰다. 정원사가 해야 할 일이지만, 아무도 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어 이 또한 올리비아가 직접 하게 되었다. 그래도 잡초만 베어 내면 정원수의 가지치기는 해 준다는 약조를 받았다.

    정원 일은 위험해서 조심조심하니 속도가 나지 않았다. 낫을 내려놓고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올리비아의 모습을 보며 애니가 짜증을 냈다.

    “언제까지 잡초만 벨 거야? 네가 신청했다던 물품 왔어. 얼른 정리해야지.”

    얼른 처리해 버리라는 애니의 재촉에 올리비아의 기분이 꿍해졌다.

    저 일하고 있어요. 그건 언니가 해도 되잖아요. 오전 내내 쉬었으면서 그것도 하기 싫어요? 올리비아는 불만이 떠올랐지만 그 말을 직접 할 용기는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면 애니가 배는 더 무섭게 쏘아 댈 거였다.

    방의 대표 격인 애니를 올리비아는 이길 방법이 없었다. 다들 애니 편이라 밉보이면 모두에게 구박을 받았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고 감정을 삭인 후 대꾸했다.

    “잡초 베는 것만 마치고 할게요.”

    “아휴, 느려 터진 것. 알아서 해. 잡초 벤 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 놓는 것 잊지 말고. 지저분해라.”

    말을 마친 애니가 살랑거리며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올리비아가 정성들여 닦아 놓은 의자에 앉아 낮잠을 잘 거였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래도 좀 도와줬을 텐데. 애니는 로라와 비슷할 정도로 성격이 나빴다.

    입술을 한 번 비쭉인 올리비아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잡초를 이제 삼분의 일 정도 베어 냈다. 서두르면 오늘 안에 어느 정도 정리가 될 것 같았다. 다시 땀을 훔치고 주저앉아 낫을 집었다. 피곤해서 깜빡 졸까 봐 눈에 힘을 주며 낫질을 했다.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정원 정리가 끝났다. 내일 오전에 정원사에게 부탁하면 귀신의 집 같던 정원이 그럴싸해질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서둘러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애니가 말한 물품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내일 일하기 수월할 테니까. 애니는 저녁때가 되어 홀라당 가 버린 지 오래였다. 식사 후 방에 가서 쉴 게 뻔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움직였다.

    커튼은 달아야 할 창문 앞에 차곡차곡 옮겨 놓고 침대 시트는 바로 씌웠다. 내일 주름을 다시 잡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렇게 해 놓아야 내일이 편했다. 3층에 있는 이 별채에서 제일 큰 방에 있는 마지막 침대 시트를 낑낑 갈아 끼웠다.

    정원 일로 녹초가 된 상태에서 일하려니 기운이 쭉 빠졌다. 오늘도 바빠서 저녁은 걸렀다.

    “배고프고 힘들다. 졸려…….”

    누구 보는 사람도 없겠다. 올리비아는 그냥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귀족 나리의 침대에 눕다니 평소엔 절대 하지 않을 일이지만 이미 나흘째 밤잠을 줄여 가며 청소해 체력이 한계였다.

    새 시트의 냄새와 자신의 것과 다른 포근한 감촉에 올리비아의 눈이 슬슬 감겼다. 자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려오는 수마를 참을 수 없었다. 색색 낮고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올리비아가 꿈속에 빠져들자 방문이 열리고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는 올리비아가 있는 걸 아는 것처럼 소리를 죽이고 움직여 침대에 조심히 걸터앉았다. 그리고 잠든 올리비아를 살폈다. 무시무시한 경고 때문에 나서지 못하고 남몰래 그녀를 지켜보던 에이든이었다.

    요 며칠 애니의 방만한 행태와 올리비아의 고생을 전부 봤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올리비아의 얼굴에 에이든은 짜증을 터트렸다.

    “왜 이렇게 미련스럽게 굴어?”

    물론 올리비아가 깨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피곤해서 잠든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나 미련하지 않아요…….”

    그때 올리비아가 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깜짝 놀라 에이든이 바라보니 잠결에 무의식중에 대답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부터 올리비아에게는 약간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깊게 잠들지 않았을 때 말을 걸면 대답을 했다. 그게 신기해 예전엔 잠든 올리비아에게 일부러 말을 걸어 보곤 했다. 물론 깨어났을 때 그녀는 기억을 못했다. 이 버릇은 여전한가 보다. 에이든은 시트를 끌어다 올리비아의 몸에 덮었다. 그리고 기다란 머리카락 끝을 조심히 매만지며 다정히 속삭였다.

    “나야. 에이든. 네 도련님.”

    “도련……님?”

    작은 대꾸가 귀여워 자꾸 웃음이 나온다. 에이든은 더욱더 다정히, 그리고 애정을 담아 소곤거렸다.

    “응. 네 도련님. 보고 싶지 않았어?”

    “……보고 싶어.”

    부정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린 대답이 너무 어여뻐 에이든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뜨면 기억하지도 못할 테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이 아이의 속마음을 자신이 아는 것을.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녀의 무의식에 아직 자신이 남아 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너무 사랑스러워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잠든 사이에 키스한 것을 알면 강간범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불길한 생각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라면 진짜로 물건을 터트릴지도 몰랐다. 빨리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식은땀이 흐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올리비아의 등을 작게 두들겼다.

    “잠깐이야. 잠깐만 자고 일어나. 그럼 선물이 있을 거야.”

    한참 단잠을 자던 올리비아는 코끝을 간질이는 맛있는 향기에 눈이 반짝 떠졌다.

    ‘뭐지?’

    여긴 숙소가 아니었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아까 침대 시트를 갈아 끼우고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리비아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잠든 걸 알면 크게 혼날지도 몰랐다. 허겁지겁 숙소로 돌아가려던 중 탁자에 놓인 음식이 눈에 보였다.

    아직 따끈한 기운이 도는 수프와 맛있게 생긴 샌드위치였다. 먹을 걸 보니 허기가 더 강해졌다. 누가 가져다 뒀지? 먹어도 될까? 잠시 갈등하는데 어디선가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잠깐이야. 잠깐만 자고 일어나. 그럼 선물이 있을 거야.”

    올리비아는 홀리듯 샌드위치를 집어 베어 물었다. 아삭한 사과와 고소한 베이컨이 씹혔다. 어쩐지 다정한 맛이라, 올리비아는 허겁지겁 남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아련한 목소리가 기억 속에 맴돌았다.

    * * *

    올리비아가 밤잠을 줄여 가며 청소한 노력 덕분에 별채는 사람 살 만한 장소로 탈바꿈되었다. 다시 봐도 그럴싸해져서 뿌듯했다. 이번 일로 청소의 달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정원과 외양을 꾸미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와달라고 얼마나 간청했는지 모른다. 시녀들과 하녀들하고는 다르게 간절히 조르면 기술자분들이 못 이기는 척 도와줘서 다행이었다.

    드디어 내일이면 이 별채를 사용할 도련님이 돌아오신다고 했다. 하루 전날이 되니 소문이 쫙 퍼져서 그의 귀환이 이제는 비밀도 아니었다. 다들 그 이야기로 정신없지만 올리비아는 관심이 없었다. 도련님이 돌아온다고 제 인생이 바뀔 것도 아니었으니까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그저 콧노래를 흘리며 손을 바삐 움직였다. 오늘이면 이 엄청난 청소도 끝이다. 이따가 하녀장님과 총관님이 검사하러 온다고 했다. 조금만 더 힘내서 마무리하자.

    부족한 점이 없나 빨빨빨 돌아다니는 올리비아를 보며 애니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짜증 나 죽겠다. 이리 별채에 처박히게 된 것도 화나는데 꺼림칙함을 주는 싫은 계집까지 자꾸 봐야 하니 성질이 뻗친다.

    애니는 소파에 걸터앉아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더 떨어질 것도 없는 밑바닥 인생인데 거기서 더 좌천돼서 여기까지 와 버렸다. 애니도 하녀들의 수다를 들었다. 둘째 도련님은 백작님께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차라리 밖에서 살 것이지 왜 돌아오냐고. 와서도 찬밥이 될 거라고.

    그런 도련님이 머무는 별채 담당이 되다니 자신의 인생도 끝이었다. 잘 보여도 좋을 것 없고, 밉보여서도 좋을 것 없는 정말 쓰레기 같은 자리였다. 그런 곳에서 일하면서 뭐가 그리 신난다고 저리 헤실헤실하며 돌아다닌단 말인가. 올리비아가 콧노래를 부르는 것도 거슬려 죽겠다. 자신의 처지가 이리된 게 다 저 계집 탓인 것 같았다.

    아니다. 그게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저 계집 탓으로 여기고 싶었다. 애니는 제가 이 구석에 처박히게 된 이유를 알았다. 아마도 마지막에 모셨던 자작이 총관에게 무어라 언질을 준 것이 확실했다. 있는 대로 봉사는 다 받아 가고 이 무슨 꼴인지.

    ‘저속한 말, 희롱 전부 감내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쳐? 짐승 새끼.’

    개같이 굴었는데도 이런 꼴로 만들어 버린 자작에게 화가 났다. 분에 못 이겨 힘을 주자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물고 있던 손가락이 이에 짓눌려 상처 나 버렸다.

    “어? 괜찮으세요?”

    애니의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발견한 올리비아가 다가왔다. 멍청한 게 속도 없지. 저를 그렇게 못살게 군 인물인데도 걱정한다. 이조차도 애니는 싫었다. 깨끗한 손수건을 찾아 감아 주며 안절부절못하는 새하얀 얼굴을 보니 더 패악질을 부리고 싶어졌다.

    “저리 가. 네 도움 따위 필요 없어.”

    “하지만 그냥 두면…….”

    “됐어! 네 일이나 해!”

    어디서 착한 척이란 말인가, 애니가 버럭 외치자 올리비아가 찔끔해서 도망갔다. 방을 나서기 전 흘끗 쳐다봐 도끼눈을 뜨자 후다닥 사라졌다.

    애니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얼른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정말 별채 전담이 되었다간 이 구질구질한 인생을 벗어날 방법이 영영 사라질 것 같았다. 빨리 본채로 옮겨 가고 제대로 된 후견인을 만나야 했다.

    방법이 보이지 않아 초조했다.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려다가 손에 걸린 하얀 손수건 때문에 멈칫했다. 신경질적으로 손수건을 노려보았다. 어디 제까짓 게 남을 걱정한단 말인가.

    ‘저 혼자 순진한 척, 깨끗한 척.’

    애니는 그런 올리비아가 정말 미웠다. 어쨌든 빨리 별채를 벗어나야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양동이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 밖에 나가 흙을 조금 퍼 담아 흙탕물을 만들었다. 3층 방으로 들어와 그 물을 벽과 커튼에 쏟았다.

    잘 정돈되어 있던 방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그냥 물이었어도 큰일일 텐데 흙탕물이라 더러움이 확 티가 났다. 빈 양동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우당탕 소리가 울렸다. 아래층에 있던 올리비아가 허둥지둥 올라왔다.

    “무슨 일 있어요? 헉! 어떡해!”

    방 안의 꼴을 발견한 올리비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당황해 어찌할 줄 모르는 그녀를 향해 애니는 미안한 어투를 사용했다.

    “어떡해, 청소 좀 하려다 이렇게 됐어. 손이 이래서 제대로 들지 못해서 엎었지 뭐야?”

    애니가 손수건이 감긴 다친 손을 들어 올려 보여 올리비아는 할 말이 없었다. 어딜 봐도 엎은 수준이 아닌데 그걸 알아챌 눈치가 그녀는 없었다. 그저 울상 짓고 발을 동동 굴렀다.

    “큰일이네요. 곧 하녀장님이랑 총관님 오실 텐데…….”

    ‘알아. 그래서 이 짓을 한 거지.’

    애니는 제 속내를 숨긴 채 최대한 연약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파서 난 못 치울 것 같은데, 대신 정리해 주면 안 될까?”

    평소의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 아닌 미안해하는 얼굴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서 실수한 건데 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늘 강하던 사람이 연약해 보이니 왠지 마음이 찡했다. 그런데 제시간에 청소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네. 알겠어요. 내려가서 좀 쉬세요. 괜히 아픈데 뭐 하지 마시고요. 그러다 상처 덧나요.”

    흔쾌한 올리비아의 허락에 애니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로 답했다.

    “고마워. 수고 좀 해 줘.”

    시간이 없는 올리비아는 재빠르게 걸레를 찾아와 물기를 닦아 냈다. 양동이를 바로 세우고 그 안에 물기를 짜내는 일을 반복하는 올리비아를 보며 애니는 독사 같은 미소를 얼굴에 드러냈다.

    저 멍청한 계집은 정말 발전이 없었다. 올리비아가 열심히 자신이 어지른 방을 치우는 동안 애니는 별채로 들어서는 입구가 보이는 방 안에서 밖을 주시했다. 이제나저제나 하녀장님과 총관님이 오길 기다렸다.

    ‘시간이 맞았으면 좋겠는데.’

    밖을 기웃거리길 잠시. 깐깐하게 생긴 중년의 남성과 마찬가지로 빈틈없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 같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애니는 재빠르게 깨끗한 걸레 하나를 집어 들고 입구 쪽을 청소하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청소에 집중하는 척, 먼지를 닦아 냈다.

    “왜 혼자더냐? 둘이 청소한다고 들었는데.”

    총관의 목소리에 애니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 막 방문을 알아낸 사람처럼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아래층은 제가 청소하고 올리비아에게는 3층 방만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애니는 공손한 자세로 답하며 여지를 흘렸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백작가의 멍청이 올리비아임을 알렸고, 그녀에게 시킨 일은 3층 방 정리뿐이라고. 대부분의 일은 자신이 했다고. 애니의 의도대로 두 사람은 숨겨진 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표정이 굳어 버린 두 사람에게 약간의 당혹감을 담아 말을 돌리듯 이야기했다.

    “우선 1층과 2층을 둘러보시지요. 미흡하겠지만 노력했습니다.”

    “대충 봐도 훌륭하구나. 전에 왔을 때와 천지 차이야.”

    올리비아를 데리고 오면서 별채 상태를 이미 확인했던 하녀장님이 먼저 칭찬의 말을 꺼냈다. 솔직히 일주일 동안 사람이 살 정도로 치울 수 있을까 의문이었던 곳을 훌륭하게 바꾸어 놓아 하녀장은 흡족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애니는 제가 한 일을 칭찬받은 듯 수줍게 웃었다. 올리비아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과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오히려 이 자리에 없는 올리비아를 속으로 비웃었다. 당하는 년이 멍청한 거다. 자기 인생은 자신이 챙겨야 했다. 이 험한 세상에선 그 누구도 남을, 특히 하녀 따위는 챙겨 주지 않는다.

    “이리 오시지요. 한 군데씩 차분히 둘러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애니가 방긋 웃는 낯으로 차분히 방을 안내했다. 두 사람은 별채 상태를 구석구석 확인했다.

    “여기는 조금 더 닦는 것이 좋겠군.”

    “죄송합니다. 가시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이거 커튼은 아무래도 바꿔야겠다. 낡은 티가 너무 나.”

    “받은 물품 수가 적어서 빨아 썼습니다. 바로 새 물품을 달라 신청해 보겠습니다.”

    “저쪽 잡동사니는 전부 창고에 넣고.”

    “네. 알겠습니다.”

    지적이 있을 때마다 애니가 즉각 답했다. 몇몇 눈에 거슬리는 곳을 지적하면서도 총관과 하녀장의 기분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단 일주일 사이에 폐허를 이 정도로 만들어 놨으면 훌륭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기에 크게 흠잡지 않았다.

    사실, 백작님 내외나 큰 도련님이 쓰겠다면 이들도 이렇게 설렁설렁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일을 이따위로 하냐고 당장 다시 하라고, 물품도 전부 새것으로 바꾸라 소리쳤을 거다.

    하지만 백작님이 무시하는 자식에게 공을 들이는 것도 윗사람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되니 조심스러웠다. 에이든 도련님이 온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백작님은 따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았다. 그저 별채를 치워 두라만 일렀다. 그럴 땐 적당히 너무 더럽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신경 쓴 티 나지 않도록. 이 정도가 딱 좋았다.

    “혼자 생각보다 잘해 주었구나.”

    하녀장님이 또 한 번 애니를 칭찬했다. 그리고 애니는 겉으론 겸양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으론 이들이 빨리 3층으로 올라가길 빌었다. 많이 어질러진 꼴을 볼수록 올리비아의 무능함이 두드러질 테니까. 그 애가 조금이라도 더 정리하기 전에 이들을 끌고 가고 싶었다.

    “쓸고 닦고만 열심히 하면 되는걸요. 3층도 보시겠습니까?”

    먼저 말은 꺼내면서도 표정만은 곤혹스럽게. 애니는 자신이 처리한 다음에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머뭇거리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확인해 봐야지. 올라가 볼까?”

    총관님의 말에 애니가 속으로 미소 지으며 뒤따랐다. 처음 몇 개의 방은 1, 2층과 다를 바 없었다. 깔끔한 정리가 되어 있어 둘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덜렁이 올리비아의 솜씨라 믿기지 않는 상태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올리비아도 제대로 일을 할 때가 있군.”

    “그러게요. 아래층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요.”

    총관님의 말에 하녀장님이 동의하자 애니는 조급해졌다. 아래층과 비교를 하니 더 그랬다. 자세히 보면 정리하는 습관 같은 것이 있어 들킬지도 모른다. 애니는 재빨리 계산한 후 덧붙였다.

    “세 번째 방까지는 제가 하다가 올리비아가 자신도 일하겠다고 간곡히 부탁하여 네 번째 방부터 정리해 달라 했습니다.”

    둘은 어쩐지 깨끗하다 했어 하는 표정으로 다음 방문을 열었다. 그곳은 아까 애니가 흙탕물을 뿌렸던 곳이었다. 터져 나올 외침을 예상했고, 역시나 두 사람은 지저분한 방 안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 이렇게 더러운 거야! 카펫이랑 커튼은 또 어디 가고?”

    “도대체 꼴이 이게 뭐냐! 청소하긴 한 거냐?”

    총관님과 하녀장님이 차례로 소리를 질렀다. 다른 곳도 아니고 별채 주인이 쓸 침실이었다. 그곳이 제일 엉망이라니 총관과 하녀장님은 기함했다. 두 사람이 놀랄수록 뒤에 있던 애니는 고소를 머금었다.

    벽에 묻은 얼룩을 지우기 위해 기를 쓰던 올리비아는 사람들의 등장에 허둥지둥했다. 다 치우지 못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하셨다.

    “오, 오셨습니까?”

    “넌 지금 오셨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냐! 이리 어질러 놓으면 어찌해?”

    “그게…….”

    손을 올려붙일 것같이 광분한 하녀장님의 모습에 올리비아가 우물쭈물하며 애니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청했다. 이리 실수한 것은 그녀였으니까. 자신은 도와준 거라 한마디만 해 주면 되었다. 하지만 애니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올리비아가 어찌할 줄 모르는 사이 총관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어찌 일을 시키면 매번 일을 늘려 놓는구나!”

    올리비아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애니가 양동이를 놓쳤다고 말하면 변명한다고 더 혼날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한번 화난 사람들에겐 무슨 말을 해도 더 혼난다는 사실을 알아 그저 입을 다물었다.

    “일을 시켰다고 반항하는 것이냐?”

    차분히 방 안을 둘러보던 하녀장님이 냉정하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아니라 부정했지만 하녀장님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꼴을 보아하니 구정물을 아예 뿌렸구나.”

    “물을 뿌렸다니요?”

    놀란 눈으로 되묻는 게 가증스럽다는 듯 하녀장님이 치를 떨었다.

    “너는 우리를 바보로 아는 것이냐? 흔적을 보면 물을 뿌렸는데 어디서 발뺌이야!”

    총관도 동의의 기색을 싸늘하게 보였다. 올리비아는 배신감 가득한 눈으로 애니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교묘한 눈웃음을 살살 지을 뿐이었다.

    “어머, 올리비아. 너 정말!”

    그리고 겉으로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놀라는 연기를 했다.

    “아니에요. 전 정말 아니에요!”

    올리비아가 필사적으로 총관님에게 매달렸다.

    “되었다. 긴말 필요 없다. 너는 교육이 좀 필요하겠구나.”

    그는 길가의 비렁뱅이를 보는 혐오감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총관의 신호를 받은 하녀장님이 올리비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리 와라!”

    “하녀장님, 아니에요. 전 그런 짓 하지 않아요.”

    하녀장님의 억센 손길에 끌려가며 올리비아가 간절하게 해명했다. 하지만 이미 단단히 화가 난 이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하녀 숙소 지하로 끌려간 올리비아는 그 안쪽에 내동댕이쳐졌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창고였다.

    “네가 그리 일하기 싫다면 어디 맘껏 쉬게 해 주마. 허락할 때까지 거기서 나오지 못할 거야!”

    “하, 하녀장님!”

    쾅!

    올리비아의 외침을 듣지 않은 채 하녀장은 지하의 문을 세게 닫았다. 독방 처벌에 문을 두들겼지만 밖에서는 자물쇠 잠그는 철컥이는 소리만 들렸다.

    “하녀장님! 하녀장님! 아니에요!”

    이미 자리를 떠났는지 한참을 두들겨도 아무 반응도 없었다. 손이 아프고, 어둠 때문에 으스스해서 무서워진 그녀는 몸을 말았다. 처량하고 억울했다. 참았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하얀 뺨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또르르 흘렀다.

    “전 정말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올리비아의 공허한 외침이 어둠 속을 울렸다.

    * * *

    이리 모순적인 감정을 가지기도 드물 거다. 백작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에이든은 자신의 복잡한 심사에 조소를 머금었다. 올리비아를 보기 위해 몇 번 몰래 왔었지만 공식적으로 백작가에 돌아가는 것은 7년 만에 처음이었다.

    아비라는 작자와 새어머니, 이복형을 만나야 하는 상황에 구역질이 나면서도, 드디어 제 품에 그 귀여운 아이를 가둘 수 있다는 것에 들떴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올리비아만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가짜 가족에게 애정이 있을 리 없었고, 이따위 집구석은 미련도 없었다. 조그만 왕국의 코딱지만 한 백작가가 탐나지도 않았다. 영지고 작위고 아버지가 그 좋아하는 이복형에게 전부 줘 버려도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에이든이 구태여 백작가에 돌아가는 것은 오직 올리비아를 위해서였다. 그 아이를 원해서. 그리고 소중히 대해 주고 싶어서.

    올리비아는 백작가에서 태어났다. 에이든도 어릴 때라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어머니인 이사벨라가 노예 시장에 나왔고 우연히 에이든의 어머니가 그녀를 발견했다. 딱 봐도 이국적으로 생겨 두려움에 떨던 이사벨라는 다른 지역에서 막 노예로 잡혀 온 사람이었다. 사정을 딱히 여긴 어머니가 그녀를 거둬들였다. 쓸쓸한 별채의 식구가 한 명 더 늘어난 것이다.

    새 식구가 된 이사벨라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킨 일을 할 뿐이었다. 이사벨라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에이든의 어머니는 그녀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노라고 짐작했다.

    열심히는 하는데 허드렛일은 서툴고 몸에 기품이 있었다. 대화에서도 어느 정도 지식을 쌓은 흔적이 보였다. 딱히 심성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고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에이든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한 식구처럼 지냈다. 이사벨라가 백작가에서 머문 지 몇 달 안 되었을 때 그녀의 배가 서서히 불러 왔다. 입덧이 없어 몰랐지 이미 임신한 채로 노예로 잡힌 것이었다.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그저 오열했다. 그 어떤 사연도 알리지 않았다.

    에이든의 어머니는 좌절하는 이사벨라를 다독여 아이를 낳게 했다. 그 아이가 올리비아였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이다 보니 올리비아도 당연히 백작가의 노예가 되었다. 범죄를 저질러 나중에 노예가 되는 이보다 태생부터 노예인 사람의 삶은 지극히 좁았다. 올리비아가 볼 수 있는 세상은 백작가가 전부였고 운이 좋아 밖으로 나간다 해도 시장 정도였다.

    그런 아이를 제멋대로 데리고 나와도 될까? 올리비아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인데? 에이든은 그게 올리비아에게 좋은 일이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백작가에서 머물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올리비아가 그를 기억하지 못해서였다. 아둔해서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 싹 잊어버렸을 줄이야.

    게다가 올리비아는 불합리한 자신의 상황을 전부 수긍하는 성격이었다. 에이든의 욕심대로 ‘넌 이제부터 내 거야. 같이 가자.’ 하는 순간 그건 일곱 살 아이에게 사탕 하나 쥐여 주며 ‘따라오면 더 맛있는 거 줄게.’라고 속삭이면서 납치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순진함과 멍청함을 모두 좋아했지만 조금 답답하고 막막했다. 짜증스러운 한숨을 푹 내쉬는 순간. 느릿하게 움직이던 마차의 움직임이 덜컹하며 멈췄다. 일부러 싸구려 마차를 대여했더니 승차감이 좋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마부의 알림이 들려왔다. 에이든은 문을 열고 내렸다. 그의 정체를 눈치챈 듯 긴장한 경비병들을 내버려 두고 마부에게 잔금을 치렀다. 마차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경비병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거지?”

    “네?”

    경비병 교육도 제대로 안 하는 건가? 한 가문의 얼굴인 경비병들이 저러니 에이든은 백작가의 꼴이 우습기만 했다.

    “손님이 방문했다. 알아서 안내하든, 손님의 정체를 묻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에이든의 지적이 있고 나서야 경비병이 제 실수를 자각했다.

    “아! 누구십니까?”

    에이든은 저택 내에 백작의 둘째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다 퍼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경비병이 보였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챘으면서 저리 나오니 감정이 역류했다. 백작이 얼마나 홀대하라 했으면 경비병까지 이리 군단 말인가.

    “알아챘으면서 형식 따지는 것도 우습지 않나? 열지?”

    에이든은 싸늘하게 경비병을 쏘아보았다. 올리비아를 보던 다정함과 인간미는 조금도 없었다. 오만한 귀족의 고뇌가 온몸에서 드러났다. 저 쓸모없는 경비병의 목을 칠까, 말까? 에이든의 번들거리는 눈동자에서 뿜어지는 위압감에 놀란 경비병이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첫날부터 피를 보기 싫어 그냥 넘어가는 것이니.”

    첫날부터 피를 보았다는 것을 알면 올리비아가 겁먹을지도 모르니까, 에이든은 한 번은 참기로 했다.

    그는 사실 굉장히 못됐다. 살면서 남의 비위를 맞출 이유가 없었다. 배경이 잘났고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삶에 미련이 없었으니까 두려울 게 없었다.

    믿었던 아버지의 추악한 배신을 뒤늦게 알아챈 순간, 에이든의 삶 자체가 변했다. 세상엔 위선 덩어리들이 넘쳤다. 그렇게 거짓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더 직설적이고 제멋대로 굴었다. 마음껏 망종을 떨며 살다가 어쩔 수 없는 강자를 만나면 까짓것 죽으면 그만 아닌가. 괜히 점잖은 척하는 게 더 어쭙잖아 보였다. 제 아비처럼.

    에이든은 정문을 지나 평화로운 정원을 느릿하게 걸었다. 정원 또한 주인 성격처럼 위선적으로 보였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또 머물러야 한다니.

    “돌아오셨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에이든 도련님.”

    현관에 마중을 나온 노년의 집사가 감격하며 인사했다. 자글자글한 주름 가득한 얼굴에 기쁨이 드러나 있었다. 집사의 가문은 대대로 백작가에 충성을 바쳐 온 사람이었고 그만큼 정통성을 중시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환대가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이 백작이 총애하는 이복형을 후계자로 밀어도 집사만큼은 에이든의 편이 될 것이었다. 그걸 주장하듯 집사는 절대 에이든을 둘째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백작가의 장자는 에이든이라는 것처럼.

    “오랜만이야, 잭슨. 많이 늙었네. 할아버지 다 됐어. 은퇴해야 하는 거 아니야?”

    7년 전과 비교하면 사뭇 늙은 얼굴이었다. 친절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목소리였는데 잭슨이 흐뭇하게 웃었다.

    “제가 은퇴하기 전에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이 늙은이가 도련님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여지가 있는 잭슨의 말을 에이든은 모른 척했다. 그리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역시나 가족이라는 작자들은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그건 바라지도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올리비아를 찾았다. 본채라 그런지 하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얼굴을 빨리 보고 싶은데.

    “인사는 여기까지 하고 별채로 가지.”

    길게 끄는 것이 싫어 별채로 걸음을 옮기려 했더니 집사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제지했다.

    “주인님을 먼저 만나 뵈어야지요. 집무실에 계십니다.”

    에이든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저택에 있으면서 아버지는 7년 만에 만난 아들 마중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떠날 때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사람에게 무얼 바랄까. 그따위 인간을 왜 만나야 하는지 소리치고 싶었지만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할 인물이긴 했다.

    저택에 머무는 내내 잭슨에게 괴롭힘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만나는 것이 나았다. 에이든이 묵묵히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자 잭슨이 기쁜 얼굴로 뒤따랐다.

    “그런데 어째서 별채에서 머무시겠다는 겁니까? 본채가 싫으신 겁니까?”

    본채가 싫다? 싫다고 느낄 감정도 없었다. 에이든은 별채에서 머물겠다는 말을 먼저 한 적이 없었다. 그저 귀환 소식을 서신으로 알렸을 뿐이고, 백작은 총관에게 별채를 치우라 알렸다. 알아서 꺼지란 소리였다.

    틀어박혀서 자신들의 생활에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를 모를 만큼 에이든은 둔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활해서 탈이지. 에이든의 눈동자에 음험함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현자의 숲은 조용한 곳이야. 보다 사람이 적은 장소가 머물기엔 좋아.”

    잭슨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 같아 에이든은 대충 둘러댔다. 소문만 들었지 진짜 현자의 숲에 대해 알 수 없는 잭슨은 이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무실 문 앞에서 잭슨이 노크했다.

    “무슨 일이지?”

    안쪽에서 들리는 희미한 질문에 잭슨이 문을 열고 들어가 백작에게 아뢨다.

    “에이든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그것에 답하는 것이 뭐가 그리 힘든지 백작의 침묵이 길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에이든의 눈이 서늘해졌다. 얼굴도 보기 싫다는 건가? 이놈의 집구석은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들여보내게.”

    백작의 허락이 들려오고 잭슨이 나왔다. 그도 백작의 행동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여기서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에이든은 일부러 웃음을 지어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외로 백작은 서류를 보는 것이 아닌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7년 만에 만나서 그런가, 낯선 타인을 보는 기분이다. 반가움조차 없었다. 그건 백작도 마찬가지인 듯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외모는 달라도 성격은 닮은 것인가?’

    에이든은 어머니를 쏙 빼닮아 여인처럼 보일 정도로 선이 가늘고 아름다웠다. 남자다움이 곳곳에 배어 있는 백작과는 달랐다. 자신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백작의 앞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어찌하여 벌써 왔냐고 탓하는 듯한 백작의 말투에 에이든은 반사적으로 냉소 지을 뻔했다. 어찌 사람이 이리 무정할 수 있을까.

    “제가 일찍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딱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그런 의도가 아니긴.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곤혹스러워 미치겠으면서 그러지 않은 척하는 백작의 행동이 가증스러웠다.

    7년 전 에이든이 저택을 떠난 건 반쯤은 쫓겨나다시피 한 거였다. 새로운 식구가 들어온 뒤로 날이 갈수록 저택 내에서 에이든의 입지가 좁아졌다. 새어머니란 작자가 크게 패악을 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에이든을 새 식구로 여긴 건 아니었다.

    그녀는 에이든을 어려워하는 티가 났고 백작은 그 상황을 중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백작이 침묵하자 이복형이란 작자는 슬금슬금 에이든을 괴롭혔다. 처음엔 유치한 짓이라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계속 쌓이자 에이든도 울화가 쌓여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 남의 집에 얹혀사는 느낌이었다. 지긋지긋해서 이 집구석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 마음이 강해졌을 때, 올리비아에게 욕정 한 상황까지 더해져 에이든은 현자의 숲으로 떠나는 걸 선택했다.

    “현자의 숲을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들었다.”

    현자의 숲은 지혜를 탐구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마법을 배우는 이들이 모인 마탑이나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모인 공방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숲속에 모여 살다 보니 현자의 숲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천재들은 은둔자 성향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사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현자의 숲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아야 했다. 어떠한 분야로든 천재임을 입증한 것이니까. 그런 곳에 에이든이 들어갔음에도 백작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려의 눈빛을 했던 걸 기억했다.

    현자의 숲은 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나오는 게 더 힘들었다. 좋은 방향으로는 어느 정도 이상의 성과를 내 현자의 숲 내에서 칭호를 얻거나, 거절하기 아까울 정도로 괜찮은 제안을 받아 취직을 해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완벽한 구제 불능으로 찍혀 더 발전 가능성이 없단 판정을 받아 쫓겨나야 했다. 그 세 가지 경우가 아니면 속칭 졸업이 불가능해서 현자의 숲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백작의 속내가 복잡할 것이다.

    어떤 이유로 에이든이 7년 만에 나올 수 있었는지 바삐 계산하고 있겠지. 7년이면 적은 시간은 아니지만, 현자들 중에서 두각을 내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백작은 지금 에이든의 등장이 곤란한 거다. 작위를 첫째 아들에게 수월하게 넘겨줄 수 있었나 싶었는데, 위협이 되는 훼방꾼이 등장한 것 때문에 이리 심기가 불편한 것이겠지. 에이든은 가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백작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쓸모없다 내치더군요.”

    하지만 에이든은 조롱 대신 백작이 원하는 말을 던져 주었다. 그는 귀찮아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자 백작이 낮은 한숨을 느리게 쉬었다.

    “앞으로 어찌할 것이냐.”

    묵직한 백작의 질문에 에이든은 슬쩍 웃었다.

    “뭘 그리 서두르십니까? 조금 쉬다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피곤하군요.”

    진중하게 살피는 백작의 눈빛을 에이든은 피하지 않았다. 백작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낮게 쉬고 말했다.

    “알았다. 네 말대로 피곤할 터이니 나가 보아라.”

    백작의 축객령에 에이든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새어머니라는 사람에게 인사하란 소리도 안 한다. 서운한 것도 없고 억울한 것도 없다. 지금처럼 남처럼 사는 게 차라리 나았다. 오히려 백작저를 떠날 때까지 다시 만날 일이 없었으면 더 좋겠다.

    에이든이 집무실을 나서자 앞에서 기다리던 잭슨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가 별채로 안내하겠습니다.”

    에이든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말할까 했지만 죄스러워하는 잭슨의 표정에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진정한 죄인은 저리 당당한데 아무 잘못 없는 잭슨이 저런 얼굴을 하는 상황이 웃겼다.

    빨리 이 더러운 기분을 털어 버리기 위해 올리비아나 봤으면 좋겠다. 에이든은 곧 그녀를 정식으로 만난다는 생각에 들떴다. 발걸음도 가볍게 잭슨의 뒤를 따랐다.

    별채의 주인이 도착할 것을 알고 있던 별채의 식솔들이 입구에서 전부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 하나 빼고 전부 낯선 얼굴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익숙한 얼굴이 제일 필요 없다 여긴 하녀였다.

    “이들이 에이든 도련님을 모실 겁니다.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제게 언질을 주십시오. 인사들 해라. 에이든 도련님이시다.”

    잭슨의 소개에 차분하게 나서는 여인들을 보며 에이든은 표정을 굳혔다. 대기하고 있던 네 명의 여인 중 익숙한 얼굴은 애니였다. 올리비아를 괴롭히던 짜증 나는 하녀. 저 쓸모없는 하녀도 이곳에 있는데, 올리비아가 없다? 어쩐지 이상했다.

    에이든은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 백작가에서 중용하는 식솔은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일을 못하는 이들 또는 눈밖에 벗어난 이들을 별채에 배정했을 거다. 그래서 당연히 있을 거라 여긴 올리비아가 없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 일을 시도 때도 없이 떠넘기던 저 간악한 년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기대했던 상황이 무너지자 에이든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백작과 대화를 나눠야 했던 일보다 더 짜증 나는 감정에 에이든은 애니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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