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녀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콜린스 백작가의 하녀다.
백작가의 권력 구도를 그리면 하녀는 제일 낮은 계층에 속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중에서도 최하위에 있었다. 즉, 하녀들의 하녀라고 볼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늘 청소와 집안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게 그녀의 본분이었으니까. 오늘도 전쟁과도 같은 설거지를 막 끝내 갈 무렵이었다.
“다 해 가는구나? 그럼, 이것도 부탁해.”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제 몫을 하나도 건들지 않은 선배 로라가 일을 떠넘겼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시에나가 얌체같이 말했다.
“내 것도.”
제 앞에 쌓이는 접시를 보고 올리비아는 곤란해했다. 다른 때였으면 별말 없이 해 줬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안 됐다.
“언니 저 오늘은 빨리 나가 봐야 하는데요.”
올리비아의 서투른 거절에 로라는 눈을 크게 깜빡이며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그래서?”
“아시잖아요. 뒷정리 빨리 마치고 오라고 하녀장님이 그러셨어요.”
“그래. 빨리 마치고 오라고 하셨지. 그런데 어차피 설거지는 네 일이잖아? 얼른 끝내고 가면 되겠네. 왜 하지 않으려고 꾀를 부리니?”
너무나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것처럼 반박하는 그 음성에 올리비아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정확히는 로라, 시에나와 올리비아 셋에게 내려진 일이었지만, 언제나 모두의 몫까지 혼자 해 왔던 그녀였다.
로라와 시에나는 일을 미루는 게 익숙했고 올리비아는 묵묵히 일해 왔다. 일을 혼자 해야 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제시간에 끝내지 못할까가 걱정이지. 오늘은 특별히 하녀장님이 부른 날이다. 그녀의 엄한 얼굴이 떠올라 올리비아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로라와 시에나는 설거지를 도와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제 몫을 끝냈다고 그냥 갔다가 혼나는 것은 보나 마나 그녀였다. 이 둘이 한통속이 되어 올리비아가 제 일도 안 하고 도망갔다고 주장할 테니까.
그리고 늘 부족해서 혼나는 그녀와 다르게 로라는 하녀장님이 어여삐 여기는 하녀 중 하나였다. 다른 고위 귀족가에서 일하며 잔뼈가 굵어진 로라는 하녀장님의 비위를 참 잘 맞췄다. 늘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몇 번씩 가르침을 받고, 수시로 혼나는 그녀와 다르게.
“뭐 해? 빨리하면 금방 끝날 거 아니야. 계속 그렇게 늑장 부리다가 진짜 혼난다?”
로라의 재촉하는 음성에 올리비아는 결국 둘의 몫을 끌어다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하녀장님이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제대로 일하는 것을 본 게 손에 꼽는다. 아니, 이들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일하는 모두가 그랬다.
즉 모두의 일이 자신의 일. 고민하기보다 빨리 일을 마치는 게 나았다. 올리비아가 혼자 열심히 일하는 동안 로라와 시에나는 속닥거리며 수다를 떨기 바빴다.
“으, 오늘 힘들어요. 데이빗 도련님 연회 때문에 바쁜 건 알지만, 오늘따라 하녀장님이 깐깐한 거 같아요. 오전에 혼났어요.”
오전에 혼난 것이 아직도 속상한지 시에나가 고자질하듯 투덜댔다.
“그럴 수밖에. 이번에 더 신경 쓴다고 하더라고.”
“매해 돌아오는 생일인데 뭘 더 신경 쓰신대요?”
“이거 윗급만 아는 비밀이야. 너도 비밀로 해야 해.”
시에나의 이죽거림에 로라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비밀이라는 단어에 시에나가 귀를 기울였다.
“뭔데요?”
“그분이 오신다더라고.”
“그분?”
허영심 있는 로라의 기분을 맞추듯 시에나가 추임새를 넣었다. 자신 혼자만 정보를 알고 있다는 우쭐함에 신이 난 로라가 뽐내며 이야기했다.
“현자의 숲으로 떠났던 둘째 도련님.”
“어머, 가문에 둘째 도련님이 있어요?”
아직 신입이라 저택의 과거 사정에 어두운 시에나가 놀라 크게 외쳤다. 다급하게 로라가 시에나를 잡아끌며 쉬쉬거렸다.
“조용히 해. 큰 소리 나서 좋을 거 없어.”
‘아, 맞다. 백작님께 아들이 두 분 있었지.’
올리비아는 로라의 말에 둘째 도련님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집 나가신 지 하도 오래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 도련님이 백작가로 돌아오시나 보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기에 설거지에 열중했다.
로라가 시에나의 큰 소리에 누가 들었을까 봐 주위를 둘러 살폈다. 옆에서 올리비아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 쓸 필요 없는 존재니 무시하고 시에나에게 넌지시 알렸다.
“둘째 도련님은 첫째 도련님과 마님이 달라. 전 부인 소생이지.”
모시는 상전의 사생활을 듣게 된 시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입을 가렸다. 콜린스 백작님이 마님을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 저택 내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후처이고 무려 평민 출신의 마님인데도 끔찍하게 아꼈다. 그래서 시에나 본인도 부러움으로 몸부림을 쳤다. 어떻게 백작님의 눈에 띌 수 없을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백작님에게 둘째 아들이 있었다고? 그것도 전 부인? 부족한 마님의 출신 성분과 백작님의 친자가 아님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똑 닮은 첫째 도련님의 외모. 시에나의 머릿속에 귀족들의 뻔한 치정극이 그려졌다.
백작님이 정실을 얻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통 후계자를 얻었지만, 알고 보니 결혼 전부터 그에게 숨겨 둔 여인이 있었고 이미 낳은 자식도 있었다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가설. 그리고 전 마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출신 성분의 부족으로 결혼하지 못했던 정부를 데리고 들어와 정실로 앉힌 거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가십거리인가. 원래 남의 이야기가 제일 재밌는 법이다. 시에나가 눈을 반짝였고 로라도 고소를 머금으며 제대로 된 설명을 시작하려 했다.
“올리비아! 식사 뒷정리를 온종일 하는 거니? 오늘 바쁘다고 말했잖아!”
갑자기 난입한 인물만 없었다면 로라는 신나서 떠들었을 거다. 주방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리자 로라와 시에나는 재빠르게 입을 닫았다. 비밀을 이야기하려 집중한 상태라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오히려 설거지에 열중하느라 다른 부분에 신경 쓰지 못한 올리비아가 문제였다. 하녀장님의 불호령에 깜짝 놀라 그녀는 들고 있던 접시를 놓쳤다.
쨍강! 그 날카로운 소리에 수석 하녀장의 눈길이 사납게 쏟아졌다.
“또 깼니? 올리비아,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니?”
추궁하는 말투에 올리비아는 주눅 들었다.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 죄송! 그 말을 듣는 것도 지겹다.”
재빠른 사죄에도 하녀장은 답답하다는 기색이었다. 올리비아는 생긴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데 맹하게 일하는 꼴을 보면 미칠 것 같았다. 하녀 생활 30년 동안 이렇게 일 못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올리비아의 앞에 쌓인 접시를 보더니 수석 하녀장의 표정이 더없이 험악하게 변했다.
“아니, 이게 뭐야? 아직도 설거지를 못 끝낸 거니? 봐 봐, 로라와 시에나는 전부 끝냈는데 넌 아직도 그대로인 거야? 어휴, 속 터져. 일어나!”
“네? 네!”
잔뜩 얼은 올리비아가 명령에 따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올리비아는 지금부터 다른 일을 해야 하니 너희가 대신 마무리 좀 하렴. 아둔한 애 때문에 너희가 고생이다.”
하녀장은 로라와 시에나에게 남은 설거지를 명령하며 올리비아를 무시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애초에 두 사람이 올리비아에게 일을 떠넘겨 혼자 진행하느라 늦은 거지만 로라와 시에나가 불리한 일은 입을 싹 닫아 버리니 하녀장이 그런 사연을 알 턱이 없었다.
“바쁘면 서로 도와야죠. 여긴 저희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싹싹한 로라의 대답에 하녀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로라를 특히 아꼈다. 저 멍청한 올리비아보다 일도 잘해, 말도 예쁘게 해. 일을 시키면 온종일 걸리는 누구와 천지 차이 아닌가. 이렇게 백작가 전체가 바쁜 시간대엔 눈치껏 일도 돕고. 로라의 기특함에 올리비아 때문에 짜증스럽던 하녀장의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이미 제 몫을 하느라 힘들 텐데, 남의 일까지 떠맡겨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금방 끝낼 수 있어요. 여기까지 오실 정도면 많이 바쁘시잖아요. 어서 가 보세요.”
“내 참, 정신이 없다.”
하녀장은 로라에게 잘 부탁한단 말을 한 후 올리비아를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따라오렴.”
하녀장이 앞장서 걸었고 그녀가 등을 돌린 사이 로라가 올리비아의 어깨를 밀쳤다. 몸이 휘청였다. 올리비아가 억울한 눈빛을 보내니 오히려 로라가 도끼눈을 떴다. 짜증 가득한 표정은 왜 진즉 다 못해서 자신이 일하게 하느냐는 구박일 것이다.
여기서 소리를 냈다가 혼나는 것은 그녀였다. 로라의 이런 괴롭힘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습관 된 대로 입을 꾹 다물었더니 로라가 가소롭다는 얼굴을 했다.
“왜 따라오지 않니? 빨리빨리 못 움직여? 어찌 걸음도 이리 굼뜨니?”
먼저 걷던 하녀장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해 뒤돌았다가 그대로 서 있는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외쳤다.
“지금 가요.”
“어휴, 도대체 언제쯤 제 구실을 할지. 어릴 때부터 일을 시켜도 발전이 없어.”
하녀장이 답답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한 번도 올리비아가 시간에 맞춰 일을 끝내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사실 올리비아가 일을 늦게 끝내는 것은 늘 다른 사람의 일을 떠맡아 했기 때문이다.
로라와 시에나가 했던 행동을 다른 하녀들도 똑같이 했고, 그녀는 늘 많은 일을 혼자 해야 했다. 가끔은 일을 제시간에 못 끝내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수면 부족으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또 혼났다. 그걸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올리비아는 하녀장님을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본관을 나서서 하녀장님이 올리비아를 끌고 온 곳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방치된 별채였다. 깔끔하고 화려한 본관과 확연히 다르게 을씨년스러웠다. 백작가의 건물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본관 사람들이 금기시하는 곳이어서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 덕분에 전혀 관리되지 못해 아름다운 외관이었을 별채는 입구부터 초라했다.
잡초가 무성한 길을 뚫고 별채 정문에 다다른 하녀장님이 열쇠로 문을 열었다. 먼지가 쏟아져 나왔고 퀴퀴한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오늘부터 여기 청소를 해 놔. 쓸 수 있게끔. 일주일 동안 전부.”
입구부터 먼지가 쓸어내야 할 정도로 많이 쌓여 있었다. 안쪽은 더 심할 터였다. 거기다가 본채에 비하면 초라해도 명망 있는 백작가의 건물이라 작지 않은 크기였다. 무려 3층짜리 건물. 이 넓은 곳을 혼자 청소하라고?
“저 혼자요?”
올리비아가 놀라서 되물었더니 하녀장이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지금 말대꾸하는 거니?”
감히 네까짓 게. 하녀장님의 분노에 올리비아가 움츠러들었다. 보통은 아무 말 없이 일을 시작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힘들었다. 이 넓고 더러움이 넘쳐나는 건물 청소를 도저히 일주일 안에 끝낼 자신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 이 넓은 곳을 어떻게 저 혼자…….”
“그게 말대꾸지 뭐야? 곧 첫째 도련님 생신이라 다들 바쁜 거 모르니? 하녀들 총동원 중이라고.”
바빠 죽겠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기냐는 하녀장님의 태도에 올리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저런 표정일 때의 하녀장님은 가차 없었다. 데이빗 도련님 생신 연회 준비로 정신없어서 더 날카로우신 것 같았다. 이번엔 성대하게 열 거라더니 할 일이 많으신가 보다. 도대체 얼마나 크게 하려고 벌써 이러는지.
“아무튼 너는 시키는 일이나 해. 낡아서 손봐야 할 건 집사님께 알리고. 중간에 사람 남으면 도와줄게. 백작가의 혈육이 사용할 거니까 대충대충 하지 말고 깨끗하게 하렴.”
말을 마친 하녀장님은 올리비아의 손에 별채 열쇠 꾸러미를 주고,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쌩 떠나 버렸다. 하녀장의 무성의한 태도만으로 이곳을 사용하게 될 이의 백작가 내에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올리비아는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다.
그저 찾아오는 막막함에 먼지가 쌓인 별채 안쪽을 한번 보고, 잡초가 무성한 정원을 내다보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일주일 밤을 꼬박 새우면 일을 끝낼 수 있을까?
“콜록! 콜록! 먼지 구덩이다. 우선 환기부터 하자!”
올리비아는 우울해할 시간도 없어 그냥 바삐 움직이기로 했다.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모든 창문을 열고 다니며 일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먼지가 날렸다.
오래 안 써서 바닥이 파인 곳이 있었고 곳곳에 쥐가 갉아먹은 흔적도 있었다. 저런 수리는 혼자 못해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완전히 부서져 전문 인력이 필요한 곳을 확인하고, 필요한 물품을 헤아려 나갔다.
보면 볼수록 한숨이 나온다. 커튼이고, 시트고, 카펫이고 천 종류는 전부 먼지가 엉켜 새것으로 바꿔 줘야 했다.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아 다 외우기도 힘들 지경이라 아까운 종이와 연필을 꺼내 들고 일일이 적어야 했다.
올리비아는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하녀치고 특이하게도 글을 조금 읽고 쓸 수 있었다. 멍청하다는 평을 듣는 것치고 독특한 일이었다. 물론 아주 어릴 때 배운 터라 어려운 문자는 힘들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수준만 적고 읽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시절 이것도 모르냐고 혼나면서 배웠던 거 같은데, 누구에게 글을 배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연필과 종이도 하녀가 소유하기엔 굉장히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녀의 물건임은 확실한데 누구한테 받았는지 잊어버렸다. 그래도 유일한 값진 물건이라 올리비아의 보물이었다.
창문을 전부 열고 빛을 가리던 커튼들을 떼어 내고 나니 어둡던 건물 안이 환해진 기분이다.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 올리비아는 본관으로 향했다.
그녀에겐 필요한 물품을 제때 내주는 경우는 드물어 여러 번 간청해야 받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과연 물건을 내줄지는 미지수지만.
올리비아는 본관 1층을 담당하는 선임 하녀 한나를 찾았다. 데이빗 도련님의 생신 연회가 거하게 열리긴 하는지 다들 쓸고 닦고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 올리비아는 몇몇 시녀들과 눈이 마주쳐 꾸벅 인사했다. 하지만 화답하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익숙하게 그녀를 무시했다. 무시도 하루 이틀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기에 올리비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백작가에 고용된 그들과 다르게 그녀는 백작가의 자산인 노예였으니까. 이런 취급은 익숙했다.
백작가에서 같이 일한다고 해도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평민 또는 몰락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 어느 정도 소양을 쌓고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노예였던 어머니로 인해 자연스럽게 노예가 된 올리비아와는 달랐다.
그녀는 최하층민이라는 소리였다. 남들보다 더 일하는 게 당연했고, 무시당하는 게 일상이었다. 불만을 말해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워낙 무딘 터라 불만도 잘 안 생기지만. 1층을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원하는 이를 발견한 올리비아가 쪼르르 달려갔다.
“선배님, 필요한 물품이 있어서요.”
“필요한 물품? 바빠 죽겠는데 무슨 필요한 물품?”
올리비아의 선임 하녀인 한나였다. 그녀의 표정엔 네가 도대체 뭐가 필요하냐? 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선임 하녀들은 일하다 비품이 필요하면 물품 관리 직원에게 직접 요청하면 되지만, 올리비아는 그게 안 됐다. 선임 하녀인 한나에게 요청해야 했고 그럼 그녀가 물품을 구해다 주었다.
한나는 올리비아가 이렇게 직접 찾아올 때마다 귀찮았다. 하필 자신의 밑에 이런 우둔한 아이가 배정될 것은 뭐란 말인가. 자신 같은 고급 인력이 아둔한 하녀의 사소한 일까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짜증 났다. 특히 이렇게 바쁜 날 일을 들고 오니 더 그랬다. 그런 분위기를 읽지 못한 올리비아는 애써 외운 것들을 잊어버리기 전에 쏟아 냈다.
“커튼 스무 개, 시트 일곱 개, 카펫 스무 개, 식탁보…….”
목록을 적은 쪽지를 건네주면 되지만 종이와 연필은 올리비아에겐 과분한 물건이었다. 하녀인 그녀가 그런 고급 물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빼앗길지도 몰랐다. 아니면 도둑으로 의심받거나. 아무리 생각 없는 그녀라도 그걸 알기에 남들 앞에서 종이와 연필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 최대한 몰래 꽁꽁 숨겨 두었다.
“잠깐! 물건이 한둘이 아니잖아. 그런 게 왜 필요해?”
줄줄이 쏟아지는 올리비아의 요구가 과하다 여긴 한나가 말을 끊었다. 한나의 얼굴엔 황당함이 넘쳐났다. 아무도 올리비아에게 책임이 막중한 일을 맡기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이렇게 많은 물품을 필요로 할 일이 없었다.
“별채에 필요해서요.”
“별채?”
한나가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네. 하녀장님의 명령으로 별채 청소를 하고 있어요.”
“아! 그 별채…….”
뒤늦게 두 번째 도련님이 돌아올 거란 말을 떠올린 한나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별채는 전대 백작 부인이 백작가로 시집와서 만든 그녀의 공간이었다. 사소한 것까지 그녀의 손길이 닿았고 생전에 별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백작 부인은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별채에서 머물렀을 정도였다.
그만큼 전대 백작 부인의 흔적이 잔뜩 묻어서일까? 백작님은 별채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싫어했다. 누가 별채에 들어가는 모습만 봐도 정색을 했다. 백작님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다들 별채를 멀리했고 어느 순간부터 별채는 둘째 도련님만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분마저 저택을 떠나자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관리도 하지 않아 지금은 흉가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별채의 주인인 둘째 도련님이 돌아온다고 서신을 보내왔고, 때문에 청소를 시작해야 했다. 하녀들이 모두 난색을 표했다 하더니. 결국, 제일 만만한 올리비아에게 일이 돌아간 모양이다.
설마 그 넓은 곳을 혼자 청소하나? 흘긋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필요한 물품을 얻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꼴이란 비루먹은 망아지 같다.
‘아, 얜 왜 이렇게 꼴 보기 싫을까?’
올리비아는 외부에서 데려온 노예 출신임을 증명하듯 이질적인 외모를 가졌다. 미인임이 분명하지만 핏줄이 보일 것 같은 투명한 피부도, 왕국민에게선 보기 힘든 은색의 머리카락도 꺼림칙했다. 그러다 보니 한나는 올리비아와 마주하는 것 자체가 그냥 거슬리고 싫었다.
어쨌든 그러면 올리비아가 별채를 혼자 청소하는 것이 맞을 거다. 백작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올리비아에게 물건을 받아 오라 시키는 것보다 직접 움직이는 것이 빨리, 제대로 지급될 거라는 것은 다들 알 테니까.
올리비아의 맹한 얼굴을 보니 비웃음만 나온다. 멍청하긴, 그 넓은 곳을 왜 혼자 청소하게 되었는지 생각도 해 보지 않을 애다. 그저 시키니까 하는 거겠지. 이런 아둔함도 한나가 올리비아를 싫어하는 데 한몫했다.
바빠 죽겠는데 가망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일에 열중해 백작님과 마님, 첫째 도련님 눈에 드는 것이 훨씬 낫다. 한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바빠서 못 움직이니까, 물품 담당자한테 직접 가서 말해.”
“네? 하지만 제가 가면 혼날 텐데요.”
“괜찮을 거야. 지금 일손이 부족한 때 아니니, 이해해 주시겠지. 어머, 세릴 거기 그렇게 닦으면 안 돼! 그리고 그 액자 위치는 거기가 아니잖아.”
혼나도 올리비아가 혼나지 자신이 혼나지는 않는다. 한나는 더 말 걸지 말라는 듯 몸을 돌려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관심을 끊은 한나의 태도는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올리비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사님이 계신 집무실을 찾아 걸었다. 직접 요청하면 분명히 혼날 텐데.
똑똑-
사무직 직원들이 일하는 집무실 문을 두드렸음에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다시 노크를 하고 잠시 뒤에 문을 열었다. 물품 지급 담당자인 카밀라가 정신없이 서류를 보며 계산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 혼자였고, 집사님과 부집사님은 안 계셨다. 올리비아는 들어오라 허락을 듣기 힘들 것 같아 조심히 카밀라를 향해 다가갔다. 얼마나 바쁜지 사람의 인기척에 고개도 들지 않았다.
“필요한 물품이 있어서 왔습니다.”
“물품? 하필 사람 없을 때 와서는…….”
목소리에 짜증과 귀찮음이 가득했다. 같이 일하는 담당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찾아올 건 뭐람. 카밀라는 하던 일을 멈추고 물품 지급지를 찾았다.
“뭐가 필요한데?”
“커튼 스무 개, 시트 일곱 개…….”
올리비아는 잊어버릴까 봐 끊임없이 되뇌고 있던 물품을 막 쏟아 냈다.
“잠깐, 무슨 물건이 이렇게 많이 필요해? 대충 다 지급되었잖……. 어라? 올리비아? 왜 네가 직접 왔어?”
무의식적으로 받아 적던 카밀라가 엄청난 양에 놀라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과한 지급 요청에 따지려 고개를 들은 카밀라는 올리비아를 발견한 순간 표정을 굳혔다. 물품 지급지를 도로 넣으며 내쫓으려는 기색에 올리비아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한나 하녀님이 바쁘시대요.”
“아무리 바빠도 일에 순서가 있고, 규칙이 있지. 너한테 직접 물건을 내주면 내가 혼나는 거 모르니?”
큰 가문일수록 알게 모르게 사라지는 물품 손실률이 높았다. 그래서 백작가에서는 보유 중인 비품이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꼼꼼하게 관리했다. 일부러 물품을 지급받는 것도 믿을 만한 선임 하녀만 가능하게 했다. 그걸 어기고 일했다가 문제가 생겼을 시 혼나게 되는 것은 지급해 준 관리자 카밀라였다.
“한나가 바쁘면 다른 사람더러 오라 그래.”
소문난 덜떨어진 애한테 일을 맡겼다가 나중에 치도곤받기 싫은 카밀라는 올리비아에게 물건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별채를 저 혼자 청소하는 중이라 도와주실 분이 없어요.”
올리비아를 내쫓고 제 할 일을 하려던 카밀라가 이어진 설명에 움찔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작가의 일을 전부 처리하고 결정하는 집사와 함께 일하는 카밀라였다.
둘째 도련님이 돌아오시고 별채를 청소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알았다. 첫째 도련님 연회에 버금가는 큰 사건이었으니까.
“별채 청소? 그걸 너 혼자 담당해?”
“네. 데이빗 도련님 연회 준비로 바쁘다고 하셔서요. 그러니까 물품 그냥 주시면 안 될까요?”
별채의 규모와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상태를 보면 혼자 청소하는 것은 절대 무리일 텐데. 그걸 저 올리비아에게 홀로 맡겼다니? 그리고 이 애는 그걸 곧이곧대로 받았단 말인가?
참 딱하다. 하녀장의 태도가 너무한 것 같기는 하지만 자신이 참견할 바는 아니었다. 못하겠으면 자기가 인원을 더 보충해 달라고 하겠지.
그것보다 물품이 문제다. 그냥 내주자니, 걱정되는데. 하지만 올리비아는 일 처리가 굼뜨고 느린 만큼 하는 행동도 우직했다. 물건을 뒤로 빼돌릴 생각은 못할 테니까 직접 지급해도 되지 않을까?
실제로 다들 바빠서 정신없기도 했다. 물품 지급이 늦어지면 별채 단장이 제시간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올리비아와 묶여 같이 골칫덩이 취급을 받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가망 없는 둘째 도련님이라고 해도 초반부터 밉보여서 좋을 일은 없었다.
카밀라는 말단 시녀로 들어와 집사의 일을 돕는 수석 시녀 자리까지 꿰찼다. 물건을 잃어버린 게 일을 못 끝낸 것보다 덜 질책당할 거라는 판단을 마쳤다.
“좋아. 필요한 물품 말해 봐.”
결론을 내린 카밀라가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올리비아가 표정을 활짝 피며 주섬주섬 필요한 것을 나열했다.
“우선 천 종류는 전부 새로 해야 해요. 커튼 스무 개, 시트 일곱 개, 카펫 스무 개, 식탁보…….”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잠깐! 뭐가 이렇게 많이 필요해?”
카밀라의 예상보다 필요 물품 수가 많아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별채가 낡은 건 알았다. 그래도 이 많은 걸 독단적으로 내주기엔 금액이 너무 컸다. 정색하는 카밀라의 표정에 올리비아가 울상을 지었다.
“별채가 생각보다 아주 낡았어요. 다시 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걸요.”
“그래도 너무 많아.”
카밀라가 손등으로 책상을 잘게 두드리며 올리비아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올리비아는 간절한 표정을 했다.
“커튼 같은 경우는 먼지로 더러워져 빨아도 때가 안 질 상태예요. 시트는 아예 해져서 구멍 뚫린 부분도 있고요.”
“안 돼. 그래도 맞춰 줄 수 없어. 우선 전부 반으로 줄여.”
올리비아의 설명에도 카밀라가 냉정히 잘라 냈다. 다시 입을 열려는 올리비아의 말을 끊으며 카밀라가 지급 일지를 적었다.
“커튼은 열 개로 줄이고, 시트는 반올림해서 네 개, 카펫은 열 개, 식탁보는 몇 개랬지?”
올리비아는 놀랐다. 잠깐 말했을 뿐인데 카밀라가 물품의 개수를 전부 기억했다. 자신은 개수가 틀릴까 봐 곱씹고 곱씹으면서 왔는데. 괜히 사무직이 아닌가 보다. 얼른 식탁보의 개수를 말하라는 카밀라를 보며 올리비아가 우물쭈물했다.
반으로 줄어들면 나머지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미 물품을 제대로 못 얻을까 봐 이것도 최대한 줄여 온 것이다.
“그렇지만……. 다 필요한 건데요…….”
올리비아의 반항에 카밀라가 짜증을 냈다.
“필요하다고 해서 모두 다 지급할 수는 없지. 이쪽도 한 달에 정해진 지출 금액이 있단 말이야. 가뜩이나 큰 도련님 연회 때문에 새로 사들인 것도 많아서 이번 달 예산도 부족한데, 너까지 왜 이러니?”
“죄송해요.”
올리비아의 잘못은 아니지만 카밀라의 지적하는 말에 어쩐지 잘못한 기분이 들어 사죄했다. 그러자 카밀라가 언짢은 표정으로 혀를 한 번 차고 좋게 다독였다.
“쓸 만한 것은 빨아서 쓰고, 보이는 부분 우선으로 채워.”
“네? 보이는 부분이요?”
큰 눈을 깜빡이며 우둔하게 물어보는 올리비아 때문에 카밀라는 답답했다. 알아서 수단 좋게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얼굴은 웬만한 귀족 저리 가라 예쁘장하게 생겨서 잘만 하면 하녀장님의 귀염을 받을 수 있을 터인데, 저렇게 답답하게 구니 온갖 구박을 다 받는 것 아닌가. 일하는 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도련님이 사용할 곳 같은 부분 위주로 새것을 쓰라고. 하녀들이 쓰는 곳, 도련님이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장소는 헌것을 쓰고. 그렇게 시간 끌다가 다음 달에 다시 지급 요청해 봐. 그땐 물건 내주는 게 가능할 테니까.”
사실 백작가의 직계 자제가 쓸 별채를 이렇게 관리하면 안 되지만 카밀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아들도 다 같은 아들이 아니지 않은가. 카밀라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첫째 도련님에게 관심을 쏟느라 아무도 둘째 도련님이 돌아오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겨도 그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올리비아의 잘못이다. 다들 카밀라의 편을 들어 주면 들어 줬지 올리비아의 편을 들어 주지는 않을 테니까. 일하는 방식을 설명해 줬는데도 맹하게 서 있는 올리비아가 답답해 카밀라는 아까 물었던 질문의 답을 단정 지었다.
“별채엔 식당이 하나니까 식탁보는 한 개면 되겠지?”
“네? 네!”
카밀라가 해 준 설명에 멍하니 있던 올리비아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어정쩡한 표정을 보아하니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지만, 거기까지 지적해 줄 수 없었다. 카밀라는 자신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아직 총관님이 시킨 연회에 필요한 물품 준비 서류도 다 작성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얘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었다.
“뭐 해? 나가 봐.”
“저……. 물품 지급은 언제쯤…….”
물건은 주지 않고 나가 보란 소리에 올리비아가 선뜻 자리를 뜨지 못했다. 답답하게 구는 그녀 때문에 카밀라가 한숨을 쉬었다. 백작가라고 물건을 쌓아 놓고 살지 않는다.
특히, 저런 천 종류는 계절이 바뀔 때 한꺼번에 필요한 수량을 조사하고 그에 맞춰 바꾸지 굳이 창고에 비축해 두지 않는다. 유행을 따르기도 하는 물품이니까. 즉각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건을 사 와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뭐 하나 싶었다.
“사람 시켜서 사 와야 해. 가서 기다려. 사흘 안에 보내 주라고 할게.”
나가라고 대놓고 손짓까지 하는 카밀라의 행동에 올리비아는 어설픈 자세로 밖으로 나왔다. 물건 준다고 약속했으니 주긴 하겠지? 절차를 무시하고 왔다고 크게 혼나지 않아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지급해 준다고 약속한 물건이 필요한 양의 반 토막이 나서 한편으로는 싱숭생숭했다.
시녀님 알려 준 대로 한다고 해도 물품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 참, 이러고 있을 시간 없었다. 새 물품이 와도 지저분한 지금 상태로는 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때가 탈 테니까. 물건이 도착하기 전에 얼른 청소해야겠다. 올리비아가 바삐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돌아와 별채를 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청소에 이골인 난 올리비아지만 이 정도로 엉망인 곳은 처음이다. 한숨을 쉬고 머릿수건을 한 후 큰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이런 먼지 구덩이 속에서 청소하다 보면 목과 코가 텁텁해지며 괴로웠다.
청소할 준비를 마친 올리비아가 먼지떨이를 들고 별채 안을 휘저으며 털고 다녔다. 먼지가 너무 많아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가구 위를 마구 치고 다녔다. 올리비아가 움직일수록 먼지가 뽀얗게 방 안을 떠다녔다.
주변이 둥둥거렸다. 먼지들의 여왕이 된 기분이다. 원래 어둡던 방 안에 먼지까지 떠다니니 기괴했다.
‘이렇게 더러운데 다 치운다고 해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미심쩍어하면서도 손은 정신없이 놀렸다. 먼지떨이로 1층과 2층의 먼지를 털어 내고 아픈 허리를 두드렸다. 먼지를 터는 행동만 한 시간 동안 했다. 아직 3층이 남았음에도 올리비아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미처 머릿수건으로 가리지 못한 머리에도 검은색 먼지가 뒤엉켰고, 입고 있는 하녀복도 제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숨이 가쁘고 얼굴 위로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입을 가린 수건을 푸르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지만, 허공이 뿌옇게 변한 걸 보니 밖에 나갔다 오기 전엔 그것도 글렀다.
벌써 해 질 녘이라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방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청소한다는 이유로는 등불을 주지 않을 것이다. 올리비아는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1차 청소는 해 두고 싶었다. 시간이 없으니 우선 3층의 먼지를 털고 쉬기로 했다. 그때 밖에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마셔야겠다.
별채 3층은 1, 2층에 비해 훨씬 낡았다. 그 전에 별채를 사용할 때도 3층은 방치되다시피 했었던 거 같았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계단을 조심해서 올라갔다.
아까 커튼을 전부 걷어 낼 때 본 바로는 첫 번째 방은 작은 서재였다. 아니면 집무실이던가. 어쨌든 책이 놓여 있고 책상이 있는 장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 책장의 먼지를 털려 할 때였다. 올리비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가 아닌 기분. 마치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올리비아의 심장이 쿵덕거렸다. 방치된 폐건물엔 유령이 산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갑자기 온몸의 감각이 쭈뼛 섰다. 한밤중에 같은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가 해 준 괴담이 기억났다.
‘그거 알아? 폐가에 가면 귀신이 산대. 주로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지!’
믿었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후 처참하게 살해당한 젊은 여인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험하게 죽으면 악귀가 되어 산 사람을 해치고 싶다는 본능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유령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데, 올리비아는 두려움에 먼지떨이를 손에 꽉 쥐고 몸을 휙 돌렸다.
“누구, 아악!”
열린 창문의 노을빛 사이로 어슴푸레한 사람의 형상을 발견한 올리비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진짜 귀신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혼비백산한 그녀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바닥에 잔뜩 쌓인 먼지로 옷이 더러워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 살려 주세…….”
“조용.”
낮은 사내의 목소리에 담긴 강압적인 분위기에 올리비아는 입을 합 다물었다. 명령을 듣는 게 익숙해서 나온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누구지? 말을 했으니까 사람인가? 그런데 이 시간에 별채를 방문할 사람이 있나?’
올리비아는 상대가 사람이라 간절히 믿고 싶었다. 혼란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러다가 어둠 속 상대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라 몸을 흠칫했다.
“누, 누구세요? 사, 사람인가요?”
잡아먹힐까 봐 무서워 올리비아가 외쳤다. 그러자 그림자의 형체가 움찔 흔들렸다. 다급하게 그림자가 한 발 가까워져 올리비아가 뒤로 물러섰다.
“오, 오지 마!”
“올리비…….”
놀라 시작했던 음성이 점차 작아져 뒷말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아 올리비아는 공포에 빠져들었다.
“저, 저를 아세요?”
해는 참 빠르게 져 순식간에 방 안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만큼 상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올리비아는 두려움에 쭈뼛 머리털이 곤두섰다.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귀신이 아니면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그녀를 알아보고 이름을 맞힌단 말인가. 자신은 사람의 형체밖에 안 보이는데.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도망가고 싶은데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지도 못했다.
‘잠깐, 여자 귀신이 아니니까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나? 남자 귀신도 사람을 잡아먹나?’
잠깐 생각이란 걸 하려 했지만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오는 움직임에 놀라 올리비아가 머리를 감싸 쥐며 제 속내를 외쳤다.
“히익! 저 맛없어요!”
큭, 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 듯했다. 올리비아는 눈을 꼭 감고 덜덜 떨다가 천천히 실눈을 떴다. 그림자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멈춘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녀가 진정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귀신이 아니라, 사람인가?’
“누, 누구세요? 정체를 밝히세요.”
올리비아가 잔뜩 경계해 외쳤다. 잡아먹으려 달려들지 않는 걸 보니 사람인 것 같았고, 그럼 무서울 게 없었다. 달려들면 이 먼지떨이로 때려 줄 테다. 올리비아가 크게 결심하며 손잡이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남자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무기가 없음을 알리는 자세로 천천히 거리를 좁혀 왔다. 가까워지자 남자의 얼굴을 얼핏 확인할 수 있었지만, 올리비아의 기억에 없는 낯선 사람이었다. 즉, 백작가의 식솔이 아니라는 것. 올리비아의 경계심이 더욱 강해졌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정체를 밝히세요!”
우습게도 제 입으로 외치는 순간 올리비아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둑해지자마자 인적이 으슥한 백작가를 방문한 낯선 손님.
‘백작가의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놈이구나!’
올리비아의 앙칼진 경고에 남자는 다시 멈춰 섰다. 남자의 느긋한 태도에 올리비아는 기가 막혔다. 도둑 주제에 어찌 이리 여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여기서 물건을 훔쳐 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닌가? 이곳에 사람이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상습범일 수도 있겠다. 올리비아는 상대가 괘씸해서 크게 소리쳤다.
“당신 이제 큰일 났어요. 제가 집사님께 아뢸 거예요!”
“어째서?”
그러자 계속 침묵하던 남자가 되물었다. 남자의 목소리엔 이해되지 않는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런 대범한 도둑이라니! 그녀는 접시를 깨뜨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벌렁벌렁한데, 이 도둑은 귀족이 무섭지도 않은가 보다. 아니면 하녀장님과 집사님께 들켜 본 적이 없어서 그들이 얼마나 매서운지 몰라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여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장소예요. 백작님이 정하신 규칙이라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고요! 그런 곳에 몰래 들어와 물건을 훔쳤으니 당연히 혼쭐날 겁니다.”
“그래서 이 꼴이군.”
올리비아의 이야기에 남자가 놀라기는커녕 작게 중얼거렸다. 흐릿하게 보이는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입술이 호선을 그렸음에도 싸늘한 분위기였다. 올리비아는 어쩐지 남자가 화가 난 것 같다고 느꼈다. 침입자가 되레 화를 내다니!
“여긴 들어오면 안 되는 장소예요. 얼른 나가세요.”
“그런 곳에 너는 어째서 들어왔지?”
“전 여길 청소해야 하니까요.”
남자가 느릿하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이 엉망진창이 청소하는 거냐 묻는 것 같아 올리비아는 다급히 덧붙였다.
“방금 청소 시작한 거예요.”
처음 본 사람에게마저 일 못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는 더러운 상황에 의문을 가졌던 것은 아닌지 가볍게 물었다.
“이 넓은 곳을 혼자 청소한다고?”
“다들 본채 일로 바빠요. 전……앗! 이게 아니지. 당신 얼른 훔친 물건은 두고 빨리 나가요!”
올리비아는 또박또박 대답해 놓고도 왜 이 남자에게 설명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너무 자연스럽게 물어 자연스럽게 답하게 되는 것뿐이다. 그런 행태를 뒤늦게 깨달은 올리비아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는걸?”
남자가 아까부터 보란 듯이 들고 있던 양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낯선 침입자를 경계하느라 그가 정말 무언가를 훔쳤는지는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손에 든 것도, 수상해 보이는 짐도 없었다. 물론 존재 자체는 수상했지만 도둑임을 증명할 물건을 들고 있지는 않았다. 올리비아 아차 하며 외쳤다.
“도둑이 아닌가요?”
올리비아의 질문이 웃긴지 남자가 큭큭거리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어느새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남자와 거리가 가까워졌고, 덕분에 상대의 얼굴을 흐릿하지만 볼 수 있었다.
남자는 올리비아가 처음 보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저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님보다 훨씬 예쁜 사람이다. 순간 여자를 남자로 착각한 것은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올리비아의 눈이 똥그랗게 변하자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제 매력을 잘 알고 있는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이렇게 잘생기고 귀티 나는 도둑 봤어?”
잘생기기보다 예쁘다고 고쳐 주고 싶은 걸 참고 올리비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남자는 더 깊은 미소를 입가에 달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남자는 도둑처럼 안 생겼다. 그의 말처럼 너무 귀티 나게 생겼다.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얼굴. 서글서글한 눈매 속에 들어 있는 독특한 주홍빛 눈동자가 마님이 가진 목걸이 중에 가장 값비싼 보석을 박아 놓은 듯했다. 콧대는 굴곡 없이 쭉 뻗어 있었으며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입술은 붉고 도톰하니 요염했다.
정확히 도둑처럼 생겼다는 말에 대해 정의하긴 힘들지만, 하여튼 도둑과는 거리가 먼 생김새였다. 오히려 귀족가의 아가씨처럼 어여쁘며 단정하고 고귀하게 생겼다. 목소리를 듣기 전에 얼굴부터 보았다면 여인이라 믿을 뻔했다.
설마 귀족가의 도련님인가? 혹시, 데이빗 도련님 손님이 벌써 도착하신 걸지도 몰랐다. 손님이라면 이곳이 접근하면 안 되는 장소라는 것을 모를 수 있었다. 오늘따라 올리비아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다시 봐도 남자의 귀티 나는 얼굴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손님에게 큰소리치다니. 그것도 도둑이라고 외쳤다니! 여태껏 했던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였다. 접시 스무 장을 깬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사고다. 올리비아는 꾸벅 바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손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허리를 조아리는 올리비아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상상치도 못한 실수였다. 이 일이 하녀장님과 집사님에게 들어간다면 혼나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귀족에게 도둑이라는 소리를 했다는 것만으로 채찍질을 당할 수 있었다. 보통은 실수해도 체벌까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귀족 모독죄는 보통의 실수가 아니었다. 백작가의 체면과 상대 귀족을 위해서도 더 강하게 체벌을 할 거였다. 채찍이 얼마나 아프던가! 어릴 때 다섯 대 맞고 일주일을 꼬박 침대에서 앓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그 뒤로 한 달 동안 옷 입는 것도 힘들었었다.
상상만으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무서웠다. 공포로 올리비아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자 그녀를 빤히 보던 남자가 재빨리 내뱉었다.
“나 손님 아닌데?”
"소, 손님이 아니시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남자의 가벼운 말에 올리비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도둑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다?
‘그럼 정체가 뭔데?’
멍해 있던 올리비아는 남자의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보고 장난질에 제대로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 같아서 맨날 당한다. 어찌 알았는지 그녀가 어리숙한 것을 알고 놀려 먹는 게다. 방금 마음 졸였던 것이 억울해진 올리비아가 소리쳤다.
“저를 놀리셨군요! 침입자가 있다고 집사님께 당장 고할 거예요!”
훔친 물건이 없는 듯해서 조용히 보내 줄까 했더니 사람을 이렇게 놀렸다. 기분이 상한 올리비아는 당장 집사님께 고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놀림당했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가득해졌다.
하지만 갑자기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당기는 힘에 중심을 못 잡고 휘청하는 순간, 몸이 빙글 돌아갔고 남자의 몸과 턱 부딪혔다.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뒤로 물러섰지만 남자의 행동이 더 빨랐다.
남자의 팔이 순식간에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다. 든든한 몸이 맞닿았고, 타인의 온기가 느껴졌다.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 있다는 현실이 인식되자 올리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떨었다.
“왜, 왜 이러세요?”
남자는 말없이 올리비아를 내려다봤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도둑이면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면 돌변해 그녀를 해할지도 모르는데, 어쩜 이렇게 여유롭게 굴었을까? 어째서 침입자를 앞에 두고 경계를 풀었는지 의문이다.
“노, 놓아주세요.”
공포에 질린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이 어느 순간부터 부담스러워졌다. 너무 강하고 뜨거워 올리비아는 더욱 이 상황이 불편했다. 이상하게 남자의 시선이 너무 강렬했다. 마치 무엇을 바라는 것처럼.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남자가 뜻 모를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허리를 조이고 있는 팔에도 더욱 힘이 들어갔다. 몸이 더 가깝게 밀착되었다. 올리비아는 먼지떨이를 든 손을 잡혀 휘두를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반대쪽 손으로 남자의 가슴을 밀었다. 남자는 가녀리게 생겨서는 힘이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 소리 지를 거예요. 제발 놓아주세요.”
“쉿, 그건 안 돼.”
남자의 손바닥이 입과 코를 가린 수건 위를 순식간에 덮었다. 남자의 눈빛이 단호했다. 소리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행동이었다. 위험한 자세로 호흡까지 불편한 상태가 되자 올리비아는 더욱 겁에 질렸다. 심장 소리가 더 커지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파랗게 질려 헐떡이자 남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차분하게 설득했다.
“무서워하지 마. 널 해치지 않을 거야.”
그게 더 무섭게 들렸다. 올리비아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그녀의 커다랗고 아름다운 연둣빛 눈동자가 불안감에 사정없이 흔들리며 옅게 물기가 차올랐다. 올리비아가 두려움에 질리자 남자의 눈동자에도 안절부절못하는 빛이 감돌았다.
“소리 지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이 손 떼 줄게.”
남자가 눈짓으로 입을 막은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올리비아가 재빠르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고의 의미로 매서운 눈빛을 한번 보낸 남자가 천천히 손을 뗐다. 소리치면 언제든 다시 막으려는 듯 움직임이 느릿했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며 본능적으로 올라오려는 외침을 참았다. 소리친다면 남자가 강압적인 행동을 할 것 같았다.
“여기 왔었단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내가 여기 왔었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
말투는 차분한데 남자의 시선이 무서웠다. 올리비아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답했다.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걸요.”
오들오들 떨며 답했더니 남자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네.”
연신 입가에 달린 미소가 살가워 이 남자가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올리비아는 이상하게 오싹했다. 아니 저릿한 건가. 아까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미묘한 감각에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녀의 한쪽 손은 남자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고, 그곳에서 생긴 움직임에 남자의 시선이 내려갔다. 그제야 올리비아가 제 행동을 알아채고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남자의 가슴을 제멋대로 더듬은 꼴 아닌가!
남자의 시선이 깊어지고 은밀해졌다.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상하다. 올리비아에 비하면 큰 체격이긴 하지만 남자는 기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로 의심될 만큼 선이 가는 남자였다.
그런데 위험한 사람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덩치가 큰 기사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위압감이 느껴져 주눅이 들었다. 어쩐지 남자에게 오도독오도독 산 채로 뜯어 먹힐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열망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긴장감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남자가 해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해칠 것 같았다. 모순된 말이지만 남자는 다정하면서도 위험해 보였다. 올리비아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며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을 흘렸다.
“여기 왔던 거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그, 그러니까…….”
손목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내려와 먼지떨이를 빼앗아 갔다. 유일한 무기를 너무 허무하게 빼앗겨 버린 걸 자각한 올리비아가 뒤늦게 숨을 들이켰다. 툭, 바닥에 먼지떨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남자의 손이 올라와 올리비아의 머릿수건을 벗겼다. 먼지 때문에 회색빛으로 변한 천이 벗겨지자 노을빛을 머금어 불그스름하게 변한 은발이 드러났다. 찬란함을 발해야 할 은빛 실타래가 푸석푸석하자 남자의 눈동자에 설핏 짜증이 드러났지만, 어느새 그 기색을 지우고 친절함을 담았다.
남자는 올리비아의 입과 코를 막은 천마저도 벗겨 냈다. 텁텁한 공기 속에서도 좋은 향기가 났다. 나쁜 사람인데 좋은 향기라니, 이상했다.
겁을 먹어 가련하게 떨리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물기를 머금은 큰 눈동자와 귀여워서 꾹 눌러 보고 싶은 동글동글한 코끝, 소리치지 않기 위해 깨물고 있는 붉디붉은 입술이 가학심과 은밀한 욕망을 부추긴다는 것을 이제 소녀에서 갓 벗어난 이 순진한 여인은 알까?
심장이 터지도록 그립고 그리웠다. 이리 품에 안아 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진짜 그대로야. 아니, 상상보다 더 대단해.”
남자가 황홀함을 담아 내뱉었다. 올리비아는 알 수 없는 말을 자꾸 중얼거리는 남자 때문에 긴장 상태로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남자의 손이 뺨에 닿아 흠칫 떨었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눈빛은 타오를 듯 강한데, 손길만은 나긋했다.
살짝살짝.
‘왜 이렇게 만져요?’
“지금은 아까우니까…….”
올리비아의 의문을 읽은 것처럼 남자는 작게 속삭였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누구도 이렇게 그녀를 안타깝게 만진 적이 없어서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강했다.
드디어 남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올리비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넌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거야. 알겠어?”
어린아이를 어르듯 다정하고 차분한 음색이라 어느 순간 올리비아의 떨리던 몸이 진정되었다. 말을 잘 들으면 해치지 않겠다는 게 설득력이 있어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그 미소를 보자 올리비아는 두근두근 어쩐지 아까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만약 약속을 어기면…….”
상냥한 음성이 이어서 올리비아의 귓가를 간질였다. 신기하게도 뒷덜미를 누가 깃털로 간질이는 기묘한 기분이 강했다. 올리비아는 숨을 참고 남자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땐 다시 찾아와 진짜로 잡아먹을 거야.”
남자가 눈가를 휘며 웃었다. 올리비아의 심장이 덜컹거리며 공포로 물들었다.
‘잡아먹는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진짜 귀신인가 봐! 하긴, 귀신이니까 이렇게 예쁘지!’
두려움으로 짙어지는 연두색 눈동자를 보던 남자가 고개를 숙여 깜짝 놀란 올리비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고통을 기다리는데 보드랍고 도톰한 무언가가 뺨에 닿았다.
쪽!
다른 의미로 놀라 올리비아가 눈을 번쩍 떴지만 남자는 벌써 그녀를 지나쳐 입구에 서 있었다. 귀신 같은 움직임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나는 기쁠 테지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약속 지켜.”
어둠 속에 가려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데 어쩐지 웃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해 못할 말을 남기고 남자는 사라졌다. 그리고 뒤늦게 다리에 힘이 풀린 올리비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른손으로 오른쪽 뺨을 감쌌다.
저 남자의 정체는 뭘까? 왜 입을 맞춘 거지?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장소에 있다 보니 진짜 유령에게 홀린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