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

5.

“바보 도깨비야-!”

악을 쓰며 부르는 목소리에 사내가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동이가 숲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내를 목 놓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대답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물론 그녀의 앞에 나타날 생각도 없다.

동이가 숲으로 들어와 사내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지 다섯 달이나 지났다.

그 사이에 겨울이 끝나고 봄이 지나고 있다.

동이는 온 산이 눈으로 뒤덮인 겨울부터 숲을 헤집고 다니며 자신을 찾아다녔다.

사내는 그것을 그저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했다.

절대로 그녀의 앞에 나타날 생각은 없었다.

얼어붙은 겨울 산을 헤매고 다니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앞에 나타나 [그만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 번이라도 모습을 드러내면 어찌되는지 알고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교접을 통해서 음기만 배출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을 빗나가서, 동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녀를 너무 탐해서 그녀가 지쳐 그러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사경을 헤매는 지경이 되자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도깨비인 자신이 사람인 그녀와 관계를 가져서 그녀가 제 양기에 짓눌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때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지나친 음기가 자신에게 있어서 독이 되듯 지나친 양기는 그녀에게 독이 되었다.

결국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녀의 곁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로 결심을 하며 몇 번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는지 모른다.

제가 떠나면 영영 혼자가 될 동이가 어찌 살아야 하는 건지, 여전히 작고 어린 제 동이를 두고 어찌 떠나야 하는 건지, 그녀를 떠나서 자신이 살 수 있는 건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냥 모르는 척 할 것을, 하고.

그냥 말 피로 연명을 할 것을, 하고.

그냥 동이의 [먼 친척]으로 있을 것을, 하고.

괜한 욕심을 부려 더 오래 이어질 수 있었던 그녀와의 관계를 깨뜨려 버린 것은 자기 자신이다.

도깨비는 도깨비인데 사람과 오래 살아 마치 자신도 사람이 된 것인 양 착각해버린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사랑받아도 도깨비는 도깨비인데.

“어디 있어요?! 어디 있냐구요!”

목이 터져라 저를 부르다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동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사내가 그저 닿지 않을 손만 뻗었다.

당장이라도 저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울지 말라고 해주고 싶다.

저 울음을 그치게 해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12년 전에 그랬듯이 제 등에 업고 산을 내려가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입 안이 쓰다.

꼭 오래 전에 자신의 작은 아이가 준 도토리를 씹어 삼켰을 때처럼 입 안이 쓰다.

여전히 등에 온기가 느껴진다.

자신의 등에 여전히 그때의 작은 아이가 업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울다 지쳐 결국에는 힘없이 산을 내려가는 동이의 뒷모습을 사내의 시선이 뒤쫓았다.

동이가 산을 벗어날 때까지, 산을 벗어나 산 어귀에 있는 그녀의 작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며 사내가 타들어가는 가슴을 눌렀다.

오래 살며 이렇게 가슴이 아픈 적이 있었던가.

너무 오래 살아 자기 연민마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저 작은 아이를 만나 제 가슴의 온기에 불이 지펴졌고, 저 작은 아이와 함께 하며 천년동안 메말라 있던 가슴에 꽃이 폈다.

꽃이 폈지만 그 꽃은 이제 시들어야만 한다.

애당초 꽃이 피지 말아야 할 곳에 뿌리를 내린 꽃은 더는 꽃잎을 활짝 열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많은 곳 중에서 하필이면 도깨비의 가슴에 뿌리를 내린 꽃이라, 이 꽃은 씨앗을 맺지 못하고 져버릴 것이다.

겨우 꽃이 폈지만, 하필이면 제게서 피는 바람에 이 가엾은 꽃은 이제 그만 시들어야 한다.

하지만 꽃이 진다고 해서 마음까지 함께 시들까.

꽃이 진 자리에 여전히 마음이 시들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면 그건 또 얼마나 아플까.

꽃이 지며 마음도 지면 좋으련만, 꽃은 져도 마음은 여전히 그녀를 향해 피어있다면 자신의 남은 천 년은 얼마나 아프고 서러울까.

“잘 살아야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내가 이제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이의 모습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좋은 사내를 만나 연도 맺고, 잘 살아야지.”

도깨비의 시간은 길고 인간의 시간은 짧아서, 작은 인간의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지루하고 무료한 자신의 삶에 약간의 흥미가 될 줄 알고 시작한 일이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도깨비의 시간은 길고 인간의 시간은 짧아서, 저 아이의 아픔은 짧겠지만 자신의 아픔은 길고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삶이 지루하고 무료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아프고 서러울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아프고 서러워서 이 마음의 상처는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동이가 들고 나간 자리는, 다른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자리는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테니까.

가슴에 뻥 뚫려버린 구멍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니까.

뜨거운 것이 제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사내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닦았다.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사내는 처음 알았다.

도깨비도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도깨비가 울면 봄의 산에 비가 내린다.

조금 전까지 맑았고 지금도 여전히 맑은 하늘에서 말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 비는 마당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가는 동이의 머리까지 살짝 적셨다.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제 머리와 어깨를 적시자 동이가 방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상하게 서러운 비였다.

꼭 누군가의 눈물인 것처럼 그렇게 서럽게 내리는 비를 한참 동안이나 맞으며 동이가 하늘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의 발에 신은 꽃신이 그 빗물에 조금씩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 * *

남부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 이현은 요즘 머리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십수 년간 이어지는 흉년에 집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관에 보관된 구휼미는 바닥이 나고 있는데 흉년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으니 그 땅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없다.

게다가 이 흉년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봄에 비가 내려야 할 때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가물어 밭에 심은 농작물들이 타들어 가고, 여름에는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쏟아져 겨우 싹을 틔우고 자라던 작물들이 전부 쓸려 내려가고, 가을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여름 홍수에서 살아남은 작물들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시들어 죽어버리니 흉년이 끝나지가 않았다.

게다가 흉년인 채로 맞이하는 겨울은 얼마나 매서운지 겨울이 한 번 지나면 그 해에 죽은 사람의 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오죽하면 봄 초상이라는 말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흉년을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사정을 모르는 조정의 대신들과 왕은 총독이 어질지 못해서 남부 지방에 흉년이 이어진다는 쓸데없는 말들만 하고 있고 백성들은 당장 먹을 것을 내놓으라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 이현의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현이라고 총독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

이현은 원래 기름진 땅으로 소문난 동부 지방으로 가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뒷배가 없고 잡은 끈이 없으니 결국은 누구도 오지 않겠다고 한 이 남부 지방으로 좌천되듯 떠밀려 내려온 것인지라 이현 나름대로 이 남부 지방이 지긋지긋한 곳이기도 했다.

“누가 찾아왔다고?”

가뜩이나 골치 아픈 일만 잔뜩 쌓였는데 이제는 별것들이 다 찾아와서 속을 썩인다.

“그것이….”

이현의 앞에서 비방이 우물쭈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방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 자기를 도깨비 신부라고 자청하는 처녀가 찾아와서 나으리를 뵙기를 청하는데….”

“도깨비 신부?”

아니, 흉년이 계속 이어지기 사람들이 미치기라도 한 걸까?

요즘은 왜 이렇게 미친 것들이 많은 걸까.

“내쫓아 버리거라.”

이현이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처리해야 하는 다른 일도 많은데 미친년까지 상대할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비방이 물러가자 이현이 제 앞에 잔뜩 쌓인 장계 더미를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장계의 대부분은 이 흉작기를 넘어가게 해달라고, 구제를 바라는 상소문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곳간은 바닥이 난 지 오래다.

뭘 퍼주고 싶어도 이제는 퍼줄 것도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급한 문제는 따로 있다.

이제 곧 여름으로 접어든다.

해마다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그 어마어마한 수량은 홍수로 이어졌다.

홍수가 나면 민간의 집이 떠내려가고 농지가 휩쓸려갈 뿐만 아니라 가축들까지 떠내려가는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가을의 추수를 바라고 봄의 춘궁기를 겨우 넘긴 백성들에게서 여름의 홍수는 마지막 희망까지 빼앗아가기 마련이다.

“홍수를 어찌해야 한다….”

춘궁기를 넘기면 홍수가 기다리고 있고, 홍수를 넘기면 가을 흉년이 기다리고 있으며, 가을 흉년을 넘기면 겨울 맹추위가 도래한다.

그리고 그것까지 무사히 넘기고 나면 가장 무섭다는 봄의 춘궁기가 다시 시작하니 이건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하는 것일까.

하루 종일 장계와 씨름을 하다가 퇴청을 하기 위해 총독 관저를 나서던 이현이 길을 가로막고 엎드려 있는 처녀를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총독 나으리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처녀다.

아직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대단히 미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당장 저것을 치우거라.”

피곤해서 사가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별 미친 것이 다 길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이현이 비방에게 얼른 명을 내렸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비방이 이현의 가마 앞을 가로막고 길에 엎드려 있는 처녀 동이에게 역정을 냈다.

“썩 물러가지 않으면 강제로 끌어낼 것이다.”

“어찌하여 백성의 간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옵니까?”

동이가 고개를 들어 가마 위에 앉은 이현을 쳐다봤다.

“제게 당장 여름의 홍수와 가을의 흉년을 막을 방법이 있사온데 총독 나으리께서는 어찌 귀를 기울여주시지 않는 것이옵니까?! 이건 나으리의 직무 유기가 아닙니까!”

비방의 눈짓에 병사들이 달려들어 동이를 질질 끌어냈다.

끌려가면서도 동이가 이현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를 살릴 방법이 있는데 그걸 듣지 않아서 백성이 죽게 된다면 그건 총독 나으리의 죄가 아닙니까!”

바락바락 질러대는 소리를 듣던 이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듣자듣자 하니….”

이건 들으면 들을수록 부아가 치미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아니, 누구는 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안 하는 건 줄 아나.

방법? 대체 이 홍수와 흉년을 막을 방법이 뭐란 말인가.

그런 것이 있었다면 십수 년 동안 질질 끌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웬 미친년이 자기에게 방법이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게다가 제게 직무유기 운운까지 한다.

이쯤 되면 이현도 부아가 치밀었다.

“그 미친년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결국 이현이 동이를 끌고 가는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래, 어디 말해 보거라. 네 그 방법이라는 것을.”

잔뜩 머리 아픈 표정으로 이현에 제 앞에 꿇어앉은 동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둑을 쌓으시면 됩니다.”

“둑?”

“물길을 따라서 크고 깊게 땅을 파서 저수지를 만들고 그리고 둑을 쌓으면 여름에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그 물이 넘쳐 가옥과 전답을 휩쓸지 않을 것이고, 저수지에 받아놓은 물이 있으니 가을에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 물을 끌어다가 밭에 물을 대면 추수기에 물에 없어 곤란을 겪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누가 그런 것을 모르겠느냐.”

이현이 혀를 찼다.

“누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봐 고작 그런 말로 내 길을 가로막은 것이냐? 둑과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두어놓는 것은 좋으나 그걸 누가 판단 말이냐? 그 많은 빗물을 담을 저수지를 만들려면 몇 년이 걸리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당장 백성들을 부역으로 전부 끌어들여 땅을 파기 시작해도 족히 2, 3년은 걸리는 것을 알고는 있느냐? 그걸 만들다가 죽어나가는 사람은 몇이겠고, 그걸 만드는 동안에 그 부역을 감당하는 이들을 먹이는 건 또 무엇으로 충당할 것이냐. 그런 큰일이 그냥 되는 것인 줄 아느냐?”

“여러 사람의 힘은 필요 없습니다. 저 혼자서 만들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

이런 미친년을 보았나.

기가 막힌 이현이 비방을 쳐다봤다.

대체 어디서 이런 미친년이 나타난 것일까.

“지금 무엇이라 했느냐? 혼자서 그 둑과 저수지를 만들 수 있다고?”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나를 찾아오지 말고 너 혼자서 저수지나 만들 것이지 왜 굳이 나를 찾아온 것이냐?”

이젠 기가 막혀서 화도 나지 않는다.

시간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이런 미친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면 벌써 사가에 거의 다 이르렀을 것이다.

“저수지는 저 혼자서도 만들 수 있지만 총독 나으리의 도움이 필요하여 거래를 하고자 온 것입니다.”

“거래?”

이건 점입가경이다.

거래? 무슨 거래?

“그래, 무슨 거래 말이냐.”

이쯤 되면 이현도 갈 때까지 가보고 싶다.

이 미친년의 끝이 무엇인지 다 들어보고 싶다.

“제가 저수지와 둑을 만들면 그 공로에 대한 대가로 제 청을 한 가지 들어주시면 됩니다.”

“청? 무슨 청 말이냐?”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네가 무슨 수로 혼자서 저수지와 둑을 만들어?”

“제게 닷새 정도의 말미만 주시면 제가 혼자서 저수지와 둑을 만들겠습니다.”

“만약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일개 하급 관리도 아니고, 웬 미친년에게 놀아나 조롱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망신 중의 망신인데 만약 내게 망신을 준다면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제가 정해진 시간 안에 저수지와 둑을 만들지 못하면 그때는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닷새 안에 저수지와 둑을 만들지 못하면 그때는 총독을 능멸한 죄를 물어 네 목을 칠 것이다. 그래도 되겠느냐?”

“제가 해내지 못하면 제 목을 치십시오.”

“이런 미친년을 보았나.”

이쯤 되면 이현도 기가 막혔다.

얼굴도 곱상한 것이 아주 제대로 미쳤다.

살다 살다 이런 미친년은 처음 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네 목을 벨 것이다.”

이현이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네, 베십시오.”

그러나 동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네가 무슨 재주로 그걸 닷새 만에 해낸다는 것이냐.”

“제가 아니라 제가 부리는 도깨비가 그리 할 것입니다.”

“도깨비?”

“네.”

“네가 도깨비를 부린다고?”

“그렇습니다. 제 지아비가 도깨비입니다.”

이현이 비방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고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친년이구나… 진짜 미친년이구나….’

괜히 허락한다고 말했다.

이 정도로 미친년이라면 아예 말도 들어보지도 않고 내쫓아야만 했다.

그러나 제 입으로 해보라고 했으니 이제 무를 수도 없다.

‘총독이나 되어서 미친년에게 놀아났다는 소문이 나면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텐데… 어이구 머리야… 왜 내게는 이런 일만 생기는 걸까….’

잘 나가고 싶었고 출세하고 싶었고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걸까.

가뭄에, 홍수에, 흉년에, 이제는 미친년까지.

이건 삼재가 아니라 사재다, 사재.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슨 청?”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 삽과 괭이를 백 벌씩 준비해주랴?”

“소문을 내주십시오.”

“소문?”

“도깨비 신부가 도깨비를 부려 저수지와 둑을 만든다는 소문을 좀 내주십시오.”

“나더러, 그런 소문을 내라고?”

혼자만 알고 있어도 창피할 판에 대놓고 소문을 퍼뜨려서 총독이 미친년에게 속았다는 걸 사방팔방 알리라는 걸까.

“왜 굳이 소문을 내야 하느냐?”

혹시 이 처녀는 미친 것이 아니라 제게 앙심을 품고 저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 위해 이러는 걸 아닐까?

이현이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래야만 하니까요.”

대답 하는 것 좀 봐라.

대답이 아주 불성실하다.

“좋다.”

하지만 이왕 미친 짓을 하기로 한 거, 들어주자.

“소문을 내주마. 대신, 실패하면 만인이 보는 앞에서 네 목을 벨 것이다.”

이현도 이판사판이다.

여기서 더 망신살을 떨칠 것도 없고, 여기서 골치 아픈 일이 더 늘어나봤자 이미 지금도 최악이다.

최악에 나쁜 일이 한 줌 더 얹어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이래서 잃을 것이 없이 막다른 곳에 내몰리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이미 망쳤으니 더 망칠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이런 미친 짓도 하고 말이다.

“내가 소문을 낼 것이니 너는 닷새 안에 저수지와 둑을 만들거라. 네 지아비라는 도깨비를 부려서 말이다.”

“알겠습니다.”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하는 동이를 보며 이현이 기가 막혀 웃었다.

가마 위에서 웃고 있자니 스스로가 한심스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다.

* * *

남쪽 땅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도깨비를 부린다는 처녀가 닷새 만에 저수지와 둑을 만들겠다며 남쪽 땅 총독에게 호언장담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장정 수백 명이 몇 년이 걸려야 완성할 수 있는 저수지와 둑을 스무 살의 처녀가 혼자 만들겠다고 나섰는데 그 처녀가 실은 도깨비 신부라는 것이 소문의 주된 내용이었다.

어떤 이들은 처녀가 미쳤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 처녀가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결과는 닷새 후면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닷새가 지나기만을 바랬다.

약속된 닷새에서 하루, 하루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은 더 높아졌고, 그 도깨비 신부라는 처녀가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한 장소에는 항상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또 사흘이 지나고 이제 나흘째 아침이 되자 사람들 대부분은 그 처녀가 실성을 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흘이 되도록 저수지는커녕 땅에 삽 자국 하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저수지를 만들겠다는 곳의 땅은 말라붙어서 쩍쩍 갈라지고 있었고, 그 말라붙어 단단한 땅은 괭이를 찍어도 흠집 하나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닷새도 아니고 이제 고작 하루가 남았는데 그 하루 만에 누가 어떻게 그곳에 저수지를 만들겠는가.

“그래서? 그 미친 것은 어찌하고 있느냐?”

이현이 시원한 그늘에서 차를 마시다 말고 비방에게 동이에 대해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감시하거라. 소문까지 자자하게 퍼졌는데 도망이라도 치면 그 망신을 어찌하란 말이냐.”

그날은 자신이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미친 짓을 허락해줬을 리가 없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이현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냥 격무에 시달리느라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준 것이리라.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런 요구를 받으면 당장 곤장을 쳐서 내쫓으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는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하루 남았군.”

“그 처녀의 청은 어떻게 할까요?”

“저수지가 만들어진 것도 아닌데 청은 무슨 청. 그게 다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전제 하에 들어주기로 한 것 아니냐.”

“그러 하옵지요.”

“이제 내일 아침이면 알게 되겠지. 그년이 미쳤는지 아닌지.”

애당초 도깨비 신부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도깨비도 있는가 없는가 의심할 판에 도깨비 신부라니.

도깨비가 진짜 있다고 해도 사람을 신부로 삼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현의 눈이 산의 능선을 향했다.

산의 능선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니 이제 곧 해가 질 것이다.

해가 지고 밤이 지나면 아침이다.

약속한 닷새째의 아침이 멀지 않았다.

“도깨비 신부라….”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동이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왜냐하면 죽이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고작 스무 살이 아닌가.

‘차라리 밤에 도망이라도 칠 것이지.’

이현이 비방에게 슬그머니 손짓을 했다.

“오늘 밤에는 병사들을 물리거라.”

“네?”

“병사들을 그 미친년 주변에 두지 말라는 뜻이다.”

혹시나 그녀가 도망칠까봐 그녀 주위에 겹겹이 세워두었던 병사들을 물리라는 것은, 이 마지막 날 그녀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현도 아주 악랄한 탐관오리는 아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애쓴 총독이다.

다만 하늘이 그를 도와주지 않을 뿐, 그는 정말 할 만큼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결과는 최악이다.

이제 최악에 또 하나의 최악을 더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고작해야 조정의 웃음거리가 되고 세간의 비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는가.

망신은 이래저래 피할 수 없고, 이렇게 된 이상 그 처녀의 목숨이라도 살려주고 싶다.

괜히 피를 보는 것은 이현이 바라는 게 아니다.

그래서 도망칠 길을 슬그머니 열어주는 것이다.

이 서른 살의 젊은 총독은 은근히 마음이 여렸다. 은근히.

* * *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어느새 머리 위로 무수한 별들이 떠올랐다.

땅은 가물어도 하늘에는 별의 강이 무심하게 흐르는 가운데 동이가 예전에 물이 흘렀던 곳에 앉아서 어둠을 바라봤다.

이곳은 원래 큰 강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가뭄으로 바닥까지 드러나 땅이 쩍쩍 갈라져 있다.

지금은 이렇게 말라 비틀어졌지만 이제 머잖아 비가 내리면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감당하지 못하고 강물이 넘쳐흐를 것이다.

그러면 이 근방에 있는 전답들은 전부 물에 잠긴다.

매년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당하면서도 다시 똑같은 곳에 농사를 짓고 또 절망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매년 떠내려가는 집을 다시 짓고, 매년 쓸려 내려가는 작물을 다시 심고 이번에는 비가 덜 내리기만 바라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라는 걸 동이도 안다.

사람의 힘은 이렇게나 미약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동이는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올 정월부터 지금까지 그 사내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작정하고 숨은 그 사내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도깨비가 작정하고 숨으면 사람이 어찌 찾겠는가.

그 사내는 정말 꽁꽁 숨었다.

숲을 뒤지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까지 했는데 그 독한 사내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동이는 알고 있다.

모습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 사내가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걸 동이는 안다.

아마 평생 그럴 사내다.

저를 걱정한다는 핑계로 제게서 떠났으면서도 저를 걱정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해 제 주위를 맴돌고 있을 그런 사내다.

도깨비인 주제에 사람인 자신보다도 용기가 없는 사내다.

도깨비인 주제에 사람처럼 겁이 많고, 사람처럼 정이 많고, 사람처럼 사랑스럽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울면서 찾아도 제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동이는 안다.

알지만 포기라는 건 하지 않을 생각이다.

자신이 누군가.

도깨비가 업어 키운 아이이자 도깨비와 정을 통한 인간 처녀다.

“그러니까 살려주지 말았어야지.”

동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사내가 듣든지 말든지 이건 그냥 하는 혼잣말이다.

실은 그 사내가 들었으면 하고 하는 말이다.

“살려놨으니 책임을 져야지. 마음을 주고 모르는 척 하는 경우는 없지. 내 도토리를 받아먹었으니 도토리 값은 내야지.”

그래, 그때 그 도토리는 자신이 가진 전부였었다.

그걸 줬다.

그걸 냉큼 받아먹고는 도망쳐?

전부를 줬으니 전부를 받아야 손해가 아니다.

제 처녀를 줬는데, 제 순결을 줬는데 그걸 먹고 도망쳐?

양기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그래, 그 넘치는 양기 때문에 시들시들 죽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조절]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가.

교접 한 번에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그 넘치는 양기를 전부 다 받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 물이 넘친다고 그걸 다 받아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음식이 있다고 배가 터지도록 먹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때 그건 처음이라서, 그러니까 교접이 처음이라서 자신도 배가 터지게 먹고 싶었을 뿐이지 매번 그렇게 과식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조금만 조심하면 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한 번 일어난 일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치다니.

“도깨비는 겁이 많아.”

그래, 도깨비는 겁이 많다.

정이 많은 주제에 겁도 많다.

“그리 겁이 많아서 그동안 어찌 혼자 살았을까….”

겁이 많아서 혼자 살아왔던 것일 수도 있다.

쉽게 정을 주면 이별할 때 슬프니까, 겁이 많아서 이별이 무서워 그리 오랫동안 혼자 외로이 살아왔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것에 겁을 먹고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짓은 하기 싫다.

그 도깨비에게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겠지만 자신에게는 도깨비의 시간처럼 긴 시간은 없다.

자신의 시간은 짧고 도깨비의 시간은 길다.

그러니까 자신은 이 짧은 시간을 더 많이 사랑하고 조금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견우와 직녀도 일 년에 한 번 만나 사랑하면서 사는 판에….”

그래.

견우와 직녀는 일 년에 한 번, 칠석날에 만난다고 하지 않던가.

일 년에 딱 하루 만나서 얼굴 보고 얼싸안고 사랑하는 이들도 있는데 자신들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결정하고. 바보처럼 한번 물어나 보지.”

도깨비는 그래서 문제다.

뭐든지 혼자서 결정하려고 든다.

한번 물어나 보지.

한번 의논이나 해보지.

그래서 저를 이렇게 고생시키고 있다.

이렇게 하면 제가 포기할 줄 안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다.

도깨비에게 신묘한 능력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고집이 있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다고 내가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나한테서 절대로 못 벗어나요. 사람 잘못 봤어? 아저씨가 키운 아이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아이가 아니거든요.”

이름도 지어줬다.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부르기 위해서 짓는 것이 이름인데, 기껏 지어준 그 이름을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면 제가 그 이름을 지어준 수고는 헛되지 않는가.

물론 어렵게 지은 이름도 아니지만 그것과는 달리 이름을 지어준 정성이라는 것이 있다.

“하여간에 죄가 많아. 아저씨는 참 죄가 많은 도깨비야.”

이름을 지어준 정성을 무시한 죄.

처녀를 건드리고 도망간 죄.

목숨을 구해주고 나 몰라라 한 죄.

도토리를 먹고 튄 죄.

자신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만든 죄.

그런 죄인인 주제에 감히 사랑스러운 죄.

죄는 아무리 열거해도 끝이 없다.

“그 죄를 다 갚아야지. 그러니까 빨리 나타나세요. 곧 해가 떠요.”

해가 뜨면 닷새째의 아침이다.

닷새가 될 때까지 저수지와 둑을 만들지 못하면 목을 베어도 좋다고 했다.

이미 소문이 다 났으니 총독도 제 목을 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도 낫겠네요.”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동이가 제 발에 신고 있는 꽃신을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신고 돌아다녔는지 그 고왔던 꽃신은 이제 너덜너덜해졌다.

밑창이 닳아서 구멍이 날 지경이 될 때까지 많이 걸었다.

그러나 이제는 걷는 것도 지치고 찾는 것도 지쳤다.

그런데도 마음만은 지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이상할 정도로.

그때였다.

쿵-!

어둠 속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동이가 앉은 땅이 들썩거렸다.

쿵-! 쿵-!

땅은 계속 요동치며 울렸다.

꼭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자 동이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하지만 밤이 너무 어두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동이는 볼 수 없었다.

볼 수는 없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는 있었다.

‘아저씨야.’

도깨비가 왔다.

제게 온 것이 아니라 저수지를 만들려고 도깨비가 왔다.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 성격에 닷새 안에 저수지를 만들지 못하면 총독이 제 목을 벤다고 하는데 오지 않고 견딜 재간이 있었겠는가.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결국 온 것이다.

그래야 제가 아는 그 도깨비다.

모습은 싹 감춘 주제에 저를 걱정해서 주변을 맴도는 그 도깨비다.

쿵-! 쿵-!

땅울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동이가 그 진원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땅울림은 점점 더 커졌다.

한밤중에 자던 이들은 아마 큰 지진이 난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깨지 않았을까.

동이의 발이 흔들렸다.

이제는 걸음을 떼어놓기도 어려울 정도로 땅울림이 거대했다.

쿵-! 쿵-!

천지가 요동치는 소리를 들으며 동이가 한 발 더 내디뎠다.

“꺄아아악!”

발을 내딛는 순간 동이의 몸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커다란 구멍 안으로 굴러 떨어지던 동이의 몸이 위로 번쩍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동이는 저를 붙잡은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 손이 누구의 것인지, 누가 지금 저를 붙잡고 있는 건지 알 수 있다.

“다치면 어쩌려고.”

이 목소리를 너무 듣고 싶었다.

“다치면 좀 어때요.”

“네가 다치면 나는 마음이 아프단다, 얘야.”

“자기 마음 아픈 것만 생각하고 내 마음 아픈 것은 왜 생각 안 해요?”

동이를 잡은 손이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이의 발이 땅에 사뿐하게 닿았다.

사내가 그녀를 내려놓은 것이다.

내려놓는 순간 손을 떼려는 사내의 팔을 동이가 와락 붙잡았다.

“왜 그렇게 겁이 많아요?”

동이가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그녀가 아는 [아저씨]의 모습이 아니라 [도깨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깨비의 모습조차 그녀가 사랑하는 모습이다.

“말했잖느냐. 나는 너를 잃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그게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다른 것은 무서운 것이 없는데 나는 그게 무섭단다.”

“저도 아저씨가 제 곁에 없는 게 무서워요. 무서운데 아저씨는 곁에 없어.”

“얘야. 낮에도 달이 뜨는 것처럼 나는 계속 네 곁에 있지만 다만 네가 볼 수 없는 것뿐이란다.”

“저는 그런 거 싫어요. 달 그림자가 다 무슨 소용이야. 낮에 뜨는 달이 다 무슨 소용이야. 저는 그냥 아저씨와 살고 싶어요.”

“그러면 네 몸이 상한단다. 내가 너를 앓게 만들 거다.”

“좀 앓으면 어때요.”

“내가 그걸 어찌 보고 살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이 아니라도 아파요. 고뿔은 언제라도 걸릴 수 있고, 사람은 언제라도 아플 수 있어요. 그런데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으면 그게 더 아파요. 병은 언제라도 나을 수 있지만 병이 났을 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없으면 그게 더 아파요. 아저씨가 지금 날 더 아프게 만들고 있어요. 이러다가는 심장에 병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아요.”

도깨비는 모른다.

병도 나지 않고 일생 아프지 않는 도깨비는 모른다.

무서운 것이 없는 도깨비도 모른다.

잃어버릴 것이 없는 도깨비도 모른다.

버림받은 적이 없는 도깨비는 물론 더더욱 모를 것이다.

정말 아픈 것이 뭔지 모른다.

도깨비는 그저 자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시름시름 앓는 것이 두고 보기에 마음 아프겠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더 아픈 일이 많다는 것을 도깨비는 모른다.

울어도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없고, 소리쳐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고, 밤에 깨어나 옆을 봤을 때 있어야 할 사람이 없고, 기약도 없는 길을 혼자 걸어야 하고, 아픈데 옆에서 이마를 만져주는 사람이 없고, 괜찮냐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고, 맛난 음식을 함께 먹어줄 사람이 없고, 좋은 것을 봤을 때 함께 웃어주는 사람이 없고,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아프고 화가 나는 일인지 도깨비는 모른다.

모르니까 겨우 그런 것이 아프다고 저를 버리고 갈 수 있는 거다.

더 아픈 것이 있다는 걸 모르니까, 고작 그 정도 아픈 것을 가지고 저를 떠날 수 있는 거다.

그 때문에 자신은 그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아팠는데 이 바보 같은 도깨비는 고작 그게 아파서 떠났다고 말한다.

“만약 이 자리에서 내가 죽으면 내 배를 갈라서 확인해보세요. 내 심장이 몇 조각을 나뉘었는지. 아저씨 때문에 제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는지 확인해보세요.”

“얘야.”

“지금 저를 두고 떠나면 전 죽을 거예요. 아저씨와 함께 있으면 좀 아프고 좀 앓겠지만 아저씨가 떠나면 전 지금 죽을 거예요. 그러니까 떠나고 싶으면 떠나세요.”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지.”

“신부로 삼아놓고 사람과 살라고 하면 제가 쉽게 ‘네, 그럴게요’ 라고 할 줄 알았어요?”

“누가 알겠니.”

“이미 다 알아요. 제가 도깨비 신부라는 건 이미 다 알아요. 그러니까 저는 이제 아저씨밖에는 없어요. 이제는 사람의 신부는 되지 못해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책임을 져야지요.”

“참 고집스런 아이구나.”

“바보보다는 고집스러운 게 나아요.”

“누가 바보라는 것이냐?”

“아저씨요. 바보 같은 도깨비. 겁만 많은 도깨비.”

동이가 사내의 가슴으로 손으로 툭 때렸다.

툭, 툭, 툭.

때릴 때마다 조금씩 힘이 들어갔지만 이 사내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호랑이도 한 발로 짓밟는 사내에게 자신의 주먹이 뭐가 아프겠는가.

“또 한 번 도망쳐 봐요.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하려고?”

“그때는 물어버릴 거예요. 이렇게.”

동이가 까치발을 들어 사내의 턱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제 쪽으로 끌어당긴 사내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있는 힘껏 물어뜯어도 사내는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그때는 산에 불을 지를 거예요.”

동이가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타죽는 걸 보게 할 거예요.”

“그러지 마라.”

“난 아저씨가 없으면 죽어요. 아저씨가 곁에 있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아저씨가 없으면 죽어요. 이래저래 죽을 거라면 아저씨와 함께 있고 싶어요.”

동이가 사내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두 팔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몸을 끌어안으며 그녀가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백 년을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람은 그렇게 오래 못 살아요. 그러니까 그 동안만이라도 같이 있어주세요. 제가 정말 소중하다면.”

“왜 소중하지 않겠니.”

사내가 동이의 정수리에 입술을 내렸다.

“살아오면서 너보다 더 소중한 것은 가져본 적이 없단다. 너무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단다. 내가 건드리면 깨질까봐, 내가 곁에 있으면 망가질까봐 무서워서 울며 떠나본 적이 그때 외에는 한 번도 없단다.”

사내의 입술이 정수리에서 이마로, 그리고 이마에서 콧등으로 내려왔다.

그 숨결이 제 얼굴을 덮는 것을 느끼며 동이가 눈을 감았다.

이제 입술은 그녀의 윗입술 바로 위까지 닿아 있었다.

“사랑한단다, 얘야.”

속삭임과 함께 사내의 입술이 동이의 입술을 지그시 눌러왔다.

촉촉하게 젖은 혀가 기다렸다는 듯 제 입 안으로 들어오는 사내의 혀에 휘감겼다.

그동안 가뭄이 든 것은 땅이 아니라 동이의 입술이었다.

그리고 지금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그녀의 입 안에 사내의 숨결이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두 손으로 사내의 목을 감고, 동이가 저를 삼켜오는 사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맡겼다.

휘감기는 혀와 섞이는 타액이 동이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이어진 혀처럼, 이렇게 이어진 숨결처럼 이제는 두 번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생각이다.

인연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자신이 엄마를 부르며 숲에서 울며 도망칠 때부터, 이 사내가 제 앞에 나타난 그때부터 이미 자신들의 삶은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진 삶을 어느 누가 감히 떼어놓겠는가.

“빨리 안기고 싶은데….”

입술을 떼며 동이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저수지와 둑을 완성하지 않으면 제 목이 달아나요.”

겨우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처녀의 포만감에 가득한 미소가 동이의 얼굴에 번져가고 있었다.

세상을 전부 얻은 그런 표정으로 웃으며 동이가 사내의 눈을 바라봤다.

“하루에 세 번씩 안으니까 제가 병이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사흘에 한 번만 해요.”

이런 때에 할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사내를 안심시켜야 한다.

“그러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견우직녀보다는 낫잖아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말 그게 지켜질지는 모를 일이다.

사흘에 한 번이라니. 가능할까?

“자, 일단 저수지부터.”

저를 쳐다보는 사내의 등을 떠밀며 동이가 활짝 웃었다.

이 저수지가 완성되면 총독에게서 받을 것이 있다.

그러면 사내와 자신은 앞으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총독 이현이 놀라서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어제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던 곳에 하룻밤 사이에 커다란 저수지와 둑이 생겨난 것이다.

어젯밤에 땅을 진동하는 울림을 이현도 들었다.

지진이 났나 싶어 놀라서 몰려든 백성들을 관저 안에 들이고 백성들과 함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후에 날이 밝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와 보니 하룻밤 사이에 없던 저수지와 둑이 생겨나 있었다.

“저, 저, 정말 이걸 네가 했단 말이냐?”

제 눈을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서 이현이 몇 번이나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러나 꿈이 아니다.

장정 수백 명이 달라붙어서 하루도 쉬지 않고 2, 3년이 걸려도 해낼까 말까 하는 거대한 저수지와 둑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만들어낸 것일까.

“정말 도깨비가 한 것이냐?”

이건 사람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다.

도깨비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러하옵니다.”

동이가 사뭇 기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정말 도깨비의 신부가 맞는 것이냐? 네가 도깨비를 부려서 저걸 만든 것이냐?”

“보시고도 믿지 못하겠습니까?”

“아니다. 아니다. 믿는다, 믿어.”

저걸 눈으로 보고 어떻게 못 믿는단 말인가.

이제 이현은 동이가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라고 해도 믿을 생각이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이건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내가 다 들어주마. 원하는 것을 말하거라.”

“제가 원하는 것은….”

동이가 바라고 바라던 것을 드디어 꺼냈다.

동이가 바라는 것은 금은보화도 아니고 부귀와 명예도 아니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사랑하는 도깨비와 행복하게 사는 것밖에 없다.

“제가 바라는 것은….”

동이의 머리 위로 아침의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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