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7)
  • 3.

    “이게 뭐예요?”

    사내가 짐 속에서 꺼내 내미는 것을 본 동이가 뺨을 붉혔다.

    그게 뭔지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너무 좋아서 그냥 물어본 것이다.

    “네 거다. 지나가다 곱게 보여서 너 주려고 사왔다.”

    사내가 내민 것은 꽃신이었다.

    좋은 가죽에 복사꽃을 예쁘게 수놓은 가죽신을 받아든 동이가 얼른 그걸 제 발에 대어봤다.

    “딱 맞아요.”

    “신고 다니거라.”

    “흙이 묻을까봐 아까워서 신지도 못하겠어요.”

    “망가지면 또 사올 테니 아끼지 말고 신거라.”

    “올해도 흉년이래요.”

    꽃신을 한쪽으로 밀고 동이가 바느질거리를 손에 쥐었다.

    지금 동이가 만드는 것은 솜을 누빈 저고리다.

    이 사내가 겨울 내내 입을 저고리를 제 손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동이가 일부러 천을 끊어오고 솜도 얻어 왔다.

    “흉년이지.”

    “벌써 십 년도 넘게 흉년이래요. 이십 년 가까이 이렇게 흉년인 건 처음 있는 일이래요. 그나마 이곳은 덜한데 다른 마을들은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나 봐요.”

    “비가 내려야 할 때에 비가 내리지 않고, 비가 내려도 땅이 물을 받아놓지 못하니 흉년일 수밖에.”

    사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벌써 십 수년째 이어지는 흉년에도 사내는 이 집에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했었다.

    덕분에 동이는 흉년도 모르고 살았다.

    “여름에 비가 곧잘 내렸는데, 그죠.”

    “비가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땅이 물을 받아 놓아야 하는 거란다.”

    “땅이 어떻게 물을 받아요?”

    “커다란 저수지가 있어서 거기에 물을 받아놓으면 가물어도 거기에서 물을 끌어다 쓸 수 있고, 홍수가 나도 물이 넘쳐 밭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는 법이지.”

    “그런 커다란 저수지는 또 어찌 만들어요.”

    “땅을 깊게 파고 돌로 둑을 쌓아 만들지.”

    “아저씨는 말만 쉽게 해요. 그런 걸 만들려면 수백 명이 달라붙어서 일 년을 해도 다 못 해요.”

    “나라면 십수 년을 홍수와 가뭄으로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일이 년이 걸리더라도 수백 명을 동원해서 땅을 파고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이 흉년을 없애는 길을 택하겠다.”

    “하지만 다들 농사도 지어야 하고, 저수지를 만드는 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평생 흉년에 시달려야지.”

    “그래도 나는 아저씨 때문에 굶은 적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아저씨가 없었으면 벌써 굶어 죽었을 거예요. 그렇죠?”

    그 말에 사내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어떻게 알고 그날 여기에 절 찾아오신 거예요?”

    “무슨 말이냐?”

    “전날 엄마가 떠난 걸 어찌 알고 딱 맞춰서 여기 오셨는지 궁금해서요.”

    “우연이지.”

    “우연히 오셔서 그냥 눌러앉으신 거네요.”

    “그런 거지.”

    “그러면 원래 아저씨가 살던 집은 어떻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것을 동이가 살그머니 물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이 사내가 살던 집이 있을 것이다.

    그곳은 어찌하고 이 사내는 여기에 온 걸까.

    이곳에서 12년을 살 동안 원래 집에 돌아가 봤을까.

    “원래 살던 집에는 아무도 없단다.”

    “그러면 혼자 살았던 거예요?”

    “그래.”

    “얼마나 오랫동안이요?”

    “꽤 오래.”

    “그러면 아저씨도 가족이 없었던 거네요.”

    “그렇지.”

    “저도 가족이 없었고,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가족이구요.”

    가족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듣기 좋은 걸까.

    “우리 둘이서 이젠 가족이잖아요.”

    “진짜 가족을 만들어야지, 너는.”

    “아저씨가 진짜 가족이에요.”

    동이가 바늘을 휙 눌렀다.

    “아얏.”

    푹 찌른 바늘이 검지손가락을 찔러 순식간에 새빨간 핏방울이 배어나왔다.

    “피가 나는 것이냐?”

    동이의 비명에 사내가 불쑥 다가앉아 피가 새는 손가락을 쥐었다.

    그러고는 대뜸 그 손가락을 입에 물고 쪽쪽 빨았다.

    “…….”

    동이가 제 손가락을 빠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제는 바늘에 찔린 손가락이 아프지도 않다.

    예전에 다쳤을 때 피가 나면 사내는 항상 상처를 빨아줬었다.

    신기하게도 사내가 상처를 빨면 피도 빨리 멎고 상처가 덧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픈 것도 빨리 사라졌었다.

    그래서 동이는 칼에 손을 베어도 곧장 사내에게 그 다친 손을 내밀곤 했었다.

    그랬던 것이 최근 2년 동안에는 사내의 앞에서 다친 적이 없어 이런 일은 거의 없었다.

    “아프냐?”

    사내가 물었던 손가락을 놓고는 동이를 쳐다봤다.

    “아니요.”

    “조심하거라.”

    “네….”

    동이가 살짝 돌아앉아 아직도 사내의 타액이 묻어있는 제 손가락을 살며시 입술에 가져가댔다.

    사내의 타액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거기에 제 혀를 살짝 얹고는 할짝이자 가슴이 간질거린다.

    사내의 혀가 꼭 제 입 안에 들어와 제 혀를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건 흉내일 뿐이다.

    동이도 그걸 안다.

    이건 진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 * *

    잠결에 목이 말라 동이가 잠을 깬 것은 아직 어둠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한밤중이었다.

    “아저씨?”

    일어나 앉은 동이가 옆의 이부자리에 사내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어디 가신 거지?”

    이 밤중에 사내는 어딜 간 걸까.

    “목이 말라 물을 드시러 가셨나?”

    자신처럼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부엌에 갔을 수도 있다.

    방문을 열고 나온 동이가 신을 신고 부엌으로 갔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내는 없었다.

    “이상하다….”

    뒤뜰에도 가봤지만 거기에도 사내는 없었다.

    헛간에도, 울타리 밖에도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동이가 부쩍 겁이 났다.

    ‘나한테 말도 없이 가실 리가 없잖아.’

    사내가 제게 간다는 말도 없이 갔을 리가 없다.

    그러나 어렸을 때 어머니도 간다는 말도 없이 저를 두고 도망쳐버렸다.

    만약 사내가 저를 버리고 말없이 도망쳐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야. 아저씨가 그럴 리가 없어.’

    당황한 동이가 집 근처를 돌아다니며 사내의 모습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사내는 없었다.

    ‘우물가에 가셨나? 하지만 이 밤에 우물가에 갔을 리는 없잖아.’

    사내가 갔을 만한 곳을 짐작할 수가 없다.

    사내는 12년 동안 여기서 살면서 마을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어쩌다 필요한 것이 있어서 시장에 갈 때면 사내는 꼭 필요한 것만 사왔고,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곧장 돌아왔었다.

    그런 사내였기 때문에 마을에는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까 마을에 갔을 리는 없다.

    ‘우물에 가셨을 수도 있어.’

    어쩌면 사내는 잠이 오지 않아서 독에 물을 채워 넣으려고 우물에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동이가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는 끈을 동이는 놓고 싶지 않았다.

    촤아아악-! 촤악-!

    우물이 가까워지자 물소리가 동이의 귀를 건드렸다.

    ‘아저씨인가?’

    이 밤중에 누가 우물에서 물을 저리 길어서 뿌리는 걸까.

    어둠 속에서 조심조심 다가간 동이가 나무 뒤에 숨어 우물가에 서 있는 사내를 엿봤다.

    키가 장대처럼 큰 그 사내는 틀림없이 동이의 [사내]였다.

    ‘뭘 하시는 거지?’

    사내는 벌거벗고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로 몸을 씻고 있었다.

    오늘은 달이 밝은 밤이라 동이의 눈이 사내의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볼 수 있었다.

    ‘왜 피가….’

    사내는 전신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저렇게 피를 뒤집어쓴 걸까.

    다친 걸까?

    이 밤에 무얼 하다가 저렇게 피가 많이 날 정도로 다친 걸까.

    아니다. 다쳤으면 피를 저렇게 씻기보다는 상처를 치료했을 것이다.

    ‘그러면 피만 뒤집어썼나? 다른 사람의 피인 걸까?’

    숨어 있는 나무 뒤에서 나가 사내에게 [웬 피냐]고 묻고 싶었지만 동이는 그러지 못했다.

    혹시라도 사내에게 들킬까 싶어 살금살금 그 자리를 벗어나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조용히 열리고 사내가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내는 이불을 덮고 누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자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을 들킬까봐 동이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일일까… 대체 무슨 일이기에….’

    동이는 사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사내는 수상한 일을 하고 온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것을 물어봐도 될지 안 될지 그것이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지금은 말고 나중에….’

    사내라고 왜 비밀이 없겠는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한두 개 정도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신이 먼저 묻기보다는 사내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

    기다리다보면 자신에게 말해줄 때가 오지 않을까.

    ‘그래, 기다리자.’

    그렇게 결심한 동이가 애써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감은 눈 안에 우물 곁에서 전신에 묻은 피를 씻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자꾸만 선명하게 보이는 듯해 쉽게 잠들 수 없었다.

    * * *

    아침에 일어났을 때 동이가 본 사내는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

    평상시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그런 사내를 보며 동이는 어제 제가 꿈을 꿨나 싶었다.

    “어디 가려고?”

    마당을 나서려던 동이가 품 안에 안은 바구니를 사내에게 보여주었다.

    “올해는 밤이 많이 떨어져서 마을에 가서 밤을 다른 것으로 바꿔오려구요.”

    “같이 가줄까?”

    “아니요, 혼자서 다녀올게요.”

    “그러면 나는 그 사이에 지붕을 좀 고쳐야겠다.”

    “네. 빨리 다녀올게요.”

    동이가 마당을 나섰다.

    올해는 정말 밤이 많이 떨어졌다.

    흉년이 들면 산에 열매가 많은 법이라고 어려서부터 사내에게 들었었다.

    산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굽어보다가 사람들의 마을에 흉년이 들면 산열매를 많이 맺게 하여 사람도 짐승도 굶지 않게 해주려는 것이라고, 사내는 흉년에 밤이 유난히 많이 열리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해줬었다.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올해 유난히 흉년이 들었고 밤나무의 가지가 무거워질 정도로 많은 밤이 열렸다.

    동이는 밤을 주워서 그걸 가지고 마을에 가 솜이나 천으로 바꿔 오곤 했다.

    오늘 새 천을 끊어 와서 그것으로 이불을 새로 지을 생각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불은 몇 년을 쓴 것으로 이번에는 사내에게 새 이불을 지어주고 싶다.

    ‘어제는 내가 잘못 본 거야. 꿈을 꿨든가, 그래. 꿈이었겠지.’

    가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마 어제도 그랬을 것이다.

    “간밤에 또 죽었다지?”

    “그렇게 높은 담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마구간에 묶여 있던 말을 기어이 잡아먹고 갔다지 아마.”

    “무서워라. 대체 무슨 짐승이기에 그렇게 담을 넘어오는 거지?”

    “관에서는 뭐라고 안 하든가?”

    “그 짐승을 잡으면 비단 스무 필을 내린다고 방이 붙은 것을 막 보고 오는 길이네.”

    “비단 스무 필이면 욕심도 나지만, 그 짐승이 뭔지 알고 덤벼들겠나.”

    포목점에서 천과 솜을 사던 동이가 저도 모르게 구석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내들을 쳐다봤다.

    “꼭 말만 죽여서 피만 쪽 빨아먹는 것이 무슨 짐승인지 모르겠어.”

    “피만 빨아먹고 살덩이나 내장은 건드리지도 않았다지?”

    “그러니까. 그게 무슨 변고란 말이야.”

    “몇 달 전에 그러더니, 두 달 전에 그러고, 또 잠잠하더니 그제, 어제 그러는 걸 보면 두 달 간격으로 짐승이 이 근방에 오는 것도 아니고….”

    두 달.

    그 단어가 동이의 가슴에 박혔다.

    사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주기가 꼭 두 달이다.

    그리고 사내가 이번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필이면 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제, 사내가 돌아왔고 그제와 어제 말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

    그리고 사내는 어젯밤 몰래 어디를 다녀왔고 우물가에서 피투성이 몸을 씻었다.

    그 피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아저씨가 왜 말을 죽이겠어. 더군다나 말을 죽이고 피를 빨아 먹었다는데… 아저씨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이건 괜한 생각이다.

    그 사내가 왜 그런 무서운 짓을 하겠는가.

    그 사내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사내가 아니다.

    “정말 도깨비의 소행인가?”

    “그렇지? 짐승이 아니라 도깨비의 소행 같지? 그런데 도깨비가 저지른 짓이면 어찌 잡나? 도깨비는 창칼로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닌데.”

    “도깨비를 잡을 때는 말 피를… 응? 말 피?”

    “말을 죽여 말 피를 전부 빨아먹는 놈인데 말 피로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이상하네? 도깨비는 말 피를 무서워한다고 들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동이가 사내들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팽 돌아서서 포목점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동이의 발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 사내의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무서워지는 건 어젯밤 그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아저씨의 짓이라면 어떻게 하지?’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 관에서는 기어이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가 사내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어찌해야 하는 걸까.

    ‘오늘 밤에도 나갈까? 오늘 밤에도 만약 아저씨가 밖에 나간다면….’

    그 뒤를 밟으면 진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오늘도 밖에 나가면 뒤를 밟자.’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그 사내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여 확실히 매듭짓자고 동이가 결론을 내렸다.

    동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 사내는 이미 지붕을 전부 고치고 허술하게 흔들리는 울타리까지 전부 고쳐놓은 후였다.

    사내는 울타리와 지붕을 말끔하게 고쳐놓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장작까지 헛간에 잔뜩 쌓아놓았다.

    동이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을 반나절 만에 뚝딱 마쳐놓은 것이다.

    “안색이 왜 그런 것이냐?”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동이를 보며 사내가 다가섰다.

    “네?”

    “낯빛이 좋지 않구나. 어디 아픈 것이냐? 열이라도 있나?”

    사내가 큰 손으로 동이의 이마를 짚었다.

    사내의 차가운 손이 제 이마에 닿자 동이의 귀가 확 달아올랐다.

    “저, 저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열이 있는데. 아마 고뿔이 오는 모양이구나.”

    “괜찮은데….”

    “약을 달여 줄 테니까 오늘은 일찌감치 이불을 덮고 누워 자거라.”

    제 이마를 덮고 있는 사내의 손 위에 동이가 제 손을 살며시 얹었다.

    “아저씨 손은 차가워서 기분 좋아요.”

    “네 이마가 뜨거우니 그렇지.”

    이마에서 떨어지려는 사내의 손을 동이가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뭘 하는 거냐?”

    “차가워서 잠깐 더 이렇게 있으려고요.”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이게 얼마나 우스운 짓이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좋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다.

    이 차가운 손바닥의 체온을 느끼며 이 사내가 제 곁에 있다는 걸 느끼고 싶다.

    제가 모르는 모습으로, 제가 모르는 곳에서, 제가 알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 * *

    결국 동이는 사내가 달여 주는 약을 먹고 일찌감치 자리에 누워야만 했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닌데 사내의 말처럼 열이 오르기는 했다.

    아마 사내의 생각에 너무 골똘하게 몰입해서 열이 오르는 것일 텐데 사내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사내는 아궁이에 불을 넣고, 동이에게 먹일 죽을 끓이고, 또 동이가 잠들 때까지 곁에서 찬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얹어줬다.

    동이는 잠들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잠들면 사내의 뒤를 밟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노력했는데,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다.

    “헉!”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큰일이야.’

    사내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허둥지둥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나온 동이가 잠시 고민했다.

    ‘그제와 어제 관의 마구간의 말이 죽었으니까 오늘은 관에는 가지 않겠지. 지난번에는 역참의 말이 습격을 당했다고 했어. 그러면 오늘은 어딜까. 이 근방에 말이 있는 곳이 어디 있지?’

    잘은 모르지만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역참이다.

    ‘그런데 왜 어제와 그제는 역참으로 가지 않았을까?’

    두 곳 중의 한 곳을 골라야 한다.

    역참이나 관아.

    물론 그 두 곳이 아닌 다른 곳일 수도 있다.

    ‘관아로 가자.’

    연달아 세 번이나 관아를 습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역참에서 말을 세 마리나 잃었다고 근처 아낙들이 말했었다.

    하루에 한 마리씩, 세 번.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

    아직 관아의 말은 두 마리밖에 습격당하지 않았으니 오늘도 역시 관아일 수도 있다.

    ‘그래, 관아로 가자.’

    결정을 내린 동이가 관아로 뛰어갔다.

    관아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도중에 두 번이나 멈추고 숨을 고르며 동이가 겨우 관아에 도착했지만 그녀는 관아에 접근도 하지 못했다.

    관아 근처에는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횃불이 그 주변을 대낮처럼 밝혀 도무지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여기가 아니었어.’

    사내는 관아로는 오지 않았다.

    아마 이곳으로 왔다가 저 환한 횃불과 많은 병사들을 보고 다른 곳으로 걸음을 돌렸을 수도 있다.

    ‘여기서 역참이 얼마나 걸리지?’

    벌써 동이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가야 해.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그때였다.

    ‘가까운 곳에 분명히….’

    집에서는 멀지만 관아를 기준으로 보면 가까운 곳에 객잔이 있다.

    그리고 객잔에는 장사꾼들이 타고 온 말들이 묶여 있다.

    오늘 낮에 장터를 다녀가면서도 객잔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는 장사꾼들을 봤었다.

    ‘거기에도 말이 있었지.’

    정말 말만 습격한다면 객잔의 말을 노릴 수도 있다.

    관아까지 왔다가 관아의 병사들을 보고 발길을 돌리는 와중에 객잔의 말을 봤다면 말이다.

    인적이 드문 밤길을 허겁지겁 달려 객잔까지 온 동이가 말을 묶어두는 곳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말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구간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자신의 숨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마구간으로 다가간 동이가 안을 들여다봤다.

    ‘헉….’

    동이의 숨이 턱 막혔다.

    마구간 안은 온통 지독한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커다란 말이 한 마리 쓰러져 있고 그 위에 올라탄 희끗한 것이 죽은 말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희끗한 것은 동이가 알고 있는 그 사내였다.

    벌거벗은 사내가 말의 목을 물어뜯는 것을 보며 동이가 기겁을 했다.

    ‘어째서… 어째서….’

    대체 왜 저 사내가 저런 짓을 하는 걸까.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두려움을 애써 누른 채 동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서움보다는 사내를 믿는 마음이 더 강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사내가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저씨?”

    동이가 그를 부르는 순간 사내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저씨. 아저씨 맞지요?”

    동이가 용기를 내어 더 크게 사내를 불렀다.

    그러자 사내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피투성이 얼굴에 조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리고 마구간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 눈동자는 금빛이었다.

    “도깨비님?”

    순간 동이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자신이 아는 그 사내가 아니라 [도깨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12년 전 자신을 구해주었던 그 도깨비였다.

    “저기에 누가 있다!”

    “그 짐승이야!”

    “모두 여기에 와 봐!”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자 동이가 놀라 허둥거렸다.

    여기 있다가는 잡힌다.

    그때였다.

    “꺄악!”

    조금 전까지 마구간 안에 있던 사내가 어느새 동이의 앞까지 다가왔다.

    “아…!”

    사내의 손이 동이의 허리를 꽉 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동이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

    ‘나 지금 꿈을 꾸는 걸까?’

    사내의 품 안에 꽉 안긴 채로 동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으니 지금 자신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주 오래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도깨비의 등에 업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내의 품에 안겨 하늘을 날고 있다.

    금빛 눈동자, 뾰족한 송곳니, 그러나 이 사내는 틀림없이 동이가 아는 그 사내다.

    ‘아저씨가 도깨비님이었어.’

    그런데 이상하게 놀랍지가 않다.

    12년 전에 자신을 구해주고 사라진 도깨비가 실은 자신의 먼 친척이라는 사내였는데, 그게 조금도 이상하거나 놀랍지가 않다.

    어렸을 때는 전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도깨비가 저를 데려다주고 사라진 그 다음날 낯선 사내가 찾아왔다.

    부모님이 계실 때에 한 번도 찾아와본 적 없는 사내가 먼 친척이라며 찾아와 아예 눌러 앉아서 저를 돌봐준 사실 자체가 이미 이상했다.

    이상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의문을 제기하면 이 사내가 사라져버릴지도 몰라서였다.

    그래서 이 사내가 먼 친척이라고 믿어버렸을 수도 있다.

    도깨비가 아니라 먼 친척이라고, 진짜 그런 것이라고 어린 마음에 덜컥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모르는 척 할 수 없다.

    12년이 지나도록 조금도 늙지 않은, 여전히 그 얼굴 그대로인 이 사내는 사람이 아닌 도깨비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아저씨는 도깨비라는 것을.

    * * *

    하늘을 날아서 외떨어진 집의 마당으로 내려온 사내는 동이를 방 안으로 들여보내고 조금 후에야 방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피를 씻어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피가 깨끗하게 지워진 사내를 보고 동이가 겨우 깨달았다.

    그러나 피만 씻겨 나갔을 뿐 사내의 눈은 여전히 금빛이고 여전히 송곳니가 돋아 있었다.

    기억과 다른 것이 있다면 사내의 손등에 불긋한 비늘이 돋아있는 것 정도였다.

    “새 옷을 드릴까요?”

    묻고 싶은 것이 많이 있지만 동이가 조금 전에 바구니에서 꺼내 품에 꼭 안고 있던 새 옷을 내밀었다.

    “왜 놀라지 않느냐.”

    “놀랐어요.”

    “그러면 왜 묻지 않느냐.”

    “안 물어도 말해줄 것 같아서요.”

    말을 습격한 것이 사내라는 사실에는 놀랐었다.

    그러나 사내가 도깨비였다는 사실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내가 무섭지 않느냐?”

    “아저씨인걸요. 그리고 도깨비님이구요.”

    “너는 어찌 그러느냐.”

    “왜 말을 죽였어요? 배가 고파서요?”

    “아니.”

    “그러면 왜 그러셨어요?”

    “안 그러면 미치니까.”

    사내의 얼굴은 어둡고 슬퍼보였다.

    그 슬퍼 보이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동이의 마음도 이상하게 슬퍼졌다.

    사내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금 사내는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아파하고 있다.

    “나는 도깨비란다.”

    “알고 있어요.”

    “도깨비는 정기를 먹고 살지.”

    “정기라는 것을 말의 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나요?”

    “아니. 정기는 가만히 있어도 얻을 수 있단다. 숲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숲의 정기를 얻을 수 있고 인간들 틈에 섞여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정기를 얻을 수 있지. 한꺼번에 많이 얻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정기를 빼앗기는 쪽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렇게 얻는 거란다.”

    “알 것 같아요.”

    “그런데 특정한 인간과 너무 오래 있다 보면 원치 않아도 정기를 계속 흡수하게 된단다.”

    “그게 전가요?”

    “그래. 네가 어렸을 때는 괜찮았었지. 그런데 네가 자라고 초경을 시작하자 문제가 생겼단다.”

    “무슨 문제인가요?”

    “네 음기가 너무 강해지기 시작한 거야.”

    “제 음기….”

    “도깨비는 원래 양기가 강한 법이지. 그런데 네 음기가 강해지다 보니 내가 원치 않아도 내 몸 안에 네 음기가 스며 들어와서 가득 차게 되더구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음기가 양기를 몰아내고 몸 안에 가득 차게 되면 귀신이 되는 법이지.”

    “귀신….”

    “사악하고, 난폭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괴물이 된다는 뜻이란다.”

    “사악하고 난폭한….”

    “지금처럼 말이야.”

    “지금이 사악하고 난폭한 상태인가요?”

    동이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조금이지만 점점 더 난폭하게 변해가겠지.”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사람들을 찢어죽이고 이 마을을 전부 망가뜨리겠지.”

    “말 피는 왜 드셨나요?”

    “말의 피에는 양기가 가득해서 그걸 먹어야 음기를 누를 수 있으니까.”

    “만약 여기에 안 계시면, 제 곁에 돌아오지 않으시면 음기가 쌓을 일도 없겠네요, 저 때문에 쌓이는 음기라면.”

    “그렇지. 여기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말 피를 마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나요?”

    “하나 있긴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아.”

    “무슨 방법인데요?”

    “음기가 강한 여인과 교접을 해서 몸 안에서 음기와 음기를 충돌시켜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란다.”

    “그 말은….”

    “여인과 교접을 하면 음기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거다.”

    “해보셨어요?”

    “아니.”

    해보지 않았다는 말에 동이가 안도했다.

    다른 여인과 교접을 하는 사내라니, 생각하기도 싫었다.

    “왜 안 하셨어요? 아저씨라면 얼마든지 교접 상대를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러면 계속 말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게요? 계속 그런 짓을 하면 사람들이 아저씨를 찾아내서 죽이려 할 거예요.”

    “아니.”

    “그러면요?”

    “여길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야지. 그러면 음기가 찰 일도 없을 테니까.”

    “그건… 제가 싫어요.”

    동이가 주먹을 꽉 쥔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이 사내의 말이 맞다.

    자신 때문에 음기가 쌓여서 말을 죽여 그 생피를 마셔 음기를 다스려야 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떠나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맞다.

    하지만 이 사내가 돌아오지 않는 건 싫다.

    자신을 두고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는다.

    “저는 아저씨가 없으면 안 돼요.”

    “통제력을 잃어버리면 너도 해치게 될 거다. 나는 내 손으로 너를 해치고 싶지 않구나.”

    “교접이라는 걸 하면 되잖아요. 말을 죽이지 말고 그 교접이라는 걸 해요. 그리고 여기에 계속 남아계세요.”

    “그건….”

    “대신 저와 해요.”

    “동이야.”

    사내가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동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저하고 해요, 그 교접이라는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저를 신부로 삼아주면 되잖아요. 먼 친척도 아니니까, 제가 신부가 되어도 되잖아요. 저를 신부로 삼아서 저와 교접을 하면 음기도 다스리고 제 곁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

    동이의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오래 전부터 바라온 일이다.

    먼 친척이라고 해서 포기했던 마음을 이제는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제발 저를 안아주세요.”

    “내 음기가 사라지면서 네 몸의 음기도 함께 사라지는 거란다. 내 양기에 네가 짓눌리게 될 거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어떻게 되는데요?”

    “시름시름 앓겠지. 앓다가 죽을 수도 있단다. 나는 너를 잃을 수 없단다, 아가야.”

    “저도 아저씨를 잃기 싫어요. 저도 포기 못해요. 아저씨를 아무데도 보낼 수 없어요.”

    “나는 지금 가야 한단다. 몸 안의 음기가 들끓어서 머잖아 미쳐버릴 거다.”

    “싫어요.”

    동이가 방문 쪽으로 가서 앉았다.

    방문을 등지고 앉아서 동이가 제 옷고름을 풀었다.

    “절대로 못 나가요.”

    “얘야.”

    오늘만큼은 사내가 뭐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오늘은 자신의 고집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할 작정이다.

    절대로 사내를 보내주지 않을 거다.

    이 사내가 저를 이렇게 키웠으니까, 책임도 이 사내가 져야 한다.

    “저는 이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옷고름을 푼 동이가 저고리를 벗었다.

    그리고 사내의 눈앞에 제 말갛고 봉긋한 젖가슴을 드러냈다.

    아직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도톰한 앵두 같은 꼭지가 얹어진 젖가슴을 드러낸 동이가 힘을 잔뜩 실은 두 손으로 제 치마를 풀었다.

    그러자 배꼽이 드러나며 속바지만 입은 알몸이 사내의 눈앞에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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