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45/45)
  • 11.

    컹- 컹-

    벌컥, 문이 열리고 커다란 덩치의 개가 신나게 뛰어 나왔다. 그 목줄이 아직도 길게 안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밖에 나온 게 기쁜지 마냥 날뛰기만 했다. 결국 목줄을 잡고 있던 누군가가 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딸려 나왔다. 

    가벼운 셔츠를 걸치고 색이 짙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그 뒤를 이어 앞치마를 한 젊은 여자가 뛰쳐나왔다.

    "선생님! 그냥 가시면 위험하다니까요."

    "괜찮습니다. 뭐, 자주 다녔던 길이고, 이 녀석도 지금은 흥분해서 날뛰지만 좀 진정하면 누구보다 얌전하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혈기왕성한 개가 힘에 부쳐 쩔쩔 매면서도 남자는 웃으며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진짜 저기 놀이터만 돌고 오셔야 해요!"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인 남자보다 힘이 더 좋은 개를 다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이, 야, 야.. 좀 천천히 가자니까. 어이, 소망아!"

    비틀비틀 거의 뛰다시피 개를 따라가던 남자는 결국 돌부리에 걸려 줄을 놓치고 말았다.

    "우왔-!"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뜻밖에도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

    그가 얼결에 붙잡은 것은 고급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양복 천. 그는 자신을 붙잡은 사람이 꽤 체구가 큰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저... 고맙습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그가 다시 넘어질 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듯 어깨와 허리를 꼭 붙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도와주신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그는 남자의 얼굴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의 몸을 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좀 더 강해졌다.

    "저희 소망이 좀 찾아 주시겠습니까? 제가 아까 데려온 갠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컹컹 소리가 들리더니 예의 그 개가 목줄을 질질 끌고 다시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에 갇혔던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발산했나 보다.

     소망이는 그의 손바닥을 핥아 친근감을 표시하고는 옆의 존재에게 이를 드러내며 경계했다.

    "그려지마. 소망아. 도와주신 분이야. 너 때문에 넘어질 뻔 한 거 도와주신 분이라니까."

    무릎을 꿇고 소망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나 되풀이하자 개는 마치 말을 알아듣는 것 처럼 으르렁거림을 멈추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눈이 불편해서 하마터면 굉장히 곤란해 질 뻔했거든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 잠시 요 앞 놀이터에 갑니다만..."

    살짝 쉰 듯한 목소리가 왠지 묘하게 귀에 익어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는 사이에 남자는 그의 손에서 목줄을 받아 들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허리를 감았다.

    ".....! 저기요?!"

    "갑시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놀란 그가 펄쩍 뛰었지만 남자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놀이터에 그를 앉히고 소망이의 목줄을 풀어주고 그에게 찬 음료 하나를 안겨 주고서야 남자는 그의 옆에 앉았다.

    "대구 분 아니시죠?"

    "........."

    말 없이 남자는 그가 들고 있던 캔을 따서 손에 쥐어 주었다.

    "억양이 서울 쪽인 듯 한데... 대구에는 사업차 오셨나 보지요?"

    "...........그.. 눈은.. 선천적입니까."

    어쩌면 무례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질문인데도 그는 의외로 사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뭐.. 선천적이라면 선천적일 수도 있겠군요. 유전병이라고 들었습니다. 병명은 너무 어려워 못 외웠는데, 거의 100% 유전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음료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이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포카리 스웨트. 그가 좋아하는 거다.

    "처음엔 굉장히 좌절했었습니다. 저 고아거든요.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남겨준 게 고작 이런 유전병 하나라니... 허탈해 지더군요.

     처음엔 주변 다 정리하고 죽어버릴까도 생각했는데 그러자니 너무 억울했습니다. 유전병 물려받은 것도 억울한데 내가 왜 죽어

     주기까지 해야하나 싶더군요. 그래서 온 곳이 여깁니다. 여기서 점자 배워서 선생노릇 하고 있어요. 배운 게 이것 뿐이라 결국 

    이걸로 밥 벌어먹어야 할 것 같아요."

    하하, 웃으며 그는 다시 음료를 삼켰다.

    "저 원래 이렇게 아무에게나 말 막하는 사람 아닌데... 그 쪽 분 목소리가 왠지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누군가랑 닮아서 마음이 풀렸나 봅니다."

    ".........누군지.. 여쭤 봐도 되나요?"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남자의 기색을 읽으며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름 감기라도 걸렸나?

    "그냥...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입니다. 아, 목소리가 굉장히 좋았어요. 당신처럼. 처음 만났을 때가 한창 

    시력이 나빠져 눈은 눈대로, 귀는 귀대로 안 들려서 고생하던 때였는데... 묘하게 그 녀석 목소리만 뚜렷하게 들렸어요. 

    그래서 기억을 금방 하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허기져 보이는 아이였는데..."

    그는 아련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때는 그 녀석을 챙겨줄 마음의 여유가 나도 없었습니다. 망가져 가는 눈으로 멀쩡한 흉내를 내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녀석이 그렇게 절박하게 잡는 거 외면했습니다. 아니, 실은 도망쳤다고 해야겠지요. .........무서웠거든요.

     내 몸이 이 모양이니... 한결같이 올곧은 눈으로 매달리는 녀석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녀석은 뭔가 기댈 곳을 찾고 있는데... 

    나는 뿌리깊은 나무가 아니거든요. 튼튼한 거목인 줄 알고 기대었는데... 그게 썩은 고목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 뒤를 상상하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녀석을 버렸어요.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그럼..."

    남자는 다시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 다시 만난다면 그를 받아 주실 수 있습니까?"

    "......글쎄요..."

    그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녀석은 이제 더 이상 버팀목이 필요 없을 거에요."

    "제 얼굴... 한 번 만져 보시겠습니까?"

    "예?"

    그는 놀란 얼굴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 맹인들은 손으로 얼굴을 만져서 사람을 기억한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하지도 않는 사람의 얼굴을 만진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실례가 아닌가. 그렇게 망설이는 

    그의 손을 남자는 덥썩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었다. 놀라서 빼려는 손은 크고 단단한 손에 갇혀 빠지지 않았다.

    "그냥, 만져 보세요. 닳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잠시 망설이던 그의 나머지 손이 천천히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날이 더운 관계로 생리적으로 맺혀 있는 이마의 땀방울을

     가볍게 훔쳐준 그의 손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남자의 얼굴을 여행했다. 짙은 눈썹과 오똑한 콧날,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매만지던 

    그의 손이 왠지 바르르 떨렸다. 

    "저..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불에 데인 듯 손을 떼고 황급히 일어나는 그의 손목을 남자는 움켜쥐었다.

    "또... 도망가는 거야....?"

    더 이상 잠긴 목소리를 내지도, 기침을 하지도 기침을 하지도 않는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나... 난...."

    손목을 잡힌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 기억 못해? 나는 당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데.... 이윤세."

    털썩, 윤세의 몸이 무너졌다.

    "당신 말대로 나는 이제 버팀목 같은 거 필요 없어. 철없는 투정을 받아 줄 상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심술 부릴 상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야.

     굳이 아버지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는 능력도 있어. 그러니... 이제 나는 매달릴 상대 같은 거 필요 없어."

    남자, 완이 잡고 있던 손목을 놓자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윤세는 넋이 빠진 얼굴로 망연히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저 멀리 미끄럼틀 아래의 모래를 무지막지한 기세로 파헤치던 소망이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고 이쪽을 쳐다보았으나 주인이

     인정한 사내 외엔 어떤 위협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윤세의 옆에 앉았다. 그런 완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세는 미동도 않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완은 손을 뻗어 

    윤세의 볼을 감싸 안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래도 당신을 필요로 하면 안 돼?"

    "........!"

    작살 맞은 고기처럼 윤세가 움찔했다. 경악으로 살짝 벌어진 입술에 완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입술을 부볐다.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나는 윤세를, 

    어깨를 잡아끌어 당겼다.

    "나는 버팀목이 필요한 게 아니야. 그냥 당신이 필요할 뿐이야. 괴롭게 해서 미안해.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해. 이제는 내가 당신의 버팀목이 

    되어 줄게. 당신의 그늘이 될게. 그냥... 그냥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돼?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게. 원한다면 보기만 할게. 

    밀어내지만 말아 줘.... 당신이 없는 5년 간은....... 정말 내겐 지옥이었어........."

    설득의 목적으로 시작된 말은 애원이 되고 눈물이 되었다. 완은 윤세를 꽈악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망연하게 안겨 있던 윤세가 

    팔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고 하자 완은 오히려 필사적으로 으스러져라 그에게 매달렸다.

    "나 싫어하지 않잖아. 내가 당신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당신이 날 미워하지 않는다는 눈치 정도는 있어. 

    사랑해... 사랑한단 말이야...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물기가 묻어나는 젖은 목소리에 윤세는 머뭇머뭇 손을 들어 그의 뒤통수와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몸을 살짝 밀어내자 의외로 완은 순순히 그를 풀어 주었다.

    "난... 변하지 않을 거다."

    "...........응."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완은 윤세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얼른 대답했다.

    "난 여기서 내 일을 계속할 거야."

    "응."

    "그렇다고 네가 모든 일을 팽개치고 여기에 눌러 앉는 건 싫어."

    "..............................으응." (제길, 하고 완은 잠시 생각했다.)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결혼해."

    "싫어!"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윤세는 제자리에서 튀어 오를 정도로 놀랐다. 완은 인상을 잔뜩 쓰며 윤세를 노려보았다.

    "난 당신 밖에 없어! 내가 뭣 땜에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공부를 마쳤는데!"

    "..........그러니까,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이라고 했잖아. 누가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이랑 결혼하라든?"

    "...아, 그래?" 

    그럼 안 해도 되겠군, 하고 완은 기뻐했다.

    "그럼... 이제 옆에 있어도 돼?"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윤세를 살피자 작고 하얀 얼굴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수습도 못하고 완은 턱을 잡아 윤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얼굴 좀 보자, 이윤세."

    "아, 그건...!!"

    윤세가 말리기도 전에 완은 그의 안경을 훌러덩 벗겨 버렸다. 윤세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눈 좀 떠 봐."

    "싫어."

    "윤세야..."

    "싫어. 장난치지 말고 안경 내놔."

    정색을 하고 화를 내는 윤세의 반응에 완은 한숨을 쉬며 윤세의 두 손을 잡아 그의 볼에 대었다.

    "내 얼굴 여기 있거든? 그러니까 그대로 눈만 뜨면 돼. 응?"

    ".........보기 흉할 거야."

    "절대로 안 그래."

    "............초점 안 맞아."

    "눈 만 뜨면 내 얼굴이기 때문에 다른 곳은 보이지도 않는다니까."

    ".........."

    "윤세야..."

    나직하게 몇 번이고 속삭이자 바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드러난, 주위의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짙은 검정의 눈동자.

     홀린 듯 눈동자를 바라보던 완은 이윽고 소중한 듯 두 눈에 키스를 하고 윤세의 귓가에 작게 뭐라고 속삭였다. 

    윤세는 피식 웃으며 완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완은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나는 당신의 이 눈동자에 반했다니까.」

    자주 왔다 갔다 하면 비행기 값이 많이 들겠다는 사소한 문제부터, 대를 잇길 종용하는 아버지라던가,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는커녕 상대가 있으면 결혼하라고 등 떠미는 윤세의 태도 등등, 산재한 문제는 

    아직 많이 깔려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저앉아 있는, 열을 받아 뜨끈뜨끈한 놀이터의 모래가

     비단 방석으로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완은 행복에 가득 차 있었다.

    여름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