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항상 그렇지만 막 비행기가 착륙한 공항은 특히나 더 시끄럽다. 공항 직원의 안내 멘트와 우루루 출구로 몰려드는 마중객들,
세관검사대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까지... 그 사이로 작은 슈트케이스 하나만을 가진 장신의 남자가 유유히 빠져 나왔다.
편안해 보이는 세미 정장에 선글라스로 가려진 얼굴로 유추해 보건데 나이는 이십대 중 후반, 목덜미를 약간 덮은 긴 머리카락이 자유분방해 보인다.
공항 로비에서 잠시 주위를 살펴보던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공중전화로 향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네, 지금 도착했습니다. .................예, 제 마음은 변함 없습니다. ...........아닙니다, 말씀만 해 주시면
지금 바로..... 예? 고모님이요? ..........예, 알겠습니다. .............예. 집에서 뵙겠습니다. ......예.."
남자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입구로 나왔다.
"......"
강한 햇살에, 선글라스를 꼈음에도 절로 미간이 접혔다. 잠시 인상을 쓰며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벤츠의 문이 열리며 우아한 옷차림의 중년 부인이 내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완아-!"
".......고모님."
마냥 소녀 같으신 고모님을 완은 부드럽게 마주 안아 주었다.
"우리 꼬맹이, 잘 다녀왔어?"
"꼬맹이라뇨..."
나이가 몇 갠데... 하며 피식 웃는 완을 그녀는 소매를 잡고 차안으로 이끌었다.
"그럼 이제부터 회사에서 일하는 거야?"
".....예, 그러기 위한 유학이었으니까요."
"아아.. 성우가 마음이 든든하겠네... 우리 강현이는 일년 전에 대구로 내려갔어. 네 고모부가 그냥 어떤가 둘러보라고 내려보낸 거라
얼마 전에 다시 불러오려고 했더니 글쎄 이 녀석이 좀 더 있겠다지 뭐니. 대학 때부터 나가 살더니 이젠 어미가 보고 싶지도 않나 봐."
"그럴리가요."
"그나저나 너도 참 독하다. 어떻게 5년 동안 딱 연락을 끊을 수가 있니. 성우가 너 많이 걱정했어."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하긴, 그랬으니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지. 우린 다들 10년은 걸릴 거라 예상했었거든."
"........"
"그래, 5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기분이 어때?"
"글쎄요, 별로 달라지진 않은 것 같은데요."
"하긴 요즘은 하도 서구화되어서 별 차이도 없다더라."
"예."
공항을 빠져 나온 차는 어느 사이엔가 끝도 없이 높은 담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주택지도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사모님. 어서 와요, 완이 학생."
"오랜만입니다, 아줌마."
"이젠 훤한 대장부가 다 되었네. 회장님 연락 받고 2층에 방 치워놓았어."
"감사합니다."
"그럼 완아. 피곤할 텐데 올라가서 쉬렴. 성우 오면 부를 게."
"예."
완은 2층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살던 맨션의 짐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는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완은 가방을 침대 발치에 내려놓고
그대로 다이빙을 하듯 침대로 떨어졌다. 깨끗한 시트에서 향기로운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잠시 팔을 벌리고 누워 있던 완은 몸을
비틀어 지갑을 꺼내 안쪽 깊은 곳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약간 노랗게 변색되어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 종이는 반듯하게 두 번 접혀져 있었지만 예전에 구겨졌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종이를 펼친 완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와'라고 쓰다만 글자 위에 좍좍 그어진 두 줄. 하도 꺼내봐서 가장자리가
너덜거리고 접힌 부분이 헐기 시작하자 더 이상 열어 보지도 못했던 종이.
처음에는 이럴 거 차라리 쓰지 말지..라며 원망했던 마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변해갔다. 글을 쓴 게 연필이 아니라 유성 볼펜이라 다행이라고...
좍좍 찢어 버리지 않고 단지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게 다행이라고...
완은 희미하게 구겨진 자국이 남아 있는 종이에 코를 묻었다. 아니라는 건 알지만 왠지 이렇게 하고 있으면 그의 체취가 배여 나올 것 같다.
......아무리 미친 듯이 찾아보아도 그가 남긴 것은 이것 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어이없을 정도로 기가 막혀서, 종이에 코를 박은 완의 감은 눈이
조금 젖어 들었다.
이윤세... 이제 조금이야...
윤세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완은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바이크를 몰고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윤세가 좋아하는 장소가 어딘지, 그의 친구가 누구인지, 완은 아무 것도 몰랐다. 민증도 없는 미성년자에게는 어떤 정보든 제약이 너무 많았다.
결국 윤세가 사라진지 2주만에 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던 성운 그룹 본사를 제 발로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접니다."
"....오랜만이구나."
완과 많이 닮은 정회장은 무대포로 난입한 완에 의해 회의가 중단될 수 밖에 없었음에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완을 바라보았다.
"알고 계시죠?"
"뭘?"
"씨발, 시침 때지 말아요. 아닌 척 하면서도 결국 내 일은 다 당신 귀에 들어가는 거 알고 있어. 어디 있어요?"
"누구 말이냐?"
"썅. 이윤세! 우리 반 임시 담임!!"
"네가 강간했던 그 사람 말이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완은 고개를 떨구었다. 정회장은 여전히 굳은 눈매를 풀지 않았다.
"어디 있어요?"
"모른다."
"회장님!"
"제 발로 네 곁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이다. 네 주변의 인물에게까지 사람을 붙여 놓진 않아."
"찾아 주세요. 찾을 수 있잖아요."
완은 간절히 애원했다.
"내가 왜."
"회장님!"
"하나뿐인 아들이 사내자식과 붙어먹는 걸 보고도 잠자코 있어 준 거로 충분해. 등까지 떠밀어 줄 생각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라구요."
"...네 평생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런 10살이나 연상의 동성에 장님이 아니더라도 네 평생을 걸 만한 사람은 또 있을 거다."
"....뭐.....라.....구요.....?"
완은 쇠망치로 후두부를 내려치는 충격을 받았다. 뭔가.. 무슨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듣긴 들었는데 머릿속에서 입력이 안 된다.
근데도 이렇게 거칠게 뛰는 심장의 정체는 뭐지?
강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완을 보며 정회장은 미간을 접었다.
"네 평생을 걸만한 사람은 또 있을 거라고."
"그것 말구요!"
쾅, 하고 책상을 두들겼다.
"버르장머리 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완의 귀엔 정회장의 목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장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사람이 왜 장님이야? 장님이 어떻게 애들을 가리켜요?!"
"........무슨 유전병이라더군.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 9월 아침이었다. 의사 말로는 시신경이 완전히 죽어서 이식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말 몰랐냐."
비실비실 완은 뒤로 물러났다. 머리 속에서 그간의 윤세의 모습이 휙휙 지나갔다.
문을 열지 못해 10분 이상 낑낑거리던 윤세, 심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던 윤세, 날이 갈수록 침대나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던 윤세...
몰랐다. 진짜 몰랐다.
완은 털썩 주저앉았다. 온 몸이 후들거렸다. 그 모습을 정회장은 눈을 찌푸린 채 지켜보고 있었다. 뚝, 하고 갑작스레 떨어진
젖은 습기가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적셨다.
"찾아.. 주세요..."
"......."
"찾아 주세요. 하라는 데로 다 하겠습니다. 뭐든지 시키는 데로 할게요. 윤세만... 그 사람만 옆에 있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라는 소리까지 결국 내뱉는 완을 보는 정회장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러나 줄곧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완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결혼도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다. 무엇으로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거냐."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왠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하시는 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믿을 수 있다고 하시는 모든 일 해 보이겠습니다."
".....몇 가지 조건이 있다."
"......"
"유학 가라."
".........!!"
뭐든지 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담은 눈이 경악으로 커지고, 곧이어 맹렬하게 비난을 담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유학 가서 잊으라구요? 세월이 잊게 해 줄 거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지시만 내리면 나는 일주일 내로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데려오면? 너는 그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느냐?"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는 완을 정회장은 손을 들어 막았다.
"너는 지금 미성년자고, 너에게 들어가는 돈은 다 내 돈이다. 미우나 고우나 너는 내 아들이지만 나는 그 사람까지 먹여 살릴 생각은 없다."
"........."
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유학 다녀와서 회사에 나와라. 시기가 늦어 강현이처럼 밑에서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게 안타깝다만 할 수 없지. 네가 번 돈으로
그 사람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별 말 하지 않겠다. 대신 네가 유학 다녀 올 때까지는 음으로 그 사람을 지켜 주겠다."
".........."
"유학 다녀와서 까지 너희들의 마음이 변함이 없다면 인정하겠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동안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든지,
너에 대해 전혀 감정이 없다면 사내답게 물러나라."
"......알... 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회장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
"대를 이어라."
"..........!!"
"결혼을 하던 대리모를 두던 상관없다. 성운은 반드시 정가의 핏줄에 의해 이어져야 한다."
".........못합니다."
"........."
"못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윤세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을 두고..."
"대리모라도 상관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래서, 또 내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들라고?!!!!!"
완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정회장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가문과 핏줄이 중요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가문의 뜻에 따라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에게 후손이 없자
또 다른 여자를 취하고, 그래서 태어난 아이를 어미의 품에서 강제로 뺏을 정도로? 그래서 그 여자들이 모두 어찌 되었죠?
당신의 알량한 가문애 때문에 몇 사람이나 희생되었는지 자각이나 하고 계십니까? 사람 목숨이 그깟 가문 존속 보다 더 중요합니까?!
그런 식으로 존속되어야 하는 가문이라면 저는 이 길로 당장 나가 정관 수술을 받겠습니다!"
"..........."
한참을 서로 노려보던 두 사람 중 결국 정회장이 눈을 돌렸다.
"그 얘긴 네가 유학을 다녀와서 하도록 하자."
"제 생각은 변함 없습니다."
"널 유학 보내고 그 사람을 차라리 죽고 싶도록 만들 수도 있다."
"윤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 두지 않겠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완은 책상을 짚고 정회장을 노려보았다.
"그러니 일단 얌전하게 유학 가거라."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당신을 어떻게 믿고?"
"너는 내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으니까. 여기서 네가 등을 돌려 나간다면 나는 모든 줄을 동원해 네가 그를 다시는 찾을 수 없도록 할 거다.
그러나 유학에서 돌아오면 너도 성인. 네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겠지. 설사 내가 그동안 그를 돌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때까지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너는 충분히 그를 보살필 여유를 가지게 될 거다. 한국에 남아서 성인이 되어 그를 찾겠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라.
그럴 경우 나는 단 한푼의 원조도 하지 않을 거다. 너는 맨손으로 그를 찾아야 한다. 어쩌면 네가 유학 갔다
오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를 찾는다 하더라도 너희들은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루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극박한 현실 속에, 너처럼 고생한 번 못해본 철부지가 과연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속에서도 과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움켜쥔 주먹과 꽈악 악물린 입술이 완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 있거라."
정회장은 회전 의자를 빙글 돌려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결국 완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2주 후, 완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에 완은 몸을 일으켰다. 깜박 잠이 들었었는지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완아."
"예, 고모님."
그녀는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성우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오늘 못 들어온다지 뭐니. 윤기사 편으로 이것만 보내왔어. 네가 기다리는 거라던데?"
".............!"
퉁기듯이 일어나 완은 봉투를 받았다.
"아, 고맙습니다. 고모님. 아버지야 언제든지 뵐 수 있는데요, 뭐. 오늘만 날인가요?"
"그래. 서운해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럼 좀 있다 밥 먹으로 내려오렴."
"예."
그녀를 내려보내고 완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봉투 속에는 지난 5년 간의 그가 담겨 있었다.
윤세....
완은 소중하게, 소중하게, 서류들을 품에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