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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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선생."

    소리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푹, 하고 손가락이 볼을 찌른다.

    "너..."

    "하핫-"

    신나게 웃으며 완은 소파를 타 넘어 그의 발치에 앉았다. 

    "까분다."

    "맨날 당하면서 폼 재기는."

    윤세는 다시 시선을 TV로 돌렸다. 시선은 TV에 고정한 채 귀를 기울여 청취를 하고 있는데 문득 발등이 간질간질하다. 

    스윽 내려다보니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완이 손가락으로 발등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뭐하냐?"

    "발 만져."

    "왜?"

    "이뻐서."

    "........"

    대꾸하는 대신 윤세는 발을 끌어올려 소파 위에서 양반다리를 했다.

    "좀 만지면 어때서. 닳는 것도 아닌데..."

    "닳아."

    입을 삐죽이는 완이 생각지도 못하게 귀여워 윤세는 피식 웃다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보이지 않았다. 그저 뿌옇기만 하던 시야가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

    굳어버린 윤세에게 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세는 고개를 돌렸다. 텅 비었을 동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선생?"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을 뿐이야. 상관 마."

    ".....침대로 갈래?"

    "상관하지 말랬잖아!"

    팔을 잡는 완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

    "......."

    그 과격한 반응에 뿌리친 윤세도 내쳐진 완도 한동안 몸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윤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기분 안 좋다고 했잖아... 그냥.. 좀 내버려 둬..."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 윤세는 완을 외면했다.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는 완의 시선이 느껴졌다.

      "........"

    한참 후에 완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포기하고 자리를 뜨려나 보다. 안도감에 윤세의 몸에서도 살짝 힘이 빠졌다. 

    그 순간 몸이 번쩍 들렸다.

    ".........!!"

    놀라 얼결에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잡힌 완은 팔은 단단했다.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지탱해 주는 단단한 근육.

     완은 성큼성큼 걸어 윤세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너.. 뭐냐."

    "기분 안 좋을 때는 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소파는 불편하잖아."

    "......"

    윤세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시트를 쳐다보고 있는데 살짝 앞머리가 넘겨졌다. 그리고 이마에 닿는 따뜻한 기운.

    "내가 뭔가 거슬리게 했다면 미안해. 화 풀고 잠시 쉬어."

    이마에 입술을 댄 채 말하는 완의 어조는 다정하여 윤세는 마음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완아..."

    "응?"

    "네 얼굴... 만져 봐도 될까?"

    "...........물론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완은 윤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대었다. 윤세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쓸었다.

    이마 넓이는 이 정도.. 눈썹이 짙구나... 콧날은 오똑하고.. 피부는 조금 거친 편. 입술은 도톰하고 부드럽다...

    이제 겨우 반 맹인이 된 자신이, 청각도 촉각도 둔하기 짝이 없는 자신이 과연 이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까...

    윤세의 손이 얼굴을 쓰다듬고 입술에 머무르자 완은 살며시 그의 손을 잡고 손끝에 키스했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끝을 살짝 깨물고 

    혀로 핥는 완의 행동을 윤세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키스.. 해도 돼?"

    "........."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인 완은 손을 당겨 그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맞닿은 피부는 뜨거웠다. 입 안 구석구석의 성감대를 찾아 헤매는 혀놀림에, 온 몸 구석구석의 감각을 일깨우는 손놀림에 

    윤세는 몇 번이나 하늘 높이 치솟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을 느껴야 했다.

    "하아..."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엷은 한숨에 손놀림이 조금 더 분주해 진다. 

    "으응..."

    윤세는 그저 눈을 감고 느꼈다. 볼 수 없는 만큼, 앞으로 많은 시간을 이 감각을 기억할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해서는 잊고 최대한 몸을 열어 그를 받아 들였다.

    "윤세... 윤세..."

    다급하면서도 간절한 음색이 몇 번이고 귓가에 속삭여 졌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 당겼다. 꽈악 힘있게 마주 끌어당겨졌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두근두근 힘찬 소리는 머릿속에 울려 퍼지더니 마침내 온 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크게 맥박치기 시작했다.

    "하.. 핫... 아..."

    목덜미와 핑크빛 유두, 겨드랑이와 팔 안쪽의 약한 부분, 허리와 허벅지 안쪽... 윤세가 미처 알지 못했던 '느끼는 부분'을 완은

     윤세가 끝내 다급한 호흡을 뱉을 때까지 끈질기게 괴롭혔다.

    "완... 그만..."

    "한 번 더..."

    "......?"

    턱 가에 작게 쪼는 듯한 키스를 되풀이하던 완이 입술을 스칠 듯이 맞대고 속삭였다. 의미를 알 수 없어 윤세는 작게 눈을 깜박였다.

    "이름.. 한 번 더 불러 줘..."

    "와...ㄴ... 읍-!"

    목소리는 거칠게 덮쳐 오는 완의 입술에 파묻혔다. 동시에 손가락 하나가 뒤를 뚫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쾌한 이물감에 윤세는 도리질을 쳤다. 

    완이 다정하게, 달래듯 혀로 쓸어 주지 않았다면 윤세의 몸부림은 한층 더 심해졌을 거다.

    "쉬... 괜찮아... 아프게 하지 않아... 절대로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아..."

    귓가에서 상냥하게 들려오는 수십 번의 속삭임. 애정을 가득 담아 다정하게 달래주는 수백 번의 키스... 굳어있던 몸에 힘이 빠지고 근육이

     풀리자 뒤를 침입한 손가락은 조금 더 늘었다.

    "흐윽..."

    "좋아해, 이윤세... 좋아해..."

    이윽고 완전히 발기한 완이 서서히 윤세의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윽..."

    과도하게 벌려진 근육이 경련이라도 일으킬 듯 부들부들 떨려왔다. 완은 풀이 죽은 윤세의 것을 잡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앗..."

    윤세가 조금씩 힘을 뺄 때마다 완은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마다 움찔 움찔 몸이 떨렸다. 참다 못한 윤세는 두 팔로 완의 목을 감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은 다음 끌어 당겼다.

    "흑-!"

    투둑, 하고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완이 단숨에 안으로 들어왔다.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동작을 멈추고 있던 완이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괜찮아? 당신 찢어졌....!"

    그러나 윤세는 그런 완을 더욱 끌어당겼다. 

    "괜찮아. 그냥 해..."

    "윤세..."

    "어서..."

    "윽-"

    엉덩이를 조금 들자 완은 다급히 숨을 멈추고 허리를 감아 당겼다.

    "미안... 더 이상 못 참겠어..."

    "하앗-!"

    거센 피스톤 질이 시작되었다.

    지친 듯이 잠든 완의 얼굴은 윤세는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거의 시야의 절반이 사라졌다. 꼭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 같다며 윤세는 고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직은 보인다.

    윤세는 손을 들어 완의 얼굴을 쓸었다.

    "으음..."

    간지러운지 고개를 살짝 젓는다. 피식 웃던 윤세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의 벗은 어깨에 입술을 댔다.

    "윤세..."

    낮은 웅얼거림이 새어 나온다. 요 며칠 간 계속 느껴왔던 저릿한 통증이 다시 심장을 울렸다.

    "제길..."

    꾸욱 주먹을 쥐고 고개를 숙인 그의 아래로 시트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

    "으음..."

    환한 햇빛에 뒤척이던 완은 눈을 떴다. 어제 자면서 블라인드를 치지 않았나 보다. 시간은 벌써 한낮이 되었는지 뜨거운 햇빛이 침대 위에까지 늘어져 있다. 

    "아, 젠장..."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던 완은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고 흠칫 굳었다.

    ".........선.........생........?"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뒤졌다.

    "선생!"

    윤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 그의 집에 들러 가져다 달라고 했던 그의 옷도, 그의 신발도... 

    "제길, 이윤세!"

    와장창,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벽에 걸린 액자며 선반이 순식간에 TV들과 부딪혀서 쓰레기가 되었다. 디지털 벽시계마저 

    집어던지려고 뜯어내던 완의 손이 문득 멈췄다. 월, 일이 함께 나오는 디지털 시계에는 달이 바뀌어 있었다. 9월. 개학이다.

    "이 망할 선생이!"

    개학이면 개학이라고 귀뜸이라도 좀 해 주던가! 

    후다닥 옷을 주워 입고 완은 집을 나섰다. 혼다 CBR 1100이 중후한 엔진음을 울리며 여운을 남겼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 시간이었다. 밥도 못 먹고 서둘러 나온 터라 출출함이 느껴졌다. 윤세를 잡아 같이 밥이나 먹을까, 생각하며 

    완은 곧바로 교무실로 향했다.

    "어머, 정완. 개학 첫날부터 지각이야, 넌?"

    ".............!"

    완은 순간 멍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학교 왔다고 보고하려고 왔니? 못 본 사이에 착해졌네."

    "........이윤세 선생은?"

    "이선생이야 임직이었으니 그만 뒀지. 어차피 나 대신... ........완아?! 정완!!"

    이제는 날씬해진 몸을 한 담임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완은 서둘러 뛰쳐나왔다. 심장이 불길한 음을 내며 뛰고 있었다.

    철컥.

    반지하인 윤세네 집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완은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윤세야! 이윤세!! 거기 있지! 문 열어!!"

    오늘따라 급하게 나오느라 열쇠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게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이윤세!!!"

    "거기, 학생. 뭐야?"

    계단 위에서 불쑥 들려온 말에 완은 고개를 들었다. 중년 남자 하나가 경계가 가득한 눈을 하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집에 사는 이윤세 선생님 제자입니다. 선생님께 볼 일 있어서 왔습니다."

    "그 사람 오늘 아침 일찍 방 빼서 나갔는데? 거기 이제 빈 집이야."

    ".........뭐?!"

    순식간에 뛰어올라 완은 남자의 멱살을 잡아챘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큭.. 이 사람... 왜 이래...?!"

    "이윤세가 어딜 갔다고?!"

    "아침 일찍 방 뺐..."

    "열쇠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방이 빼 져?!"

    "무슨 소리야... 열쇠 두 개 다 받았는데..."

    ".........!"

    남자를 팽개치고 완은 집으로 달렸다.

    이윤세! 이윤세! 이윤세!! 이윤세!!!

    머릿속이 폭발할 것 같았다.

    벌컥 대문을 열고 완은 언제나 키를 던져 놓던 책상 위를 훑었다. 없었다. 아무것도.

    "씨발..."

    책상 위의 물건을 다 쓸어 내렸다. 책상 서랍을 열고 안의 물건을 다 끄집어내었다. 혹시나, 혹시나... 미친 듯이 물건 사이를 뒤집고 쓰레기통을 엎었다. 

    "이윤세...."

    숨을 몰아 쉬며 완은 주저앉았다. 쓰레기통에서 굴러 나온 구겨진 종이가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종이를 주워 들던 완의 얼굴이 굳었다.

    '와'라고 쓰다만 글 위에 좍좍 줄이 그어져 있는 종이.

    ".....이게 뭐야..."

    완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뭐냐고..... 이윤세!!!!!!!!!!!!!!"

    울부짖는 듯한 완의 고함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짧아져 버린 해가 지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여름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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