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42/45)
  • 8.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 윤세는 멍하니 흐릿한 천장을 바라보며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야.. 이럴.. 이렇게 하려고 했던 건... 이럴 의도는 아니었어... 그냥...... 나는 단지... 당신은 언제나 냉정하니까...

     그냥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건데... 근데 가슴이 아파서... 그래도 밀어내지 않아서... 기뻐서.... 나는 그냥 당신이 좋은데...

     당신은 눈뜨자마자 나갈 궁리만 하고... 그냥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너는..."

    횡설수설한 얘기를 들을수록 기가 찬 윤세는 남은 힘을 끌어올려 입을 열었다.

    "선생-?!"

    침대 밑에 주저앉아 있던 커다란 덩치가 후다닥 다가왔다.

    "건드리지 마!"

    날카롭게 튀어나온 말을 쇳소리가 되어 갈라졌다. 완은 얼른 동작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아, 안 건드려. 아까도 아무 일 없었어. 당신 그냥 기절한 거야. 다행이다... 계속 눈을 안 떠서 정말 놀랬어."

    스윽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는 녀석의 얼굴은 영락없이 애다. 윤세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너, 나 좋아하냐."

    ".....!"

    완의 몸이 굳었다.

    "그러니까..... 그게......"

    짐짓 허공을 바라보는 완은 민망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너는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강간부터 하고 보냐."

    "아냐-!"

    완은 펄쩍 뛰었지만 윤세는 가차없었다.

    "아니면. 네 행동에 대해 설명해 봐. 처음엔 하는 짓이 맘에 안 든다고 친구들 시켜 강간하고, 

    그 다음은 이왕 강간한 거 두 번은 어떠랴 하고 직접 박고, 다음에는 너는 이제 재미없으니 하고 싶으면 너희들끼리 하라며 애들을 보내?"

    "아냐-!!"

    윤세의 말을 듣는 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냐, 내가 시킨 게 아냐. 나도 그 녀석들이 또 당신에게 간 줄 몰랐어. 처음 이후로는 그 녀석들 만난 적도 없어. 진짜야..."

    "웃기지마. 설사 네가 시킨 게 아니라고 해도 애초에 네가 벌인 일이다. 게다가 이번엔 집에 가겠다는 사람을 붙잡아 폭력에 강간을 해? 그러고도 뭐? 좋아해?"

    "그럼 어떻게 해!"

    완이 주저앉은 땅바닥으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몰랐단 말이야...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 좋아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아버지는 매달 쓰고도 남을 정도의 돈을 비서를 통해 줘. 그 사람 얼굴 볼 수 있는 건 일년에 몇 번 되지도 않아. 

    나를 좋은 친구라고 말하는 녀석들은 내 지갑만 쳐다보고 있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여자들은 하룻밤의 쾌락과 

    비싼 선물을 원해... ............나는... 단지 당신이 보고 싶을 뿐이었어. 그렇다고 당신한테 돈을 줄 수도 없잖아!"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하고 완은 악을 쓰듯 외쳤다. 

    "아직 젖도 못 땐 애송이 자식이..."

    그야말로 어린아이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 완의 외침에 윤세는 허탈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화가 한 풀 꺾인 듯 한 윤세의 태도에 완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안 그럴 게. 당신이 싫어하는 짓은 절대로 안 할게. 어차피 보충수업 끝났잖아.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그냥 다 나을 때까지만 있어. 그 다음엔 당신발로 어딜 가든지 상관 안 할게... 응?"

    ".......선생님."

    "응?"

    땅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애원하듯 중얼거리듯 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윤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연장자에겐 존대. 난 네 선생이다."

    "그럼..."

    어리둥절해 하던 완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손해보는 것 같다.

    "알았어!"

    크게 고개까지 끄덕여 대답한 완은 윤세가 누워있는 시트 자락을 조심스럽게 말아 쥐고는 살며시 이마를 댔다.

    "좋아해... 진짜 좋아해, 선생..."

    몇 번이고 중얼거리는 완의 어조에 윤세는 그저 크게 한숨만을 내쉬었다.

    **

    "...또 태웠냐."

    침대 위에 앉아 책을 읽던(읽는 척을 하던) 윤세는 한숨을 내쉬고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아, 아냐..."

    후다닥 소리와 함께 완이 후드를 틀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탄내가 여기까지 풍기는데. 그러길래 내가 한다니까..."

    "오지마. 그냥 누워 있어. 당신 아직 움직이면 안돼."

    "선.생.님."

    "응, 선생."

    건성으로 대답하고 완은 슬금슬금 휴대폰을 들었다.

    "뭐하는 거냐."

    "응? 아니.. 그냥.. 시켜 먹을까 해서..."

    "저건?"

    가스렌지 위의 냄비를 턱짓으로 가리키자 애매모호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몸으로 가린다.

    "그냥.. 아줌마 밥만 먹는 것도 지겨우니까 우리 시켜먹자... 내가 전복죽 잘하는 데 아는데... 응?"

    ".....가지고 와 봐."

    "어이, 선생..."

    "한 입으로 두말하게 할래?"

    '아, 젠장...' 따위를 중얼거리며 쟁반에 죽그릇을 담아 오는 완은 기가 팍 죽은 거대한 강아지 같다. 

    윤세는 완에게 받은 쟁반을 무릎 위에 놓고 멀거니 쳐다보았다. 하얘야 할 죽은 군데군데 정체불명의 검은 이물질이 섞여 있다.

     윤세는 숟가락으로 슬슬 저어 이물질을 피해 죽을 떴다.

    "먹지마. 탄 거 먹으면 안 좋아."

    완이 인상을 썼다.

    "됐어. 그럭저럭 괜찮네. 근데 넌 어째 데우는 것 하나 못하냐? 재벌집 애들은 다들 그래?"

    ".........강현인 안 그래."

    "...누구?"

    "있어. 고종사촌. 당신이랑 비슷한 나이."

    "형을 이름으로 부르냐?"

    인상을 쓰고 바라보자 완은 장난꾸러기처럼 씨익 웃었다.

    "당신한테도 반말하는데 뭘."

    .....말을 말자.

    윤세는 묵묵히 죽을 떠 넘겼다.

    윤세가 완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 뒤부터 완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뭔가 조금이라도 윤세에게 더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이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아이 같았다. 착잡한 심정으로 윤세는 완을 보았다. 전혀 다른 듯 하면서도 

    윤세와 완은 묘한데서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버림받은 아이들 특유의 황폐한 심장. 하나는 폭력으로 하나는 무심함으로 

    그 심장을 감추고 있을 뿐, 본질은 같다.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아이는 실상 버림받은 아이들이다. 한번도 버림받아 본 적이 없는 아이는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오랜 시간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후에야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혼자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가오는 온기를 뿌리치지 못한다. 결국은 다시 버림받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이번에는...'하는 미련이 망설임을 밀어낸다.

     그것이 버림받은 아이들...

    "무슨 생각해?"

    휙휙 눈앞에서 손이 왔다갔다한다. 윤세는 인상을 쓰며 슬쩍 몸을 뒤로 뺀 다음 다시 죽을 떠먹었다. 완은 실실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살짝 내려 뜬 눈 밑으로 길다란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고 있다. 붓기가 빠지고 약간의 멍들만 남아 있는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아름답다. 

    멍하니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윤세가 숟가락을 멈추고 완을 노려보았다.

    "뭘 봐?"

    "당신."

    "......왜?"

    "당신 눈이 참 이뻐. 그거 알아? 새카만 게 꼭 강아지 같애."

    "...............웃기네."

    생글거리며 쳐다보는 완의 시선을 피해 윤세는 고개를 돌렸다.

    "쳐다보지 마."

    "왜?"

    "눈 맞추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분명히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는, 허공에 뜬 눈 일게다. 

    "그럼... 다른 건 맞춰도 돼?"

    "뭐?"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 윤세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완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어 깜짝 놀랐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예들 들면... 입술... 이라던가..."

    시선이 섞여 서로를 옭아매다 문득 완은 슬쩍 눈을 내려 윤세의 입술을 보았다. 바르르 떨리던 입술이 홱 고개를 돌림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 건드린다고... 했잖아."

    태연한 척 내뱉은 말은 그러나 끝이 조금 갈라졌다.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고 했었지."

    슬쩍 턱을 잡아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의외로 윤세가 완강하게 버티자 완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쓰다듬었다. 

    "당신 내가 키스하는 거 싫어하지 않잖아. 설마 내가 밤마다 키스할 때 정말로 자고 있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너...."

    어딘가 분해하는 기색의 윤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완은 윤세의 관자놀이에 쪼는 듯한 키스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좋아해... 좋아해, 이윤세. 진짜 좋아해..."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키스는 광대뼈와 뺨을 거쳐 턱으로 내려오더니 기어이 보드라운 입술을 덮쳤다. 촉촉한 혀가 제 집인 양 들어와 입안을 애무한다. 

    그것은 따뜻했고 묘한 충족감을 주었다.

    진짜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아이는 과연 누구일까.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붙잡는 자는 누구? 버림받지 않기 위해 차라리 버리려고 하는 자는 누구?

    윤세는 부드럽게 등과 가슴을 만지는 완의 손길을 느끼며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