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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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은 암흑에 갇혀 있었다. 분명 시계소리를 듣고 깼는데 방안이 지나치게 어둡다고 생각하던 윤세는 시계를 찾는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몸이 굳어졌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것은 훨씬 충격이 컸다. 망연하게 다가오는 

    두려움으로 윤세는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웅크렸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남들이 냉혈한이라고 하니까, 본인도 그런 줄 알았다. 집을 팔고, 직장을 그만두며 마음도 그때 다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무릎 사이에 턱을 올린 채, 윤세는 오랫동안 요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끔벅끔벅, 보일 리 없는 허공을 

    향해 망연히 눈만 깜박이던 윤세는 어느 순간 조금씩 시야가 밝아 오는 것을 느꼈다.

    "......!"

    윤세는 가만히 손을 들었다. 꼼질꼼질. 맞다.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손가락이다. 윤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건 책상,

     저건 냉장고, 저건 싱크대, 저건 화장실 문, 저건... 윤세는 서랍을 열어 약봉지를 꺼냈다. 약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물도 없이 씹었다. 

    캡슐이 바즈락거리며 터지고 쓰기만 한 약이 침과 섞여 진득하게 입안에 달라붙었지만 윤세는 피실피실 웃었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창 밖은 어느새 훤히 날이 밝아 있었다.

    "뭡니까, 이윤세 선생. 임직이라고 지금 개기는 겁니까? 월급받기 싫습니까? 신인순 선생이 아끼는 후배라기에 믿고 채용했더니 태도가 이래서 되겠습니까?"

    "........."

    "아,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 보세요."

    "저기, 교감 선생님. 이선생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좀 있다 하시죠. 어쨌든 왔으니 수업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봅시다, 이선생."

    정선생의 만류에 교감은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서류철을 책상 위에 팽개치고 나가버렸다. 윤세는 묵묵히 교제를 챙겨 들었다.

    "어이, 이선생. 진짜 들어가려구?"

    "..........?"

    "이선생 얼굴 지금 굉장히 창백해. 금새라도 쓰러질 것 같다구. 그냥 양호실에 가서 좀 누워있지?"

    ".......괜찮습니다."

    만류하는 정선생을 뿌리치고 윤세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양호실에 누워 있을 거면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확실히 수업은 무리다.

     눈앞이 흐릿한 게 간신히 명암을 구별할 정도다.

    드르륵.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들이 후다닥 자리를 찾아간다. 2학년 7반이었군.

    "됐어. 앉아라."

    인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실장을 만류하자 엉거주춤 하던 녀석은 잠시 주저하다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조용히 자습해라. 영어 말고 다른 과목해도 괜찮으니까."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그대로 교탁 위에 두고 윤세는 창가로 가 기댔다. 잠시 침묵하던 아이들은 이윽고 조그맣게 부스럭거리며 

    각자의 책을 펼쳐든다. 그리고 윤세는 멍한 눈으로 창 밖을 응시했다. 주위는 온통 흐릿한 안개 속에 싸여 있었다. 그래도 암흑보다는 

    낫다고, 윤세는 스스로를 달랬다.

    또 왜 저래?

    완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윤세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노려보면 대부분의 경우 시선을 느끼고 쳐다보던가,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긴 신경을 가졌음이 분명한 저 임시 담임은 꼼짝도 안하고 꿋꿋하게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나 심란하다라는 오오라를 잔뜩 풍기며.

    아침조회도 안 들어 온 걸 보니 지각한 것 같은데, 평소 그의 지론이 '어차피 임직인데 짤리기밖에 더하겠냐.'라는 것으로 보아선

     설마 교감이나 교장한테 야단들은 것 가지고 저러진 않을 것 같다. 

    그럼 도대체 왜 그러냔 말이야아아-.

    하다 못 해 눈이라도 보면 속내를 짐작이라도 해 보겠지만 저놈의 시커먼 안경은 그것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완은 사람의 눈이

     그렇게 많은 것을 표현하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눈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완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었다. 

    멀쩡한 입을 놔두고 왜 굳이 눈으로 말을 하느냔 말이다. 허나 색안경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데다 입만 열었다 하면 속 뒤집어지는 

    말을 툭툭 내뱉는 선생을 보다보면 눈이 아니라 뇌라도 갈라보고 싶은 심정이 든다.

    문득 윤세가 머리를 창틀에 살짝 기댔다. 눈을 감고 느긋하게 햇살이라도 쬐고 있는 것 같다. 쳇, 더워 뒈질 것 같은 날씨에 일광욕이 웬말이냐. 

    기울어진 고개 덕에 매끈한 목선이 한 눈에 들어왔다. 더위에 느슨하게 당긴 넥타이와 윗단추를 연 셔츠 사이로 언뜻 보이는 

    살결에 이어지는 목선을 상상했다. 아니, 그것은 상상이 아니었다. 저 목에 가볍게 이를 세우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기억이라는 

    놈은 편리하게 '그 날'로 되돌아갔다.

    보기보다 더 마른 몸에 쇄골이 도드라져 있었지. 덕분에 목과 쇄골이 이어지는 부위가 옴폭 파여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폭력과는 

    한 번도 연관이 없어 보였던 팔은 생각했던 것보다 근육이 잡혀 있었지만 팔 안쪽은 물면 무는 데로 이빨자국이 남을 정도로 연하고 보들보들했다.

    동전크기만한 유륜은 예뻤고 앙증맞은 유두는 귀여웠다.

    두근.

    위험한 열기가 아래로 몰리는 것을 느끼자 완은 당황했다. '그 날' 이후 뭔가 굉장히 신경 쓰이는 바람에 줄곧 윤세와 붙어 있었지만 완은

     한번도 윤세에게 욕망을 느낀 적이 없었다. 뭔가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가끔은 통증까지 느껴졌지만 '그 날' 같은 흉폭한 욕망은 

    들지 않았기에 역시 그 날은 뭔가에 홀린 모양이다, 윤세가 이렇게 신경 쓰이는 이유는 그가 첫남자(?)였기 때문이다, 라고 나름대로 

    결론까지 내린지도 한참이 지났다. 본래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완은 동정을 버린 여자의 얼굴 따윈 기억도

     못하고 있지만 그런 사소한(?) 일은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근데 왜 선생의 목을 보고 반응한 거지?

    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날 이후로 흥분하진 않았으니 윤세를 보고 반응한 건 아닐 거다. 목선을 보고 그 날 일까지 떠올리다니.

    ........그 날이 좋긴 좋았지. 따끈따끈하고 꽉 조여주고... ......읏.

    점점 거북해지는 하체에 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 욕구불만이었나?

    생각해 보니 그동안 저 신경 쓰이는 선생과 함께 지내느라고 밤놀이를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 게 선생이었을 정도니까. 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몸이라도 풀러 가야겠군.

    무슨 놈의 회식이 이렇게 많은지...

    윤세는 간신히 술자리 청을 물리치고 학교를 빠져 나왔다. 교장, 교감은 물론 각 부장 선생들의 눈치를 봐 가면서 마셔야 하는 술은 정말 곤욕이다. 

    그것도 '먹고 죽자.'라는 분위기 속에서는. 버티지 못할 바엔 처음부터 사양하는 게 낫지.

    '술이다, 술.' 희희낙락하며 사라진 정선생을 떠올리며 윤세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쯤에는 반송장이 되어 있다에 십만원. 

    어차피 보충수업은 끝났고 일주일 뒤가 개학이니 상관은 없겠지만.

    곤두선 신경 탓에 콧등의 안경이 한층 더 무겁게 느껴져 윤세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하루종일 눈은 형광등처럼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했고 그것은 윤세의 신경을 깔짝거리며 갉아내고 있었다.

    피곤해..

    지친 표정으로 윤세는 타박타박 골목을 들어서다 누군가에게 부딪혀 세게 뒤로 넘어졌다.

    "윽-!"

    "어이쿠, 아파라. ....어라? 이게 누구신가?"

    부딪힌 어깨와 밀쳐지며 담벼락에 부딪힌 등이 몹시 아팠다. 그러나 자신을 아는 듯한, 어쩌지 좋지 않은 의도를 담은 듯한 말투에 

    윤세는 고개를 들고 미간을 잔뜩 찌푸려, 흩어지는 초점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누구?"

    "어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서운하지, 선생. 그래도 사이좋게 배 맞대고 노 젓고 강 건넌 사인데..."

    .........그놈들이다.

    윤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해서 정확히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완은 없는 것 같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미래의 이사장님은 여자가 더 좋으신 모양이더군. 뭐, 그다지 서운해하진 마. 대신 우리가 확실하게 놀아줄 테니까."

    녀석들은 낄낄 웃으며 서서히 가까이 다가왔다. 윤세는 미간을 찌푸렸다.

    재미가 없다.

    완은 나른하게 침대에 늘어져 있는 여자를 내버려두고 호텔을 나섰다.

    오랜만에 들른 클럽이지만 분위기는 여전했다. 성원그룹의 힘이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달라붙는 파리들도 여전했고. 

    그 중에서 간택이라도 하듯 한 사람을 골라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유난히 눈동자가 새카만, 심해의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눈동자와 흡사한 여자를 데리고 클럽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한시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여자는 능숙했고 섹스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 예전 같은 쾌락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서 본 여자의 새카만 눈동자가 칼라렌즈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기분이 잡치기까지 했다.

    섹스후의 나른함과 적당한 취기로 완은 느긋하게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선생이 보았다면 아마도 음주운전에 헬멧도 쓰지 않았다고 

    엄청 잔소리 할 거라고 생각하며 완은 키득키득 웃었다. 문득 언젠가 술에 취해 찾아간 다음날 끓여준 북어국의 시원한 맛이 생각나 완은 

    핸들을 꺾었다. 생각난 것은 단지 자신의 파출부보다 솜씨가 좋은 윤세의 북어국뿐이라는 듯.

    "..........?"

    윤세의 집 입구인 지하 계단을 내려가던 완은 문득 이상한 기분에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굉장히 찝찝하고 불길한 기분. 

    한낮의 더위를 몸으로 받아낸 지표면은 이제 슬슬 그 열기를 다시 토해내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에 맞춰 밀려오는 진득한 불쾌함.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완은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저 아래에 뭔가가 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선생?!"

    길지 않은 계단의 끝에서 완은 멍청히 윤세를 불렀다. 현관 앞에 구겨져 있는 것은 분명히 윤세였다. 천천히 그를 향해 뻗는 완의 손이 떨렸다.

    "....이봐?"

    조심스레 그를 안아 일으키자 힘없이 목이 뒤로 꺾였다. 계단 위에서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에 드러난 윤세의 얼굴은 처참했다. 

    계단에서 굴렀는지 바닥에 닿았던 이마 쪽은 피가 맺혀 있었고 광대뼈와 턱 주위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입술은 터져 퉁퉁 부어 있었고

     거기서 흐른 피가 턱을 타고 목에까지 내려와 굳어있었다. 간신히 걸쳤다고 표현할 수 있는 재킷을 펼치자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넥타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언제나 단정했던 셔츠는 바지에서 반쯤은 빠져 나와 있었다. 어긋나게 채워진 셔츠의 단추는 그나마 몇 개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벌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숨길 수 없는 흔적들...

    "이...!"

    완은 이를 악물었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친다는 말을 실감했다.

    "어이, 선생! 눈 떠! 뜨란 말이야! 이윤세!!"

    완은 다짜고짜 윤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끓어오르는 살의를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눈앞의 윤세라도 죽일 것 같았다.

    "이윤세!"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뺨이 돌아갔다. 창백한 뺨 위에 손가락 다섯 개의 흔적이 뚜렷이 남았다.

    "으..."

    고통에 반응한 육체가 희미하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윤세! 나 누구야? 나 알아 보겠어?"

    몇 번 파들거리던 눈꺼풀이 서서히 벌어지며 초점을 잃고 불안하게 떨리는 새카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정... 완..?"

    "그래. 나 정완이다. 그러니까 말해. 당신 이렇게 만든 녀석이 누구야."

    "......"

    나직하게 이를 가는 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세는 그러나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이윤세! 눈 안 떠?! 누구냐니까! 말해!!"

    멱살을 쥐고 그를 끌어당겼다. 목이 죄어 숨이 막힐 텐데도 윤세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퍼석한 웃음뿐이었다.

    ".......알아서 뭐하게?"

    "뭐하다니-!"

    주리를 틀어 뼈를 갈아 마실 거라며 씩씩거리던 완은 다음순간 그를 똑바로 직시하는 새카만 눈동자에 숨을 들이켰다. 

    이 눈동자를 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본 것은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홍채와 동공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완은 하마터면 윤세의 말을 놓칠 뻔 했다.

    "까불지 마..."

    "......뭐?"

    "누가.. 누굴 벌하겠다는 거냐... 모든 일의 원흉인 자식이...!"

    ".......!"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덕분에 윤세는 다시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말 한마디하는 것도 힘이 부친 듯 색색 숨을 몰아쉬는 그는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넋을 잃은 듯 그를 바라보던 완은 윤세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고도 그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천천히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잠이 든 듯 보이지만 사실상 기절한 윤세를 완은 집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요 위에 눕혔다. 타박상을 비롯해 온 몸이 울긋불긋하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이불을 들어 배 부위만 살짝 덮어 주고 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곧 돌아올 테니까."

    들릴 리 없는 윤세에게 다짐하듯 말하고 완은 문을 닫았다. 철컥, 하고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적막한 집 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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