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39/45)
  • 5.

    퇴근하던 윤세는 건물 옆에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오토바이를 보고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새카만 본체가 매끄럽다.

     오토바이에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꽤 값나가는 것 같다.

    바이크 중에 비싼 건 자동차 보다 더한 것도 있다더니 설마 그런 종류인가...

    어디로 보아도 나 새차요, 하고 광택을 내고 있는 오토바이를 보며 잠시 갸우뚱하던 윤세는 이내 관심을 끊고 지하로 내려갔다.

     얼마나 비싼들 무슨 상관인가. 자신에겐 머나먼 이야기인 것을.

    "왜 이렇게 늦어! 배고파 죽는 줄 알았잖아."

    ...........누가 기다리랬냐.

    커다란 덩치로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완을 보며 윤세는 인상을 썼다. 물론 시커먼 안경에 가려져 별다른 효과를 보진 못했지만.

    "뭐해. 빨리 열쇠나 내놔."

    마치 맡겨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완의 저런 땡깡을 하루 이틀 보아온 게 아닌 윤세는 그저 잠자코 키를 던졌다. 공중에서 멋지게 

    낚아챈 완은 마치 제집처럼 익숙한 솜씨로 문을 열었다.

    "도대체가... 땡, 하면 끝나는 선생 주제에 어딜 싸돌아 다니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저 말버릇하고는.

    뒤따라 들어가던 윤세는 손을 들어 그대로 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으악! 왜 때려!"

    때아닌 기습에 완이 뒤통수를 만지며 홱 뒤돌아보았다. 

    "연장자에겐 존대."

    "으아.. 미치겠다."

    완이 천장을 보며 포효를 했다. 

    "나에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

    "웃기네."

    윤세가 늦은 감이 있는 답변을 하자 완이 코웃음을 쳤다.

    "요 며칠동안 매일 찾아와도 당신 어디 나가는 꼴을 못 봤다, 내가."

    "그러는 자네는 학교나 꼬박꼬박 좀 나오시지?"

    상황이 불리해지자 윤세는 말을 돌렸다. 단순한 완이 덜컥 걸려든다.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저 놈 때문에."

    "저 놈?"

    "밖에 못 봤어?"

    에헴, 하고 완의 콧대가 올라간다.

    "......그 시커먼 거?"

    "시커먼 거라니. 이래봬도 Black Bird라는 애칭이 있어."

    마음이 상한 완이 인상을 썼다. 그래봤자 윤세에겐 씨알도 안 먹힌다.

    "아, CBR 시리즈 몰라? 저건 무려 1100이라구. 혼다의 기함이라 불리는 놈인데?"

    1100인지 1200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

    "전에 타던 건 어쩌고?"

    "소음기 땐 바이크는 시끄러워서 싫다며..."

    "........."

    설마 내가 한 말 때문에 오토바이를 갈아 치웠다는 거냐? 

    "뭐.. 어차피 그건 부서지기도 했으니까.. 그거 고치고, 마후라 갈고.. 어차피 돈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그냥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멀거니 쳐다보자 우물우물 변명하듯 완이 말했다.

    "아, 어차피 내 건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그냥 밥이나 줘."

    .........그래, 네 돈으로 무슨 짓을 하건 내가 알 바는 아니다만... 왜 내가 네 밥을 차려줘야 하는 거냐.

    인상을 쓰며 쳐다보던 윤세는 속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어딜 가?"

    "씻으러."

    "내 밥은!"

    완이 신경질을 낸다. 기가 막혀 그 행태를 쳐다보던 윤세는 책상 옆의 작은 냉장고를 가리켰다.

    "안에 된장 남은 거 있다. 데워 먹어."

    "뭐얏?!"

    펄쩍 뛰는 완을 무시하고 윤세는 탕,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샤워실 문을 닫았다.

    "..........."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윤세는 멍하니 벽에 붙은 타일을 세고 있었다.

    그로서는 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완이 그를 싫어한다는 것은 그도 알고 완도 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방학 전과 비교해서 완은 조금 달라졌다. 높임말 안하고 맞먹는 것은 여전하지만 비교적 학교에는 꼬박꼬박 나온다. 등교시간은 여전히 

    불규칙 하지만. 수업시간에 필기는 안하고 사람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본다든지, 종례도 받지 않고 -어쩔 땐 1교시가 끝나자마자-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건 여전하지만 얼굴 한 번 못보고 일주일이 지나갔던 예전에 비해서는 얼마나 양호한가.

    문제는 그렇게 사라진 놈이 항상 자신의 집 앞에 있다는 거다. 나날이 약해져 가는 시신경을 하고 정상인 흉내를 내야 하는 윤세에게, 

    예고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완의 행동은 피곤을 배로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혹시 이게 완의 새로운 전법이라면 적중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완의 저러한 행동이 그다지 싫지 않다는 데에 있다. 저 제멋대로의 건방진 말투도, 아이 같은 투정도.

     혹시 자포자기한 자신의 마음이 완의 행동을 묵인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무리 자포자기했어도 윤세는 멀쩡한

     신경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완을 받아 줄 너그러움은 없었다.

    그럼 도대체... 강간까지 한 놈을 자신은 어째서 그냥 두는 것일까...

    결국 윤세가 샤워를 다 하고 나올 때까지 입을 내밀고 기다리던 완 덕분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된장찌개에 밥을 비벼 먹었다. 

    집 안에 요리사까지 대동해 놓고 최고급으로만 입맛을 키웠을 녀석이 뭐가 아쉬워 칠 벗겨진 상위에 된장찌개 하나로 밥을 먹고 있는지 

    참 궁금했지만 완은 거뜬하게 두 그릇을 비워냈다.

    "밥 먹었으니, 좀 치워라."

    "에에?!"

    "차려 줬으니 밥값은 해야지."

    펄쩍 뛰는 완을 곁눈으로 보며 윤세는 이불 더미 위에 누워 버렸다.

    ".......뭐야, 선생. 벌써 자는 거야?"

    쭈욱 다리를 펴고 누워버린 윤세의 발에 걸리지 않게 상을 밀어 놓고 완은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피곤해..."

    이불 더미 깊숙이 머리를 묻어 버린 윤세의 목소리는 이미 반쯤 잠겼다. 아닌게 아니라 안색이 창백하다.

    "....어이, 문단속은?"

    "귀찮아... 그걸로 잠그고 가. 하나 더 있으니까."

    어, 주는 거야? 이야, 이제 그럼 기다리지 않고 집에 들어와 있어도 되는 거..........가 아니라.

    쬐끄만 열쇠 하나를 들고 덩치에 맞지 않게 좋아하던 완은 정신을 차리고 윤세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미 잠들어 버린 건지 윤세는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칼날 같은 독설이 튀어나오고, 걸핏하면 눈에 불이 번쩍 할 정도로 머리를 쥐어 패는 남자가 어째서 잠만 들면 이렇게

     조그마하게 보이는 걸까.

    완이 지켜보던 가운데 윤세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모로 누워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처음에는 추운가,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저게 

    잠버릇이라는 걸 안다. 

    사람이 왜 저렇게 불쌍하게 자는지...

    할 수만 있다면 꼬옥 품에 안고 추워 보이는 몸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까지 한 자신을 발견하고 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대체 10살이나 많은, 연상에 동성을 상대로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그러나 생각과 상관없이 몸은 절로 반응을 하여 어느새 손은 흐트러진 윤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으음..."

    작게 잠투정을 하며 윤세는 완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 얼굴이 너무나 천진난만하여 완은 잠시 넋을 잃었다.

    ".....이봐, 선생.... 나 당신 강간한 놈이야... 그거.... 기억하고 있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완은 윤세가 베고 누운 이불 뭉치를 조심스레 끄집어내어 그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