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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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눈을 떴을 땐 낯선 곳이었다. 윤세는 제법 값비싸 보이는 집안에 어리둥절해 하다 몸을 일으켰다.

    "……!"

    순간 현기증이 돌아 윤세는 머리를 짚고 잠시 눈을 감았다. 사각거리는 시트의 감촉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은 그가 알몸이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도대체 여긴 어딜까.

    윤세는 앉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뿌연 시야로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원룸 형식의 방은 꽤 큰 편이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윤세의 귀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녀석이 들어왔다.

    "……"

    "…이틀만에 일어난 주제에 그 눈초리는 뭐야."

    "…놔두고 갈 줄 알았는데…?"

    "정액까지 잔뜩 묻혀놓고 송장 치룰 일 있어?"

    아, 그런가.

    정액이 묻은 벌거숭이 변사체라면 확실히 강간죄와... 아, 남자는 강간죄가 성립 안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럼 살인죄 만인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째 저놈은 아까보다 더 씨근덕거리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들어올때만해도 뭔가 기분 좋아 보였는데?

    "…왜?"

    "아무것도 아냐!"

    …괜히 신경질이다.

    "근데 여긴 어디지?"

    "보면 몰라? 내 집이잖아!"

    내가 너네 집에 언제 와 봤다고 보자마자 너의 집인 줄 알겠냐.

    "내 옷은?"

    "넝마라 버렸어."

    "…안경은?"

    "그 와중에 안경까지 챙겨오라고?!"

    "…그럼 옷 좀 빌리자."

    척척 일어나 옷장을 뒤지는 윤세를 완은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말이다. 기절한 놈을 데려와

    (걸레 같은 옷을 수습해 택시 타고 오는 게 얼마나 쪽팔렸는데!) 씻기고(기절한 사람 무게가 좀 나가냐!), 

    재워주고(하나밖에 없는 침대까지 양보했는데!), 간호까지 해 주었는데(노는 거 왜에 밤을 새워 본 건 정말 처음이었다), 

    저 인간은 인사 한 마디 없이 오히려 옷까지 내 놓으란다. 게다가 자신을 가…… 가…ㅇ…… 하여간! 그걸 한 사람 앞에서 저렇게 나체로 다녀도 되는 거냐!

    완이 그러거나 말거나 윤세는 완의 옷장 속에서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냈다. 다행히 키가 비슷해서 옷은 그럭저럭 윤세의 몸에 맞았다. 

    허리가 좀 크긴 했지만 그건 어떻게든 골반에 걸쳐졌다.

    "…그럼 보충 수업 때 보도록 하지."

    "안가-!"

    반사적으로 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발을 신던 윤세는 완을 잠깐 돌아보았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윤세는 애 같다. 안경이 없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인지 완을 바라보는 시선은 약간 허공에 떠 있다. 

    까만 흑진주 같은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완은 조금 서운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속으로 경악을 했다.

    "싫음 말구."

    "이 썅-!"

    그러나 완의 욕설들은 무겁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파묻혔다.

    "으…."

    윤세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완의 앞에선 한껏 태연한 척 했었지만 두 시간 가까이 강간을 당하고 이틀동안 기절해 있다

     일어난 몸은 이미 정상이라고 할 순 없었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겨우겨우 문을 연 윤세는 개지 않은 채 그대로 펼쳐진 이부자리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영양분 공급을 열심히 주장하던 몸은 결국 현기증이라는 데모를 일으키며 윤세의 의식을 잡아먹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로 윤세는 기필코 저 놈의 자물쇠를 버튼 식으로 뜯어고치고 말겠다며 이를 갈았다.

    **

    뒤끝이 씁쓸하다는 말을 완은 요즘만큼 절실히 느껴본 적이 없다. 윤세가 그렇게 나가고 다시 이틀이 지났다. 완의 방은 윤세가 나간 후로 전혀 변화가 없다. 

    심지어 윤세가 걷어차고 일어난 이불의 형태까지 그대로다. 3일에 한 번 꼴로 오는 파출부 아주머니조차 그대로 보내 버렸다. 완은 물끄러미 침대를 

    바라볼 뿐 몸을 뉘일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덕분에 4일 째 그의 잠자리는 침대가 잘 보이도록 마주 돌려놓은 소파 위였다.

    "젠장."

    완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이틀동안 저 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윤세의 얼굴이 도무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언제나 쌀쌀한 독설만 던지길래 굉장히 심술궂을 거라고 

    생각했던 얼굴은 뜻밖에도 꽤나 단정했다. 정작 그를 강간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사실을 자신의 침대 위에 뉘여 놓고 나서야 깨달은 완은 

    아연해했다. 뽀송뽀송해진 윤세의 얼굴은 약간의 열로 불그스름하기까지 해 완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몰골을 자각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땀내는 물론 정사의 희미한 냄새까지 완의 체열에 힘입어 열심히 올라왔던 것이다. 씻고 나오자 이번에는 단순한 미열이었던

     윤세의 몸이 펄펄 끓는 냄비로 변해 다시 한번 아연해 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간다던가 집안의 주치의인 윤박사를 부른다는 건 이미 생각하기도 

    전에 패스. 남자를 강간했다는 것이 집안에 알려지게 되면 강제로 끌려가는 건 시간 문제다. 애써 이룩한 독립 시간을 단축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사절이다.

     서둘러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낸다, 찬 수건을 만든다 하고 난리를 치고 난 뒤엔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모처럼 씻은 몸이 다시 땀범벅이 

    되어버렸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 고생을 했는데도 완은 왠지 윤세가 전처럼 밉지만은 않았다. 열이 내려 몸이 좀 편해지자 몇 번 뒤척이던 윤세는

     몸을 옆으로 돌려 둥글게 말았다. 이불을 손에 꼭 쥐고 턱까지 끌어올리고 잔뜩 웅크린 모습은 답지 않게 귀엽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손을 내밀고 

    싶어질 정도로 아련했다.

    "내가 미쳤지..."

    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그것이 윤세를 강간한 것인지, 그를 집에 데려온 것인지, 그를 그대로 보낸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윤세는 두 손에 든 짐이 점점 무거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틀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망가진 몸이 하룻밤에 멀쩡해지는 것은 아니다. 

    걸을 때마다 미묘한 곳이 아파 왔지만 그렇게 구겨져 있다 아사하는 것도 사양이라 어째저째 몸을 이끌고 장을 보러 나왔다. 

    일주일만에 나온 마트는 때마침 할인 행사까지 하고 있어서 몇 가지 물건을 고르다 보니 어느새 두 손 가득 마트의 로고가 찍힌 커다란 비닐봉지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끄응..."

    윤세는 결국 들고있던 짐을 대충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가 저릿한 게 아직 이 정도의 무게도 무리인가 보다. 가볍게 허리를 두드리며 윤세는 

    깜깜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예전엔 그래도 한 두 개씩 별이 보이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냥 새까맣기만 하다.

    "후우..."

    다시 한숨을 내쉬며 윤세는 짐을 움켜쥐었다. 어쨌든 이걸 가지고 가야 한다. 봉지를 잡은 손에 힘을 쥐고 허리를 펴는 순간 요란한 오토바이의 

    소리가 들렸다. 배기 통에 구멍을 뚫은 저런 오토바이들은 대부분이 폭주족의 그것이다. 윤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의 취향가지고 왈가왈부

     할 생각은 없지만 주위에 폐가 되는 취향은 이미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부아앙-

    쿠당탕탕-!!

    애물단지 같은 짐을 들고 다시 걸어가던 윤세는 요란한 소리와 속도로 자신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가 전봇대에 부딪히는 물체를 바라보다

     빈 손이 되어버린 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짐은 오토바이가 스쳐지나가며 부딪히는 바람에 그의 손을 벗어나 바닥을 구르며

     내용물을 재확인 시켜 주었다. 전봇대에 걸려 멈춰진 오토바이는 아직까지 허공에 바퀴를 굴려대고 있었고 운전자는 전봇대와 오토바이 사이에서 

    그야말로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살아 있을까?

    119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윤세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운전자는 헬멧을 쓰고 있었고 그것으로 윤세가 점치는 사망률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뭐, 넘어지며 전봇대에 척추를 부딪혔다라는 일도 있으니까.'

    엄한 상상을 해대며 윤세는 조심스레 쓰러진 오토바이 너머로 운전자를 내려다보았다.

    "으으..."

    헬멧 아래로 불분명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단은 살아있군.

    그렇다면 살인 방조죄가 성립하기 전에 도와주어야 할 것 같다. 윤세는 하나 남은 짐을 내려놓고 쓰러진 오토바이를 끌어당겼다. 

    팔에 힘을 주자 찌르르 척추를 타고 꼬리뼈까지 흘러내리는 우울한 통증이 윤세의 눈에서 약간의 젖은 물기를 뽑아 내었지만 어떻든

     오토바이를 조금 세울 수는 있었다.

    "으윽, 젠장..."

    몸을 조금 뺀 운전자는 헬멧을 벗어 던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완?!"

    뜻밖에 아는 얼굴임을 확인한 윤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떫은감을 삼킨 심정으로 윤세는 아직도 붙잡고 있는 오토바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거 그냥 다시 내려놓으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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