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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1 (35/45)

여름의 끝.

**

2학년 7반.

검고 굵은 글씨로 입혀진 팻말을 미간을 찡그린 채 노려보던 윤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열었다.

드르륵.

문을 열자 조금은 소란스럽던 교실이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낯선 사람에 대한 가벼운 경계심과 호기심에 찬 조용한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윤세는 천천히 교단위로 올라가 교탁 위에 출석부와 학급일지를 내려놓았다.

"출석을 부르겠다."

웅성거림이 좀 더 심해졌다. 윤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름을 불러 내렸다.

"강홍석, 김영석, 김진현, ...................................박정완, ..........................신영태, ...............이정훈, 

........................정완...."

빠른 속도로 부르는 윤세의 목소리에 맞추어 아이들도 짧은 스타카토의 발음으로 재빠르게 대답을 했다. 그것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

"정완? .........정완 안 왔나?"

정완이라는 이름을 건너뛰고 출석을 마저 불렀다. 대답하지 않은 이름은 정완뿐이었다.

윤세는 손끝으로 교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수려한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형광등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은태 안경이 그를 더더욱 차갑게 만들고, 

색이 짙게 들어간 안경알 덕분에 보이지 않는 눈이 아이들을 경직시켰다.

"나는..."

드르륵.

윤세가 오지 않는 학생을 포기하고 입을 열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뒷문이 거칠게 열렸다.

"........."

"........."

거의 문틀에 닿을 정도로 큰 키를 가진 학생이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친 채 조금은 의아한 얼굴로 윤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완학생인가?"

"..........뭐야."

굵직한 저음. 그 낮은 울림에 윤세의 팔에 잠시 소름이 돋았다.

"일단 자리에 앉도록."

완은 윤세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훑어본 다음 거칠게 책상 위에 가방을 내동댕이쳤다.

'문제아가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윤세는 잠시 분만실에 있을 신선생을 원망해 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신인순 선생님께서 어제 갑작스럽게 진통이 시작되어 급히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나는 신선생님의 대리로 약 한 달간 여러분의 임시 담임을 맡게 될 이윤세다.

 어차피 기말고사도 끝났고 곧 방학이니 그다지 여러분께 피해가 가진 않을 거라 생각된다. 전공은 영어. 시력이 좋지 않은 관계로 색이 들어간

 안경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 미리 여러분께 양해를 바란다."

말을 마치고 윤세는 완을 바라보았다. 불행히도 이곳에서는 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정완."

"......."

완은 상당히 불량스런 자세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이 애를 낳으러 갔던 죽으러 갔던 그닥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계집애같이 창백한 피부를 한 임시 선생도 그의 관심 밖이었다. 아직까지는.

"정완."

"......."

"대답해라, 정완."

"......뭐야."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평온한 어조로 계속해서 불러대는 자신의 이름에 완은 잔뜩 신경질을 내며 윤세를 노려보았다.

"나는 여러분에게 존경심까지 바라진 않는다. 너희 또래들이 제일 씹기 편한 상대가 담임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없는 곳에선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굳이 하지 말라고 하진 않겠다. 그러나 일단 너희는 학생이다. 학교라는 틀에 매여 있는 이상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고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이름을 부르면 대답해라. 알겠나, 정완."

"뭐?"

그제야 그게 자신을 향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된 완이었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가 아니다. '예'라고 대답해라. 정완."

선글라스에 가려진 윤세의 눈은 똑바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하!"

"대답."

기가 찬 완은 물끄러미 윤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노려보면 대부분의 선생들은 고개를 돌리며 얼버무린다. 그러나 윤세는 조금도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 

재미있군.

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것은 장난감을 발견했을 때의 완 특유의 표정이었으나 윤세에게는 그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완의 대답에 윤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출석부를 집어 들었다. 

"조용히 자습하도록. 수업시간에 보자."

윤세가 나가고 나서도 교실 안은 숨소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천하의 정완에게 감히 대든 간 큰 신임 선생도 선생이지만 평소와 달리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살벌하게 웃고 있는 정완의 모습이 교실 안의 공기를 한층 더 냉각시키고 있었다.

"할 만 합니까, 이선생?"

본래 신선생의 자리였던, 아직 예쁜 꽃무늬 방석과 사랑하는 낭군님의 사진도 채 치워지지 않은 자리에 주저앉자 옆에 있던 정선생이 

툭 어깨를 치며 친한 척을 한다.

"뭐, 애들이야 다 그렇죠."

"아, 그 반에 정완이라는 학생 있죠?"

"......그런데요?"

윤세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정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다지 학교 일에 관심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웬만해서는 부딪히지 않도록 하세요."

"...예?"

떨떠름한 윤세의 얼굴에 정선생은 몸을 조금 더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사장 손자에요. 걔 아버지는 성운 그룹 회장이고. 우리학교 이름이 성운고잖아요. 지금 이사장이 오늘 내일 하는 바람에 미리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글쎄 이 학교를 손자에게 주겠다나. 내 참, 가뜩이나 망나니 미성년자에게 그리 큰돈을 덥썩 안겨줘서 어쩌겠다는 건지. 덕분에 예전엔 그나마 완이 

놈에게 한마디씩 하던 교사들도 입 딱 닫고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지요. 어쩌겠어. 교사도 사람인데.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이선생도 그 놈한테 휩쓸리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요. 이선생이야 한 달만 참으면 되잖아요."

정선생의 말을 들으며 윤세는 점점 낯빛을 굳혔다. 역시 뒤가 있어서 그렇게 뻣뻣한 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윤세는 연하가 

기어오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정선생의 말대로, 한 달만 있으면 다시는 안 볼 얼굴. 어차피 임직이다. 짤려도 상관은 없는 것이다.

**

툭툭.

뭔가가 책상을 치는 울림에 완은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귀찮다. 인간에게는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게 있어서 보통의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하루에 4시간 

이상은 자 줘야 한다. 고로 어제 밤놀이라 하느라 날밤을 꼬박 새운 완군이 학교에 와서 내처 자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툭툭.

울림은 조금 더 심해졌다. 완은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저 울림은 완의 잠을 깨우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씹.

완은 눈을 떴다. 반질거리는 흑갈색의 나무막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뭔지는 눈감고도 알아 맞출 수 있다. 사랑의 매, 라고도 불리는 지휘봉이다. 

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는 교과서의 가운데 부분을 펼쳐서 잡고 다른 손으로 지휘봉의 손잡이를 잡은 임시 담임이 무표정한 얼굴로 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로 가려진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씨댕.

완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 모습은 여느 평범한 고등학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정완."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윤세의 말에 완은 얼굴을 찌푸렸다. 

"일주일 동안 지각이 일곱 번에 무단 조퇴가 일곱 번이었다."

.........그래서?

올려다보려니 생각보다 목이 아프다. 호리낭창하게 생긴 담임은 의외로 키가 컸다. 머리끝에서 들리는 윤세의 말을 흘려 들으며 완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 전에 교단에서 건방진 폼으로 예의 운운하던 선생은 무단 지각도 결석도 용납 못한다고 했다. 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보란듯이 일주일 째 

지각과 조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딱 윤세의 눈을 피해서. 참다 못한 담임은 결국 수업 시간을 노렸나 보다.

"교무실 청소 일주일."

..........뭐?!

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새끼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걸까.

"교무실 청소 일주일. 그 사이에 또다시 무단으로 사라질 경우 화장실 청소 일주일이 추가될 거다."

".......당신, 내가 누군진 알고 있어?"

"성운고등학교 2학년 7반, 32번, 정완. 덧붙여 임시지만 내 제자. 뭐 틀린 거 있나?"

완은 속 뒤집어진다는 말을 실감했다. 같잖은 백의 좋은 점은 사고 쳐도 수습이 가능하다는 것과 학교에서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귀가 따가울 정도의 잔소리도 묵묵히 들어주는 것이고. 그런데 이 선생이란 작자는 당당하게 완의 금역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못하겠다면?"

삐딱하게 대꾸하자 갑자기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윤세가 들고 있던 교과서로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모서리에 맞은 부위가 몹시도 아팠다. 

맹세코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누군가에게 맞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 새끼가!"

190에 육박하는 거구의 완이 위협적인 눈초리로 내려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변의 위험을 늦기고 움츠러든다. 그러나 윤세는 꿋꿋했다.

"연장자에겐 존대."

"밤길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선생."

완의 으르렁거림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럼 오늘부터 시작하도록."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윤세는 교단으로 돌아가 척척 책을 챙겨 나가버렸다. 남겨진 완은 으드득 이만 갈았다.

끼익.

반지하의 낡은 자취방의 문을 윤세는 힘들게 열었다. 갈수록 초점이 흔들리는 게 열쇠구멍도 제대로 맞추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윤세는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구멍을 더듬어 열쇠를 밀어 넣었다. 악전고투 끝에 들어온 방은 눅눅하고 후덥지근했다. 

겨우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창문을 열고 윤세는 자리에 앉았다.

피곤했다.

스스로가 점점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계속 멀쩡한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동반했다.

 윤세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드러난 눈동자는 여전히 새까맸지만 그 초점은 어딘지 모르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쉬고 윤세는 서랍을 열어 약봉지를 꺼냈다. 의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약은 증세를 조금 늦추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시신경이 퇴화하여 이식도 불가능해집니다.]

성장기가 끝나며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다 실명에까지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그것이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윤세는 그만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윤세는 고아다. 아직 태 중 때도 벗겨지기 전에 배냇저고리에 싸여 고아원 앞에 버려져 있었다고 했다. 원장 수녀님은 그 배냇저고리를 무슨 증표라도 되는 냥,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윤세가 보기에 그것은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배냇저고리에 불과했다.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했고 좀 더 자라서는 중국집 배달과 공사장을 뛰었다.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대학에 가고 싶었다. 열 여덟에 고아원을 나왔고 학자금 대출을 하여 대학에 들어왔다. 과외를 한 뒤로 돈과 시간이 조금 넉넉해졌지만 그 시간에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기에 전 장학금을 받을 성적은 되지 못했다. 군은 면제되었다. 고아라 다행이라 생각했던 적은 그 때 뿐이었다. 또래보다 3년 일찍 

사회 생활을 시작하여 겨우 학자금을 갚았다.

3년이 흐른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작은 오피스텔의 전세금과 유전병이라는 눈의 이상이었다.

처음부터 치료를 거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수술을 하기엔 윤세의 오피스텔 전세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행했던 종합 검사 결과에서 유전병임이 

판명되자 윤세는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윤세는 버려진 아이였다. 

"후후후..."

윤세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없는 좁은 방안에서 몸을 숙이고 터트리는 낮은 웃음은 흡사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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