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혈아 04 (21/45)
  • 혼혈아

    덥다.......

    후덥지근하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기분...

    토지는 자신을 내리 누르는 압력을 못이겨 눈을 떴다.

    엄청난 양의 이불이 자신을 짖누르고 있었다.

    탁탁거리는 타자소리.....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소리가 토지의 귀에 다가왔다.

    따뜻한 코코아 향도 느껴진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아파온다.

    지끈대는 두통에 아무말도 못하고 머리를 움켜쥘 뿐이다.

    익숙한 뒷모습이 뿌옇게 들어왔다.

    토지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빈다.

    뭔가가 눈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뻑뻑하고 가렵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웬일로 둔치가 고개를 돌린다.

    "히...히틀러..... 깨.....깼구나....!"

    여전히 히틀러다.

    사람들은 히틀러의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대량학살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의 식민지 정복을 저주한다. 게다가 그의 공포정치가 독일 사

    상 최대의 오점을 남겼다고 여긴다. 히틀러라는 존재에 치를 떨기도 한

    다.

    하지만 토지는 그 반대다.

    히틀러가 있었기에 세계 사람들은 독일이란 나라를 기억한다.

    무시하지 못한다. 나치즘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독

    일 우월주의 정치는 독일인을 부유계층으로 만들었다.

    히틀러가 있었기에 세계정복- 비록 목표달성은 못했지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히틀러의 열렬한 숭배자 따위는 아니다. 

    단지 히틀러에대한 거부감은 없다는 것 뿐...

    그런 토지로서도 자신을 히틀러라 부르는 그가 반갑지 않다. 전혀 달갑

    지 않다. 

    생각해보니, 독일과 일본 모두 전 세계의 파괴자 민족이다. 그 생각에 

    토지의 입가가 비틀린다...

    그럼..... 나는 그 두 국가의 아류작인가?

    왜 저 바보는 자신의 말을 저렇게 쉽게 믿어버리는 걸까?

    "누....눈.... 비비면.... 아.... 안돼........"

    "..........................."

    "이.... 이제 아..안 아파?"

    흘러내리는 안경을 쓸어올리며 더듬더듬 말한다. 상당히 걱정스러운 말

    투다. 저런 말투........... 너무 다정하게 들려 오해받기 쉽상이다.

    "아....! 배.....배고프겠다.......... 바.........밥먹어.........."

    그의 안경이 또 한번 흘러내리자 똑바로 올려주고 싶다. 오해는 말라. 

    그에게 특별한 관심이 갑자기 생겼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답답

    함에 비롯된 것이다.

    그의 어눌한 말투...

    더듬대는 목소리....

    답답한 안경.........

    짜증이 치민다.

    "히.....히틀러?" 

    게다가 저 순진함도..........

    토지가 한 발자국 다가서자 그는 치고 있던 손을 멈추고 모니터를 꺼

    버린다. 그의 갑작스럽고도 허둥거리는 손길에 토지마저 놀란다.

    쑥쓰러워 하는 건가? 자신이 쓴 글을 누군가가 본다는 것이?

    바보......

    토지는 속으로 웃는다.

    비웃음이다.

    어차피 읽지도 못하는 글.... 굳이 저럴 필요 없다는 것 알면 어떤 표정

    으로 변할까? 

    "밥.........안......먹어?"

    옳지.....

    천천히 말하니 더듬대진 않는다.

    하지만 자꾸 '밥''밥'거리는 것이 귀에 거슬린다.

    그는 정말 내가 식충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고개를 훽~돌려 베란다를 찾는다. 베란다 문을 열자 꽤 싸늘한 공기가 

    방안의 뜨거운 공기를 삼켜버린다.

    자신의 열기도 앗아가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베란다 난간을 

    손에 꼭 쥔 채 마냥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토지의 몸에 두터운 외투가 걸쳐진다.

    "가.....감기 걸려........이...........이제.......그.....그만.......문닫아........또........또.....

    감기....거....걸리고 싶어?" 

    토지는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그는 왜 나에게 이렇게 잘 대해 주는 건가?

    익숙해질까 겁난다.

    그는........

    아주 순수한 얼굴과....

    맑은 영혼을 가진듯한........

    또 ............

    사람좋은 미소와...........

    어눌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쉽사리 나를 쥐고 있는 것 같다.

    기분이 나쁘다.

    괜시리 또다시 화가나 그의 컴퓨터 책상 다리를 발로 탁탁 찼다.

    "어.......어.........."

    나. 를. 내. 버. 려. 두. 란. 말. 이. 다.

    토지는 신경질적으로 냉장고를 뒤적였다.

    냉장고는 여러종류의 신선한 햄과, 음료수, 빵, 비스켓, 그리고 체다치

    즈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그는 관념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같다.

    빵과 비스켓 정도는 밖에 놓아도 상관없다는 것을 진정 모르는 것일

    까?

    굳이 이렇게 냉장고의 전기를 낭비해 가며 꽉꽉 채워 넣을 필요는 없

    지 않은가?

    게다가 빵은 냉장고에 넣으면 오히려 그 맛이 떨어진다. 딱딱해진 빵은 

    질색이다.

    야채도 마찬가지다.

    녹색채소 이외의 것은 실온이 더 유지하기 좋은데.....

    토지는 어깨를 으쓱 한다.

    그리고는 가만히 체다치즈를 꺼내 입속에 집어넣었다.

    체다 치즈만 먹고도 며칠은 살 수 있다.

    독일은 치즈가 비싼 편이다. 

    아니, 꽤 비싸다.

    하지만 그는 토지가 체다 치즈를 좋아하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냉장고 

    한 칸을 다 메울만큼 많이 사다 놓았다.

    그래도 뿌리박힌 가난 근성이 토지를 압박한다.

    결국 '우적우적' 대신 '야금야금' 이다.

    조금 고개를 들자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시선을 받을때마다 '어쩌면  봉사해주길 바라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지만 여태까지의 진도상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니라고 보겠다. 

    그저 무의미한 '관찰'이라고만 생각 될 뿐이다.

    "그"는 글을 쓰는 작가인가 보다. 소설가나.. 뭐..... 기타등등..... 책을 쓴

    다는 것은 소설가 밖에 더 되겠는가? 

    배운 것이 없는 나로서는 그 정도가 한계다.

    저번에 왔던 그 여자가 편집장이고, 토지는 작가다. 

    확실하다.

    잘 나가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일매일 열심히 타자를 두드려 

    댄다는 노력하나는 가상하다.

    집안 전체를 매우고 있는 것은 엄청난 양의 책들.......

    토지는 따분함을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서 글을 배우기로 했다.

    차라리 한자 한자 배워서 문맹을 탈출하는 것이 현명한 생각 같았다. 

    사실 토지의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고 - 오히려 영특하다고 말해야 할

    까나? -어딜가나 글 모르면 고생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지는 그동안 먹고 살기에 바빠 글 공부할 틈이 없었다고 스

    스로 변명한다.

    타당한 변명이다.

    바빴으니까......

    게다가 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이런 우스꽝 스러운 외모를 가진 자

    식.... 아무도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기에 친구도 없다.

    친구에 별로 아쉬움도 느껴본 적 없다.

    그러니 동정하는 것이라면 추호도 그런 생각을 말길......

    국어사전을 갖다놓고 하나하나 공부하자니 힘들다. 게다가 몰래 하느라 

    눈치도 봐야 하고.....

    하지만 한글자 한글자 알아가니까 글자라는 거.... 문자라는 거...... 너무

    나도 신기할 뿐이다....... 

    "똑똑.............."

    그는 노크조차 느릿하고 지겹다.

    토지는 가만히 문쪽을 바라봤다.

    "히.....히틀러........"

    "뭐야?"

    "나......나가자.................."

    "..................."

    나야 상관 없다. 하지만 그가 일을 다 끝내고 그러는 것일까? 웬지 걱

    정이다. 

    그래서 그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도 토지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빙그레 어설픈 미소를 짓는다.

    "이.......일은................새....생각날 때..........음...... 그...그 때 해...........지......지

    금은.....새...........생각이......다....끊겼어........"

    그렇다......

    우리는 말로만 듣던.......

    '눈빛만봐도 아는 사이'

    가 되어 버린것이다. 물론 의미야 확연히 틀리지만.....

    토지는 속으로 웃었다.

    토지는 거의 웃음이 없다. 

    웃을 일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적도 없다. 토지가 속으로 웃는 다는 

    것은 한마디로 비.웃.음. 이다.

    자기 자신이건 상대건..... 속으로 미소지을 뿐이다.

    "나가자....."

    그 말에 토지는 보고 있던 사전을 닫는다.

    "어.....어...... 사..... 사전에서....뭐....뭐 찾고 있었어....? 나.......나한테 물어

    보지............나.......나도......꽤........."

    "됐어. 신경꺼."

    차가운 토지의 말에 그의 얼굴이 발그레 해 진다. 하얀 피부에 붉은 기

    운이 도니, 분홍빛으로 변해 버린다. 

    마치 아기같다.

    가끔 의문이 드는것이 토지가 그보다 8살이나 어린데, 얼굴이나, 하는 

    짓은 그가  더 어린애 같다.

    하지만 그것도 토지 자기만의 생각일 것이라고 생각하자 또 속으로 웃

    음이 터져나온다.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장소는 여전히 광장..........

    오랜만에 나온 것이라 그런지 가슴이 탁 트여지는 것 같아 힘차게 숨

    을 내쉬었다.

    그런 토지의 모습을 살짝 훔쳐보며 그가 웃음을 짓는 것이다.

    토지는 천천히 걸어다니며 그가 비둘기 먹이를 바닥에 뿌리는 것을 지

    켜보았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젠 바로 옆에

    서 지켜보는 것이다.

    그도 말이 없었다.

    토지 역시 말이 없었다.

    기대할 것 조차 없지 않은가?

    벤취에 기대어 앉았다.

    그와 토지사이에 거리가 있다.

    하지만 서로 그것을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다.

    토지는 ........ 예전에 자신이 이 곳에 앉아 다른 사람을 기다리며 생각

    했던 것을 떠올린다.

    웃기는군...... 그런 생활이 그리운 건가? 

    그런건가?

    웬지 요즘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다.

    이상하다.

    전에는 한번도 이런적이 없었는데....

    아마 그때는 다른 상대들이 매일매일 나타나니까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좀 심하다....

    속으로 욕설을 내뱉았다.

    웃기잖아?

    욕구불만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그 때 눈 앞에 커다랗고 반짝이는 구두가 눈에 띈다.

    갈색구두...... 뭐지?

    고개를 들자, 한 남자가 서 있다. 20대 후반? 

    그 남자가 토지를 내려다 보며 웃고 있다. 

    약간 음흉하다면 음흉한 웃음이다.

    아아......

    이 사람은 나를 아는 것일까?

    "너....... 시타르...... 맞지?"

    시타르........?

    토지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럴 리 없어.... 분명해.... 예전에 나랑 하룻밤을 보냈었잖아....."

    아아........

    하지만 그 따위 자질구레한 것을 기억할 토지가 아니다....

    게다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이름따위 기억하고 있다니.... 

    스토컨가? 

    간혹가다 이런 사람이 있다.

    하룻밤에 도취되에 계속 찾아대는......

    토지는 아무 초점없는 눈으로 다른곳을 바라봤다.

    솔직히 끌리긴 끌린다...

    욕구불만이 쌓여서인가...?

    "어때..... 나랑 오늘도....... 밤....... 시간있어?"

    보편적으로 깔끔하게 생긴 그가 토지에게 의사를 묻는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그".... 일어난다.

    "누.....누구신가요?"

    "당신은 누구지? 아아......"

    권유한 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자네도...............구하는 건가? 꽤 단정하게 생겼는데?"

    "............."

    "그"의 얼굴이 붉어진다.

    토지는 벌떡 일어났다. 웬지 화가 나서였다. 

    "얼마?"

    그 남자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분홍빛 지폐가 꺼내진다.

    앞쪽에서 메독 치료제 사용으로 노벨 수상을 한 폴 에를리히가 웃고 

    있다.

    현미경과 세포조직이 눈에 띈다...........

    그렇다........

    200마르크다......

    많은 돈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돈도 아니다.

    토지는 말없이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어..........히......히틀러..........."

    "먼저가."

    짤막한 말 한마디를 던지고 토지는 그를 따라 어두운 골목길로 걸어가

    고 있었다......

    "아..........아아................"

    남자가 신음한다.

    토지는 신경질 적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한번도....

    이런 정사를 치루면서 즐긴적이 없었다.

    그냥 몸은 즐길망정...... 정신은 항상 깨어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흥분하고 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흔들리고 있다....

    그 이유는 모두........... 

    "그"때문이다.

    "그"가 자신과 같이 있는 것 같다.

    자기 뒤에서 박아대는 남자가 "그"인마냥.... 토지는 눈을 감고 상상을 

    한다.

    끈적끈적한 땀냄새...

    미끈거리는 피부.....

    남자가 토지의 동굴속으로  사정없이 찔러댈수록.... 토지는 몸을 비트

    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잠도 자지 않은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착각 같지만서도....

     웬지 그러고 있을 그가 눈에 선하다...

    "윽.............."

    남자가 토지를 움켜쥐고는 손놀림을 바삐 움직이자 토지는 더이상 견

    디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았다.

    이건.....

    누구에게 뱉아내는 신음인가?

    누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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