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토지는 그의 집에 와 있었다.
일감인가......... 이자식?
이렇게 생각한 순간..... 그가 무언가를 던진다.
엉겹결에 받아들자..... 그것은...... 옷......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차가운 햇살이 고개를 집어 넣으려 한다.
날씨에 대한 불만도....... 자신앞에 서 있는 남자에 대한 의문도 잊은 채
그냥 창가에 섰다.
우울한 날씨군,........
하지만 독일 날씨야 다 그게 그거 아니던가?
화려하진 않지만 결코 초라하지도 않은 .........
게다가 혼자 살기엔 너무 큰듯한 집.....
윙윙대며 켜져있는 컴퓨터 모니터.... 깔끔한 부억..... 몇몇개의 문이 있
는 걸로 보아 이게 다가 아닌가보다.
당연 크다고 단언할 수 있는 집...
갑자기 자신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직업에 의문을 갖게 된다.
재벌집 아들인가?
보통 남자들은 일<?>을 치룰때 자신들의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는다.
위험 부담이 크다고 생각해서인것이다.
특이한 사람이다.
토지는 창가에 서서 해 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관
찰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가 씩 웃는다.
그 미소에 머리가 이상해 짐을 느낀다.
난 아직 미성년자다..........
미성년자를...... 그것도 남자를 이런곳에 데리고 와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인간이라면... 안 봐도 뻔한 거 아니겠어?
똑같아......
이 사람도..........
어른들은 원래 그래.......... 그래............
똑같은 짐승.
토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주섬주섬 옷을 벗어대기 시작했다.
이제 막 남자다운 골격을 내비추고 있는 토지의 몸은 조각같이 섬세
하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옷을 벗는 토지를 보며 그 남자가 기겁을 하는
것이 보인다.....
"이........ 이봐......... 왜...... 왜이러는 거야........?"
처음부터 더듬대는 저 말투도 싫다.
깔끔한 저 마스크도 갈갈이 찢어 발기고 싶다.
하지만
그의 외침에 멈칫한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멈추라는 얘긴가?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내가 너무 말라서 그런가?
그런뜻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멈추라는 의미였다....
왜지?
왜 멈추라는 거지?
빵 한조각이 먹고 싶었어.
단지 빵조각과 베이컨이 먹고 싶었다........
하다못해 뮌헨 길거리에 그 흔하디 흔하게 널린 훈제 소세지라도......
그런데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걸까?
내가 뭔가를 잘못한걸까?
그가 나의 손을 잡는다.
누군가와 손을 잡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얼떨결에 뿌리친다.
조용한 침묵.....
"네.....네가..... 머.......물방을 알......려 주려고.... 그...그런거야..........."
머물다니..... 누가? 내가.........? 내가 왜 이 큰 집에 머무른다는 거지?
"지...... 집이 없잖아.....너......."
수치심이랄까?
뭔가 기분나쁜 느낌이 자신을 옭아맨다.
해맑은 웃음.....
왜 저렇게 배시시하게 웃는거지?
내가 애고, 니가 어른인데....
왜 자꾸 이런 기분이 들까?
"나...... 난 호....혼자 살아.......... 너....랑 나랑 둘이...... 살....살아도.... 집은
넓으니까........."
도대체 왜 자신과 같이 살고 싶어하는 지 토지는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사람.... 굉장한 말더듬... 그에 반해 말이 많다.
자신에게 자꾸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긴장했는지 땀이 보
인다. 닦아주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은 또 왜일까?
그의 말 하나하나... 거슬린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비볐다.
항상 당황하거나 뭔가를 생각할라치면.. 눈이 가렵다.
"어..... 아.....잠.....잠깐.... 눈을...그렇게 비벼대면... 가...각막이......"
그 말에 손을내린다. 무슨 소린진 모르지 손을 내려야 할 것만 같았다.
"여.......여기 있지 않을래?"
"...................."
"계....계속 같이 살자는 게 아니고.... 그....그냥.... 너 갈 데 생길 때 까지
만....."
계속되는 싸늘한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 댄
다.
다시금 시선을 창기로 돌리자 그제서야 입을 다무는 그....
"꼬르르륵......."
자신의 뱃속에서 나는 소리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가 보인다.
"배.고.파."
허둥지둥 주섬주섬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는 그의 손길이 바빠보인다.
향긋한 내가 토지의 코 끝을 자극한다.
"마...많이 먹어....."
풍성한 식탁위엔 처음보는 음식 투성이다.
나이프와 포크를 버려두고 손으로 집어먹는 토지를 흐뭇한 마냥 지켜
보는 그....
"누... 눈동자 색이 이...상해.."
또 시작되는 말......
먹느라 정신이 없는 토지로서는 한 귀로 흘러버린다.
"내 이름은.... 카...카토야.... 너....넌 이름이 뭐야?"
",,,,,,,,,,,,,,"
".....응?"
"히틀러"
"뭐?"
"히틀러!!!!"
빽 소리를 지르곤 다시 음식을 꾸역꾸역 처 넣는다.
"히.....히틀러? 이.. 이름 멋지다......"
이거 바보인가?
조용한 침묵이 거실을 감싼다.
배불리 음식을 먹은 토지는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놔....놔둬...... 내..... 내가 할게....."
하지만 설겆이까지 마친 토지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는다.
"왜....왜 그러는 거야?"
대가도, 주는 것도 없이 공짜로 생활을 한다는 거... 토지로서는 싫다.
한번도 남에게 신세 져 본적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항상 빚은 안
졌다.
토지는 말없이 운동화 끈을 맨다.
"어.....어디 가?"
"................"
"이...... 이제 ...... 겨울이 다가온다고.......!!"
그랬다.
곧 겨울이다.
항상 겨울은 토지에게 생존과의 혈투를 벌이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보
호시설도 있고.... 어떻게든 버텨 나갈 수 있다.
일감이 떨어지더라도...... 여태껏 버텨 왔으니까.
"신세는 싫어."
딱 잘라 말하며 무심히 운동화 끈을 매는 토지를 붙잡는 그... 카
토..........
"그.....그럼....... 니가 집안일 해........ 그....그럼 되잖아."
도대체 왜 나를 이 집안에 끌어들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순진한 낯짝하며.....
누구도 이런 식으로 토지에게 대한 적 없던지라 토지는 기분이 묘하
다....
조용한 하루.......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매일같이 뭔가를 쳐 대고 있다.
지루한 시간에 하품이 터져 나온다.
눈이 가려워.......
토지는 또다시 아무생각 없이 눈을 비빈다.
나른한 오후다.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소리와 탁탁거리는 타자소리가 그 전부다.
왜 이렇게 목이 칼칼한 건지 모르겠다..
계속 꿀꺽꿀꺽 물을 마셔보지만 오히려 다 갈증이 심하다. 게다가 머리
까지 아파온다.
긁적 긁적 배를 긁어대며 주방앞에 섰다.
배고파.....
냉장고를 뒤져대지만 비어있다.
뭐야..........
그는 밖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전에 6시만 되면 광장 앞을 서성였으면서... 이젠......... 아예 나가질
않는 이윤 뭐야?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지만 여전히 타자 치는 소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신경한 자식...
자신의 침대위에 놓여진 책 한권을 올려다 본다.
읽으라고 준 책이다.
하지만 토지는 글을 모른다. 수치스러워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학교
를 다닌 적이 없는 토지로서는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
한 것일지도....
그는 이런 기분을 모를것이다....
아무렴 어떠랴?
그냥 베란다에 주저 앉는다.
떠가는 구름이 여러가지 모양을 그리며 토지의 눈에 들어왔다.
배.고.파.
이쯤되면 토지는 스스로가 식충이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괜히 뚱해진다.
벌떡 일어나 그가 뭔가를 두드리고 있는 탁자 옆에 섰다.
하지만 이 얼간이에, 말더듬에, 둔치는 토지란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화가나 탁자 다리를 발로 찼다.
"어.......어?"
그제서야 코끝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쓸어올리고는 놀란듯이 자신을 올
려다 본다.
"밥.줘."
"꺼...꺼내먹어..."
"없.어."
"어..... 하......하나도 어..없어?"
"없.으.니.까. 없.다.그.러.지."
멍--------------------
이건 무슨 침묵이지?
토지는 얼빠진 그를 보며 한숨을 쉰다. 신경질적으로 탁자 다리를 계속
발로 찼다.
"아...알았어. 자....잠깐....."
전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나간다.
"어........나...... 여기? 집..... 먹을 거 들고 ........응......... 우리 집으로 와......
다 떨어졌어....... 응.......응....... 그래......많이 사와......... 응............."
어라? 저 자식..... 말을 안 더듬는다?
"어.............. 어? 잠깐만.........."
"저.......저기 히.....히틀러.......뭐......뭐먹고........."
아직도 히틀러라 부르고 있는 저건..... 정말 멍청이 아닌가?
"체다치즈!"
"체.....체다치즈? 아....알았어.... 응. 체다치즈 사와. 응. 많이... 어? 으
응...... 도...동생....... 아니, 몰라. 어쨌거나 빨리와. 배고프대.... 응..... 알았
어."
신기하다.........
그가 말을 더듬지 않다니....
저 지독한 말더듬쟁이가.....
토지는 어깨를 으쓱한다.
누구 앞에선 말을 더듬거리는 주제에.......
"미.....미안...... 나...... 나 일해야 해.... 내.... 내가 준 책 ....... 이.... 읽으면
서.... 조.....조금만.... 이.... 있어봐....."
차라리 나한테 돈을 주지...
누군데 음식같은 것을 사 들고 온다는 거지?
다시 베란다로 가서 털썩 앉는다.
목아파....
답답하고 지루하다.
그는 다시 안경을 고쳐쓰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간다.
베란다 밖을 보자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인다.
조금만 지나면 광장이다.
그 생각에 기분이 들뜬다. 그냥 밖에 나가버릴까? 하지만 답답하다는 불
만보다는 편리하다는 이점쪽이 더 기운다.
겨울동안만 참자....... 하고 생각한다.
넓은 집에서 돈 벌 필요도...뒤 대줄 필요도 없이.... 이렇게 편하게 먹을
거 먹고 있는 거.... 흔한 일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을 명상에 잠겨 있는데 벨 소리가 들린다.
찰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휘날리는 밍크코트.... 밖은 그렇게 추워
보이지 않는데...... 저건 순전히 자기 과시욕이다.
"뭐야, 벌써 시작하는거야? 아직 한참 남았잖아."
"그래도 미리 해 놓으려고..... 갑자기 생각이나서...."
최신형 페라리의 주인이다. 화려하고 멋진 몸매... 빨간 립스틱이 인상
적인 그 여인....
"어...? 그런데 쟨 누구야?"
"아..... 히틀러. 아는 동생이야."
저 바보.........
"뭐라고?"
"히틀러라고.."
"히이~틀러? 웃기지 마. 지금 장난해?"
토지는 가만히 그를 노려본다.
저 자식 머리엔 뭐가 들은거야?
여자가 긴다리를 뽐내며 손을 내민다.
"난 키라라고 해. 진짜 이름이 뭐야?"
장갑 낀 손을 내민다. 토지는 아무생각없이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
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히.틀.러."
어이없어 하는 여자를 뒤로하고, 음식이 가득 든 봉투를 뒤적거려 체다
치즈를 빼낸다.
"카토, 쟤 뭐야?"
"내가 히틀러라고 말했잖아."
트윈이군.... 바보 트윈....
토지는 무시한 채 우적우적 치즈를 입안가득 집어넣었다. 머리가 아프
다.
어질어질한 기운이 한꺼번에 닥쳐와 무심코 벽을 붙잡았다.
어...... 왜.........이럴까?
그와 그녀가 서로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마치 십년은 멀리 떨어져 있
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찔하다.....
현기증에 머리가 돌 지경이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