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80)화 (80/80)
  • 특별 외전 3화.

    준혁은 수술실 앞에 앉아 초조한 얼굴로 손끝을 괴롭혔다.

    의사가 위험 가능성에 대한 설명을 하긴 했지만, 연희의 경우엔 지금까지 잘 해왔기에 특별히 나쁜 상황은 없을 거라고 했다.

    괜찮을 거라는데, 임신 기간 내내 믿고 함께했던 의사이니 그 말을 믿어도 될 텐데.

    그런데 준혁은 도저히 편안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가 떠오르고, 그 소식을 전하며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웃던 연희의 얼굴이 그려졌다.

    “……진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는데.”

    그녀와 자신의 아이.

    꿈꿔 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어쩌면 간절히 원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연희와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 더는 헤어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준혁아, 나…….’

    ‘…….’

    ‘……나, 임신한 거 같아.’

    그런데 제 앞으로 내밀어진 테스트기를 본 순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는 거로 모자라 미소를 감출 길이 없었던 걸 보니, 아무래도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라고.

    그것 말고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 순간은 연희뿐 아니라 저 역시 그토록 기다리고 고대했던 순간인 건데.

    “하,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준혁은 하얗게 질린 손을 힘껏 말아쥐었다.

    괜찮을 거라고 했으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아이도 연희도 모두 무사히 나와 줄 거라고 믿고 기다리면 되는 건데.

    그런데 불안했다.

    혹여나 연희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손발이 벌벌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고통에 일그러졌던 연희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연희를 다시 만나고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자꾸만 실수하고 놓쳤던 것들만 떠올랐다.

    더 잘해줄걸. 더 노력할걸.

    연희만 무사히 제 품에 돌아와 준다면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분 1초가 억겁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그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준혁의 귓속을 우렁차게 찔러왔다.

    가지런히 내려앉아 있던 속눈썹이 번쩍 들리고 그가 닫혀있는 수술실 문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준혁은 본능이나 다름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 연희의 이름이 호명되고, 그를 찾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체 없이 다리를 뻗었다.

    ***

    암전된 듯 어둠으로 가득하던 공간이 느껴지고, 냉기 가득하던 온몸에 차츰 온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연희는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무거운 추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곧 이어진 아이들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냈다.

    간신히 눈을 뜨자 시야가 흐릿했다.

    뿌예진 눈앞으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쳤다.

    두어 번 눈을 끔뻑였다.

    실루엣이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오한이 밀려들었다.

    이가 달달거리며 부딪히고 온몸이 벌벌 떨렸다.

    와중에 정신이 조금씩 들긴 하는 건지, 웅웅거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야, 정신 들어? 나 누군지 알겠어? 괜찮아?”

    준혁의 말소리였다.

    여유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조급했다.

    그게 뭐라고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갈급한 목소리만으로 그가 얼마나 제 걱정을 하고 있었을지, 그 무게가 선명히 전해졌다.

    무슨 말이든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버석하게 마른 목에선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연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눈을 끔벅였다.

    눈길로나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 고개를 돌리는데, 그때 생각지 못했던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연희야. 정신이 좀 드니? 응?”

    물기를 가득 머금은 음성의 톤이 높았다.

    연희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친의 얼굴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였다.

    “연희야, 엄마 알아보겠어?”

    유정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연신 연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는데, 연희는 가슴이 울렁거리며 감정이 울컥거리는 걸 느꼈다.

    순식간에 동공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도통 감당할 수 없이 빠르게 밀려왔다.

    엄마도 날 이렇게 힘들게 낳았을까.

    장장 열 달을 배 속에 품고 극한 고통을 견디며, 출산하는 그 순간까지 제 걱정만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자신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그녀의 가슴이 얼마나 무너졌을까 생각하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

    “그래, 연희야. 엄마야. 엄마 여기 있어. 하, 정말 고생했다. 정말로 고생했어.”

    그렇게 말하는 유정의 눈매를 타고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말을 잇기 어려운 건 여전했고, 가시지 않는 오한에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 너무 벅찼다.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맞닿아있는 유정의 손을 미약하게나마 꾹 잡아보는 것뿐이었다.

    그거로 전하고 싶었던 많은 말과 감정을 전해보았다.

    ***

    완전히 가시지 않는 잠기운에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유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제 손을 잡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준혁의 모습이 보였다.

    “……준혁아.”

    가까스로 소리를 쥐어 짜냈다.

    목을 할퀴는 듯한 느낌이 유쾌하지 않았지만, 줄곧 제 걱정만 했을 준혁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었다.

    “연희야. 정신 들어?”

    준혁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놀란 눈으로 연희를 살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거 같은데 그새 시간이 꽤 지나기라도 한 건지, 준혁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연희는 천천히 팔을 들어 그의 볼을 슥 쓸어보았다.

    “걱정 많이 했어?”

    당연한 질문에 그의 미간 위로 주름이 패고 속눈썹이 파들거리는 게 보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전이라면 몰랐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감정을 억누르는 중이었다.

    성치 않은 제게 걱정까지 끼칠 순 없다고 생각할 테지.

    그런 그에게 미안하기도, 또 고맙기도 했지만, 꼭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애들은, 괜찮아?”

    “괜찮아.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이고 자가 호흡도 되고. 널 닮은 건지 울음소리도 엄청 씩씩하더라.”

    그 말을 하는 준혁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었다. 아이들이 건강하다니 다행이었지만, 아이들과 달리 준혁은 괜찮은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뭉클했다.

    “애들도 괜찮고, 나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근데 우리 남편은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네.”

    “하……. 내가 어떻게 괜찮아. 네가 깨어나기 무섭게 또 정신을 잃었는데.”

    장난 섞인 말에 준혁이 참았던 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긴장과 함께 다리가 풀린 것 같았다.

    천하의 정준혁이 다리가 풀리다니.

    그 사실이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마취가 엄청 잘 되나 봐, 내가. 너무 졸렸어.”

    “하, 그래. 잘했어, 잘했는데…….”

    준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망울이 촉촉했다.

    그게 연희의 가슴에 알 수 없는 감정을 심어주었다.

    준혁과 함께한 시간이 한두 해도 아닌데,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신연희가 정준혁에게 얼마큼 사랑받고 있는지, 꼭 그 사랑의 크기를 알 것 같은 기분이랄까.

    “……준혁아, 나 안아줘.”

    형언할 수 없이 벅찬 기분에 연희는 본능처럼 속삭였다.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술 부위에서 묵직한 고통이 전해졌지만, 잠깐이라도 좋으니 준혁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준혁은 연희의 말에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무척이나 조심하는 손길로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그녀의 몸이 바스러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 손길까지도 그녀의 가슴을 자꾸만 간지럽혔다. 그래서 연희는 속살일 수밖에 없었다.

    목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이 말을 꺼내지 않으면 심장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해, 준혁아.”

    길지 않은 한마디에 그나마 안정됐던 준혁의 숨소리가 탁 멈추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거칠게 쏟아졌다.

    “나도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 사랑한다, 연희야.”

    연희는 힘껏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껴안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듣던 그의 고백인데, 뭐 하나 달라진 것 없는 그 사랑 고백이 이 순간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고작 가벼운 포옹일 뿐인데,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그녀의 가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준혁과 신연희가 더는 헤어지지 않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꿈만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걸 이룬 것만으로 이번 생은 과분한 행복 속을 거닐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보다 더 큰 행복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그녀의 앞에 다다라 있었다.

    마치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상하듯,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버틴 그녀의 선택을 칭찬하듯.

    그래서 연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행복했다.

    이보다 더한 행복은 존재할 수 없을 거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을 만큼 완벽했다.

    그 마음을 가득 담아 다시 한번 속삭였다.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사랑해, 준혁아.”

    진심 가득한 고백에 그의 어깨가 잘게 진동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그의 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맞닿은 가슴으로 서로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연희는 묵직한 울림을 음미하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신생아를 태운 아기 침대가 들어왔다.

    연희와 준혁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아이에게로 향했다.

    무엇 하나 쉽지 않았던 두 사람의 인생 2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다정한 집착> 특별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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