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79)화 (79/80)

특별 외전 2화.

모친과 통화를 나눌 수 있겠냐고 묻기도 전에 연희는 기다렸다는 듯 밀폐 용기를 내려놓곤 손을 탁탁 털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준혁은 피식 한 번 웃곤 핸드폰을 연희에게 건넸다. 그러자 연희가 한층 더 환해진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 저예요. 점심이요? 저 아직도 밥 먹는 건 조금 힘들어서 다른 거 열심히 먹고 있어요. 말린 과일은 가리지도 않고 너무 잘 들어가는 거 있죠? 지난번에 어머님이 사 주신 건망고도 너무 맛있어서 그 많은 걸 하루 만에 다 먹었어요.”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꼭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연희는 시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도 불편한 기색은커녕 틈만 나면 웃음을 터뜨리며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준혁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일상이 된 모습이고 이젠 당연하기까지 한 모습인데, 그에게는 여전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무척이나 달콤한 꿈을 꾸는 것처럼, 믿을 수 없으리만치 행복했다.

그게 그를 자꾸만 혼몽하게 만들었다.

도무지 아주 잠깐도 신연희를 사랑하지 않곤 배길 수 없도록.

***

늦은 저녁.

겨우 식사를 마친 연희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최대한 많이 먹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몇 숟갈 뜨지 못했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속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이 울렁거렸다.

구역질이 밀려올 거 같은 느낌에 서둘러 준혁이 챙겨준 물을 마시며 속을 달랬다.

“속 많이 안 좋아?”

설거지를 하던 준혁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연희를 살폈다.

“응, 조금.”

식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환했던 연희의 표정이 잠깐 사이에 희게 질려있었다.

준혁은 밀려 올라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설거지하는 손길에 속도를 더했다.

음식 냄새를 힘들어하는 그녀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서둘러 설거지를 마친 그는 연희가 있는 거실 소파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속을 달래기 위해 계속 물을 마시는 것 같던 그녀는 어느덧 잔뜩 지친 모습으로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연희야.”

준혁은 연희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보았다. 그러자 가지런히 내려앉아 있던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리고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잔뜩 지친 것 같기도, 많이 피곤해 보이기도 한 모습이었다.

얼마 안 먹긴 했어도 식사 후 바로 눕는 건 산모의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소파에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려니 그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결국 준혁은 연희를 부축해 침실로 향했다.

그의 손길에 이끌리듯 침대에 누운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반쯤 들었다.

그 사이로 준혁이 익숙하게 팔을 쑥 집어넣었다.

불룩하게 부른 배 때문에 제대로 팔베개를 해줄 수도, 그녀를 품에 꼭 안아줄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언제나 이렇듯 서로를 마주 보고 눕곤 했다.

“많이 힘들어?”

준혁은 흘러내린 연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희는 잠깐 대답을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 묵직한 숨을 푹 내쉬었다.

“……으응. 가진통 온다.”

말과 동시에 그녀의 미간으로 주름이 깊게 팼다.

준혁은 그런 연희에게서 잠깐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진통이 좀 심하다 싶으면 뒤얽힌 연희의 손가락으로 힘이 들어갔고, 조금 괜찮아지고 나면 그녀의 손에서도 사르르 힘이 빠졌다.

그렇게 연희의 진통을 체크하며, 준혁은 최대한 연희와 모든 걸 나누고자 했다.

비록 그녀가 느낄 고통을 진짜 나눌 수는 없었지만, 제 아이를 품으며 이토록 고생하는 그녀에게 온 신경을 쏟는 거로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연희의 진통은 2분가량 이어졌다.

길지 않다면 길지 않은 시간인데, 그것만으로 연희는 힘을 다 소진한 것처럼 축 늘어진 채 눈꺼풀을 내리 닫았다.

아무래도 조금 전 먹었던 저녁이 다른 날과 비교해 유난히 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준혁은 티 나지 않게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연희의 어깨를 도닥거려주었다.

이따금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기도 했고, 헤어라인을 따라 엄지를 지분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주름으로 가득하던 얼굴에 평온이 찾아오고, 그녀의 어깨가 규칙적인 박자로 오르내렸다.

준혁은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도 모르게 까무룩 잠에 빠지고 말았다.

***

……아. ……혁아.

고요하던 어둠 사이로 불현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준혁은 미간을 좁히다가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비몽사몽한 정신에도 옆자리부터 살폈다. 그러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연희가 보였다.

“연희야!”

준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연희의 뺨을 부여잡았다.

그제야 힘겹게 눈을 뜬 그녀가 아스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준혁아, 나……. 나, 배가 너무 아파.”

연희가 배를 부여잡은 채 고통 섞인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당황한 눈으로 연희의 이곳저곳을 살피자, 고통 어린 표정뿐 아니라 그녀의 하반신 쪽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게 보였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이 당혹스러웠다.

사태가 파악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끙끙거리는 연희의 신음이 다시 한 번 이어진 순간, 준혁은 정신을 차리곤 침대에서 내려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제 옷과 연희의 옷을 챙겼고,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그녀의 모습이 준혁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연희를 따라 그의 숨소리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연희야, 괜찮아. 크게 심호흡하고, 천천히 걸어보자. 아니, 힘들면 내가 안을까?”

준혁은 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며 절박한 눈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리숙하게 굴까 봐 그간 셀 수도 없이 이 순간을 떠올리며 시뮬레이션을 했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그간의 노력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수십 번 생각하며 만들어두었던 메뉴얼은 단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고, 그저 연희가 잘못될까 하는 두려움만 밀려왔다.

“아니, 야. 걸을 수, 있어. 가자.”

연희는 그렇게 말하며 준혁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마주 잡고 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이 실렸을 뿐인데, 준혁은 가슴이 저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힘들면 얘기해. 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준혁은 연희를 부축해 곧장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차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연희의 안전벨트까지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주행을 시작했고, 곧장 병원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새벽 시간이라 차가 막히지 않는다는 것 정도.

병원으로 향하는 길 내내, 연희는 주기적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신음을 흘렸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준혁 역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연희는 곧장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였다. 신속하게 여러 가지 검사가 이어지고, 곧 주치의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했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양수도 터졌고, 자궁문이 이미 6cm나 열렸어요. 바로 분만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준혁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본능이나 다름없이 눈으로 연희를 찾았다.

언제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고대했던 그녀인데, 출산을 앞두고 한껏 긴장한 낯빛이 보였다.

그게 준혁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연희야.”

준혁은 연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출산을 앞둔 건 그녀인데 하얗게 질리다 못해 식은땀을 흘리는 건 준혁이었다.

연희는 긴장감에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는 걸 느꼈지만, 담담한 얼굴로 준혁을 보았다.

그러곤 힘껏 웃어 보였다.

“괜찮아. 나 잘하고 올게. 잘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나 다름없는 말을 되뇌었다.

저들 부부에게 찾아온 아이들은 태명 그대로 분명 기적이고 축복이 맞았다.

하지만 쌍둥이 출산에 대한 위험성을 임신 기간 내내 들었던지라 긴장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꼭 잘 이겨내고 싶었다.

준혁과 자신을 닮은 아이들을 만나는, 그 숭고한 과정의 마지막을 보란 듯이 견뎌내고 싶었다.

두 사람 주변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의료진들이 곧 준비가 끝이 났음을 알려왔다.

동시에 빈틈없이 맞물려있던 두 사람의 손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

연희는 의료진들의 도움으로 수술대 위에 누웠다.

날카로운 냉기가 등 전체로 스며들고, 동시에 찌르는 듯한 진통이 다시금 이어졌다.

맞닿은 이에 힘을 주곤 진통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을 둘러싼 의료진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질 때마다 애써 외면했던 두려움이 자꾸만 몸집을 부풀렸다.

그때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던 주치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뜨자 예상했던 얼굴이 동공 가득 들어찼다.

“연희 씨,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미 양수가 터진 데다 쌍태아라서 바로 전신 마취해야 해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지금부터는 나 믿고 마음 편히 자고 일어나요. 알겠죠?”

그 말끝에 주치의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그게 뭐라고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졌다.

곧 링거를 통해 하얀 액체가 주입되고, 산소 호흡기가 씌워졌다.

연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말짱한 것 같던 정신이 뚝 끊기고,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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