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1화.
유난히 날이 맑았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 중앙을 연희가 느린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침실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식탁엔 조금 전까지 식사를 나눈 흔적이 여실했다.
연희는 잠시 지저분한 식탁을 한 번 바라보곤 시간을 살폈다.
“금방 들어오긴 할 건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딘지 내키지 않은 뉘앙스를 싣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고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아 대충이라도 정리를 하려는데, 타이밍 좋게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위에 뜬 이름을 확인한 연희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준혁아.”
- 슬슬 내려와도 될 거 같아. 차 적당히 데워졌어.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가 절로 미소 지어질 만큼 무척이나 다정했다.
조금 전 먼저 집을 나선 그는 차가워진 날씨에 그녀가 추위에 떨기라도 할까 봐 차를 데워놓겠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새 적당한 온도를 갖춘 모양이었다.
식탁을 보며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그녀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지금 내려갈게.”
전화를 끊고 침실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은 여전히 느릿했다.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향하고 굽이 낮은 신발에 발을 끼워 맞추기까지.
세상에 하나뿐인 다정한 남편에게 향하는 걸음이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녀가 익숙한 손길로 층계 버튼을 눌렀다.
사소한 움직임에 단추를 채우지 않은 코트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배가 어느덧 불룩하게 불러 있었다.
***
자그마한 진료실 공간.
두 사람의 시선이 작은 모니터 화면에 박혔다.
연희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곧 이어질 의사의 말을 기다렸다.
“다행히 자리를 잘 잡았네요. 저번 주에 머리가 하늘 방향으로 있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괜찮을 것 같아요. 특별한 이상 소견도 보이지 않고요.”
언제 들어도 인자한 목소리가 반가운 소식을 안겨주었다.
연희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약 9개월쯤 전, 선물 같은 아이가 저들 부부를 찾아와 주었다.
신연희가 아닌 윤세연으로 준혁과 정식 부부가 되고, 많은 일이 있었다.
항간에 알려진 정준혁의 부인이 윤세라였기에 바로 잡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준혁과 윤세연을 향한 질책은 곧 HN과 RM을 향한 비난으로 바뀌었다.
고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무사히 그 시간을 잘 견디고 버텨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절대 쉬운 시간은 아니었다.
기꺼이 제 방패막이 되어 준 준혁과 친정 부모님이 없었다면 절대로 버티지 못했을 것이리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시간이 지나고 겨우 준혁과 떳떳하게 부부로 지낼 수 있게 되자 자연스럽게 아이를 원하게 되었다.
헤어져 있던 기간이 길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준혁과의 연애가 짧지 않았을뿐더러 그와 함께 해외를 돌았던 시간도 길었기에 신혼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보단 그와 자신을 닮은 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준혁도 제 마음과 같은 듯 보였다. 하지만 제법 긴 시간 동안 아이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따뜻한 바람에 향긋한 꽃내음이 가득 밸 무렵,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찾아와 주었다.
처음엔 임신 소식만으로 얼떨떨했는데, 배 속에 품은 아이가 둘이란 사실을 듣곤 엉엉 소리까지 내며 눈물을 쏟았다.
그토록 바라던 아이였는데, 두 배의 기쁨을 주려고 그렇게나 애간장을 녹였던 모양이라고.
그간 했던 속앓이를 준혁에게 쏟아내었다.
연희에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이가 기적이고 축복이었다.
그런 이유로 배 속 아이들의 태명은 기적이와 축복이가 되었다.
“다음 주에 다시 뵙는 거로 하고, 그 사이 혹시라도 이상 징후가 느껴지시면 곧바로 병원에 오세요. 아마 곧 아이들 만날 수 있을 것 같네요.”
담당의가 연희와 준혁을 차례로 보며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희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준혁의 손을 꼭 잡았다.
자상한 시선이 곧장 연희를 향했다.
그걸 마주하는 것만으로 연희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이 설레었다.
자신과 준혁을 반씩 닮은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지.
그걸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숨 쉬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연희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평생에 걸쳐 요즘처럼 가슴이 벅차고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고.
그 마음을 가득 담아 준혁을 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빈틈없이 맞물리는 손가락의 감촉이 곧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연희는 준혁의 손을 꼭 잡은 채 병원을 나섰다.
***
집에 들어오자 포근한 온기가 두 사람의 몸을 둘둘 감쌌다.
준혁은 뒤뚱거리는 연희를 부축하며, 그녀가 편히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도왔다.
“애들 건강하다니까 너무 다행이야, 그치.”
코트를 벗은 연희가 상기된 얼굴로 준혁을 올려보았다.
핑크빛으로 물든 양 볼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준혁은 속절없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는 안 아파?”
“조금 저리긴 한데 괜찮아.”
연희가 개의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준혁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냥 보기에도 연희의 두 다리가 퉁퉁 부어있었다.
어떻게 봐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입술을 맞붙인 그는 묵묵히 연희와 제 코트를 정리하곤 그녀와 소파에 앉았다.
익숙한 손길로 그녀의 다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리곤 꾹꾹 주물렀다.
매일 하는 일이라 두어 번 주무르는 것만으로 그녀의 상태를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어제와 그제, 또 일주일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부기였다.
역시나 괜찮지 않을 게 분명한데.
어제는 오늘과 비슷한 부기에도 힘들다고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더니, 아이들이 건강하다는 의사의 말이 진통제라도 된 모양이다.
“2주 정도 남은 건데. 나 너무 떨려, 준혁아.”
연희가 아이처럼 종알거렸다.
다리를 주무르던 준혁이 흘깃 연희를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을 하고선 소파 협탁에 늘 준비되어 있는 말린 과일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연희는 30주에 접어들 무렵까지 입덧 때문에 무척이나 고생했었다.
그 탓에 쌍둥이를 배 속에 품고도 몸무게의 변화는 크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편하게 먹는 것이 말린 과일이었다.
“무섭진 않아?”
준혁은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모르겠어.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진통 시작되면 얼마나 아플까 싶어서 무섭다가도 드디어 애들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연희가 오물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진통이 무섭다고 말한 사람답지 않게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따라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와 진득하게 눈을 맞춘 그가 입꼬리를 한 번 휘어 올리곤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다리를 보았다.
퉁퉁 부었다는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을 만큼 부기가 심했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 제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서 준혁은 차마 연희를 따라 속 좋게 기뻐만 할 수가 없었다.
출산 예정일과 가까워질수록 연희의 고생은 배가 아니라 곱절이 되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걸 알지만, 그게 준혁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몸이 무거워진 만큼 서 있는 건 물론이고 앉아있는 것도 버거워했고, 누워있는 것마저 오른쪽 방향이어야만 잠깐이나마 편히 쉴 수 있었다.
고통을 느끼고 고생하는 건 연희인데,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 준혁 역시 연희 못지않은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 준혁은 저들을 찾아온 아이가 무척이나 기쁘고 감사하면서도 엄마를 힘들게 만드는 아이들이 조금은 야속하기도 했다.
“배는 안 고파? 아까 아침도 조금밖에 못 먹었잖아.”
“출출하긴 한데 밥 생각은 안 들어. 으, 밥은 생각만 했는데도 속이 느글거린다.”
줄곧 표정을 구길 줄 모르던 연희의 이마에 처음으로 주름이 생겼다.
31주차가 되면서 그나마 조금씩 먹기 시작한 밥이 여전히 그녀의 속을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고?”
“응. 이거면 될 거 같아. 나 말린 과일 진짜 안 좋아했었는데, 이게 왜 이렇게 입맛에 잘 맞는지 모르겠어. 임신하면 안 먹던 음식도 먹게 된다더니 이런 건가 봐.”
연희가 재잘거리면서도 오물거리는 걸 쉬지 않았다.
연희의 걱정에 속이 시끄럽다가도 이런 모습을 보며, 준혁은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주무르는 그의 손이 조금 더 부지런해졌을 때였다.
준혁의 핸드폰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준혁은 다리를 주무르던 손 중 한쪽을 뻗어 핸드폰을 쥐었다.
액정 위에 적힌 이름은 모친의 것이었다.
“네, 저예요.”
- 응, 준혁아. 엄마야. 점심은 먹었니?
“아니요, 아직이요.”
- 어머, 아직? 점심 때가 한참 지났는데, 그럼 연희도 아직이야?
“네. 병원 갔다가 조금 전에 들어왔어요.”
- 아 참, 오늘 병원 가는 날이라고 했었지! 병원에서는 뭐래? 애들은 괜찮다고 하니?
“네. 자리도 잘 잡고 건강하다고 하네요.”
- 다행이다, 정말. 연희는. 연희는 괜찮고?
연희의 상태를 묻는 질문에 준혁이 다시금 연희를 흘끔 보았다.
눈을 댕그랗게 뜬 그녀가 오물거리는 입술로 ‘어머님이셔?’하고 물어왔다.
준혁은 연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은하를 향해 대답했다.
“연희는 늘 괜찮다고 해요. 제 눈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 그치. 괜찮을 리가 없지. 아휴, 하나 품고 있기도 힘든데 둘씩이나 품으려니 얼마나 힘들겠어. 준혁아, 혹시 연희 옆에 있니?
“네. 바꿔드릴까요?”
- 연희가 괜찮다고 하면 그래 줄래?
핸드폰 너머에서 조심성 다분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준혁은 재차 연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