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77)화 (77/80)

외전 8화.

저녁이 깊어가는 시각.

이른 아침 외출을 한 준혁이 돌아왔다.

막 2층 침실로 들어온 준혁이 지난밤보다 한결 밝아진 얼굴로 연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깨를 끌어안는 손길엔 스스럼이 없었다.

연희는 익숙하게 그의 품으로 안겼다.

“잘 다녀왔어?”

“응.”

“어머님이랑 좋은 시간 보냈고?”

“응. 네 안부 물으셔서 너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렸어.”

“잘했네. 다음엔 나도 같이 뵙자.”

연희의 말에 준혁이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곤 연희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뭐가?”

“나랑 같이 엄마 만나는 거…….”

준혁이 편하지 못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연희는 입술을 일자로 늘어뜨렸다.

그가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제 마음에 그의 가족들로 인한 상처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터였다.

아니라곤 할 수 없었다.

난도질당한 가슴이 너무 아파서, 준혁까지 원망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젠 괜찮았다.

상처의 크기로 따지면 오히려 저보단 준혁의 마음이 더 성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준혁의 마음에 남은 흉터는 전부 하나같이 자신의 손으로 새긴 것이었다.

그럼에도 제 곁을 지키고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이 눈앞의 남자인데.

이 남자를 위해 자신이 하지 못할 일이랄 게 과연 무엇이 있을까.

연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널 낳아주신 분이잖아.”

연희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를 낳아주신 분.

그 정도 설명만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은하는 제게 상처를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준혁을 놓아달라고 했을 때도 제 조건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망가져 가는 아들을 걱정한 엄마의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더욱이 그의 부친이 남긴 상처까지도 대신해서 사과하지 않았던가.

연희는 기회가 된다면 은하와 웃으며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이제 겨우 한발 내디뎠을 뿐이었다.

더는 겁내며 뒷걸음질 치고 싶지도, 어렵게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젠 준혁에게도 이야기해야 했다.

오늘 자신이 보낸 하루에 대하여.

“준혁아,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할 말?”

“응.”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하게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준혁은 퍽 긴장한 얼굴이었다.

연희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준혁의 팔을 당겨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 엄마랑 최 회장님 만나 뵙고 왔어.”

고작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준혁의 표정이 단박에 굳어버렸다.

연희는 서둘러 말을 보태었다.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없었어.”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미리 말했으면 나도 같이 갔을 텐데.”

“너 나가고 나서 만나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혼자 간 거 아닌데, 뭐. 걱정할 만한 일도 없었고.”

그의 불안을 덜어내기 위해 연희가 쉼 없이 노력했지만, 준혁은 좀처럼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연희는 펴질 줄 모르는 준혁의 미간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곤 힘을 주었다.

“인상 쓰지 마.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 괜찮아?”

“응. 다녀오길 잘한 거 같아. 나 마음이 되게 많이 편안해졌어.”

“연희야. 혹시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연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회장님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어제 너랑 한 대화 때문이 맞았어. 마음이 자꾸 불편했거든. 근데 진짜야. 나 이제 정말 괜찮아질 수 있을 것 같아.”

괜찮아질 수 있을 거란 희망적인 메시지로 말을 마무리했지만, 준혁에게 들린 말은 지난밤의 일로 마음이 불편했다는 말뿐인 모양이었다.

연희의 손끝이 닿고서야 가까스로 펴졌던 미간이 다시금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연희는 못 말리겠다는 듯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말처럼 많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았어. 그게 윤세라 씨를 향한 죄책감뿐 아니라 나를 향한 죄책감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오늘 회장님을 보고 알게 됐고.”

연희는 내도록 준혁과 맞추고 있던 눈을 피하곤 어딘지 모를 곳을 멀거니 응시했다.

“그동안 나 그 사람이 많이 힘들고 아팠으면 좋겠다고, 줄곧 그렇게 생각했었나 봐.”

“…….”

“너랑 같이 한국 떠나기 전에 너무 속 편해 보였거든. 본인이 저지른 일들은 깡그리 잊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윤세라 씨에 대한 기억만 안은 채로, 윤세라 씨한테만 죄책감을 가진 채로 나머지 기억들은 전부 잊었다는 게 사실 너무 화가 났었는데…….”

“…….”

“내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셨어.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까, 신기하게도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하더라.”

이 말을 하는 동안에는 차마 준혁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시종일관 자신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남자를 곁에 두고 그런 마음밖에 갖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 진짜 옹졸하지.”

연희는 부끄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줄곧 말이 없던 준혁이 제법 단호한 투로 대답했다.

“아니.”

어찌나 가차 없이 대답하던지, 연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준혁을 보았다.

준혁의 얼굴로 어느새 불안한 기색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정확히 알 수 없는 확고한 감정만이 실려 있었다.

“그 사람 때문에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나는 그분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던 여전히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준혁다운 말이었다.

그래서 연희는 푸스스 웃음이 났다.

“응. 나도 그 사람 용서 못 할 것 같아. 그래서 그렇게 얘기하고 왔어.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앞으로도 쭉.”

“잘했네. 진짜 잘했다, 연희야.”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준혁이 기특하단 손길로 머리를 흩뜨렸다.

연희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정말 준비하고 준비하던 마지막 말을 고백할 차례였다.

이 말이 하고 싶어서 하루 종일 그의 귀가만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연희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서 나 이제 진짜 다시 시작해보려고. 엄마, 아빠 밑으로 호적 옮기기로 했어. 이젠 신연희 말고 윤세연으로 다시 시작할 거야, 나.”

숙희와 관련한 말에는 흔쾌히 말을 잇던 준혁이 이번만큼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연희는 더욱 선명하게 미소를 감아올렸다.

제 생각에 대해 조금도 숨기지 않아야, 그가 지금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신연희라는 이름에 너랑 같이 쌓아온 추억이 너무 많아서, 너랑 상의하고 결정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연희야.”

“근데 왠지 너라면 내 뜻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줄 것 같아서.”

연희는 준혁에게 잡혀있던 손을 빼내어 반대로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곤 그 결정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를 떠올렸다.

“내가 신연희가 아니라 윤세연이 되면…….”

“…….”

“그럼 아버님도 나를 조금은 예뻐해 주시지 않을까?”

사실 윤세연이 되겠다고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준혁이었다.

연희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준혁의 피앙세로 윤세라는 가능하지만, 신연희는 안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그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윤세연으로서의 삶을 사는 일에 대해 상의를 하면 백이면 백 말릴 것 같았다.

준혁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럴 남자였다.

신연희가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아 하는 일이라면 두 발 벗고 나서서라도 말릴 사람이었다.

그래서 상의하지 않았다.

“연희야, 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역시나 준혁의 잇새로 예상했던 대답이 새어 나왔다.

연희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한 결정 아니야. 말했잖아. 나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

“진짜 행복해지고 싶어. 불편한 감정 마음 한편에 묻어두고 행복한 거 말고, 진짜 온전한 행복. 어머님 아버님한테도 네 짝으로서 인정받고 싶고.”

그 말을 하는 연희의 표정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준혁은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연희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익숙한 체취가 연희의 코끝을 휘감았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향기이자,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체취.

아무런 걱정 없이 제 남자의 체취를 마음껏 들이켤 수 있는 날이 왔는데, 그런 그를 위해 자신이 하지 못할 일이랄 게 과연 무엇이 있을까.

물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이 아직도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적어도 이 밤을 또 너와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거로 오늘 밤 역시 제법 많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행복이 오늘 밤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오래도록 이어질 거란 믿음이 너와 내 마음속에 스며있을 테니, 어쩌면 훨씬 더 많이 행복한 시간 속을 머무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 아닐까.

연희는 준혁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푸르곤 눈을 맞추었다.

그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백했다.

“사랑해, 준혁아.”

벅찬 감정 속을 헤매고 있는 듯, 준혁은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의 대답을 돌려받고자 고백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연희는 기쁜 마음으로 다시 준혁을 끌어안았다.

오늘처럼 행복한 밤이 있었을까.

아니, 단언컨대 이렇게까지 행복한 밤은 처음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온전히 기쁘기만, 행복하기만 한, 설레기만 한 밤이었다.

그래서 이 밤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쯤 자신을 내려보고 있을 신께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싶었다.

제 앞에 놓인 장애물이 수천, 수백 개라고 하더라도, 바라건대 지금 잡고 있는 이 남자의 손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부디 신께서 돌보아 달라고.

이제야 겨우 행복할 준비가 된 우리 두 사람을, 죽는 그 날까지 지켜봐 달라고.

연희의 입가로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그 행복한 웃음소리를 한참이나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준혁이 연희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곤 속삭였다.

사랑해, 연희야. 사랑해. 사랑한다. 정말 미치도록 사랑해.

서로를 향한 고백처럼 사랑이 충만한 밤.

그 밤 아래 준혁과 연희가 있었다.

<다정한 집착>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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