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76)화 (76/80)

외전 7화.

숙희가 누워있는 침대 쪽이었다.

그 위에 누워있는 숙희를 눈에 담은 순간, 연희의 속눈썹이 격렬하게 나부꼈다.

연희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한쪽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내도록 미동도 하지 않던 숙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뿐일까.

도대체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모를 정도로 얼굴이 흠뻑 젖어있었다.

마치 제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는 듯이.

깊은 회한에 젖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

하고 싶은 말로 가득하던 입 안이 바싹 메마르다 못해 텁텁하게 느껴졌다.

연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처음 병실을 찾았을 때와 같이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울고 있는 숙희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이 꿈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울고 있는 걸까.

어째서…….

최숙희의 기억 속에 신연희는. 아니, 윤세연은 없는데.

윤세라만 기억하고 있으면서 왜 자신을 보고 이렇게나 후회 가득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까.

연희가 혼란에 휩싸인 얼굴로 숙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 증상이 심해지다가도 본인의 정신으로 돌아오곤 한다고 했는데…….

설마 지금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을 향한 죄책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와중에도 얼굴이 흠뻑 젖도록 울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심장이 거칠게 뛰어댔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머릿속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잠깐도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날뛰었다.

혼란의 연속이었다.

감정의 정점을 찍도록 만든 건, 곧이어 연희의 눈동자에 비친 누군가의 손이었다.

거죽만 남아 뼈마디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숙희의 손이 미약하게나마 움직이고 있었다.

손끝을 겨우 까딱이는 정도이던 움직임이 시간이 흐를 때마다 조금씩 커져갔다.

한 마디를 겨우 움직이는가 싶더니, 손가락을 좌우로 움직였고, 이내 손끝이 자신을 가리켰다.

그 모든 움직임들이 꼭 자신의 손길을 바라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 달라고.

한 번이어도 좋으니, 손을 잡아줄 수는 없겠느냐고.

요구 섞인 말은 없었지만, 연희는 알 것만 같았다.

숙희가 지금 제게 바라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걸 깨달은 순간,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생각들이 단번에 자취를 감추었고, 혼란이 잠들었다.

그리고 제 마음이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연희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서야 제게 용서를 바라시는 걸까요.”

“…….”

“제가 회장님을 용서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연희가 조금쯤 허탈한 듯 웃었다.

분명 숙희의 대답을 바랐다.

왜 자신을 버렸는지에 대해서.

그게 핑계에 불과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슨 말이든 듣고 싶었다.

그런데 제게 손을 뻗는 숙희를 보고 나니, 그마저도 철저한 착각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내내 회장님이 불행하길 바랐나 봐요.”

“…….”

“날 그렇게까지 힘들게 만들어 놓고, 회장님은 겨우 윤세라 씨에 대한 죄책감만 안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회장님이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나 봐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울렸다.

연희의 눈매를 타고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제 사람을 송두리째 뒤흔든 거로도 모자라, 또다시 자신을 죽이려고 한 여자였으니.

원망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게 이상할 일이었다.

그런데 바보처럼 원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숙희의 생각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어서, 그저 묻어둔 거에 불과할지언정 숙희와 관련한 생각은 그게 무엇이든 다 지워냈다고 믿었다.

간혹 어쩔 수 없이 떠올려야만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외엔 숙희의 생각을 하지 않고 제 일상을 충실히 즐기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던 거다.

매분 매초, 아니라고 합리화하며 숙희와 관련한 일에, 숙희를 향한 감정에 얽매여있었던 거였다.

그걸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숙희의 손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노인의 손을 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통쾌한 감정 같기도, 허탈한 감정인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 정의를 내릴 수가 없는데, 확실한 건 숙희의 손을 보고서야 지난 몇 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감정이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잡지 않을 거예요.”

제게 내민 손을 잡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용서할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그 마음은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고 해도 절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숙희의 손을 잡지 않는 것도, 용서하지 않는 것도 전부 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숙희가 제게 손을 내밀어야, 제게 용서를 구해야만.

그래야만 비로소 제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그 기회가 이제야 겨우 제게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도……, 회장님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연희는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숙희의 손이 간절하게 바르작거릴수록 더욱 단호하게 멀어졌다.

그때마다 결국 제 손으로 숙희에게 벌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희열과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옹졸함에 허탈한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밀려왔다.

그러나 더는 후회할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제 마음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딱 그 정도에서 그치고 싶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연희는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병실 문까지 거리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에 다다라서야 다시 한번 숙희를 보았다.

숙희가 고통에 찬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녀가 원망스럽다고는 하나, 그 모습을 보는 게 썩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이제는 정말 털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이곳으로 향하기 직전 연희가 그토록 바라던 확신만큼은 가슴속에 한가득 들어찼다.

연희는 손목에 찬 시계를 살폈다.

간호사가 고지했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있는 게 보였다.

뒤를 살피자, 세로로 길게 이어진 창을 통해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는 간호사가 보였다.

이제 정말 숙희와의 길고 긴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연희는 어깨에서 반쯤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맸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입술을 떼었다.

“어서 쾌차하시라는 말이나 이만하면 충분하니 편안해지셔도 될 것 같단 말은 못 할 것 같아요.”

“…….”

“난 여전히 당신이 끔찍하게 무섭고, 그날의 악몽에서 잠깐도 벗어나지 못할 만큼 당신이 밉거든요.”

“…….”

“근데 그것도 다 털어낼 거예요, 이제. 그리고 더 이상은 당신이 나만큼 불행하길 바라지도 않을 거예요. 그 생각에 묶여있는 동안엔, 어떻게도 행복해질 수 없을 테니까.”

말을 뱉을 때마다 가슴이 거칠게 쿵쿵 뛰었다. 그리고 머릿속 가득, 준혁의 얼굴이 차올랐다.

오로지 자신만을 향하는 그의 환한 미소가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보고 싶었다, 그가.

어서 빨리 달려가고 싶었다, 그에게.

“보란 듯이 행복해질 거예요. 회장님이 멋대로 앗아가려고 했던 내 인생. 죽는 그 날까지 분에 넘치게 행복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 거예요.”

“…….”

“안녕히 계세요. 이게 정말 마지막이에요.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니까요.”

그게 마지막이었다.

연희는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 순간에 등 뒤에서 쇠가 부딪치며 나는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문을 열자 곤란한 얼굴을 하던 간호사가 예의상의 묵례를 하더니 병실을 지키고 있던 보호사에게 눈짓을 하는 게 보였다.

연희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유정이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을 향해 다리를 뻗었다.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괴로움에 찬 울분이 미처 닫히지 않은 병실 문 틈새로 새어 나왔지만, 연희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할 때였다.

오롯이 자신 하나만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곁으로.

이제야 겨우 온전해진 마음으로, 너무 늦었겠지만 이제라도 자신이 그들을 품어줄 때였다.

***

성북동 RM 일가 저택으로 향하는 차 안.

유정은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연희를 조금쯤 불안한 눈으로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번으로 벌써 몇 번째 살피는 것일까.

분명 육안으로 보기엔 숙희를 만나러 가기 직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숙희를 만나고 돌아온 연희는 무언가 복잡해 보이기도,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딸아이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확신할 수가 없어, 선뜻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다.

말을 고르고 고르며 고민하길 한참.

내도록 창밖만 보고 있던 연희가 별안간 유정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엄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유정이 퍽 긴장한 얼굴로 연희를 보았다.

딸아이가 할 말이란 게 무엇일지.

혹시나 숙희와 관련한 일은 아닐지.

이야기를 듣기도 전부터 떠오르는 경우의 수에 유정은 입술이 바짝 마르다 못해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딸아이가 무어라 말을 건네왔다.

“지난번에 엄마가 하셨던 말이요.”

“내가, 했던 말? 어떤 말을 말하는 거야, 연희야?”

유정의 대답은 지나치리만치 조심성이 가득했다.

그제야 연희는 유정이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돌보겠다고 마음먹은 게 얼마나 지났다고 바보처럼 간과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해했던 모친이었다.

그런데 모친의 마음을 돌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 감정을 추스르기에만 급급했다니.

유정을 향한 미안함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지만, 연희는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정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까지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말일지도 몰랐다.

그 말을 전하는 것으로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호적, 합치는 문제 말이에요.”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자꾸만 연정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그때마다 연희는 생각했다.

명호와 유정의 아래로 제 이름을 옮긴다고 해서 연정이 제 마음속에서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그 생각을 되뇐다고 마음이 완벽하게 편안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위로는 되었다.

연희는 연정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살아있었더라면, 무엇을 가장 바랐을지.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같았다.

자신의 행복.

‘네가 행복한 삶을 살아. 뭘 하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한 선택을 하고 네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을.’

‘…….’

‘엄만 연희, 네가 꼭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엄마는 언제나 응원할게.’

사경을 헤매던 순간에도 자신의 행복을 빌기 위해 의식을 붙잡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제게 바랄 것이 또 무어가 있을까.

분명 신연희의 행복한 인생을, 연정이라면 그 한 가지만 간절히 바랄 것이 분명했다.

“…….”

잦아든 듯했던 연희의 눈매로 물기가 차올랐다. 그 모습에 금세 당황한 유정이 연희의 손을 붙잡았다.

“연희야, 그 얘기는……. 엄만, 정말 너한테 부담 주려고 한 말이 아니야. 아직 네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엄마랑 아빠는 더 기다릴 수 있어. 그러니까…….”

걱정이 한껏 배 있는 목소리가 연희를 위로하고, 배려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연희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엄마. 그렇게 할게요. 저를 위해서도, 모두를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연희야…….”

“이젠 정말 행복해지고 싶어요. 신연희로 겪었던 아픈 일들 다 잊고, 잘살아 보고 싶어요.”

연희는 그 말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거짓 하나 보태지 않은 진심이었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상처투성이 신연희가 아닌, 사랑으로 가득한 윤세연으로.

모두를 지켜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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