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75)화 (75/80)

외전 6화.

“보시다시피 지금 환자분 상태가 크게 좋지 못해서요. 10분 이상 면회는 힘들 것 같아요.”

품에 끌어안은 차트를 살피던 간호사가 제법 강건한 투로 말했다.

연희는 간호사에게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한 곳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간호사의 인기척을 느끼고 나서였다.

그제야 연희는 간호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알겠습니다.”

연희의 대답을 듣고서야 간호사가 병실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열린 틈으로 보초 서듯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장정의 보호사가 둘이나 보였다.

자그마한 소란이라도 일었다간 당장 병실로 튀어 들어올 기세였다.

연희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건 병실 한쪽 벽에 붙어있는 침대 위였다.

장정의 보호사가 둘씩이나 병실 앞을 지키고 서 있기엔, 침대 위에 누워있는 노인의 몰골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언제 다듬었는지 추측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풀어헤쳐진 머리카락과 반쯤 감긴 눈꺼풀.

그리고 죽은 자의 것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 같은 눈동자까지.

연희는 작게 벌어진 입술을 도무지 다물 수가 없었다.

꿈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처참한 몰골도 몰골이었지만, 숙희의 팔다리가 침대와 연결된 족쇄에 묶여있었다.

숙희는 그 꼴을 한 채로 천장만 응시한 채 더디게도 눈을 깜박였다.

그런 숙희를 제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연희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잠깐씩 보이는 숙희의 눈동자로 과거의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카리스마나 독기랄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빛을 잃어 암흑뿐인 세상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만을 간신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떠한 희망도, 바람도 없이 숨을 쉬고 있지만 정말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것들을 눈에 담고 나서야, 연희는 이곳으로 향하는 길 유정이 했던 말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연희야, 엄마는 아무래도 네가 그 사람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이라도 차 돌리자. 응? 너한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니고 병원을 간다고 하더라도 면회가 될지 안 될지도 장담할 수 없어.’

‘얼마나 상태가 안 좋은 건데요?’

‘연희야…….’

‘잠깐도 만날 수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거예요?’

유정은 마지막 제 질문에 선뜻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마저도 내도록 맞추고 있던 시선을 어긋낸 채였다.

‘나도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어서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치매 증상이 심해졌다가 다시 본인 정신으로 돌아온다고 했어. 그런데…….’

‘…….’

‘그런데 본인 정신으로 돌아왔을 땐 자꾸 세라가 보인다면서 자해를 하고 난동을 피운다고 그러더라…….’

그 말에 연희는 그저 고개를 담담히 끄덕이기만 했었다.

그게 이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연희는 다시금 숙희를 바라보았다.

지금 숙희의 모습은 절대 면회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팔다리가 묶여있는 것 자체가 면회 직전까지 난동을 부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고, 죽은 사람의 것처럼 빛을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는 난동의 대가로 맞은 약물의 결과물일 것이다.

숙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경악스러운 감정이 연달아 밀려왔다.

이 정도로 심각한 상태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유정의 말처럼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밀려왔다.

거창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제 속에 담아둔 말을 꺼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연희에게 숙희의 마지막은 어린아이의 무구한 모습으로 자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던 모습이었으니까.

그때는 그런 사람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할까 하는 마음에 그대로 뒤돌아섰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상태 여부와는 관계없이 떠오르는 말은 뭐든 속에서 꺼내어 내뱉겠단 생각이었다.

그렇게 제 속에서 곪고 곪아버린 감정을 전부 숙희에게 버려버리고, 한결 말끔해진 모습으로 준혁을 마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라 하고 싶은 말은커녕 머릿속이 백지장 같기만 했다.

연희는 제법 오래 미동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소비했다. 그랬다는 걸 인지하기 무섭게 아차 하며 정신을 차렸다.

숙희가 도저히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는 하나, 오늘이 지나고 나면 두 번 다시 숙희를 찾지 않겠다 다짐하고 온 길이었다.

그러니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연희는 발끝에 힘을 주곤 천천히 숙희의 앞으로 다가갔다.

유난히도 고요한 병실로 구두 굽 소리가 청아하게 뻗어 나갔다.

이토록 선명하게 소리가 울리는데도 숙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연희는 숙희의 바로 앞까지 겨우 한 걸음을 남겨두고서야 자리에 멈추었다.

가까이에서 보는 숙희의 모습은 더욱이 끔찍했다.

도대체 한국을 떠났던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마지막으로 보았던 숙희의 모습이 무척이나 온전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연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괜히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심호흡을 두어 번이나 하고 나서야 겨우 입술을 뗄 수 있었다.

“……잘 지내, 셨어요.”

길지 않은 말인데도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한심스러운 건, 고작 뱉은 말이 안부 인사라는 거였다.

잘 지냈느냐고?

숙희가 잘 지내지 못했다는 건 보이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라니.

이 자리는 유정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가진 자리였다.

더욱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연희는 재차 심호흡했다.

더는 바보처럼 굴어선 안 되었다.

그 생각과 동시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연희의 눈동자가 현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맑게 개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입술이 조금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잘 지내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회장님이 벌인 그 끔찍한 일의 대가로 윤세라 씨 하나만 기억하는 건 정말 끝까지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제 기억 속에 회장님의 마지막 모습이 그런 무책임한 모습이라, 계속 그렇게 살고 계실 줄 알았는데……. 그런데 계속 벌을 받고 계셨네요.”

“…….”

“여전히 저는 기억 못 하실 테지만, 적어도 윤세라 씨를 죽인 일에 대한 벌은 치르고 계셨던 것 같아요.”

겨우 말을 뱉은 연희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녀의 마음속에서 연일 들끓었지만, 결국엔 묻어두어야만 했던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을 가쁘게 만들고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렇게나 힘들고 힘든 말을, 연희는 끝끝내 입 안에 담았고 마지막으로 숙희를 보았던 때와는 달리 용기를 내었다.

“왜 하필 저여야 했던 건가요.”

“…….”

“윤세라와 윤세연은 같은 날 같은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는데, 왜 하나를 버려야 했던 거고, 왜 하필 그게 저여야 했었나요.”

말을 하면서도, 그리고 말을 뱉은 지금까지도 연희는 꼿꼿하게 세운 허리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토록 묻고 싶은 말이었다.

자신이 기대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더라도 무슨 말이라든 듣고 싶어서.

그게 핑계라고 할지언정 자신을 버려야만 했던 이유를 들어야만 할 것 같아서 늘 묻고 싶었지만 결국 삼켜내야만 했던 말이었다.

지금이라고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뱉어내기라도 하고 싶었다.

어차피 돌아올 대답은 없는데, 질문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끝내 이 말을 꺼내지 못한 걸, 연희는 지난 몇 년간 두고두고 후회했다.

애초에 저 혼자 삭인다고 하여 지워낼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제 속을 곪게 만든 그 일을 어떻게 혼자 치유할 수가 있었을까.

그걸 알고 자신을 돕기 위해 준혁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건 준혁이 도와준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의 당사자는 최숙희와 신연희였으니까.

곪아 터진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르는 건 적어도 숙희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지난밤 준혁과의 대화로 연희는 그 사실을 처절하게도 깨달아야 했다.

더불어 바보처럼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그동안 준혁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까지도.

그래서 오늘은 제 안에 담아두었던 모든 말들을 남김없이 쏟아낼 작정이었다.

그게 설령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한 꼴을 한 숙희를 상대로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다 같이 행복했을 수도 있잖아요. 꼭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았으면 더 행복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왜 꼭……!”

“…….”

“……왜, 언니랑 저, 둘 중에 하나는 죽었어야만 했던 건데요.”

연희가 이를 사리물었다.

흥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불시에 들이닥친 감정까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눈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빼곡히 들어찼다.

맞물린 이로 더욱 힘을 주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최숙희의 앞이라면,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호흡을 고르는 시간이 짧게 지나갔다.

그때 고요하던 병실 안으로 크지 않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희는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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