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74)화 (74/80)
  • 외전 5화.

    연희는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유정이 식사를 권했지만, 시차 적응을 핑계로 조금 있다 먹겠다고 말해 둔 상황이었다.

    마침 준혁도 그의 모친인 은하를 만나러 나간 참이라, 식사를 거절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준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식사는 힘들었을 것 같다.

    무엇을 먹든 먹자마자 얹힐 것 같은 컨디션이었으니까.

    “하아…….”

    연희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밤 준혁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운 탓에 금세 잠이 들긴 했지만, 잠에서 깨어나 지금까지 잠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자신이 하고 있을 생각에 대해서.

    그가 눈치챌 수 없도록 딴에는 무던히 노력했으니, 제 입장에선 준혁은 추호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근데 그토록 노력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전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 마음에서 잠깐도 떠날 줄을 모르는 생각과 감정들에 대해서.

    어제 그의 이야기를 듣고도 아닐 거란 부정은 할 수가 없었다.

    연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느리게 끔벅이는 눈꺼풀 안으로 과거에 젖은 눈동자가 탁하게 풀려 있었다.

    줄곧 힘들었다.

    힘들어서 한국을 떠난 것이었지만, 한국을 떠나고도 힘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근래 들어서는 한국을 떠나 효과를 서서히 느끼고는 있었다.

    그래 봐야 아주 잠깐 그날 일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준혁과 함께하며 못 견디게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야 겨우 괴로운 감정을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견디면 지금보다 더 많이 편해지고, 괜찮아질 거라고 여겼다.

    앞으로는 준혁과 행복할 일들만 가득할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지난밤의 일로 그간의 자신이 무척이나 무책임하고 안일했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힘들고 괴로우면서도 그 감정을 숨긴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건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준혁이 듣는다면 섭섭해할지 몰라도, 언제 끝날지 모를 기약도 없는 이 고통을 준혁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준혁이 힘들길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를 힘들게 만든 꼴밖에 되지 않았다.

    지난밤 준혁이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하게 귀를 울렸다.

    ‘윤세라 씨를 그렇게 만든 건 네가 아니잖아, 연희야. 무엇보다 네 의지는 한 톨도 없이 너는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의 욕심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이미 지나치게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야 했어.’

    ‘…….’

    ‘나는 네가 더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고,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어.’

    그 말끝에 그가 작게 내쉬었던 한숨의 농도까지도 선명히 기억했다.

    그의 잇새로 나온 건 한숨이었지만, 그 한숨에 담긴 건 자신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괴로움이었다.

    자신이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묵인한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듯.

    그는 그토록 무거운 한숨을 마음 편히 내쉬지도 못했다.

    그것까지도 자신을 배려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배려가 거기까지였다면 지금처럼 억장이 무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뜸을 들인 건 고작해야 1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사이 그는 눈동자에 짙게 배 있던 감정을 말끔히 지우곤 여느 때처럼 다정한 눈길을 제게 보내왔다.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을 떨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면, 그럼 나는 또 지금까지처럼 네 곁을 지키면서 네가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고 그렇게 살 거야.’

    ‘…….’

    ‘네가 안 되겠다고 하면, 네 어깨에 실린 그 죄책감까지 내가 나눠 가질게. 그것까지도 같이하자, 우리.’

    그 말을 하던 순간의 준혁의 표정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잔잔히 웃고 있었다.

    제 어깨에 실린 죄책감까지도 나누자는 말을 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 순간까지도 웃을 수가 있던 걸까.

    기쁨이 담긴 웃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어떻게.

    ‘그러니까 너 혼자만 속앓이하지 마. 너한텐 내가 있잖아.’

    ‘…….’

    ‘힘든 거든 좋은 거든…….’

    ‘…….’

    ‘우리 같이하자, 연희야.’

    기어이 설움을 참지 못하게 했던 준혁의 말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며 연희는 눈을 꾹 감았다.

    준혁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제 아픔을 그와 나누어야 하는 걸까? 그가 그걸 바랐으니까?

    “…….”

    아니. 죽어도 그럴 수 없었다.

    준혁의 가슴에 상처를 준 건 바보처럼 몇 번이고 그를 떠나려 했던 지난 일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이상은 더 이상 그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신연희가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라고, 꼭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지만, 연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미 지나칠 정도로 많은 사랑을 주었고, 그로 인해 넘치도록 행복한 나날을 보내왔다.

    그러니 이젠 자신의 차례였다.

    그에게 받기만 했던 지난날의 당연한 사랑들을, 이젠 자신이 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연희는 한층 단단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연희야, 아무래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가자, 응? 아빠가 아시면 많이 화내실 거야. 그러니까…….”

    병원 로비로 들어서던 연희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탓에 종종걸음으로 연희를 뒤따르던 유정까지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연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그러곤 유정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약속드려요.”

    “……연희야.”

    “그냥, 이렇게 해야 마음이 좀 편안해질 것 같아서 그래요. 이렇게 해야…….”

    말끝을 흐린 연희가 제법 굳건한 얼굴로 유정을 응시했다.

    연희의 눈동자가 드물게 총기를 가득 띠었지만, 유정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연희는 아주 잠깐 입술을 꾹 맞붙였다.

    모친이 이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정과 함께 찾은 곳이 숙희가 입원해있는 폐쇄 병동이었으니, 유정의 입장에선 자신을 만류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유정의 간절한 만류를 꺾어서라도 숙희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해야 준혁이랑 정말 온전하게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렇게 해서라도 준혁을 행복하게만 해주고 싶었다.

    그게 연희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숙희를 제 발로 찾아온 이유이자, 살면서 처음으로 간절하게 바란 소원이었다.

    ***

    간절한 고백 이후, 다행히 유정은 더 이상 연희를 만류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만 온전하게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데 그 말을 듣고 어떻게 더 말릴 수 있었을까.

    유정에겐 연희가 어떤 방면으로도 아픈 손가락이기에 더욱 그랬다.

    유정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는 연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연희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면회 신청을 하고, 면회실에서는 만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연희에게선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작 자신은 이토록 두려운데.

    이렇다 할 규칙성도 없이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한낮 노인에 불과한 최 회장이 혹 연희에게 해를 입히기라도 할까 봐 손이 벌벌 떨릴 지경인데.

    그런데 연희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무척이나 결연한 모습으로 최 회장을 만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 했던 말처럼, 코앞에 드리운 행복을 손에 쥐기 위해 마지막 관문을 눈앞에 둔 것처럼.

    지금 연희의 표정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런 의미만을 가득 담고 있어서, 차마 유정은 마지막으로라도 연희를 말릴 수가 없었다.

    딸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연희보다도 자신이 더 간절하게 염원하고 갈망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랬으니 몇 년이 넘도록 외국만을 고집하며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 딸애를 원망도 하지 않은 것일 테지.

    시간이 지날 때마다 그리움이 겹겹이 쌓여갔지만, 그 마음을 단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참지 못한 감정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을지언정 연희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면 몇 번이고 했을 것이다.

    연희와 짧은 통화를 나눌 때마다 무던히도 네가 그립다고 고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나 딸아이의 행복을 간절하게 바랐기 때문이었다.

    연희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사무치는 그리움을 평생토록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그리움에 사무치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을지라도 연희를 위해서라면 웃으며 견뎌냈을 것이다.

    그런데 연희가 숙희를 만나겠다고 한 건 예상도 하지 못한 일이자, 유정으로선 도저히 허락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제 큰딸을 잡아먹은 노인이었다.

    그것도 저 몰래 버린 또 다른 딸아이를 죽이기 위해 큰아이를 희생시킨 거였다.

    그런데 아무리 정신없는 노인네라고는 하나 어떻게 마음 편히 딸아이를 그런 괴물에게로 보낼 수가 있을까.

    숙희와의 면회를 기다리는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유정의 가슴이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감정의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막 연희를 향해 한 걸음 내딛던 찰나였다.

    빈틈없이 맞물려있던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간호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숙희 씨 보호자분. 지금 병실로 가시면 됩니다.”

    그러곤 듣고 싶지 않던 메시지만을 남기곤 등을 돌렸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정은 잠시 멈추었던 발끝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연희가 다리를 움직이려던 것도 멈추곤 유정을 보았다.

    “엄만 여기 계세요. 혼자 다녀올게요.”

    “연희야, 그건 안돼. 절대로……!”

    “간호사분도 같이 가시잖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 여기 계세요. 어쩌면…….”

    “…….”

    “어쩌면 저보단 엄마가 더 마주하기 힘든 사람일 테니까요.”

    생각지 못한 연희의 속 깊은 이야기에 유정은 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그 탓에 연희가 점점 멀어지다 못해 이내 시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건 너무 늦게 알아채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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