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73)화 (73/80)
  • 외전 4화.

    “내가 그 시간을 겪으며 얻은 게 있다면…….”

    “…….”

    “미워하는 감정을 내려놓고 나니까, 내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는 거야.”

    순간 연희의 어깨가 바르작 떨렸다.

    준혁의 손끝으로 잘은 진동이 전해졌다.

    그게 그의 마음을 퍽 불편하게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평온을 얻기 위해 한국을 떠났지만, 연희는 꽤 오랫동안이나 평온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최근엔 많이 편해진 모습이었다.

    적어도 한국에 다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침실로 올라오기 직전 서재로 향하던 그녀의 부친이 나누던 통화가 이제야 굳게 닫힌 듯했던 그녀 마음속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리고 말았다.

    “아까 아버님이 받은 전화가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거지?”

    “…….”

    “최 회장님 이야기인 거 같더라.”

    준혁은 나직이 물었다.

    연희의 선택을 따라 한국을 떠났고, 또 이렇게 잠시나마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지금껏 준혁은 단 한 번도 연희에게 최 회장과 관련한 일을, 또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겪었던 일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의도한 일이었다.

    굳이 자신이 들먹이지 않아도 연희는 이미 지나칠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누가 벌인 일든 결론은 연희를 대신해 친언니인 세라가 죽은 것이니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어떤 식으로든 연희가 그날 그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가능하다면 그날의 일을 영영 잊을 수 있도록 돕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우 잊은 그 일로 다시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이제는 그저 잊을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너한테 계속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최 회장님 소식 알고 있었어. 계속 정신이 왔다 갔다 하신다고 하더라.”

    준혁은 그간 혼자만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처음 최 회장의 소식을 알게 된 건 모친인 유정을 통해서였다.

    -연희는, 조금 괜찮은 것 같니?

    ‘아직은 다 털어내지 못한 것 같아요. 가끔 잠도 설치고……. 생각보다 자주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더라고요.’

    -딱해서 어떡해…….

    ‘혹시 소식 알고 계신 거 있으세요?’

    그 질문 끝에 유정은 그렇게 대답했다.

    -나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들리는 소문에는 많이 힘든 시간 보내고 계신 것 같았어. 치매가 점점 심해지고는 계시지만, 완전히 정신은 다 놓지 않으신 것 같더라고. 치매 증상이 심해지면 애가 되셨다가 정신 돌아오시면 죄책감에 많이, 힘들어하시나 봐…….

    그 말을 듣고도 동정심은 일지 않았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뿐이었고, 법의 심판을 대신한 죗값을 치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라도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면 다행으로 여길 일이었다.

    냉정하다면 냉정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준혁은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같은 생각을 할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연희가 무사히 살아있기에 그 정도에서 그칠 수 있는 냉정함이었다.

    만약 그날 신변의 위협을 받은 것이 연희였다면 준혁은 제 손에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최 회장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연희라면,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처럼 냉정하게 굴지는 못 했을 것이다.

    최 회장을 언급한 순간 또 윤세라를 떠올렸을 것이고, 그녀를 향한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라 했을 터였다.

    결국 지칠 대로 지쳐 그녀가 느끼는 것이 원망인지 죄책감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며 더욱이 강도 높은 악몽에 시달렸을 것이 분명했다.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한 여자가 가당치도 않은 괴로움 속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은 어떤 식으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그 마음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제는 부딪쳐야 할 때란 확신이 강하게 밀려왔다.

    “어떤 날은 치매 증상이 심해져서 어린아이가 되었다가, 어떤 날은 당신 정신으로 돌아와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어.”

    그 말끝에 준혁은 품에 안고 있던 연희를 떼어내곤 조심스레 눈을 맞추었다.

    예상대로 그녀의 눈동자가 혼란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혼란할 것이다, 충분히.

    그녀의 기억 속 최 회장의 마지막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아이가 되어버린 모습일 테니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세라를 향한 제 몫의 죄책감은 물론 최 회장이 지어야 할 죄책감까지 바보처럼 다 짊어지고 있던 거겠지.

    지금껏 그녀가 그런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까지 알은척하고 싶진 않았지만, 준혁은 그것까지도 마다치 않았다.

    이렇게라도 해서 그녀의 마음이 진짜 평온을 찾을 수 있다면 해야 했다.

    “지금껏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은 건.”

    “…….”

    “말을 꺼내 봐야 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만 할 거 같아서였어. 근데 네 마음이 불편한 건 내가 너무 싫거든.”

    준혁은 그동안 혼자만 담아두었던 생각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럴수록 연희의 낯빛이 파리해지는 게 보였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최 회장님은 그때 그 사건 이후로 줄곧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 거야. 의지대로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시간들을 겪고 계시겠지. 근데 난, 그 모든 시간들은 최 회장님께서 자초한 것들이라고 생각해.”

    “…….”

    “윤세라 씨의 죽음도, 최 회장의 죄책감도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야, 연희야.”

    윤세라의 죽음.

    준혁이 금기처럼 생각했던 말이었다.

    역시나 그 말을 들은 연희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런 그녀를 마주하는 게 준혁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꿋꿋하게 버텼다.

    힘들어도 견뎌야 했다.

    그게 지금 연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윤세라 씨를 그렇게 만든 건 네가 아니잖아, 연희야. 무엇보다 네 의지는 한 톨도 없이 너는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의 욕심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이미 지나치게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야 했어.”

    “…….”

    “나는 네가 더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고,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어.”

    지금까지 연희와 함께한 모든 시간 동안 했던 생각이자, 이 순간 그가 간절히도 바라는 바람이었다.

    연희를 향한 준혁의 눈빛이 무척이나 다부졌다. 조금 전 뱉은 말에 거짓은 조금 더 담기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이.

    그러나 다부졌던 눈길로 이내 온기가 한껏 스며들었고, 언제나 연희에게로 향하던 다정한 눈동자로 바뀌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 생각들을 너한테 강요할 수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

    “누구도 너한테 강요할 수 없어. 그게 나라고 하더라도.”

    준혁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이 가득한 눈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을 떨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면, 그럼 나는 또 지금까지처럼 네 곁을 지키면서 네가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고 그렇게 살 거야.”

    “…….”

    “네가 안 되겠다고 하면, 네 어깨에 실린 그 죄책감까지 내가 나눠 가질게. 그것까지도 같이하자, 우리.”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심을, 준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마음으로 전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이제 더 이상 네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게 윤세라든, 최 회장이든. 이젠 네 몫이 아닌 그 죄책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강건히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을 가득 머금은 그녀의 눈을 마주한 순간, 차마 제 마음을 강요할 수가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도대체 언제쯤 연희는 그날의 일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생각을 하면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연희는 신연희였다.

    제 모든 걸 바쳐 사랑한 여자,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평생 지키고 싶은 여자.

    그런 여자가 아직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기다려줘야 하는 게 맞았다.

    분명 연희라면,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신연희라면, 자신을 위해서라도 언젠간 훌훌 털어내고 일어나줄 것이다.

    그 믿음이 있기에, 준혁은 그게 언제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 혼자만 속앓이하지 마. 너한텐 내가 있잖아.”

    그러니 부디 털어내는 그 날까지, 지금까지 그랬듯 제 곁에 있어만 주길.

    준혁은 그 한 가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다.

    “힘든 거든 좋은 거든…….”

    “…….”

    “우리 같이하자, 연희야.”

    그렇게 함께 버티다 보면 언젠가 행복해 마지않은 날이 분명 다가올 것이리라.

    그 생각을 곱씹으며 준혁은 연희를 품에 안았다.

    옅은 흐느낌과 함께 떨리는 어깨가 다른 때보다 더욱 진한 감정을 싣고 있었다.

    그게 자신을 향한 미안함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준혁은 연희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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