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72)화 (72/80)
  • 외전 3화.

    연희는 이상하게도 명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거리 탓에 명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와중에 알아 들은 말은 있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그 말을 하던 순간에 명호가 뒤를 흘끔거렸다.

    자신을 살피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 통화 내용이 담고 있을 의미가 파악이 되었다.

    “여, 연희야. 과일 좀 더 들어. 차는, 더 줄까?”

    당혹감 어린 얼굴로 갑작스레 과일을 권하는 유정의 행동만 보아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최 회장과 관련한 전화일 것이리라.

    “연희야, 이것 좀 먹어 봐. 응?”

    한 차례 과일을 권한 말에 대답이 없자, 유정이 연희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연희가 유정을 보았다.

    유정의 눈동자가 안쓰러울 정도로 거칠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아서, 연희는 뒤늦게나마 유정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네, 엄마. 엄마도 드세요. 진짜 달아요.”

    끝난 듯, 끝나지 않은 문제가 연희의 마음을 다시금 시끄럽게 만들었다.

    ***

    자정이 깊어가는 시각.

    연희는 긴 시간 비행으로 고생을 한 사람 같지 않게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꾸만 명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아른거린 탓이었다.

    상기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자꾸만 서재로 향하던 명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명호의 전화가 숙희와 관련된 것이다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던 순간의 명호의 얼굴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부친의 표정이 모든 걸 다 설명해 주는데 말이 무어 필요할까.

    “하아…….”

    한참을 참았던 한숨이 결국 연희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연신 뒤척이던 거로는 성에 차지 않아 미간을 좁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마를 짚자, 옆자리에서 이불을 걷어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제야 연희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준혁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잠이 안 와?”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준혁이 걱정할 거란 걸 아는데.

    그러니 이렇게까지 복잡한 속을 내색하면 안 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실천으로 옮겨지지가 않았다.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려고 하니 두통까지 밀려왔다.

    그것까지도 내색하고 싶지 않아서 양손에 힘을 주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준혁은 모르게,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감춘 채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감추고 숨겨도 그의 눈에는 다 보인다는 듯, 그가 곧 제 어깨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연희의 몸이 속절없이 준혁의 품으로 딸려갔다.

    “연희야.”

    머리 위로 다정한 준혁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대답을 해 주고 싶은데, 입술을 달싹거릴 힘도 나지 않았다.

    연희는 제 몸을 끌어안은 준혁의 팔을 꼬옥 붙잡았다.

    그게 대답이 대신 된 듯 그의 말이 이어졌다.

    연희는 준혁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아직도 너랑 보내는 하루하루가 꿈만 같아. 너무 행복해서, 내가 정말 너랑 있는 게 맞는 건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을 해.”

    잔잔하게 흘러들어오는 목소리가 가슴을 진하게 울렸다.

    연희는 목에 힘을 주었다. 고개를 들어 준혁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목에 힘을 줄수록 어깨를 끌어안는 준혁의 팔에도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마치 아직은,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는 눈을 맞추지 말자는 듯이.

    “너 없던 시간이 나한테는 죽고 싶을 만큼의 지옥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래도 견디고 버틴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 널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어서였어.”

    언제나 궁금해했지만 듣지 못했던, 신연희가 없던 시절의 정준혁의 이야기가 담담히 흘러나왔다.

    연희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이유가 도통 파악이 되지 않을 만큼.

    궁금해서 은근히 물어볼 때는 언제나 피하기만 하던 그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하필 이렇게나 제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꺼내는 것일까.

    그게 퍽 의아했지만, 그래도 묵묵히 들었다.

    이제 고작 운을 떼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목이 메고 가슴이 저몄다.

    그만큼 아픈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다.

    가슴이 아프더라도, 그것까지 정준혁의 이야기였으니까.

    “근데 아무리 너 만날 날만을 꿈꾸면서 버텨도 죽을 것처럼 힘든 것 어쩔 수 없더라고.”

    “…….”

    “어떤 날은 너만 다시 찾으면 그거로 된 거라고. 절대 널 탓하지 않을 자신 있다고 생각하다가, 또 어떤 날은 널 찾고 나면 몇 날 며칠이고 내 집에 가둬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던 건지, 왜 그래야만 했던 건지 꼭 따지고 물어볼 거라고 생각도 하고.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나를 발견할 때면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고, 그랬어.”

    연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 자로 맞닿은 눈매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랬구나. 나도 너 없는 시간이 무척이나 고통 속이었는데, 너도 그랬어.

    “그렇게 몇 년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어떤 날은 또 그런 생각이 들더라.”

    “…….”

    “이럴 거면 차라리 널 찾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그 말끝에 연희의 속눈썹이 들썩거렸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동자가 혼란하게 흔들렸다.

    잠깐이라도 그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게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원망할 것 같았어. 너를 찾기 위해 내가 힘들었던 그 모든 시간을 너에게 보상받길 원할 것만 같았어.”

    “…….”

    “그래서 너한테 어떤 식으로 뭘 받아야 보상이 될 것 같은지, 그걸 생각해 보니까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

    “…….”

    “그러니까 난 결국, 네가 그리워서 애타게 널 찾으면서도 계속 널 미워했던 거야.”

    “…….”

    “내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널 찾은 이유가 원망할 상대가 필요해서.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어.”

    연희의 입술이 바르르 진동했다.

    우리의 이별이 어쩌면 그에겐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이 처절한 고통 속이었나 보다.

    그가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조금씩 무뎌질 거라고, 자신은 물론 그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기심이란 걸 안다.

    제 마음 편하자고 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견디다 보면 언젠간 분명 그런 날이 올 거라고, 부질없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그런데 아니었구나.

    넌, 줄곧 그렇게나 고통스럽기만 했구나.

    “한동안은 널 찾지 않았던 때가 있었어. 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이 악물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어. 근데, 연희야.”

    “…….”

    “나는 결국 또 너를 찾아 헤맸고, 널 다시 내 곁에 두기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했어.”

    “…….”

    “널 원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널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더 죽도록 힘들어서. 그래서 나는 차라리 널 사랑한 대가로 널 조금도 원망하지 않기로 했어.”

    “…….”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은 살 만하더라.”

    연희는 다시금 목에 힘을 주었다.

    하고자 했던 말이 거기까지인지 그도 더 이상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지 않았다.

    어렵사리 마주한 준혁의 눈동자로 잔잔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표정은 물론 그의 눈동자에도 자신을 향한 원망의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쉽지 않았을 텐데. 너무 어려웠을 텐데.

    그런데 기어이 그 힘든 일을, 그는 해낸 모양이다.

    연희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차마 염치가 없지만,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미안해, 준혁아.”

    “…….”

    “내가, 내가 정말 너무 미안해…….”

    그 말을 하는 연희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있었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온기 가득한 손으로 물기를 닦아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너는 나한테 미안해 할 이유가 없어. 이렇게 지금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넌 잘못한 것도, 나한테 사과를 구해야 할 이유도 없어.”

    “…….”

    “그냥 나는, 그러고 나니까 괜찮아졌어. 다행히 너를 원망하는 마음보단 널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커서 아무런 이유도 따지지 않고 널 사랑하는 게 됐어. 네가 날 그럴 수 있게 한 거야, 연희야.”

    “…….”

    “널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쉬지 않고 이어지는 그의 모든 말들이 자꾸만 연희의 마음을 울렸다.

    오롯이 그 혼자 견뎌낸 시간의 공까지 전부 제게 돌리는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연희는 준혁을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고 다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기꺼이 품을 내어주었다.

    한참을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자신은 괜찮다고, 이젠 아프지 않다고, 그녀의 마음을 위로할 말들을 연신 쏟아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이 조금쯤 잦아들었을 때, 다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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