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71)화 (71/80)
  • 외전 2화.

    ‘아니에요. 그냥 예상 못 했던 말이라, 조금 놀랐나 봐요. 준혁이랑 여행 다니듯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른 생각은 전혀 안 했거든요. 바로 대답 못 한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서 그런 거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조금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머릿속으로 더욱이 많은 고민거리가 밀어닥쳤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일이었다.

    그저 종이 위에 명호와 유정, 그리고 제 이름이 적히는 것이니 호적을 합친다고 해서 제 일상이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연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미 하늘나라로 가고 없었지만, 연정은 언제나 제 마음속에는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사망신고를 하며 연정과 묶여있던 가족관계증명서에도 저 홀로 남게 되었는데, 명호와 유정에게로 이름을 옮기면 제 마음속에서조차 연정이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정과의 통화는 준혁과 상의한 후 구체적인 일정이 잡히며 연락하겠다는 대답과 함께 마무리가 되었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내일이면 준혁과 함께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었다.

    준혁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후에 잡은 일정이었으니 그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뒤숭숭한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연희는 난간에 올려두었던 찻잔을 들어 입가에 기울였다.

    여기에 서서 파도 소리를 듣다 보면, 또 이렇게 차를 마시다 보면 새벽에 깼다가도 다시 잠이 오곤 했는데.

    어쩐지 오늘 밤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인천 국제 공항.

    연희는 준혁과 손을 맞잡곤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고작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아 나왔을 뿐인데, 북적거리는 인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와중에 하나 확실한 건, 생각과는 다르게 기분이 좋다는 거였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설명 못 할 감정들로 복잡하기만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고국 땅을 밟고도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때 빈틈없이 맞붙은 손으로 의미 모를 사인이 전해졌다.

    연희는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고개를 들어 준혁을 보았다.

    그러자 준혁이 눈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연희야, 저기.”

    어딘가를 가리키는 그의 입술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연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준혁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러자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유정의 모습이 보였다.

    연희는 저도 모르게 입매를 한껏 휘어 올렸다.

    “연희야!”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유정이 두 팔 벌려 연희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연희는 그런 유정의 목덜미에 잠깐이나마 코를 묻곤 오랜만에 보는 모친의 체취를 마음껏 들이켰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 엄마는 잘 지냈어. 너희는 컨디션 괜찮아? 한국까지 오느라 너무 고되지. 일단 집으로 가자. 너희 주려고 아침부터 음식 해뒀어. 준혁이도 우선 우리 집으로, 아…….”

    반가운 마음에 횡설수설 말을 뱉던 유정이 느닷없이 말끝을 흐렸다.

    연희는 물론 준혁의 시선까지 유정에게 향했다.

    유정은 잠시간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혁이라고, 불러도 될까? 정 서방이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여러모로 조금 불편할 것 같아서…….”

    그 말을 하는 유정의 얼굴이 아주 잠깐이지만 슬픔에 젖어 들었다.

    그 모습이 연희는 퍽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그런 유정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유정이 준혁에게 ‘정 서방’이라는 호칭을 썼을 땐 언니인 세라를 대신해 자신이 준혁과 결혼했을 시점이었고, 유정으로선 세라가 아닌 자신이 준혁과 결혼했을 거라고는 추호도 알지 못했을 때였다.

    워낙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다 보니 유정의 입장에선 준혁을 정 서방이라고 부르는 게 세라를 추억하게 되는 일이자, 복잡한 생각만 야기하는 일일 수 있었다.

    다행히 준혁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잠깐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준혁의 대답을 듣고서야 유정의 입가로 다시금 환한 미소가 걸렸다.

    “얼른 가자. 아빠도 오늘 급한 일정만 마무리하고 일찍 들어오신다고 했어. 아빠 오시면 같이 저녁 들자.”

    유정은 살가운 손길로 연희에게 팔짱을 꼈다.

    그 탓에 틈 없이 맞닿아 있던 두 사람의 손이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준혁은 흔쾌히 연희의 캐리어까지 챙기며 짐꾼이 되길 자처했다.

    덕분에 연희는 한결 수월하게 유정과 걸음을 나란히 뗄 수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멀지 않은 주차장에 유정이 타고 온 듯 보이는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유정과 연희가 나란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준혁은 제 앞으로 다가온 기사에게 캐리어를 넘겼다.

    조수석에 타기 직전 준혁은 괜스레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다.

    마치 그들의 입국을 환영한다는 듯이.

    준혁은 입꼬리를 휘어 올리곤 차에 올라탔다.

    ***

    밤 아홉 시가 넘어가는 시각.

    성북동 대저택 단지의 골목 사이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RM 일가의 내부 사정은 바깥과는 퍽 달랐다.

    “그래, 외국 생활은 재미들 있었고?”

    명호가 연희와 준혁을 향해 물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다과를 즐기던 연희가 준혁을 대신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부모이긴 하지만, 혹여라도 그가 불편해 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본능처럼 나온 배려였다.

    “네, 좋았어요. 한 달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있고 싶고 그렇더라고요.”

    “그래. 연희, 네가 좋았으면 그거로 됐어. 얼마나 머물렀다 다시 돌아갈 계획인지 물어봐도 되겠니?”

    명호가 너털웃음을 내며 무척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처럼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운 단어 선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외국에 머무르는 동안 보통은 유정과 연락을 하곤 했는데, 간혹 퇴근 시간과 맞물리면 명호와도 짧게나마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때마다 명호는 지금처럼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될지에 대해 양해부터 구하곤 했다.

    딸을 대하는 아빠의 말투라기엔 지나친 배려가 묻어 있었다.

    그게 처음엔 그저 불편하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깨닫게 되었다.

    명호의 화법은 너무나도 길었던 딸과의 공백을 천천히 좁혀가는 그만의 방식이란 걸.

    그걸 이해하고 나니 더 이상 명호의 화법이 불편하지 않았다.

    연희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일주일 정도 계획하긴 했는데, 그렇게 확정한 건 아니고 지내면서 결정하려고요. 어쨌든 일주일 정도는 있을 생각이에요.”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대답을 들은 명호와 유정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뒤늦게 일주일이 제게는 적당한 기간일지 몰라도 두 사람에겐 아닐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든 덧붙여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혹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로 굴리길 한참.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때 내내 침묵을 지키던 준혁이 부드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연희가 보통 이렇게 일정을 정하는데, 늘 그 일정이 딜레이가 되곤 하더라고요. 새로 가는 여행지에 머물 때마다 그랬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는 연희가 말하는 일정은 그냥 듣기만 해요. 어쨌든 저야 짧게 있든 길게 있든 연희가 좋으면 그거로 충분하니까요.”

    “그래? 이번에도 연희 마음이 좀 더 오래 있는 쪽으로 바뀌길 바라 봐야겠네.”

    유정이 서운한 기색을 금세 지우곤 잔잔한 미소를 감아올렸다.

    준혁의 말이 정말 위로가 되어 그런 건 아닐 터였다.

    그것까지도 어쩐지 제게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연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연희는 잠시 고민 끝에 텐션을 한껏 끌어올린 목소리를 내었다.

    “생각해 보니까 정말 그래요. 준혁이 말처럼 매번 머무는 일정이 길어졌어요. 일주일이라고 말하면 기본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은근히 변덕이 심하더라고요. 오늘 마음이랑 내일 마음이 또 다르고, 막 그래요. 이건 엄마를 닮은 거예요, 아빠를 닮은 거예요?”

    부러 명호와 유정을 향한 질문으로 말을 맺었다. 그러자 부모님의 입가에 조금 전 유정에게서 본 미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명호는 재차 너털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하하하. 그건 아무래도 네 엄마를 닮은 모양인 것 같구나. 네 엄마가 소싯적에 그렇게 변덕이 죽 끓었어. 양식이 먹고 싶다고 해서 다음 날 유명한 레스토랑을 예약해놓으면 갑자기 한식이 먹고 싶다고 하고 그랬었지. 아비가 엄마랑 연애할 때 그 변덕 맞추며 데이트 코스 짜느라 애 좀 먹었단다.”

    명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정이 명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밉지 않게 명호를 노려보았다.

    그 탓에 명호는 물론 연희와 준혁까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정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연희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유정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모친에게는 참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60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미인은 그 정도 변덕쯤은 부려도 되는 거라고, 말로나마 위로를 하려는데 별안간 넓은 거실로 단조로운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 끝에 걸린 건 명호의 핸드폰이었다.

    명호가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액정을 확인하기 무섭게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연희는 그런 명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걸 느끼기라도 한 건지 명호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재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조금 거리가 떨어졌을 즈음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명홉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