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하, 으읏…….”
포근한 방 안으로 뜨거운 숨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연희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바로 앞에 보이는 준혁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이어진 강렬했던 행위를 증명하듯, 그의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움직인 연희가 이마 위로 가져다 대었다.
축축한 물기가 곧장 피부 위로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땀방울을 말끔히 닦아내고 나서야 준혁을 바라보았다.
제게서 잠깐도 시선을 떼고 있지 않던 건지, 그가 그사이 더욱 깊어진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가 입가에 미소를 감아올렸다.
마치 제 아래에 누워 있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죽겠다는 듯이.
연희는 곡선을 그린 준혁의 입술 위로 짧게 입을 맞추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매일 밤 이어지는 행위였지만, 단 한 번도 싫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도리어 지나치게 좋았다.
너무 행복해서 준혁과 함께하는 이 모든 순간들이 꿈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날 정도로.
하지만 머지않아 곧 깨닫곤 했다.
토닥토닥.
제 등을 쓸어내리는 준혁의 손길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제 이마 위로 쏟아지는 준혁의 달콤한 숨결이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정해진 순서처럼 잠이 무겁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연희는 준혁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 하루도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내가 얼마만큼이나 행복했는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
동이 트기도 전인 깊은 새벽.
지그시 감겨있던 연희의 눈꺼풀이 느리게 들썩거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속눈썹 아래로 잠이 가득 묻어있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연희는 몇 번쯤, 눈을 끔벅거렸다.
습관처럼 찾은 시계가 아직 새벽이 깊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지간히 마음이 뒤숭숭한 모양이었다.
일어나기엔 아직 너무 이른 시각이라 다시 잠을 청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깨버린 잠은 아무리 붙잡아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아…….”
얕게 한숨을 내쉰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곤히 잠들어 있는 준혁이 깨지 않도록 까치발을 들곤 나이트 가운을 챙겼다.
거실로 나오자 지난 저녁에 식사 후 마시려고 우려둔 차가 손을 탄 흔적 없이 말끔하게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저녁을 먹고 마시려고 둔 건데, 차를 마시기도 전에 준혁에게 붙잡히고 말았으니 말끔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연희는 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손에 쥔 찻잔엔 더 이상 온기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은은한 향이 올라왔다.
붉게 물든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테라스로 향했다.
쏴아아-
문을 열고 나오기 무섭게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1분쯤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을까.
연희는 난간 위에 찻잔을 내려놓곤 나이트 가운을 여몄다.
따뜻한 나라라고는 하나 나이트 가운 하나만으로 새벽바람을 견디는 건 무리였나 보다.
추위를 달래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데, 다시금 파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바닷가는 코앞이었다. 그 덕에 마음만 먹으면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었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가장 먼저 본 것이 태양이 장렬하게 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장관이었다. 그 말 외에는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한 차례 장관을 이룬 태양이 지고 나자 금세 주변으로 어둠이 찾아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었다.
처음엔 그게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지금은 제법 익숙했다.
도리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둠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눈을 감지 않아도 눈을 감은 기분을 들게 했다.
그 속에서 장엄한 파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백색 소음을 듣는 것처럼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그게 참 좋았다.
나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여기에 정착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런 순간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오늘 역시 파도 소리가 거칠게 일렁였던 감정들을 잔잔하게 잠재워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자 며칠 전 친모와 나누었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연희야, 한국엔 언제쯤 들어올 생각이니?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준혁이랑 상의해 봐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래도 한 번 들어갈 생각이긴 해요. 저도 저지만, 준혁이를 부모님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게 한 거 같아서요.’
유정과는 보통 일주일에 한 번, 텀이 길어져도 열흘에 한 번은 통화를 하곤 했다.
주로 나누는 이야기는 서로의 안부와 일상 이야기 정도였다.
제 이야기를 듣고 대답하는 유정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다분하게 묻어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알은척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직은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벗어나 좋은 것들을 보고, 좋은 환경 속에서 머무르다 보면 마음 정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준혁과 함께 좋은 곳에서 좋은 것들을 먹고 좋은 것들을 눈에 담자, 상처로 얼룩졌던 마음은 제법 많이 치유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을 떠날 때와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준혁과 이렇게 자유롭게 유랑하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 생활이 질릴 때까지, 되도록 오래 이 행복을 즐길 생각이었다.
적어도 준혁이 저 몰래 모친과 통화하는 걸 알지 못했더라면, 꽤 오랫동안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리라.
‘별 탈 없이 건강하시죠?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연희도 많이 괜찮아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쉽게 마음 정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잖아요. 저도 연희랑 같이 있는 지금이 좋고요. 아시잖아요. 원래 회사 일에 크게 욕심 없었던 거. 형들로도 충분히 회사는 돌아갈 텐데요, 뭐.’
들려오는 거라곤 준혁의 말소리가 고작이었지만, 연희는 알 것 같았다.
핸드폰 너머에서 은하가 어떤 마음으로 아들과 통화를 나누고 있을지.
그날부터였다.
연희는 하루 온종일이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준혁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전과 같이 온전하게 즐길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자신과 함께 떠난 길은 준혁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맞긴 했으나, 준혁 부모의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훌륭한 인재로 HN에 이바지하던 준혁인데, 그런 아들이 여자 하나 때문에 하루아침에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셈이니 그의 부모 입장에선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자신을 위해 준혁을 이역만리 타국땅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까지도 무척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며칠을 고민했는지 세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날을 거듭할수록 준혁을 위해서라도 한국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진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머무는 기간이 단 며칠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국에 가자. 들어갔다가 내키지 않으면 다시 나오면 되는 거잖아. 준혁이에게도 부모님을 뵐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겸사겸사 나도 엄마, 아빠를 볼 수 있으면 좋은 거니까.
한국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들어가는 게 맞았다.
자신을 그리워하는 부모를 위해서도, 준혁을 위해서도.
그런데 막상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제야 연희는 알 수 있었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정확히는 외국에 나와 있기에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억지로나마 외면할 수 있었고, 그래서 괜찮다고 느꼈던 것이었다.
제 마음을 조금 더 확실하게 깨닫고 나자 이전에는 없던 이상한 방어기제 같은 것이 발동했다.
한국에 들어가면 또 준혁과 헤어지고, 상처로 가득한 날들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유정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은 건 바로 그즈음이었다.
-연희야, 엄마가 할 말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그게, 연희야……. 엄마가 절대로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절대 그런 건 아닌데…….
웬일인지 유정이 평소와 달리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도 모른 채 긴장이 되어 연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유정의 다음 말이 돌아온 건 한참 만이었다.
-네가 괜찮다면, 호적을 합치는 게 어떨까 하고…….
‘…….’
그 말끝에 연희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뜸을 들이기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하려나 보구나 예상은 했지만, 그게 이런 식의 이야기일 줄이야.
유전자 검사 결과로 RM그룹 회장 내외가 자신의 친부모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 이후 들이닥치듯 벌어지는 많은 일들에 여타의 감정들을 곱씹고 정리할 새도 없이 부모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와 제 마음속에서 연정의 자리를 완전하게 밀어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유정은 엄마였다.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고, 이젠 그렇게 자리매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법적으로 완벽한 가족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종이 위에 명호와 유정의 딸로서 이름 석 자가 새겨지는 것뿐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대답을 쉬이 할 수 없었던 건 그저 그 이유뿐이었다.
그러나 유정의 입장은 다른 모양이었다.
-역시 아직은 이른가? 엄마가 괜한 말을 꺼낸 거면 미안해, 연희야. 네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그냥……. 돌고 돌아 겨우 찾은 내 딸인데, 그냥 괜히 불안해서…….
괜찮은 척 억지로 톤을 올린 유정의 목소리엔 복잡한 감정이 다분히 묻어있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의도치 않게 유정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았다.
연희는 핸드폰 너머로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게 묵직한 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해야 했다. 지금의 이 공백마저도 유정에겐 가볍지 않은 상처가 될 테니.
잠시 고민한 끝에 연희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