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사랑의 도피
어렵게 건넨 질문에 숙희는 한동안 말없이 눈만 끔뻑거렸다.
그 모습이 꼭 궁금해했던 대답을 돌려줄 것처럼 보여서 연희는 숨도 멈추고 숙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났다.
그 끝에 연희에게 돌아온 건.
“언니는, 그냥 언니지.”
아이 같은 1차원적인 대답과 천진난만한 숙희의 미소였다.
연희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결국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준혁에겐 마지막으로 한 번은 숙희를 봐야 할 것 같아서 이곳을 찾은 거라고 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어쩌면 내도록 궁금해했던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찾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 번은, 진심이 가득한 사과의 말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궁금했던 대답도, 사과의 말을 건네줄 사람도 없었다.
허탈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무얼 기대했던 걸까.
지금의 숙희는 그저 모든 걸 잊은 치매 노인일 뿐인데.
연희는 굽혔던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더는 이 자리가 의미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 생각을 하던 찰나.
“언니를 보니까 우리 세라가 오늘따라 더 보고 싶네.”
침음과도 같은 숙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연희의 마음을 조금은 아프게 만들었다.
“……손녀딸이, 많이 보고 싶으세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물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에 이끌려 한 말이었다.
“응, 우리 세라가 정말 많이 보고 싶어. 그런데 볼 수가 없어.”
숙희에게서 그런 대답을 듣게 될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한 질문이었을 뿐이었다.
“우리 세라는 저기로 갔어. 나 때문에.”
“…….”
“내가 우리 세라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렇게 중얼거리던 숙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린 걸음을 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숙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연희는 그런 숙희의 뒷모습을 꽤 오랫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줄곧 미워하고 원망했던 여자였다.
제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것만 같아서.
그래놓고도 반성은커녕 제 목숨까지 앗아가려고 했던 여자라서.
용서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지금이라고 용서할 용기가 생긴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지 자신이 미워하지 않아도 숙희는 충분히 지독한 고통 속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다 지우고도 윤세라의 기억만큼은 여전히 붙잡고 놓지 못할 만큼.
그런 숙희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죽는 그 날까지 죄책감에 시달리다 눈을 감을 거란 사실에 안쓰럽기도, 끝까지 윤세라는 기억하면서 제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는 고집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다 털어내야 할 시점이었다.
그건 숙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로지 저 하나만 바라봐 온 준혁을 위한 것이었고, 준혁과의 새로운 시작을 앞둔 저를 위한 것이었다.
연희는 멀어져 작아진 숙희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곤 천천히 뒤를 돌았다.
걸었던 길을 되돌아갈 뿐인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신을 괴롭혔던 원망의 감정을 한 스푼씩 덜어내면 될 것이다.
그렇게 이 길의 끝에서 준혁을 만나게 되면 처음 그를 만났던 신연희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점을 향해 걸어가면 될 것이다.
연희는 더디던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문득, 준혁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
공항에 도착한 연희는 준혁의 성화로 공항 내에 마련된 의자에서 잠깐도 일어설 필요가 없었다.
발권부터 짐을 부치는 일까지.
자신의 도움 없이도 모든 준비를 끝마친 준혁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준혁이 제 앞에 도착하면 이제 출국장으로 가는 일만이 남았다.
그러고 나면 정말 한국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민은 아니었지만, 언제 귀국하겠단 기약이 없는 여행이었다.
그 말은 곧 언젠가 돌아올 수도 있지만, 영영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어쩐지 이곳에서 살았던 33년의 시간이 차례로 떠올랐다.
‘이름이 뭐예요?’
‘네?’
‘이름이요. 그쪽 이름.’
‘이름은 왜…….’
‘앞으로 그쪽이 많이 좋아질 것 같아서요.’
처음 준혁을 만났던 순간과.
‘……잘 지내, 준혁아.’
‘…….’
‘나는 네가 없이도 잘 지낼 거야.’
‘…….’
‘그러니까 너도……. 너도 꼭 잘 지내야 해.’
정 회장이 보낸 변호사를 만난 후 준혁을 떠나기 직전 잠든 그를 보며 이별을 고했던 순간.
‘오랜만이야.’
‘왜, 왜…….’
‘많이 놀랐나 보다.’
‘…….’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쁘네, 내 신부님은.’
그리고 윤세라를 대신한 자리에서 준혁을 다시 만났던 순간까지.
그 외에도 셀 수도 없이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중엔 행복했던 순간도, 또 아프고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저 추억으로 묻어둘 수 있는 기억일 뿐이었다.
그게 가능한 건 어디까지나 그 모든 기억 속에 준혁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상념을 거둬낸 건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준혁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연희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준혁을 올려다보았다.
준혁은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얼굴로 10년 전에나 봤을 법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그게 새삼 연희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 준혁과 함께 이곳을 떠날 시간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고 싶었다.
“준혁아.”
“응.”
“정말 나랑 이대로 떠나도 괜찮겠어?”
그 말끝에 준혁의 표정이 묘하게 경직되는 게 보였다.
연희는 서둘러 말을 보태었다.
“네가 10년 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이 여기에 있잖아. 10년간 그렇게 살았던 데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일 거고. 정말, 그것들 다 여기에 두고 나랑 같이 가도 괜찮아?”
연희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이제 와 준혁이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남겠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연희는 그저 자신이 그러했듯, 준혁 또한 그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길 바랐다.
그 진심이 통한 건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준혁이 이내 확신이 가득한 시선을 얽어왔다.
“그 분명한 목표가 내 눈앞에 있는데, 내가 여기에 남을 이유가 뭐가 있어.”
그의 눈앞에 있는 분명한 목표.
그 말인즉 신연희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의 뜻이 그렇다면 그거로 충분했다.
연희는 준혁을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그러자 준혁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어왔다.
“가자. 이제 진짜 우리의 신혼여행을 떠날 시간이야.”
연희는 준혁의 손을 맞잡으려던 것도 잊고 다시금 준혁을 바라보았다.
“신혼, 여행?”
이번 여행을 두고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표현이었다.
연희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피식거리던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난번에 간 건 윤세라와 정준혁의 신혼여행이었으니까. 늦었지만 신연희랑 신혼여행 가게 돼서 나는 기분 좋은데, 넌 아니야?”
준혁이 말끝을 올려 물어왔지만, 연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정준혁과 신연희의 신혼여행.
그 말이 자꾸만 심장을 간지럽혔다.
그저 울렁이는 기분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일 뿐인데, 준혁에겐 그게 다른 의미로 비쳐진 모양이었다.
일순 표정을 굳힌 준혁이 조금쯤 낮아진 톤으로 말했다.
“출장이 아니라 여행은 나도 처음이라 당분간은 관광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 볼까 했는데…….”
“…….”
“생각이 바뀌었어.”
연희는 눈썹을 사선으로 세우며 고개를 반쯤 기울였다.
준혁이 짓고 있는 표정과 말투, 그리고 대사까지. 그 모든 걸 듣고, 보고 있자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데로 널 데려갈 거야.”
이어진 말을 듣고서야 연희는 그 기시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김 비서, 오전에 결혼식이 끝나면 공항으로 갈 거냐고 물었던 거 기억합니까.’
‘예, 대표님.’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지금 하죠. 우린 공항이 아니라 강원도 별장으로 갑니다.’
윤세라를 대신해 그와 결혼했던 날이었다.
그날 분명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아무도 없는 데로 데려가 신혼여행으로 예정된 일주일 동안 자신을 침실 밖으론 단 한 걸음도 내보내지 않을 거라고.
“신혼여행으로 예정된 기간 동안 널 침실 밖으론 단 한 걸음도 내보내지 않으려고.”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터지며 재생된 그 날의 말이 바라보고 있는 준혁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종일 침실에만 가둔다고 해도.”
연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휘어 올리고 말았다. 미소를 감아올리긴 준혁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숨을 들이마시는 게 보았다.
그날 했던 마지막 말을 꺼낼 생각인 듯했다.
준혁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던 연희가 동시에 입술을 떼었다.
“네가 지루할 틈은 잠깐도 주지 않을 테니까.”
“내가 지루할 틈은 잠깐도 주지 않을 거라고?”
똑같은 문장이 서로의 목소리를 타고 한데 섞여 새어 나왔다.
그 끝에 행복으로 가득한 남녀의 웃음소리가 공항 안을 울렸다.
연희는 망설임 없이 준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완벽한, 행복이었다.
<다정한 집착>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