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68)화 (68/80)

68. 한 번은 묻고 싶었던 말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봄이 찾아왔다.

몸을 휘감는 바람의 온도만으로도 봄을 체감하기 충분했지만, 창밖 너머로 새순이 돋고 활짝 피운 꽃을 볼 때마다 연희는 더욱이나 봄이 왔음을 실감했다.

고작 두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연희에겐 살면서 가장 정신없고 벅찬 시간이었다.

취임식 이후 구속된 숙희는 수사를 받던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원인은 급성 뇌출혈이었다.

함께 취조실에 있던 담당 형사의 재빠른 응급처치와 빠른 후송, 그리고 수술까지.

급성 뇌출혈이긴 했지만,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은 덕에 숙희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 건 아니었다.

“꼭, 봐야만 되겠어?”

묵묵히 운전만 하던 준혁이 목적지에 다다라서야 연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차창 너머로 시선을 두고 있던 연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준혁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걱정의 빛이 가득했다.

그가 그러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꼭 봐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이 아니면, 다신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오늘은 준혁과 함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한국에서의 기억들은 당분간 잊고 지내고 싶었다.

세라를 대신해 RM푸드 대표 취임식에 참석한 날 숙희가 경찰에 연행되며 일련의 문제는 한동안 시끄럽게 회자되었다.

그 과정에 신연희의 이름으로 죽음을 맞이한 여자가 RM그룹의 딸인 윤세라라는 것이 밝혀졌고, 취임식장에 자리한 윤세연의 이야기는 대대적으로 연일 보도되며 사람들 입방아에 시끄럽게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게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명호의 배려 덕분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보는 스포트라이트도,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받는 것도. 연희로선 그 어떤 것도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건만 명호는 딸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온 것처럼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그 덕에 상황은 빠르게 종료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희의 마음에까지 평안이 찾아온 건 아니었다.

당시 며칠간의 일로 연희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에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고, 윤 회장 내외와 준혁 외의 사람과는 잠깐도 함께하지 못했다.

외국 여행은 그 과정에 결정하게 된 일이었다.

윤 회장 내외는 일련의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외국으로 나가고 싶다는 연희의 말에 그 자리에서 허락의 답을 돌려주었다.

그거로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지만, 그렇다고 짐을 완벽하게 덜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윤 회장 내외의 허락을 받고 나니 준혁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연희는 몇 날 며칠 그 이야기를 준혁에게 어떻게 전할지에 대해 밤잠까지 아껴가며 고민했다.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준혁에게 이별을 고하는 건 아니지만 잠시나마 떨어져 있기를 권해야 하는 거였다.

벌써 세 차례나 일방적인 이별로 그의 마음에 못을 박았던 그녀로서는 어떤 식으로도 말을 꺼내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엔 해야 하는 말이었다.

준혁이 퇴근을 하고 돌아온 어느 날 밤, 연희는 오랜 시간 고민해온 제 마음을 어렵사리 내비쳤다.

‘준혁아, 나…….’

‘…….’

‘나, 당분간 외국에 나가 있고 싶어.’

연희로선 힘겹게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어려워한 것이 무색하도록 준혁의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그래. 그렇게 하자.’

‘어?’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어떻게 하는 게 널 위하는 건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외국으로 나가면 괜찮아질 거 같아? 그럼 그렇게 해. 나도 같이 갈게.’

처음 그가 그렇게 이야기했을 땐 당혹감과 고마움이 뒤섞인 묘한 마음이었다.

준혁이 자신과 함께해준다면 저로선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으니까.

한국에서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정리하기 위해 결정한 일이었지만, 외국에 나가본 경험이라곤 전무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준혁이 자신과 같이 떠나준다면 한결 걱정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결정을 고마워만 하기엔 은하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준혁아, 나 그렇게 오래 나가 있을 생각은 아니야. 아무래도 넌 백화점 대표직도 이어가야 하고, 또 어머님이 네 생각 정말 많이 하시는데 이렇게 나랑 같이 떠나는 건…….’

‘이미 다 말씀드렸어.’

‘어? 뭘?’

‘대표 자리 내려놓겠다고, 말씀드렸다고.’

그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10년 전의 일로 정 회장을 향한 원망이 아직은 남아있었지만, 은하를 생각하면 준혁과 함께 떠나선 안 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말릴 새도 없이 일을 저질렀다는 그의 말에 연희는 한동안 벙찐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만에 왜 상의도 없이 그런 거냐고, 본능이나 다름없는 타박의 말이 새어 나오려던 찰나였다.

‘10년이면 너랑 나 사이의 공백은 충분하지 않아?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

‘지금 네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아. 근데 하지 마, 그거. 난 이제 너 없는 시간은 견디고 싶지 않아.’

그렇게까지 말하는 준혁을 차마 타박할 수도, 혼자 다녀오겠단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10년이 넘도록 이어진 한 남자의 순애보에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날 이후 자신의 여행은 준혁과의 여행이 되어 차근차근 준비되었다.

그 과정에서 몇 달 정도로 그쳤을 여행이 귀국 기약이 없는 여행이 된 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래서였다.

편하지 않은 자리란 걸 알면서도, 오늘 굳이 여기까지 찾은 이유가.

“오늘이 아니면 앞으로 평생 보지 못할 것 같아서.”

“…….”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봐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준혁은 더 이상 연희를 만류하지 못했다.

연희는 준혁의 침묵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곤 다시 차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연희는 나무로 우거진 오르막길을 느린 걸음으로 올랐다.

숨이 가빠올 즈음 언덕이 끝나고 단정한 외관의 건물이 보였다.

그 앞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연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산책 시간인 건지, 날씨를 즐기며 간병인과 함께 거니는 노인들이 꽤 많이 보였다.

연희는 그들 틈에 섞여 눈동자를 이리저리로 굴렸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마침내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연희는 천천히 거리를 좁혀갔다.

“곱다. 참 곱게도 피었어.”

노인은 정원 한쪽에 핀 개나리를 보며 천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희는 조용히 그 곁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낀 노인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맞춰왔다.

숙희였다.

이전의 독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어린 아이처럼 말간 얼굴을 한 건, 분명 최숙희였다.

“언니는 누구야?”

숙희는 해맑게 웃으며 그렇게 연희에게 말을 건네왔다.

어찌나 천진한 얼굴인지, 목소리마저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이 무구해서 연희는 선뜻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숙희가 새초롬히 고개를 돌리곤 다시 개나리를 응시했다.

“참 예쁘지? 근데 언니도 참 예쁘다. 이 꽃이랑 똑같이 생겼어.”

“…….”

“우리 세라도 이 꽃처럼 참 예뻤었는데.”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던 연희의 눈동자가 이내 숙희에게로 향했다.

숙희는 슬픔에 깃든 눈으로 개나리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연희는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숙희를 따라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그러자 침울해하는 숙희의 얼굴이 보였다.

숙희는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세라 닮은 꽃은 피었는데, 우리 세라는 볼 수가 없네…….”

이어진 숙희의 말에 연희의 동공이 바르르 흔들렸다.

유정을 통해 듣기론 수술 후유증으로 치매에 걸려 기억을 전부 잃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세라는 기억하고 있는 걸까.

“할머니. 세라가……, 누구예요?”

연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내뱉었다.

내내 개나리를 올려다보던 숙희가 일순 고개를 돌려 연희를 바라보았다.

“우리 세라? 내 손녀딸.”

눈을 동그랗게 뜬 숙희의 얼굴은 마냥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그게 연희로 하여금 재차 할 말을 잃게 했다.

기억을 잃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세라만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구나.

그 생각이 들자 잊고 지냈던 말들이 떠올랐다.

언젠가 한 번은 묻고 싶었다.

윤세라와 윤세연은 같은 날 같은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는데, 왜 둘 중 하나를 버려야만 했었느냐고.

그게 왜 하필 자신이었던 거냐고.

그 대답을 꼭 듣고 싶었지만, 숙희가 쓰러지기 이전엔 물어봤자 그 대답을 돌려줄 리 없다고 생각했고, 기억을 전부 지운 숙희에겐 그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라를 기억하는 숙희를 보고 있노라니 한 번쯤은 묻고 싶었다.

“할머니.”

어째서.

“혹시 저는, 모르시겠어요?”

자신을 버려야만 했던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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