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67)화 (67/80)
  • 67. 취임식(2)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기억하는 세라 양 얼굴이 맞는데, 윤세라가 아니라 윤세연이라니.”

    장내에 자리한 사람 중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버럭 소리쳤다.

    연희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느긋하게 시선을 움직였다.

    “우리는 최숙희 회장님의 손녀인 윤세라 씨가 RM푸드의 대표로 선임된다고 알고 온 겁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대표가 된다고 하면 우리더러 어쩌란 겁니까? 회장님, 무슨 말씀이라도 해보세요!”

    참석한 사람들을 대표하기라도 하듯 큰소리를 내던 한 임원의 말이 숙희에게로 향했다.

    그 말과 동시에 장내의 모든 시선들이 일제히 숙희를 향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뻣뻣하게 굳은 숙희는 격렬하게 요동치는 눈동자만은 숨기지 못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일순 연희를 향해 매서운 눈길을 보내며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지금, 윤세연이라고 했니?”

    숙희의 목소리가 복잡한 감정과 함께 덜덜 떨리렸다.

    연희는 그 모습을 두 눈 가득 담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할머니.”

    길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장내를 술렁거리게 할 파급력은 충분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속이 소음으로 더욱 복잡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숙희는 꿋꿋이 연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은 연희를 다음으로 명호를 향했고, 그다음으로 유정을 향했다.

    명호와 유정은 숙희의 눈길이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뜻인 걸 알았지만, 끝끝내 침묵했다.

    누구 하나 지금의 사태를 정리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수록 소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런데 그때,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경쾌한 걸음 소리가 컨퍼런스 룸을 울렸다.

    “아이고, 우리 회장님! 못 뵌 사이에 신수가 아주 훤해지셨습니다.”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건 다름 아닌 태광이었다.

    태광은 경쾌한 걸음만큼이나 환해진 얼굴로 컨퍼런스 룸을 가로질렀다.

    그런 그의 걸음이 룸의 중앙쯤 자리했을 때였다.

    불시에 걸음을 멈춘 그가 짝다리를 짚은 채로 선글라스를 위로 들추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건 정확히 숙희였다.

    “어? 이렇게 보니 안색이 파리하신 것 같기도 하고. 꼭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태광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한껏 비아냥거렸다.

    숙희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드는 거로 모자라 그녀의 눈가가 경련하듯 파들거리는 게 보였다.

    몇십 년은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떨어질 실형까지 감안하며 걸음한 자리였다.

    다른 게 아니라 오직 저 꼴을 보기 위해서.

    누군가는 미친 짓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태광에겐 아니었다.

    오직 야망을 위해 최숙희가 시키는 일은 뭐든 하며 산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자신의 공은 잊고 끈 떨어진 주머니 취급을 하니, 실형을 피하기 위해 평생 이 분한 마음을 품고 살 자신이 없었다.

    더욱이나 법의 처분이 두려웠다면, 뒷골목을 전전하는 삶도 살지 않았을 것이다.

    태광은 이제라도 숙희에게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는 사실을.

    이 김태광이가 고작 돈 몇 푼에 굽신거리며 야망을 버릴 놈이 아니었다는 걸.

    태광은 그 생각을 곱씹으며 숙희를 향해 매섭게 박아넣었던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곤 원래의 페이스를 되찾곤 컨퍼런스 룸을 빙 둘러보았다.

    “표정이 왜들 그래요? 나 몰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댁들이 고개 조아리던 사람이잖아, 내가. 뭘 그렇게들 놀란 얼굴을 하고 있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인사들이 한둘이 아니건만 태광은 고집스레 하나하나 시선을 맞추었다.

    하나같이 부담스럽단 얼굴로 시선을 피하기 일쑤였다.

    태광은 그 꼴들이 못내 우스워 큰소리로 웃으며 멈추었던 다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이내 멈춘 자리는 연희의 앞이었다.

    태광은 연희를 한 번 바라보곤 다시 뒤를 돌아 임원들을 향해 말했다.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내가 하루아침에 사라져주니 다들 살 만했나 봅니다? 그런데 이를 어쩐담. 댁들이 최숙희의 하나뿐인 손녀딸 윤세라인 줄 알고 쌍수 들고 환영했을 여기, 이 여자분이.”

    “…….”

    “사실은 윤세라가 아니라 이 집안에 숨겨진 딸 윤세연 양이라는데.”

    태광의 등장으로 쥐 죽은 듯 조용했던 룸이 그 말에 다시금 술렁이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목소리가 섞여 수군거리는 소리의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반응은 비슷한 듯했다.

    그간 태광이 만들어온 이미지 때문인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식이었다.

    그에 미간을 좁힌 태광이 비장의 카드라도 되는 양 재킷 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떵떵거리듯 말했다.

    “못 믿겠어? 못 믿겠는 사람들은 귀 열고 똑바로 들어. 지금부터 듣게 될 이 녹음 파일이 여기 있는 이 윤세연 양이 윤세라가 아니란 증거가 돼줄 거고, 저기 앉아있는 최숙희 회장 발목을 붙잡을 증거가 돼줄 거니까.”

    태광은 그 말끝에 녹음기 어플을 켜 저장해둔 파일을 재생시켰다.

    이내 숙희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새어 나왔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네가 처리해줘야 할 아이가 하나 있다.

    -처리해줘야 할 아이요? 누구 말입니까?

    -지금 정준혁이랑 같이 살고 있는 계집애가 하나 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정 대표는 회장님 손녀랑 결혼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정 대표가 회장님 손녀랑 같이 안 살면 누구랑 산다는 말이오?

    -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고, 너는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그 아이를 처리하기만 하면 돼.

    -나 참, 정말. 어쩐 일로 회장님이 지시 없이 조용하신가 싶었어요.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그 아이가 숨 쉬고 있는 꼴,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보이는 일 없도록 해.

    -뭐, 어디 새우잡이 배에라도 태우라는 말입니까?

    -영영 보이는 일 없게 하란 말이야.

    -……뭐, 죽이기라도 하라고요?

    태광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거기까지였다.

    연희는 잘게 떨리는 눈으로 숙희를 바라보았다.

    숙희가 자신을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화 내용을 직접 듣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지난 한 달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죽이란 내용이 담긴 대화를 듣고 나니 손이 벌벌 떨리고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런 연희의 손을 옆자리에 앉아있던 유정이 잡아주었다.

    연희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유정을 보았다.

    놀라기는 유정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유정의 눈매를 타고 기어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연희는 유정이 붙잡은 손을 빼내어 반대로 유정의 손을 잡아주었다.

    자신을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윤세라 씨는 한 달 전 저를 대신해 죽었습니다. 그게 제가 오늘 윤세라 씨를 대신해 이 자리에 참석한 진짜 이유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차분한 연희의 말에 내도록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숙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삿대질을 하며 반쯤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네가 세라가 아니라고? 내가 오늘만 기다리며 우리 세라를 그렇게 금지옥엽 귀하게 키웠는데, 네가 어떻게 세라가 아니라는 거야!!”

    숙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맹목적으로 부정했다.

    연희는 그런 숙희를 조금은 안쓰러운 눈으로, 그러면서도 단호함을 잃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윤세라가 굳이 윤세연인 척을 하고 있는 건.”

    “…….”

    “그건, 말이 되는 상황이라고 하실 수 있겠어요?”

    허를 찌르는 연희의 말에 숙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관전하듯 바라보고 있던 태광이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숙희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곤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채 선글라스를 벗곤 숙희를 똑똑히 보았다.

    “보리밥 먹던 놈한테 쌀밥 맛이 뭔지 알려줘 놓고 다시 보리밥 먹던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회장님이 나라면, 돌아가겠습니까?”

    “…….”

    “그러게 왜 그러셨어. 내가 회장님 처음 뵀을 때 분명히 얘기했잖아. 배신만 하지 말라고. 그럼 회장님이 시키는 건 뭐든 다 하겠다고. 그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날 배신하는 순간, 지옥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복수하겠다는 뜻이야, 이 양반아.”

    “너, 너, 이……!!”

    태광의 비아냥에 숙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광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러나 해코지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그 순간 곧바로 컨퍼런스 룸의 문의 열리고 준혁을 선두로 형사들이 숙희의 앞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최숙희 씨 당신을 윤세라 살인 사건의 살인 교사 및 윤세연 씨 살인 미수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지금부터 당신이 한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연희는 형사의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숙희의 모습을 오롯이 바라보았다.

    분명 좋은 날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평생 꿈꿨던 최고의 엔딩을 오늘 맞이할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틀린 방법으로 꾸었던 꿈은 산산이 조각이 났고, 숙희에게 남은 건 나락으로 떨어진 남은 생일 뿐이었다.

    연희는 어느덧 곁으로 다가온 준혁의 품에 안겨 얼굴을 묻었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건, 은색 수갑이 채워진 숙희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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