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66)화 (66/80)
  • 66. 취임식(1)

    연희는 호흡을 고르며 허리를 세운 채 소파에 앉았다.

    세라의 죽음 이후 제가 윤세연으로서 세라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게 벌써 한 달째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연희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다는 게 생각보다 큰 의미의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해 자신이 살게 되었다는 사실에 퍽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만큼 제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걸 지난 한 달에 걸쳐 깨닫게 되었다.

    매일을 준혁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에게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을 해야만 상념을 떨칠 수 있다는 게 한편으론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준혁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겨졌다.

    연희의 노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희는 틈틈이 연락을 해오거나 집으로 찾아오는 유정을 맞아 어색하지만 애틋한 시간들을 보내왔다.

    유정은 저와 같이 시간을 보낼 때마다 자신을 애처럼 다루며 하나부터 열까지 그게 무엇이든 해주고만 싶어 했다.

    처음엔 그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일 때마다 유정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33년 만에 되찾은 딸과의 시간이 그녀에겐 얼마나 애틋하고 간절했을까.

    아마 뒤늦게라도 그동안 못했던 엄마 노릇을 해주려는 것 같았다.

    더욱이 최숙희를 무너뜨리기 위한 자료를 위해 유전자 검사를 진행한 터였다.

    그 결과지를 통해 친자가 확실하다는 판결까지 받았으니 자신에 대한 유정의 마음은 더욱 애틋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희의 시간은 아주 잠깐도 허투루 흘러가지 않았다. 그 탓에 지난 한 달이 생각과 고민으로 가득하긴 했지만, 적어도 잡념으로 보낸 시간은 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되었고, 덕분에 연희는 생각보다 많이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 한 달이란 시간의 결실이나 다름없는 날이었다.

    “세연아, 너무 긴장하지 마.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엄마가 네 옆에 있을 거니까, 혹여라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도록 가만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니까, 그러니까…….”

    연희는 제 옆에 앉아 횡설수설하는 유정의 손을 말없이 붙잡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유정의 눈동자가 불현듯 초점을 되찾곤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연희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저 괜찮아요. 잘할 수 있어요. 오늘을 위해서 그동안 많이 준비하고 연습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연희는 유정을 다독이듯 그녀의 손등을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저 역시 그녀 못지 않게 떨리고 긴장이 되었지만, 저보다 더 긴장한 유정의 앞에서 내색할 순 없었다.

    연희는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시각을 살폈다.

    예정된 시간까지 이제 고작 두 시간쯤 남아있었다.

    이른 아침,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비운 준혁만 돌아오면 곧장 출발하게 될 것이다.

    최숙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윤세라의 RM푸드 대표 취임식 현장으로.

    ***

    RM푸드 본사 건물 내에 자리한 컨퍼런스 룸은 격식을 차린 모양새의 사람들로 하나둘 그 자리가 채워졌다.

    참석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회의장을 울리는 수군거리는 소리 역시 커져 갔다.

    소란이 오래가진 않았다.

    곧 문을 열고 들어온 숙희에 의해 장내의 분위기가 잡혔다. 내빈들은 각자 흐트러진 자세를 고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숙희는 고아한 걸음으로 ‘ㄷ’ 자 모양으로 된 테이블 상석으로 향했다.

    뒤따라 들어온 윤명호 회장 내외와 연희 역시 명패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곤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삽시간에 엄숙한 분위기가 드리우고 곧 진행자에 의해 취임식이 시작되었다.

    형식적인 인사말이 전해졌고, 곧 RM푸드의 새로운 대표로서 윤세라의 소감을 전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연희는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장내에 자리한 인사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 중엔 최숙희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희는 숙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노인의 얼굴은 평생의 숙원 사업의 완벽한 결말을 보는 듯 환하게 피어있었다.

    아마 지금이 그녀에겐 최고로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그러니 이젠 제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바쁘신 와중에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참석해주신 덕분에 이 자리가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이 몰려왔지만, 연희는 자신을 향한 시선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며 준비한 인사말을 꺼내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여기 앉아계신 최숙희 명예 회장님의 은혜로 부족한 저에게 너무 과분한 기회가 찾아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많이 도와주세요. 여러분께서 주신 기회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연희는 자신을 위해 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다시금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그런 연희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건 숙희였다.

    숙희는 무척이나 대견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로써 숙희는 제가 그려왔던 청사진이 완벽한 엔딩을 맞이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연희가 준비한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으려는 듯 엉거주춤 다리를 굽혔던 연희가 일순 허리를 펴곤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 한 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연희는 공손하게 모은 두 손을 배꼽 아래에 가져다 대곤 환한 미소가 걸린 얼굴로 장내를 둘러보았다.

    “바쁘신 와중에도 여기까지 걸음 해주신 걸 텐데, 다들 잘못 알고 계신 부분을 정정해드리고 싶어서요.”

    그 시선의 마지막은 이번에도 최숙희였다.

    숙희는 묘하게 균열이 간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이제야 눈치챈 걸까.

    “저는, 최숙희 회장님의 손녀인 윤세라가 아니라…….”

    당신이 똑바로 보고 있는 내가.

    “윤세연이라고 합니다.”

    윤세라가 아니라는 걸.

    ***

    준혁은 RM푸드 본사 건물 1층 로비에 서서 시간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여럿 서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준혁의 제보로 함께 이곳을 찾은 관할 지구 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이었다.

    준혁은 로비 입구와 손목에 찬 시계를 연거푸 번갈아 살폈다.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가는데 태광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날 자신과 나눈 대화도 함정의 일종이었던 건가.

    괜한 초조함에 그런 생각에까지 다다랐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날 보았던 태광은 최숙희를 끌어내리기 위해 무척이나 절실해 보였다.

    ‘내가 사람을 시켜 정 대표랑 살던 여자를 죽였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손으로 저지른 살인에 대해 고백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숙희가 시켰어요. 정 대표랑 살고 있는 그 여자를 죽이라고. 나는 그동안 최숙희가 시키는 일이라면 그게 뭐든 다 했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얻은 게 지금의 내 자리이고.’

    ‘…….’

    “그래도 지금까지 누굴 죽이라고 시킨 적은 없는데, 미친 노인네가 나한테 살인까지 시키더군요. 처음엔 망설였는데, 결국엔 내가 그렇게 했습니다. 정 대표가 고발한 문제가 내 발목을 붙잡을 것 같아서. 최 회장이 시키는 일만 하면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망할 노인네가 기어이 내 뒤통수를 치네.”

    길게 이어진 태광의 말에선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이 최숙희가 연희를 해치려고 했다는 건 확실한 정보가 맞았고, 태광의 말은 최숙희의 지령의 정황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증명해주었다.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특별한 이유랄 게 있겠습니까. 최숙희한테 제대로 엿 한번 먹이겠다는 거지.’

    그 말에 준혁은 꽤나 오래 고민해야 했다.

    태광은 그저 ‘엿 한번 먹이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러기 위해선 태광의 안위를 보장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정 대표님한테 부탁하고 싶은 건 별거 없습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보다 더한 기분을 최숙희가 느낄 수 있는 그 적재적소의 타이밍.’

    ‘…….’

    ‘그 타이밍만 알려줘요. 그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태광의 말처럼 어렵지 않은 요구였다.

    그러나 연희의 완벽한 복수를 위해 제 쪽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도움이기도 했다.

    이렇게 선뜻 절실하던 그 도움을 주겠다고 하니 준혁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준혁은 기꺼이 태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김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일 진행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변호인이 필요하면 말씀해주십쇼. 이미 지은 죄에 대한 감형까진 아니더라도, 최숙희 회장님 측의 술수로 부당한 처사까지 감내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사람이 너무 솔직하네. 이럴 땐 지은 죄도 없애주겠다고 하면서 꼬셔야 되는 겁니다.’

    태광이 너털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태광의 말이 진심이 아니란 것 정도는 준혁도 알고 있었다.

    준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런 준혁을 향해 태광이 언제 지어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선한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HN백화점 지난 분기 실적으로 속 썩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당하기만 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꼬라지 좀 부린 거니까. 내 말 한마디에 타사로 다 옮겨갈 것 같으면 그게 VIP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일시적인 거고, 이번 분기부터는 기존 실적 회복될 겁니다.’

    태광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그 길로 태광은 본인의 차를 타고 사라졌다.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태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동안 숙희의 지시를 이행하면서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모아놓은 증거들이었다.

    오늘을 기다린 건 저뿐 아니라 태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태광이 나타나지 않을 리 없었다.

    준혁은 재차 로비 입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때 뒤에 서 있던 형사 무리 중 한 명이 준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 대표님, 대체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준혁에게 말을 건넨 건 관할 지구 경찰서 강력계 형사인 박 경위였다.

    준혁은 시간을 살피던 걸 멈추곤 박 경위를 바라보았다.

    “제보 드린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 증인이 올 겁니다.”

    그 말끝에 박 경위의 뒤로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는 태광의 모습이 보였다.

    준혁은 태광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금 박 경위를 향해 말했다.

    “저기 오시네요.”

    준혁은 태광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게 준혁이 태광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예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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