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65)화 (65/80)
  • 65. 목숨도 아깝지 않은 여자

    늦은 밤, 태광은 평소와 달리 퇴근도 하지 않고 조도를 낮춘 대표실 안을 지켰다.

    집무 책상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낯빛이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른 아침, 숙희를 통했던 말이 종일 그의 귓전을 맴돌며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했다.

    ‘회장님, 나한테 이래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안 그래요? 우,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회장님을 위해서 어떻게까지 했는데!’

    자신이 팽당하기 직전이란 걸 직감한 태광은 최 회장 앞에 무릎까지 꿇고 앉아 매달렸다.

    ‘너에게 기회를 주는 건 내가 아니라 주주들이라는 걸 왜 아직까지도 몰라.’

    하지만 최 회장에게서 돌아온 말은 태광이 기대한 것과는 완전하게 다른 것이었다.

    태광은 이를 사리물었다.

    최 회장은 주주들의 반발 때문에 자신을 내치는 척하고 있었지만, 태광은 알고 있었다.

    주주들의 반발때문이 아니라, 최 회장은 처음부터 자신을 내칠 준비를 하고 있던 거다.

    자신은 최 회장의 지시로 사람까지 죽였다.

    그런 일까지 저지른 이유는 오로지 딱 하나.

    지금 자신이 앉아있는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 자리 하나 갖자고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일에 더불어, 이번 일까지 군말 없이 했는데.

    그런 나한테 감히.

    줄곧 내리감겨 있던 태광의 눈꺼풀이 불시에 번뜩 뜨였다.

    그 안으로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골몰하던 태광은 지체 없이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 자리를 지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물러나는 것 말곤 별도리가 없다는 건데…….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순순히는 못 물러나지. 최숙희, 네가 날 이렇게나 만만하게 봤다, 그거지? 어디 한 번 같이 죽어보자고.”

    독기로 가득한 목소리가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남겼다.

    태광은 곧장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찾아 통화를 걸었다.

    ***

    이른 퇴근을 했던 준혁은 연희와 잠자리에 들기 직전 걸려 온 전화를 받곤 운전대를 손에 쥐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의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 늦은 시각에 향하는 곳은 인적이 드문 한강변이었다.

    -정 대표. 납니다, 김태광.

    전화를 걸어온 건 RM푸드의 대표 태광이었다.

    보네르 문제는 제외하면 연고가 없는 사람인지라 갑작스러운 연락에 의아할 법도 했지만, 준혁은 담담했다.

    집을 나간 연희가 연락이 닿지 않던 그 시간이 준혁에게는 일생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자, 신중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집을 나서는 연희의 표정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감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런 제 직감 역시 불길함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도 연희를 믿고 기다려 보자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억겁 같던 시간을 버텼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을 보고 나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준혁은 곧장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고, 그녀가 받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전화를 걸고 또 걸어도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 안내만 연거푸 재생될 뿐, 기다리던 연희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연희가 정말 자신을 또 버리고 떠난 건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김 비서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표님. 연희 아가씨 소재가 파악되었습니다. 경기도에 있는 카페로 가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늦어서 카페 영업이 끝났을 것 같긴 한데, 혹시 몰라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두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연희가 왜 경기도까지…….’

    -아무래도 윤세라 씨를 만나러 가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준혁은 살아있는 지옥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제게 말 한마디 없이 윤세라를 만나러 간 걸까.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일 줄 알고 겁도 없이.

    그 생각에 처음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끝끝내 연희가 또 자신을 믿지 못해 독단적으로 행동을 한 건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장악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연희가 만나러 간 사람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그 사람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가를 떠올리니 손발이 벌벌 떨릴 정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윤세라는 극한으로 몰면 몰수록 냉정해지기 보단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간 연희가 윤세라인 척하며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감정적으로 몰린 그녀가 어리석은 판단으로 연희에게 연락을 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여러 가지 경우의 수 중 단 하나일 뿐이었다.

    혹여라도 최숙희의 지시로 연희를 불러낸 거라면…….

    그렇다면 지금 연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준혁으로서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준혁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이라 김 비서의 말대로 카페 영업은 끝났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우선은 사람을 보내두었다니, 자신은 혹여라도 집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연희를 기다리는 게 현명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준혁은 곧장 차 키를 챙겨 현관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연희의 번호로 전화 거는 일은 잊지 않았다.

    당연히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연희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여보세요.

    그런데 준혁의 귀를 찌르고 들어온 건 예상했던 기계적인 음성이 아니었다.

    준혁은 놀란 얼굴로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군가 제 전화를 받았다는 것에 우선 첫 번째로 놀랐고, 두 번째로 놀란 건 분명 연희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상대의 목소리가 연희의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준혁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나, 세라 엄마예요…….

    돌아온 대답에 준혁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윤세라의 모친이라면 최숙희의 며느리 되는 사람이었다.

    연희가 최숙희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건 백번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문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상대 또한 최숙희의 가족이었다.

    준혁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왜 연희 핸드폰을 가지고 계신 건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가 데리고 있어요. 우리, 우리 세연이…….

    우리 세연이.

    고작 다섯 글자밖에 되지 않는 말에 준혁은 완벽하게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윤세라가 본가로 들어갔으니, 최숙희를 비롯한 그녀의 부모까지 연희의 존재를 알아챘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가 최숙희와 한통속이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없었는데, 들려온 목소리로 보아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준혁은 긴장이 풀린 몸을 어찌하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길게 설명 못 하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그런데 그때, 울분에 찬 상대의 목소리가 겨우 내려놓은 긴장을 순식간에 바로 세웠다.

    -세라가 죽었어요. 나도 사람을 통해 알아보는 중이라 정확한 내용까진 전부 파악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우리 어머님……. 그러니까 그걸 지시한 사람이 최 회장이란 거고, 원래 죽었어야 할 사람은 세라가 아니라 우리 세연이였다는 거예요.

    죽었어야 할 사람이 세라가 아니라 세연이였다, 그 말에 준혁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 속을 벗어날 수 없었다.

    혹여라도 자신이 없는 사이 연희에게 나쁜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그간 이어진 최숙희의 행보를 생각하면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혼자 나가겠다는 연희를 붙잡지 못했다.

    그런데 기우일 거라고 믿었던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진짜로 벌어졌다는 사실에 준혁은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최 회장은 죽은 사람이 세라라는 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최 회장이 그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될 거예요. 그랬다간, 우리 세연이도 위험해질 테니까.

    ‘…….’

    -조금 이따 최 회장이 세연이를 세라인 줄 알고 찾을 거예요. 그 자리는 피할 수 없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정 대표한테 다시 돌려보낼게요. 그러고 나면 나는 최 회장이 우리 세연이에게 어떻게도 손댈 수 없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치를 취할 생각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그때까지 정 대표가 우리 세연이를 좀 지켜줄 수 있겠어요?

    유정과의 통화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유정이 말하는 세연은 연희였고, 연희를 지켜달라는 말에 대답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유정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연희는 자신이 지켜야 할 여자였고, 그게 설령 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라고 해도 망설일 필요가 없는 여자였다.

    유정과의 통화 이후 준혁은 김 비서를 통해 윤세라의 죽음과 관련한 정황 파악을 시작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 비서를 통해 들은 말에 의하면 유정의 말처럼 윤세라가 신연희의 이름으로 사망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윤세라가 연희 명의의 차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과 연희의 이름으로 발급된 체크카드를 윤세라가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망자가 신연희라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 없이 단정되었다.

    윤세라가 본인의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

    그녀가 소지하고 있던 핸드폰으로 부모에게 우선 연락이 갔을 테니 윤세라의 장례와 관련해서는 윤명호 회장 내외가 알아서 처리했을 일이었다.

    다만, 윤세라가 아닌 신연희로 죽은 그녀의 장례식장을 지켜줄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하니 윤세라를 향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감정과는 별개로 숙연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까지가 연희가 자리를 비운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 시간 동안 준혁은 연희를 향한 걱정으로 불안 속을 고통스럽게 헤매다가도, 연희의 신변을 위해 조치를 취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달라는 유정의 말을 떠올리며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신중하게 고민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거쳐 갔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최숙희가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그녀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것. 그것 말고는 연희의 안전을 보장할 길이 없었다.

    준혁은 핸들을 고쳐 잡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태광과 약속한 장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점이었다.

    태광에게로 향하는 이 길이, 연희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그 첫 시작이 될 것이다.

    그 생각으로 준혁은 액셀 위에 올려놓은 발끝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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