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64)화 (64/80)

64. 돌고 돌아

준혁의 손에 힘껏 당겨져 집 안으로 들어온 연희는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곧장 안착한 곳은 준혁의 품 안이었다.

익숙한 체취가 단숨에 콧속을 뚫고 들어왔다.

동시에 내도록 불안하던 마음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가는 걸 느꼈다.

본능이나 다름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온몸 가득 차오르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해서, 이렇게 살아 준혁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도 감사해서, 그래서 연희는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의 오열이었다.

연희는 한껏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속절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연희를 힘주어 안고 있던 준혁 역시 무너지듯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제야 연희는 조금이나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야 느껴졌다, 준혁이.

그가 떨고 있었다.

자신이 없던 그 시간 동안 끝없는 불안 속에서 헤맸던 것처럼 그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연희의 마음을 더욱이나 찢어지게 만들었다.

연희는 뒤늦게나마 준혁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네 곁에 다시 돌아왔다고.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고.

네 마음에 또 상처를 줘서, 정말 미치도록 미안하다고.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진심을 온몸으로 전달했다.

애처로운 재회는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이나 이어졌다.

연희는 준혁의 몸에서 잔떨림이 사라질 때까지 온전히 그의 품에 안겨, 그로 인해 자신이 느낀 안정을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족히 한 시간은 지나고 나서야 그가 천천히 몸을 떼었다.

그리고 한 시간 만에 마주한 그의 얼굴은 연희를 다시 한번 울리고 말았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거란 건 백번 천번 이해했지만, 그래봐야 고작 몇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몇 시간 사이에 준혁의 얼굴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연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준혁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러곤 울음 섞인 투정을 아낌없이 쏟아내었다.

“넌, 넌, 흐윽. 도대체 왜 이러고 있어, 바보야!! 나 같은 게 널 또 버리고 떠난 것 같으면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더 좋은 여자 만나면 되잖아! 넌 어떻게, 도대체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나한테……!”

염치도 없는 말이었다.

두서없이 말을 뱉으면서도, 참 염치없는 말이란 걸 연희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또 돌아오고 말았지만,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그럼 그중 한 번쯤은 나쁜 년이라고 욕을 할 수도 있고, 왜 매번 이런 식인 거냐고 매섭게 따지기라도 할법한데, 도통 준혁은 단 한 번을 그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고, 그랬기에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는 거였지만, 연희는 차라리 준혁이 그렇게 하길 바랐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너 같은 거 필요 없다고 그러니까 당장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자신이 울며 불며 준혁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은 준혁이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참으로 이기적인 바람이었다.

결국은 자신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으니까.

연희는 한결같은 준혁의 사랑 앞에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하는 남자를 두고 어떻게 매정하게 떠날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버리고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 연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뼈 아픈 절망을 느끼고 나서야, 연희는 비로소 인정해야만 했다.

그를 떠나는 것으로 그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지독한 오만일 뿐이었다.

“미안해, 준혁아. 내가, 흐윽……. 내가, 다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다신, 네 마음 아프게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나한테 한 번만 더…….”

연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뱉어내며 준혁의 옷가지를 꽉 부여잡았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차마 그 말이 나오질 않았다.

두려웠다.

너 같은 여자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끝까지 기만할 줄만 아는 여자와는 더 이상 미래를 그리고 싶지 않다고.

그동안 내도록 준혁에게 그런 말이 듣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이 순간 자신이 그를 붙잡았을 때 그가 매정한 대답을 돌려주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불안하게 떨렸다.

연희는 준혁을 붙잡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런데 그때,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준혁이 처음으로, 입술을 열었다.

“됐어. 이렇게 다시 왔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괜찮아, 연희야.”

그가 미치도록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괜찮다고. 다시 왔으니까, 그거로 된 거라고.

그 말에 연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준혁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제 몸을 받아내곤 힘주어 끌어안아 주었다.

완벽히 하나가 된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10년 전 그와 연애를 하면서도, 그리고 10년 후 그와 재회한 후에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심장으로부터 온몸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벅차게 뛰고, 몸이 바르르 떨릴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나 벅찬 감정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연희는 준혁의 품에 안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을 마음껏 즐겼다.

이제야 진짜 제 자리를 찾은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이곳이 제 자리였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었는데.

그걸 왜 이제야 깨달은 건지.

연희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일자로 가늘어진 눈매를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더는 아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행복으로 가득한 감동의 눈물이었다.

***

“회장님이 웬일로 여기까지 나를 다 보러 오셨습니까?”

RM푸드 본사 대표실로 들어선 태광이 놀란 눈으로 소파 상석에 앉은 숙희를 보았다.

숙희는 허리를 편 자세로 앉아 대표실 비서가 준비해준 차를 즐기고 있었다.

숙희가 대표실을 찾은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손가락에 세고도 남을 정도로 흔한 일 역시 아니었다.

더욱이 오늘처럼 최측근 비서까지 대동해서 온 적은…….

순간 호선을 그렸던 태광이 입매가 단박에 굳었다.

숙희의 뒤에서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서 있는 사람은 분명 최 회장의 최측근 비서인 선재영이었다.

도대체 선 비서까지 대동해서 여기에 온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태광은 경직된 몸을 겨우 움직여 숙희의 곁으로 걸어갔다.

“출근이 늦었구나.”

태광이 건너편 소파에 앉기 무섭게 숙희가 고아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평소였다면 지겨운 잔소리쯤으로 여기고 버럭 했을 태광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태광은 긴장한 기색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숙희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설마 아닐 거라고, 제가 최 회장을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데, 설마.

“……차가 좀 막혀서요.”

태광이 뻔한 변명을 덧붙였다.

성의도 없고, 그렇다고 참신하지도 않았다.

숙희는 실소를 흘리며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출발을 했어야지. 회사 대표씩이나 되는 놈이 그 정도 모범도 못 보여서야 직원들이 뭘 보고 배워.”

이어진 말까지도 최숙희다운 잔소리였다.

정말이지 다른 날과 다를 게 하나 없었다.

그저 뻔하고 뻔한 잔소리일 뿐인데, 그게 왜 이렇게까지 불길한 기분을 들게 하는 건지.

태광이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여유로운 자태로 태광의 모습을 즐기던 숙희가 일순 뒤에 서 있는 선 비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미동도 하지 않던 선 비서가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봉투를 꺼내어 숙희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숙희는 두말할 것 없이 묵직한 봉투를 태광의 앞으로 던졌다.

툭.

민망할 정도로 짧기만 한 소리가 태광의 전신으로 수치심을 심어주었다.

태광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제 앞에 떨어진 봉투를 보았다.

안에 든 것은 확인해볼 것도 없이 돈일 터였다.

이 순간 태광이 궁금한 건, 봉투 안의 내용물이 아니라 최 회장이 왜 제게 이 돈 봉투를 건네냐는 것이었다.

태광은 부릅뜬 눈으로 최 회장을 보았다. 그러자 숙희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기품 있는 손길로 팔짱을 꼈다.

“식품 성분 문제로 장난질 친 거랑 보네르 통해 여기저기서 검은돈 끌어모은 거, 그 문제로 주주들 반발이 장난이 아니야.”

성의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숙희의 말투에 넋을 놓았던 태광이 반쯤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 문제로 주주들이 불만을 가진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걸 문제 삼을 일이 무엇일까.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소싯적 데리고 있던 부하직원 몇 명만 대동해 자리를 가지면 금세 꼬리를 내릴 게 주주들인데.

태광은 도저히 숙희의 말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마음 같아선 성질대로 난동이라도 부리고 싶었지만, 숙희의 뒤 에 버티고 있는 선 비서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젊었을 적 뒷골목을 평정했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도합 10단이 넘는 유단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태광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채 조곤조곤 말을 뱉었다.

“회장님, 장난이 좀 지나치신 거 같습니다. 주주들 문제는 늘 제가 잘 해결해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문제예요. 그러니까 그건 저한테 맡겨주시고…….”

하지만 태광은 채 끝까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태광아. 그나마 그거라도 쥐여줄 때 챙겨서 나가. 더 버텼다간 너도 좋은 꼴 못 봐.”

태광에게 있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 기어이 숙희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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