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안면몰수
숙희는 조명을 낮춘 서재 책상 앞에 담담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한동안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고 있던 그녀가 불현듯 눈을 뜨곤 형형한 빛을 띠는 눈동자로 시간을 살폈다.
그녀의 계산으로는 진작 기별이 와도 왔어야 했는데, 어쩐 일인지 기다리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하다가, 혹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기어이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문제가 생긴 거라면 최대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다.
불안한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며 숙희는 태광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곧 의기양양한 태광의 목소리가 숙희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예, 회장님.
음색과 목소리의 톤, 말투까지.
모든 것에서 여유가 자르르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숙희는 원하는 대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왜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 일은 어떻게 된 거야.”
-그렇지 않아도 막 전화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상황은 무사히 종료되었으니, 그동안 회장님 머리 아프게 했던 걱정은 내려놔도 될 겁니다.
태광을 곁에 둔 이후로 언제나 강조했던 예의 차린 말투였다. 제 놈의 기분이 좋을 때만 쓰는 말투이기도 했다.
숙희는 한결 걱정을 덜어낸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일 처리 제대로 한 거 확실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신연희 명의 차량 분명하고, 혹시 몰라서 후송된 병원까지 갔다 왔다는 보고 받았수다. 환자 이름 신연희 확실하고, 사망선고 받은 것까지 들었다니까 걱정 마쇼.
재차 이어진 질문에 금세 기분이 상했는지, 태광이 원래의 말투를 되찾았다.
그게 숙희의 심기를 거슬렀지만, 숙희는 다른 때와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망선고까지 직접 들었다니 일은 확실히 처리한 것 같고, 그거로 태광은 제 몫을 다한 것이었다.
“수고했다. 조만간 다시 연락할 테니 그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회장님도 참, 내가 어린앱니까? 사고나 치게. 너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연락줘요. 나 성질 급한 거 알고 계시지?
“끊는다.”
숙희는 미간을 좁히며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놈이니 무슨 말인들 다 들어줄 수는 있었지만, 꼴사납게 방방 뜬 시건방은 굳이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다.
숙희는 찬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엣가시 같던 신연희를 치워버렸으니, 이제 남은 건 한 가지뿐이었다.
세라에게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주는 건 물론, 긴 시간 고대했던 RM푸드 대표 자리를 넘겨주는 것.
그러기 위해선 현 대표인 태광을 대표에서 해임시켜야 했는데, 그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태광이 걸어온 발자취가 결국 그의 발목을 잡을 증거가 되어줄 터였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나선다면 그간 태광의 무력에 억눌려 왔던 주주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게 분명했다.
태광의 해임은 자잘한 문제 하나 없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럼 자신은 주주들의 반발을 핑계로 태광에게 돈 좀 쥐여주며 좋은 말로 달래면 될 테지.
숙희의 입가로 함박웃음이나 다름없는 미소가 걸렸다.
숙희는 기꺼운 마음으로 서재를 나섰다.
세라의 무단 외출로 언짢았던 심기는 평소의 텐션을 찾은 지 오래였다.
***
RM 일가의 저택 거실 소파가 오랜만에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최숙희를 비롯한 윤명호 회장 내외, 그리고 RM 가의 유일한 후계자가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았다.
숨 막힐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숙희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목소리로 다독이듯 말을 건넸다.
“세라야, 어딜 다녀왔니?”
숙희의 말이 향한 건 세라의 옷차림을 한 연희였다.
예견된 상황이란 걸 알면서도 연희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지만, 독한 마음으로 견뎌냈다.
그러곤 뻔뻔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신연희를 보고 왔어요.”
“네가 왜 그 아이를 만나야 했는지,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니?”
재차 이어진 최숙희의 질문에 연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최숙희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뻔뻔한 척 굴고 있었지만, 실상 연희의 속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했다.
그런 와중에 세라인 척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건 더욱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했다.
최숙희의 처참한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견뎌내야 하는 과정이었다.
“저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저인 척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다니고 있다고. 매일 같이 그 전화를 받는 게 너무 힘들어서 욱하는 마음에 그랬어요. 죄송해요.”
연희는 풀 죽은 모습을 가장한 채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최숙희를 속이기 위한 연기이기도 했지만,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다간 이 모든 게 거짓말이란 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무서운 마음에 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최숙희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네 행동이 잘못된 거란 걸 알고 있는 것 같다니, 그건 다행이구나.”
“……죄송합니다.”
“세라야. 할머니가 분명 말했잖니. 앞으로는 이 할머니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고.”
이어진 숙희의 말에 연희가 맞닿은 입술 사이로 꽉 힘을 주었다.
인자한 할머니인 척 구는 최숙희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몇 시간 전엔 누군가를 죽이라고 지시를 내리고 사람을 매수했으면서, 고작 몇 시간 만에 안면몰수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연희는 테이블 아래 숨긴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
연희는 숙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한 기분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듯, 숙희는 미소까지 감아올렸다.
“세라야, 드디어 이 할머니가 네 자리를 되찾아왔단다. 이제 그 누구도 감히 네 자리를 탐하고 욕심낼 수 없을 게야.”
무척이나 흐뭇해하는 목소리였다.
연희는 이를 사리물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도대체 어떻게…….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흐뭇해하는 최숙희의 모습을, 연희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최숙희의 말에 대답을 돌려줘야 하는 타이밍이란 걸 알면서도 차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최숙희를 바라보며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 걸까.
답은 뻔했다.
뛸 듯이 기뻐하며 갖은 아양과 애교를 부려야 할 것이다.
윤세라가 자신을 만나러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죽 그래왔듯 이 집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자신이 죽음으로써 그녀의 자리를 되찾게 된 사실에 대해선 추호도 알지 못한 채 아이처럼 기뻐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연희로선 도저히 해맑게 웃을 수도, 최숙희를 향해 아양을 떨 자신도 없었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마다 호흡이 가빠오고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어서 세라인 척 완벽히 연기해야 한다고 속으로 수없이 외쳐댔지만, 한껏 격양된 감정은 쉬이 정돈되지 않았다.
위험했다.
이대로 가다간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감정이 최숙희를 향해 터져나갈 게 빤했다.
그때,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유정이 입을 열었다.
“그럼 세라는 오늘부터 신혼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머님 생각은 어떠세요?”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에 놀란 연희가 맞은편의 유정을 바라보았다.
유정은 함께 방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차례 오열한 얼굴의 수척함까진 가릴 수 없었지만, 적어도 딸을 먼저 보낸 아픔 같은 건 깨끗하게 지운 채였다.
“글쎄. 그런 일도 있었는데, 당장 세라를 보내면 세라가 많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구나. 그러기보단 내일이라도 정 대표를 불러서 알아듣게 이야기하고 같이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숙희가 숙고 끝에 말을 뱉었다.
유정은 알게 모르게 입 안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제 손으로 죽인 게 누구인지도 모르고 생각해주는 척하는 작태에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 같았다.
하나를 버린 거로도 모자라 또 다른 하나를 죽이기까지 한 여자를 시어머니라고 평생 봉양하며 살아온 것이 원통하다 못해 비통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썩어 문드러진 가슴속 울분을 토해내며 제 시어머니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최숙희에겐 너무나도 가벼운 처사일 뿐이었다.
유정은 거칠어지려는 숨을 멈추곤 목을 가다듬었다.
“어머님 말씀도 이해는 가지만, 이럴 때일수록 얼른 정붙이는 게 세라에게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머님이 어떻게 하신 건지는 몰라도 그 아가씨가 알아서 떨어져 나간 거라면 정 대표도 지금쯤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정 대표 마음도 뒤숭숭할 테고. 저희가 나서기보다는 차라리 이럴 때 세라가 정 대표한테 신경 써주고 챙겨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요.”
평생을 완벽한 내조에 대해 강요받으며 살아온 유정이었다.
지나친 숙희의 요구에도 불평불만 한번 없이 꿋꿋하게 버텨온 건 어디까지나 제 남편인 명호와 하나 남았다고 생각한 세라까지, 제 가정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 속을 숙희가 알 리 만무했다. 그저 낡아빠진 가부장제에 저 역시 동의한다고만 생각했겠지.
그런 숙희에게 내조를 핑계로 한 설득은 효력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흐음, 듣고 보니 네 말도 맞구나. 세라, 얼른 올라가서 정 대표 집으로 갈 채비하거라.”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최 회장은 앞에 준비된 찻잔을 들어 입가에 기울였다.
유정은 그런 최 회장을 메마른 시선으로 잠깐 바라보다 이내 연희를 챙겨 2층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