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끔찍한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두통이 느껴졌다.
왜 갑자기 이런 두통이 찾아온 건지.
그걸 고민하는 사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의식이 돌아왔다.
연희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튕기듯 일어나 앉았다.
거친 숨이 연이어 새어 나왔다.
놀란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고,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어딘지 파악할 정신은 더더욱이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예상하지 못한 손길이 연희의 손을 붙잡아왔다.
“누, 누구세요!”
놀란 연희가 붙잡힌 손을 뿌리치며 본능이나 다름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래 봐야 등 뒤에 있는 침대 헤드에 닿아 금방 멈춰야 했지만,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기 위해 몸을 한껏 웅크리곤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무서운 협박이나 위협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도리어 서글프게 우는 누군가의 울음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연희는 뒤늦게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언젠가 본 적 있던 여자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울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왜…….”
연희는 혼란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 친모였다.
분명 준혁과 함께 갔던 자선 경매 행사에서 최 회장의 뒤로 보이던, 슬픈 눈을 하던 그 여자가 맞았다.
그제야 연희는 정신을 차리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의 방인 것 같은데,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혼란스럽기만 한데,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신음 섞인 흐느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연희는 다시금 여자를 보았다.
종잇장처럼 처참하게 구겨진 여자의 얼굴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식을 마주한 어미의 기쁨과는 거리가 있는, 지나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연희는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느닷없이 낯설기만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여자는 쉼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까스로 말을 건네왔다.
그런 여자의 얼굴은 도대체 언제부터 운 건지 얼굴은 온통 물기로 가득했고, 눈가는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안아봐도 되겠니?”
여자가 어렵사리 부탁의 말을 건네왔다.
연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조심스럽게 다가온 여자가 연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포근한 체취가 고스란히 연희의 콧속을 뚫고 들어왔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금세 안정을 되찾을 만큼, 무척이나 안온한 향기였다.
그제야 연희는 제 두 눈에도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제게 엄마라곤 평생 연정 하나뿐이었는데, 자신을 끌어안은 이 여자 또한 제 엄마가 분명하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밀려왔다.
그걸 느끼면서도 차마 여자의 허리를 둘러 안을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자신의 친모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기는 하나, 그래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엄마는 아직까지도 연정 한 사람뿐이었다.
애틋한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절대로 힘이 빠질 것 같지 않던 여자의 팔에서 별안간 힘이 풀렸다.
그러더니 어깨를 붙잡곤 올곧게 시선을 맞춰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가, 갑자기 옷은 왜요?”
눈앞의 여자가 제게 위해를 가할 사람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연희는 늦추었던 경계심을 다시 세우곤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럼에도 여자는 사정 봐주지 않고 어깨를 꽉 붙잡아왔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 우선 넌 지금부터 세라인 척해야 한다는 거, 그것만 잊지 마.”
세라.
그 이름에 연희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을 붙잡았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덤프트럭이었다.
그리고 덤프트럭을 향해 달려가던 제 차.
그러니까 윤세라가 탔을 그 차가 덤프트럭과 부딪치기 직전인 장면이었다.
연희는 옷장으로 향하려는 유정의 옷깃을 붙잡곤 다급하게 물었다.
“유, 윤세라 씨는요? 윤세라 씨는 어떻게 됐어요? 아니, 윤세라 씨는 어디에 있길래 제가 윤세라 씨인 척을 해요? 네?”
유정을 향한 눈길이 그토록 간절할 수 없었다.
아무리 세라와 좋지 않은 감정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잘못되길 바란 적은 없었다.
복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도, 이런 식으로 신변에 문제가 생기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유정은 끝끝내 연희가 바라는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더욱이나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거로 연희는 유정이 하지 못한 대답이 무엇일지 짐작했다.
윤세라에게 큰일이 일어난 것이리라.
연희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망연하게 물었다.
“……살아는, 있는 거죠?”
부디 바랐다.
그 정도 바람 정도는 하늘이 들어주기를.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연희의 바람은 이루어지는 법이 없었다.
유정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고통에 찬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저을 뿐.
“하…….”
연희는 헛숨을 내쉬었다.
윤세라가 죽었다.
작정이라도 한 듯 중앙차선을 넘어 달려오던 덤프트럭과 부딪쳐 죽은 것이다.
더욱이 윤세라는 자신의 차를 운전하던 중에 명을 달리했다.
그렇다면 이건 자신을 향한 위해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윤세라를 향한 위해였던 게 맞는 걸까.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전자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윤세라가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죽어야 했던 게 맞는 거다.
이 엄청난 사고를 낸 당사자가 누구일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최숙희.
그 빌어먹을 노인일 게 분명했다.
연희의 볼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런 일까지 저지를 수 있는 건지, 숨조차 쉬어지질 않았다.
그런데 그때, 내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유정이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하필 사고 난 구간이 주변에 설치된 CCTV와도 거리가 먼 지점이라, 차량 번호 확인도 안 되고 사고 경위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더구나.”
연희는 맞붙인 입술로 힘을 주었다.
준혁을 떠나기 직전 억장이 무너진단 기분을 실감했다고 생각했지만, 유정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건 오만이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억장이 무너진단 말은 지금 유정을 보고 해야 하는 게 맞았다.
유정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참고 억누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연희는 그 모습을 마주하며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아있던 유정이 연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연희의 손을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나는, 나는 도저히 용서를 할 수가 없어. 내 딸을 버린 거로도 모자라, 내 딸을 죽인 그 사람을 도저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그러니 나 좀 도와다오.”
“…….”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 딸이 살아있다는 걸 알고도 염치가 없어서 널 찾아갈 수가 없었어. 내 손으로 널 버린 적은 없지만, 결국 널 지키지 못한 엄마밖에 되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고 너무 죄스러워서, 그래서 용기가 나지 않았어, 세연아…….”
세연아.
낯설기만 한 그 이름이 연희의 가슴을 애처롭게 후벼팠다.
제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여자를 여전히 제 엄마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는 거였다.
연희는 몸을 움직여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곤 간절하게도 자신을 붙든 유정의 손을 남아 있는 손으로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돼요?”
그러곤 물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곧 세라를 RM푸드 대표로 선임하는 취임식이 있을 거야. 그날…….”
“…….”
“그날 세라를 대신해 RM푸드 대표로 취임식에 참석해줄 수 있겠니?”
유정은 조심스럽게 물으면서도, 뭔가를 결심한 듯 그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그 눈빛에서 연희는 유정의 진심을 찾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그랬듯, 그녀 또한 최숙희를 무너뜨리고 싶은 것이리라.
“어머님이. 아니, 최숙희가 평생을 바쳐 그려온 그림이야. 그 자리에서 네가 세라가 아니라는 걸 밝히면 어쩔 줄 모르고 무너져 내릴 거야.”
역시나 예상한 말이 이어졌다.
연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숙희를 향한 복수심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 감정을 내려놓기까지 저 역시 쉽지 않은 시간들을 견디고 인내했다.
그런데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최숙희를 향한 복수의 길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했다.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해선 안 되는데, 근데 세연아…….”
“…….”
“그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내가 널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어. 세연아, 엄마는…….”
“…….”
“엄마는 너까지 잃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유정이 수십 년간 가슴에 묻어만 두었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토해냈다.
정말 밑바닥까지 무너진 사람의 모습이 있다면, 지금 유정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벌겋게 충혈된 유정의 눈동자로 쉼 없이 눈물이 고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꼭, 피눈물을 흘리는 어미의 모습 같았다.
“네가 날 엄마로 인정하지 않아도 좋아.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너한테 엄마 대접받을 생각을 하겠어. 그냥, 그냥 네가 무사히 잘살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도록…….”
“…….”
“네가 내 곁이 아니라도 좋으니 어디에서라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도록……. 내가 널 딱 그만큼까지라도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순 없겠니?”
연희는 이렇게까지 애원하는 유정의 부탁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저를 버린 거로도 모자라 죽이려고까지 한 최숙희를, 더는 용서할 수도 봐줄 수도 없었다.
끝까지 해볼 작정이었다.
과연 그 끝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연희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봐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