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60)화 (60/80)
  • 60. 뒤바뀐 운명

    “신연희 씨가 내 남편 일에 대해서 고개까지 숙이며 부탁할 일은 아니죠. 정준혁 씨는 내 남편이고, 내 남편 일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한테 그렇게 부탁할 필요 없어요.”

    줄곧 침묵만 지키더니, 준혁의 일을 부탁하는 건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세라는 알고 있을까.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자신이 그녀의 동생이란 사실을.

    연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라에게 할 말은 이게 전부였다.

    이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세라를 향해 가볍게 목인사를 한 연희가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성큼성큼 뗀 걸음이 멈춘 건 카페를 빠져나오고 나서였다.

    차를 타고 들어왔던 입구 앞에 섰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영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서울로 오기 전 연정과 살았던 곳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짧게라도 바다가 있는 곳을 찾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일단 버스를 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연희는 우선은 택시를 잡을 요량으로 길가 앞에 섰다.

    차량 통행이 잦지 않은 길이라 그런지, 기다리는 택시는 10분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큰 도로까지 걸어가거나, 콜택시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그때 익숙한 차 한 대가 제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윤세라에게 건넨, 이곳까지 자신이 타고 왔던 차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 차라고 생각하고 타던 차였는데.

    “그러게, 내가 그동안 너무 단꿈에 빠져있었네. 처음부터 내 것이 될 수 없는 거였는데.”

    연희는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입매를 휘어 올렸다.

    씁쓸한 기분을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도저히 큰 도로까지 걸어갈 기분이 나지 않아 택시를 부르기 위해 막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콜택시 업체의 연락처를 찾아보던 바로 그때.

    별안간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거친 소음을 만들어내며 연희의 앞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운전석을 뺀 나머지 좌석의 문이 차례로 열리곤 양복을 빼입은 남자들이 차례로 내렸다.

    연희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남자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설마 제게 볼일이 있는 건가 했는데, 남자 셋이 멈춘 건 정확히 제 앞이었다.

    “저희랑 같이 가시죠, 아가씨.”

    연희는 미간을 좁혔다.

    몇 번을 보고 또 보아도 셋 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같이 가자니. 도대체 어딜?

    더욱이 아가씨라는 호칭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낯설기만 했다.

    연희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단호한 투로 말했다.

    “사람 잘못 보신 거 같아요.”

    “순순히 따라오시지 않으면 무력을 써도 좋다는 회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무력을 써도 좋다니. 그리고 회장님 지시라……!”

    순간 연희의 머릿속으로 최숙희의 얼굴이 그려졌다.

    설마, 최숙희가 시킨 건가? 자신을 잡아 오라고?

    연희는 순식간에 밀려오기 시작한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쳤다.

    최 회장의 지시로 준혁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차라리 자신을 괴롭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상상한 적 없는 위협이 목전까지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자 손발이 다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저 혼자 남자 셋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대로 남자들 손에 잡히면 자신은 어디로 끌려가게 될까.

    어떤 험한 일을 당하게 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머릿속으로 주욱 나열되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에 눈물이 고였다.

    뒤꿈치로 둔탁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다는 확신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안전하게 모시기 위한 방법이니,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가씨.”

    무섭게 다가오던 남자 셋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걸음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연희는 속절없이 남자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곧장 코와 입을 덮어오는 손수건에 반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인위적인 향이 의지와 상관없이 호흡기를 장악하고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때 거세게 고개를 휘젓던 연희의 눈동자로 멀리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덤프트럭이 보였다.

    연희가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연희는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다.

    ***

    카페에서 나온 세라는 연희가 건네준 차 키를 꺼내어 버튼을 눌렀다.

    주차장에 있는 차 중 한 대가 라이트를 깜박거리는 게 보였다.

    세라는 그 차를 향해 신경질이 다분한 걸음을 내디뎠다.

    “저가 뭐라고 나한테 내 남편 일을 부탁을 해? 건방지게.”

    생각보다 너무 쉽게 제 자리를 찾은 건 다행인 일이었지만, 제 남편과 무슨 사이라도 되는 투로 건넨 마지막 말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세라가 신경질이 가득한 손길로 조수석을 향해 가방을 집어 던졌다.

    자신인 척하기 위해 샀다는 차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천만 원 하지도 않을 것 같은 이따위 차를 타고 자신인 척 행세를 하고 다녔다니.

    생각할수록 분이 차올랐다.

    그대로 그렇게 조용히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자존심을 뭉개놓을 말 한마디 정도는 했었어야 했는데.

    그게 못내 분해서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한참을 거칠게 숨을 내뱉던 세라가 그나마 안정을 되찾은 건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난 후였다.

    세라는 액정을 한 번 살피곤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너 도대체 어디야!

    곧장 귀를 뚫고 들어온 건 모친인 유정의 목소리였다.

    눈에 뵈는 거 없이 무작정 집을 빠져나왔으니, 자신이 나왔다는 걸 알면 집에서 전화가 올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신연희와 같이 있을 때 걸려 오면 어쩌나 그게 걱정이었는데,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세라는 차에 시동을 걸며 유정의 말에 대꾸했다.

    “일이 좀 있어서 잠깐 나왔어요. 얘기 안 하고 나와서 미안. 그렇지 않아도 지금 집으로 가.”

    -너 차 가지고 나갔어? 차고에 네 차 있는 거 확인했는데.

    “아, 그냥 일이 좀 있었어. 내 차는 아닌데, 내 차가 맞기도 하고……. 어쨌든 차로 가니까 한 한 시간 정도면 집에 도착할 거야.”

    -그러지 말고 너 그냥 그 자리에 있어. 아무래도 할머니가 너 있는 곳 찾아서 사람 보낸 거 같아.

    “누굴? 선 비서 보내셨나?”

    -선 비서나,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 보냈겠지. 그렇지 않아도 할머니 심기 불편하시니까 괜히 혼날 일 더 만들지 말고 그냥 거기 있어.

    유정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그득했다. 무슨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니나, 어쩐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기분 좋게 나온 건 아니더라도 어쨌든 정말 오랜만에 한 외출이었다.

    이렇게 된 거 숙희가 보낸 사람을 통해서 귀가를 하더라도 싫은 소리를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마음 편히 바람이라도 좀 쐬고 싶었다.

    “엄마 무슨 말인지 아는데, 그냥 나 지금 바로 집으로 출발할게. 나 그동안 너무 답답했어. 알잖아, 계속 방 안에서 꿈쩍도 안 한 거.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혼날 거 바람이나 좀 쐬면서 들어갈게.”

    -세라야, 너 정말 왜 그래. 할머니한테 밉보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야? 어?

    “그런 거 아니야. 할머니가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 중에 할머니한테 밉보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

    한창 말을 잇던 세라가 별안간 입을 꾹 다물었다.

    멀지 않은 곳에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는 연희가 보였다.

    잠시 잊었던 감정이 불쑥 치밀어올랐다.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곤 액셀 위에 올려둔 발에 힘을 주었다.

    그때 다그치는 유정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세라야, 제발 엄마 말 좀 들어. 응? 그러지 말고 거기에 그냥 있어.

    “하, 혼나도 어차피 내가 혼나는 거잖아. 엄마가 왜 그러는 건지 모르는 거 아닌데, 오늘은 나도 바람 좀 쐬고……!!”

    격양된 채 새어 나오던 세라의 목소리가 다시금 중간에 뚝 끊겼다.

    세라는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눈을 힘주어 뜬 채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보세요? 세라야?

    차량으로 연결된 블루투스를 통해 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고작 상하행 1차선씩 있는 2차선 도로 위로 덤프트럭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문제는 트럭이 중앙선을 무시하곤 2차선 도로의 중간으로 달리고 있다는 거였다.

    세라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인적 드문 시골길에 자신의 차가 피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핸들을 잡은 세라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세라야. 너 엄마 말 듣고 있어? 윤세라!

    재차 유정의 말이 들려왔지만, 이번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두려움에 잠식된 몸은 의지대로 되는 게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세라는 어떻게든 트럭을 피하기 위해 차선 오른쪽으로 차를 바짝 붙여보기도 하고 클랙슨을 거칠게 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덤프트럭의 속도는 여전했고, 차선을 지키지 않은 위치까지 변함없었다.

    머릿속으로 갖가지 생각이 밀려왔다.

    그 끝에 닿은 건 이미 너무 늦은 듯하지만 무언가 잘못됐다는 거였다.

    세라는 코앞까지 다가온 괴물 같은 트럭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앙-!!!

    차체는 트럭과 부딪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각선으로 빗겨나가며 길가에 설치된 가로수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트럭에 이어 가로수를 들이받은 충격은 고스란히 세라에게로 향했다.

    세라는 핸들 위에 쓰러진 채 무거운 눈을 가까스로 끔뻑였다.

    자신을 들이받은 트럭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멀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잘못됐던 거였을까.

    끔찍한 고통이 찾아온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되짚어볼 시간은 없었다.

    의식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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