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59)화 (59/80)
  • 59. 돌려줄게요.

    연희는 카페 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앉아 있는 사람이라곤 딱 한 명뿐이었다.

    윤세라.

    자신을 발견한 세라가 들이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곤 팔짱을 끼는 것이 보였다.

    연희는 그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다 카운터로 향했다.

    제 몫의 차를 주문하자 자리로 가져다주겠다는 직원의 말이 돌아왔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곤 세라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늦지 않게 왔네요. 앉아요.”

    연희가 테이블 앞에 서자 세라가 마치 이 카페의 사장인 양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로 맞은편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시작부터 신경을 거슬러보겠다는 의미가 다분했지만, 연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이 지경까지 와서 세라의 말에 약이 오르고 화가 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연희는 잠시 숨을 골랐다.

    맞은편의 세라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여지만 주면 당장에라도 물어뜯겠다는 태세를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나오긴 했지만, 제가 세라에게 듣고 싶은 말은 없었다.

    연희의 목적은 준혁을 향한 최숙희의 화살을 제게로 돌리거나, 혹 가능하다면 그 화살을 없애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연희는 잠시 고민했다.

    그사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그 탓에 한껏 팽팽했던 긴장감이 조금은 느슨해진 듯했다.

    연희는 제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곤 다시금 세라를 보았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네요.”

    “그쪽이 나라면 없겠어요?”

    “아뇨, 많겠죠. 화도 많이 났을 거고요.”

    그러라고 했던 행동들이니, 세라가 분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는 지금의 이 표정을 너무나도 원했는데.

    연희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감았다.

    윤세라를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분을 못 이겨 어쩔 줄 몰라 하며 완벽하게 평정을 잃을 수 있도록.

    그리고 오늘처럼 윤세라와 이렇게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보란 듯이 여유롭게 상대해주고 싶었다.

    상황을 살피며 적당히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면 윤세라는 알지 못하는 그 비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작정이었다.

    그 엄청난 비밀을 홀로 간직한 채 자신 혼자만 충격받고 힘들어하는 건 너무 억울해서.

    세라가 만신창이가 되길 바랐다.

    자신이 느꼈던 고통의 두 배, 세 배. 아니, 그 이상으로 그녀도 아프길 바랐다.

    그 미움은 연정이 쓰러진 후 더욱이나 두껍게 쌓여갔다.

    어떤 식으로든 윤세라를 망가뜨리지 않으면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화에 견디지 못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 신기하기도, 또 간사하기도 했다.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 감정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세라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세라에게, 그리고 최숙희에게 복수하는 건 연정이 제게 바랐던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행에 가까워지는 일이었다.

    자신의 불행은 곧 준혁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었으며, 천국으로 떠난 연정의 마음까지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게 맞는 거야.

    이렇게 하는 게…….

    테이블 모서리만 뚫어지게 보던 연희가 세라의 앞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세라는 퍽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건 카드 하나와 차 키였다.

    이거로 뭘 어쩌란 건지, 그 의도가 퍽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내도록 입을 다물고 있던 연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쪽이 준 돈 썼어요. 그쪽인 척하려고 옷도 사 입었고, 가방도 샀고. 또 액세서리도 사고 이것저것 산 게 많아요. 그리고 그 차 키도 윤세라 씨가 준 돈으로 산 거고요. 카드는 쓰고 남은 돈 넣어둔 거예요. 비밀번호는 윤세라 씨 핸드폰 번호 뒷자리고요.”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고요?”

    “돌려줄게요. 윤세라 씨 돈도, 윤세라 씨 돈으로 산 물건들도.”

    이어진 연희의 말에 세라의 미간이 더욱이나 형편없이 구겨졌다.

    이 자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딱히 상상 같은 걸 한 건 아니지만,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마지막 봤던 신연희의 모습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완전하게 달랐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건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서도 뻔뻔하게 제 자리를 내놓지 않겠다고 하던 여자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준 돈을 돌려준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인지.

    그 의문은 곧바로 이어진 연희의 말에 의해 풀렸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이 돈을 받는 조건은 윤세라 씨가 원하는 기간 동안 윤세라 씨 역할을 수행하는 거였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받을 자격이 없는 게 맞잖아요. 그래서 돌려주는 거예요. 이 차도, 그리고 나머지 물건은 집에 그대로 뒀어요. 윤세라 씨 자리에 윤세라 씨 물건을 그대로 둔 거니까, 물건들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윤세라 씨가 결정하면 될 거예요.”

    세라는 벙찐 얼굴로 연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 들은 말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신연희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곧 죽어도 제 자리를 돌려주지 않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자격이 없어 돈을 돌려주겠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연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그녀의 얼굴에선 딱히 다른 감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 새로운 방식의 엿 먹이기 수법인가 싶다가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그마저도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기까지 왔을 땐 세라 역시 연희에게 욕이라도 몇 마디 해줄 작정을 한 거였다.

    이 자리에서 당장 제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간 방 안에만 틀어박혀 마음고생했던 거에 대한 분풀이 정도는 하기 위해서.

    그런데 욕은커녕 한마디 뱉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지금 신연희의 말은 너무나도 순순히 제 자리를 돌려주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사이 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오랜 시간 혼수상태에 빠졌던 신연정이 기어이 명을 달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이나 제 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필 간병인을 마주했고, 정준혁이 고용한 가드를 매수해 마련한 자리이니 신연정이 의식을 잃기 전 자신을 만났다는 건 당연지사 알게 될 일이었다.

    그러니 그 원망 때문에라도 독기 품은 여자가 제 자리를 쉽게 돌려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라의 눈동자가 혼란하게 진동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제 자리를 돌려준다는 말을 듣고 떠오른 감정은 두 가지였다.

    더는 답답한 감금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열과 만에 하나 이것까지도 덫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상충하는 그 두 가지 감정이 세라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감정의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희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금 입술을 떼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고 얘기했잖아요. 원래 윤세라 씨 자리였고, 그걸 돌려준 건 너무 당연한 거고.”

    “…….”

    “내가 언제까지 윤세라 씨 행세하며 살 수 있겠어요. 언젠간 들킬 일이고, 이미 윤세라 씨 집안에선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랄 게 더 없기도 하고요.”

    세라에게 자리를 돌려주는 진짜 이유는 아니었지만, 세라를 안심시키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연희는 느리게 눈을 끔뻑거렸다.

    이제 정말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준혁의 옆자리란 완벽하게 사라진 셈이었다.

    윤세라 행세를 하던 신연희도.

    RM그룹의 또 다른 딸, 윤세연도.

    정준혁의 아내였던 여자도.

    어쩐지 그간 무겁게도 어깨를 짓누르던 허울들이 물거품이 되어 허공에 날아가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게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기도, 완벽하게 떨치지 못한 아쉬움에 미련이 남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정말 막을 내려야 할 때였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제게도 그 끝이 찾아온 것일 뿐이었다.

    연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준비한 말을 전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동안 미안했어요. 내가 윤세라 씨 행세하면서 윤세라 씨 이미지 망가뜨린 건, 윤세라 씨도 나한테서 소중한 걸 뺏었으니까, 그거로 하나씩 주고받은 셈하기로 해요. 그렇다고 해도 내가 감당해야 할 타격이 더 크다는 건 알죠? 이미지 좀 망가진 게 사람 목숨에 비할 바는 아니잖아요.”

    “…….”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하나 있어요.”

    연희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도록 혼란한 얼굴을 하던 세라가 그 순간만큼은 상념이 걷힌 눈으로 자신을 응시해왔다.

    “최 회장님께서 정준혁 씨를 압박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윤세라 씨 말마따나 회장님께서 그렇게나 아끼는 손녀의 남편을 그렇게까지 압박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한테 보여주기 위해서였겠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 보고 있다는 부담감에라도 윤세라 씨 자리를 내놓게 하려고.”

    “…….”

    “늦게라도 윤세라 씨 자리 돌려주는 거니까, 앞으로 더 이상은 정준혁 씨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윤세라 씨가 좀 도와주세요.”

    그 말끝에 연희는 세라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아랫입술을 꽉 물고 있는 세라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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