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57)화 (57/80)
  • 57. 굳은 결심

    연희는 식사가 끝난 식탁 앞에 서서 그릇을 정리했다.

    종류가 많아 조금씩만 덜어서 올린 거였는데, 잘한 선택이었다.

    남은 음식은 없었지만, 음식을 전부 비울 때까지 준혁과 함께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힘을 내야 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그릇만 가져다줘.”

    한참 식탁 위의 접시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를 받고 돌아온 준혁이 팔을 걷어붙이며 싱크대 앞으로 향했다.

    그런 준혁을 말릴까 하다가 연희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쩐지 오랜만에 준혁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준혁의 말대로 정리한 접시를 싱크대로 가져다 놓았다. 그러곤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곤 애교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녁상 거하게 차려줬다고 설거지해주는 거야, 남편?”

    남편이라는 말도, 이런 애교 섞인 말도 해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선 준혁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제 입으로 뱉고도 놀라웠다.

    자신이 이런 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보다.

    당황한 건 저뿐만이 아니었다.

    준혁은 고무장갑을 끼던 것도 멈추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발칙한 말을 내뱉고 그를 오롯이 마주하고 있으려니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은근하게 홍조를 피운 준혁의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그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안 하던 행동을 하니, 이런 선물 같은 모습도 볼 수 있네.

    그러니 가끔은 이렇게 그에게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연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새초롬하게 준혁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곤 아직 정리를 끝마치지 못한 식탁을 치우는 척 그 앞에 서서 준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치도 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행복이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었는데 그걸 왜 이제서야 깨닫게 된 건지.

    왜 진작 이렇게 준혁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그게 못 견디게 후회가 되었다.

    이 일상이, 무엇 하나 행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설거지를 하는 소리도. 사소하게 팔을 움직이는 준혁의 뒷모습도. 그런 그를 바라볼 수 있는 이 시간도.

    그와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그 시기는 그녀로서도 아직 알지 못했다.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적당한 시기는 찾아올 것이다.

    그게 최숙희가 다시금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준혁을 위협하는 것이든.

    윤세라의 자리를 고집스레 차지하고 있는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든.

    어느 쪽이든 그 신호는 최숙희가 보내올 것이고, 그 신호를 받으면 그때 미련 없이 이 자리를 버리고 떠나면 될 것이리라.

    그래야만 준혁도 더는 자신을 붙잡지 못할 터였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자신을 갈구할지언정 그 앞에 놓인 위기를 해결해야 하든, 이 자리를 지킴으로써 자신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단 사실을 자각하든.

    최숙희의 움직임이 있어야만 자신을 붙잡지 못할 것이고, 혹 또다시 떠난 자신을 찾아 헤매더라도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꼭꼭 숨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연희는 이 시간이 더욱이나 소중하기만 했다.

    그를 떠나게 될 날이 언제가 될지 어떤 식으로도 가늠할 수가 없어서 하루하루가 불안하면서도 애틋했고, 힘에 겹다가도 감사했다.

    그러니 오늘 역시 이런 슬픈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연희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준혁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곤 다시금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가 이렇듯 자신을 위해 설거지를 해주니 자신은 그를 위한 디저트라도 준비할 생각이었다.

    ***

    “와, 이거 되게 맛있다. 그치.”

    연희는 소파 테이블 앞에 철푸덕 앉아 한입 크기로 덜어낸 생크림 카스텔라를 오물거리며 준혁을 보았다.

    그러자 언제부터 자신만 보고 있던 건지, 소파에 앉아 시선을 아래로 내린 준혁이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거짓말. 먹어보지도 않고 뭘 그렇대?”

    “네 표정이 딱 맛있다는 표정이길래.”

    연희는 준혁을 밉지 않게 흘겨보며 손에 들고 있던 포크로 카스텔라를 덜어 준혁의 앞으로 가져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준혁의 입술이 열렸다.

    연희는 그 안으로 포크를 냉큼 집어넣었다.

    준혁이 입에 머금은 카스텔라를 두어 번 오물거리는 것 같더니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진짜 맛있네. 이것도 오늘 장 보러 갔다가 사 온 거야?”

    “응. 베이커리 코너 지나는데 맛있는 냄새가 나더라고. 그래서 둘러보는데 이게 딱 눈에 들어왔어. 네가 단 거 별로 안 좋아서 고민했는데, 사길 잘한 거 같아.”

    “그러게. 맛있는 거로 잘 골랐네.”

    아이처럼 구구절절 얘기하는 걸 바라보는 준혁의 눈엔 여전히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연희는 그 시선을 잠깐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무릎에 턱을 올린 채 달콤한 카스텔라를 한입 더 머금었다.

    부드러운 식감 때문에 생크림의 단맛이 입 안에 싹 퍼지는 게 잠깐이나마 처졌던 기분을 좋아지게 했다.

    게다가 준혁과 저녁 식사 후에 먹는 달달한 디저트라 그런지 준혁과 같이 있는 시간이 더욱 평온하게 느껴졌다.

    연희는 제 입으로 포크를 한 번 더 가져가곤 준혁의 앞으로도 가져갔다.

    막 준혁의 입 안에 포크를 넣었을 때였다.

    잠잠하던 준혁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던 준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연희는 아닌 척하며 그런 준혁을 유심히 살폈다.

    “잠깐만.”

    시선을 느낀 건지, 준혁이 짧게 말했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은 척 굴었다. 그러나 곁눈질로 계속해서 준혁을 살피는 건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별안간 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번엔 준혁의 것이 아니었다.

    연희는 익숙한 벨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러기 무섭게 표정을 딱딱하게 굳혀야 했다.

    액정 위에 적힌 번호는 세라의 것이었다.

    연희는 순간 망설였다.

    세라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이유야 너무나도 뻔했지만, 어쩐지 이 전화를 받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준혁을 떠나야 하는 신호는 숙희가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 전화가 그 신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받아? 누군데?”

    복잡한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거칠게 뛰는 심박을 무시하곤 표정을 정리했다.

    그럼에도 혹 지워내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기라도 할까 봐 준혁을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 지금 받으려고.”

    받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이미 준혁에게 대답해버리고 난 후였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화를 받아야 맞았다.

    그러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준혁이 누구의 전화인지 끈질기게 물어 올 것이고, 세라의 전화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잠깐 멈춘 듯했던 최숙희를 향한 복수의 길을 다시 계산하기 시작할 것이다.

    준혁이 다시 스스로 위험에 뛰어들도록 둘 순 없었다.

    연희는 내키지 않는 손길로 액정을 지분거렸다. 그러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핸드폰 너머로 전한 목소리가 달갑지 않은 감정을 가득 싣고 있었다.

    연희는 무거운 마음으로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나예요. 오랜만이죠?

    “…….”

    -긴말 필요 없고, 좀 봤으면 좋겠는데. 설마 내 얼굴로 그런 짓거리를 벌이고 다녀놓고 나한테 이런 연락 받게 될 줄 몰랐다고 하진 않을 거고. 나올 거죠?

    역시나 세라의 용건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라를 만나서 들을 말이야 뻔했다.

    예상 가능한 범위 내의 이야기일 거고, 그런 거라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윤세라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줄곧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여자였다.

    오늘이라고 과연 그 말을 듣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당장은 자신이 그간 윤세라인 척 벌인 일들에 화가 나 있다고는 하나 결론은 그녀의 자리를 돌려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면 무어라 대답하는 게 옳은 것일까.

    지금까지처럼 그럴 생각이 없다고?

    그러기에 연희는 이미 준혁을 떠나기로 결심한 터였다.

    그 마음을 먹으며 최숙희를 향한 복수도, 윤세라를 망가뜨리겠다는 생각도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그 마음을 계속 지닌 채로는 모든 걸 포기하고 준혁의 곁을 떠나겠다는 결심이 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렵게 그 마음도 정리한 건데.

    근데,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빠른데…….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것만 같은 이별의 순간에 연희는 치미는 한숨을 억지로 참아냈다.

    그때, 기다림을 참지 못한 세라의 목소리가 성급하게 귓속을 뚫고 들어왔다.

    -안 나온다고 하면 이대로 전화 끊고 할머니한테 갈 생각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그동안 한 짓에 대해서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다 얘기할 거예요. 듣기론 나인 척 우리 할머니도 찾아왔었다던데. 그럼 알겠네. 우리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

    -우리 할머니가 어떻게 하실 거 같아요? 내가, 당장 전화 끊고 할머니한테 가는 게 신연희 씨가 원하는 일이에요?

    연희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윤세라의 협박이야 무서울 게 하나도 없었지만, 최숙희의 움직임은 두려웠다.

    준혁이 다치길 원하지 않았다.

    준혁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뿐이었다.

    연희는 굳은 결심이 실린 입술을 벙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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