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최고로 행복한 미소
연희는 분주한 움직임으로 저녁을 준비했다.
준혁이 돌아올 시간이 코앞이었다.
원래라면 찌개 하나와 몇 가지 반찬으로 차려졌을 저녁상이 오늘은 훨씬 더 푸짐했다.
잔칫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연희는 보글보글 끓는 찌개의 간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가스 불을 껐다.
이거로 저녁 준비가 끝이 난 셈이었다.
“하아…….”
연희는 식탁 의자에 앉으며 숨을 푹 내쉬었다. 음식을 하기 위해 내도록 움직이던 다리가 처음으로 맞이한 휴식이었다.
그녀는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자신이 보아도 과하다 싶을 만큼 음식의 종류가 다양했다.
여느 때와 같이 장을 보러 갔을 뿐인데, 눈에 보이는 식재료마다 준혁이 좋아할 것 같은 음식들이 떠올랐다.
무작정 손이 가는 대로 카트에 담았는데, 이 정도로 양이 많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둘이 먹기엔 너무 많긴 한데…….”
그래도 이왕 한 거니까 맛있게 먹으면 그거로 된 거지, 뭐. 소분해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앞으로 며칠은 반찬 걱정할 필요도 없고.
연희는 애써 긍정적인 생각으로 잡념을 지워냈다.
식탁 의자에 앉아 5분쯤 시간을 보냈을까.
조용하던 현관으로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공허하던 집 안에 울리고, 움직임을 읽은 센서 등이 곧 환하게 불을 밝히는 게 보였다.
연희는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출근했을 때와 다름없는 멀끔한 모습의 준혁이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왔어?”
연희는 준혁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고 나면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이내 저를 따라 미소를 머금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평화였고 행복이었다.
연희는 은하와 만난 이후로 준혁을 마주할 때마다 환하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모순되게도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단 생각이 들자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를 위해 했던 일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제 나름대로 준혁을 위해서 했던 일은 많았다.
다만, ‘그를 위해 했던 일’이 ‘그가 원했던 일이었는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를 위해 도망치듯 그의 곁을 떠난 것이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떠나는 걸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던 것처럼.
그래서 꽤 오래 고민했던 것 같다.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그러면서도 그가 진정 자신에게 원하는 일.
그 두 가지가 충족되는 정답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시간을 같은 생각으로 고민했는데도 뭐 하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은 전부 꺼내어 되짚었다.
한참을 그 추억 속에 머무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준혁이 제게 바란 건, 그를 떠나지 않는 것과 그를 보며 환하게 웃는 것.
단 두 가지뿐이었다.
그걸 깨닫기 무섭게 연희는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심장도 꺼내어줄 것처럼 굴던 그가, 정작 제게 원했던 일이란 게 너무 소박하기 짝이 없어서 미안했고, 또 미안해서 가슴이 아팠다.
그 쉬운 일을 다시 만난 이후 제대로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미어졌다.
그를 떠나지 않는 일은 제가 준혁에게 결코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신연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준혁에겐 걸림돌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니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동안에라도 그를 위해 활짝 웃어보자고.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도,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견디며 행복한 척이라도 해보자고.
연희는 그렇게 다짐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에 이어 연정의 일까지, 제 마음 어디 한 곳도 온전치 않아 준혁을 보고 웃는 게 무던히도 힘들 줄 알았는데 생각처럼 어렵지만은 않았다.
그와 보내는 시간을 편안하게 생각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노력하지 않아도 웃음이 나왔다.
연정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준혁에게만 집중하자고 마음먹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행복했다, 진심으로.
그와의 시간은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간절하게 바랄 만큼, 연희는 준혁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미치도록 좋았다.
“뭘 이렇게 많이 했어?”
상념에 젖어있던 사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준혁이 식탁을 보곤 놀란 얼굴로 물어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연희가 배시시 웃으며 준혁에게 팔짱을 꼈다.
“점심때 장 보러 마트 다녀왔는데, 보는 것마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준비해봤어. 어때?”
연희는 이제 막 결혼한 새댁처럼 새초롬하게 물었다.
문득 연정과 보낸 마지막 날, 연정이 건네왔던 질문이 떠올랐다.
‘결혼해보니까 어때?’
그 말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음, 절반은 좋고, 나머지 절반은…….’
‘…….’
‘조금 힘들어.’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절반은 좋고, 절반은 힘들다고.
그 말 뒤로 자신은 언젠가 떠나줘야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데도 이 남자가 너무 잘해줘서. 그래서 힘들다고 대답했던 게 떠올랐다.
“그런 걸 뭘 물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날 위해서 준비한 음식인데, 벌써부터 배부른 기분이다.”
연희는 거짓이라곤 하나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준혁의 모습을 보며 연정에게 받았던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이젠 그럴 수 없는 일이지만, 연정이 그 질문을 다시 한번 제게 해준다면 그땐 지난번과 다른 대답을 할 것 같았다.
‘결혼해보니까 어때?’
너무 행복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나 너무 행복해, 엄마.
그때 이 대답을 할 수 있었다면 떠나기 직전 연정이 지고 있었을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자 가슴만 아플 일이었지만, 연희는 그렇게 해주지 못해서 새삼 연정에게 너무 미안했다.
미안한 마음은 연정뿐 아니라 준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제게 바란 일이란 건 소소하다는 말도 과할 정도로 쉬운 일인데, 그런 준혁에게 이제야 이런 행복을 안겨줄 수 있어서.
그런데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준혁에게 미안했다.
미안한 일이 뭐가 이렇게도 많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축 처져 있는 건 미안한 사람들에게 더욱더 미안해야 할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늦게나마 깨달았다.
그래서 연희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환히 웃었다.
“맛있게 먹어. 다 네 생각 하면서 만든 거니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까지, 아낌없이 곁들이며.
연희는 그렇게, 준혁을 향해 최고로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하,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며칠 사이 비쩍 마른 세라가 핸드폰을 귀에 대곤 미간을 구겼다.
“내가 이번엔 또 어딜 갔다고?”
말투엔 신경질이 가득했다. 움푹 팬 볼이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세라를 더욱 날카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세라는 그런 제 모습은 안중에도 없이 핸드폰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네가 다녀와 놓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하, 말꼬리 잡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내가 어딜 갔다고?”
-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야? 더 갤러리. 너 거기 다녀왔다며. 진짜 왜 그래, 너?
지영의 말에 세라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눈을 힘주어 감았다.
핸드폰을 쥔 손에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종국엔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하, 이번엔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수군거리던?”
이번에도 신경질이나 다름없는 말투로 물었다.
이야기를 전하는 지영의 입장에선 걱정이 되어 그런 거란 걸 알면서도 세라는 제 감정을 컨트롤 할 수가 없었다.
감금 생활은 언제가 끝이란 기약도 없이 무기한으로 연장되고 있었고, 다 알아서 하겠다던 할머니 숙희 또한 그날 이후 제게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건지,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숙희뿐 아니라 제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식사 때가 되면 부모님과 숙희를 마주하긴 하지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식사만 이어나갔다.
그 불편한 분위기에 얼마 먹지 않은 음식이 얹혀 토악질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언제까지 견디고 버텨야 하는 건지.
세라는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 걱정이랍시고 이런 전화까지 걸려 오니 더욱이나 정신이 어떻게 돼버릴 것 같았다.
-임 관장님이 신인 화가 한 명 추천했는데, 네가 보란 듯이 다른 작가 그림 사겠다고 했다며. 임 관장님 마음이 단단히 틀어지신 것 같던데, 도대체 왜 그랬어? 너 임 관장님이랑 좋은 관계 유지한다고 공 많이 들였잖아. 하, 이런 얘기 전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어지간한 얘기로는 내가 놀랍지도 않아. 윤세라, 정신 차려. 너 지금도 충분히 이미지 바닥까지 내려갔어. 여기서 뭘 더 얼마나 할 생각인 거야?
이어진 지영의 말에 가지런히 내려앉은 세라의 속눈썹이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거세게 씹어 문 여린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고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 사이로 물기가 비집고 새어 나왔다.
세라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변명할 말도 없었다.
자신이 봐도 똑같은 얼굴로 저지른 일들인데.
문득 신연희를 처음 만났을 때 제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그쪽이랑 나, 지금 당장 옷만 바꿔 입고 나가도 내가 신연희고 당신이 윤세란 줄 알 거 같은데.’
‘…….’
‘진짜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생겼지?’
그땐 오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똑같은 외모가 신기해서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그 말이 이제 와 이런 식으로 제게 칼이 되어 돌아올 거라곤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하, 나도 요즘 입장이 좀 그래. 예전에 너랑 제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나까지 이상한 애 취급받고 있다고. 내가 정말 이런 소리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랑 더 이상 연락 못 할 거 같아.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니? 막말로 넌 지금까지 날 진짜 친구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
지영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세라가 별안간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이미 제게 등 돌리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의 말인데, 그걸 굳이 끝까지 듣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지금 제게 그런 말 따위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세라는 초조한 얼굴로 손톱 끝을 물어뜯었다.
그러다 이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